나가면 다신 안 볼 거다. 같은 말 아무렇지 않은 척 던지긴 했지만 제일 큰 일 난 건 온화 속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더 물러날 곳 없이 몰아가놓고 그 다음은 어찌하려고 했던 걸까. 누구보다도 사람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고. 체온과 실감이 필요한 사람은 온화였다. 그렇지만 그것 제대로 표현하는 법 애시당초 몰랐으니. 실수에 실수를 거듭할 수 밖에. 그 실수로 인해 끝내 모든 것을 잃는대도.
온 신경이 뒤에 있었다. 그럴 거면 뒤돌아있지나 말던지. 그리 생각한들 혹시나 하는 상황 마주할 용기 없어 이러고 있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 제 팔 제가 꽉 쥐고. 입술 저러다 동강나겠다 싶을 만큼 물고. 어느새 눈까지 꼭 감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일 초가 영겁 같은 순간. 뒤에 있을 그의 기척이 더 멀어지지 않고 가까워지며 나가지 않겠다는 말까지 들리자. 아니. 그 말까지 기다릴 것 없이 뒤에 느껴지자마자 돌아서 그의 품에 매달리듯 안기려 했다. 제 팔 대신 그의 옷 움켜쥐고 품에 얼굴 묻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거. 해주지 않아도 돼요. 그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돼요. 당신 못 하는 거. 내가 다 할게요. 그러니 나 아플 때 옆에 와줘요. 도저히 못 버티겠을 때 옆에만 있어줘요. 많은 거 안 바랄게요. 그 하나면 돼요..."
또 우나 싶으나 용케 울지는 않고 꿋꿋이 버티며 또박또박 말하고도 고개 들진 않았다. 보나마나 얼굴 엉망이니까. 고개 푹 숙이고 있다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이는 말 있었다.
"그리고. 모진 말 많이 해서. 미안해요. 안 해도 될 말 하게 해서 아프게 한 것도. 괜히... 나가라고 한 것도."
필수였을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관계이니 우여곡절이니 굴곡이니 많을 법 하다만. 그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감정 추스른 듯한 온화 숨 한 번 훌쩍 하더니. 옷 쥐었을 손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상담... 많이 남았어요? 아니면. 오늘은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는데..."
많이 남았으면 어쩔 수 없고... 라며 은근히 여운 남기는 것 보면 분명 상황 만족하여 내내 숨었던 여시짓 빠끔 드러남이 분명했다.
아회가 충동적으로 제안하고, 도망치고, 또 충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은 불안의 역치 탓이어요. 사람은 불안한 상황에 오래 노출되면 그 불안이 디폴트 값이 되어버려서, 조금만 편해져도 본능적으로 이건 내 디폴트 값이 아니라며 나는 자연스럽게 위험을 추구하게 되거든요... 이건 비단 불안만이 아니라 공포, 쾌락, 의심과 같은 여타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감정에도 해당된답니다.😏
다른 말로 의심병과 불안, 공포까지 동시에 도진 무야옹은 집사가 손만 들어도 저게 날 쓰다듬으려고 해! 하면서 허공에 대고 하악질을 할 수밖에 없는거죠~🤦♀️
아직 면담이 남아 가야한다고 하면 어쩔까 싶었지만. 다행히 그럴 일 없이 제가 마지막이란다. 제게 시간 쓸 것을 염두하고 그런 건지 모르지만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듯 하니 그저 좋을 뿐이었다. 고개 숙인 채로 베시시 웃으며 그의 옷 꾹꾹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제게도 물을게 많지만- 하는 말에 살짝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물어볼 거... 그럴 만한게 있나?
당장은 감 잡히는게 없어 눈 깜빡깜빡하다가 피 얘기에 고개 돌려 조금 전까지 앉았던 자리 본다. 여즉 흥건히 남은 핏자국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고. 다 게워내는 것 아닐까 싶을 만큼 피 쏟던 하 사감의 모습 재차 떠올라 희미하게 미간 찡그렸다. 그가 인간이었으면 지금 서 있던 건 고사하고 숨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하며 다시 하 사감 보았다.
"치우는 건 내가 천천히 해도 돼요. 그보다 지금은 아프지 않아요? 그렇게나 토했으면서."
이미 안겼지만은 재차 확인하듯 그의 가슴팍에 손 대어본다. 옷 아직도 피범벅인 채인지. 달리 외상은 없는지. 조심히 본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조금 세게 눌렀을 지도 모르겠다.
역린? 시야?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순간 팟 하고 떠오른다. 아회랑 있었던 술자리. 역시 다 보고 있었구나... 그래 사실 그걸 생각하면 제가 그렇게 화 낼 처지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스스로 마음씨가 좋지 않다고 해도 제 성질 다 받아주고 지금도 넌지시 말만 하는 것 보면 나름대로의 배려 해주는구나 싶다. 아회에게도 그럴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아들었지만 괜히 내색은 않고 그를 살펴보았다. 조금 힘주어 눌렀을 뿐인데 쑥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급히 손을 거둔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어 놀란 것도 있었다. 제가 안겨있는 것도 부담이 될까봐 살짝 떨어지려 했다. 피를 토하길래 속이 상한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나보다. 또 어기게 될 금기였다거나. 이건 쉽게 낫지 않는다거나. 그런 말 들으며 어찌해야 하나 전전긍긍하다가 일단은 쉬게 해야 할 거 같아 그의 팔 잡고 제 침대로 이끌려 했다.
"말 안 해도 더 안 누를 테니까. 이리 와요."
세게 당기면 아파할까 꼭 쥔 손과 달리 억지로 당기지도 않는게 그를 무슨 금지옥엽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싶다. 힘만 안 썼을 뿐 고집스럽게 그를 이끌어 침대에 걸터앉히고 저도 그 옆에 앉으려 했다.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가슴팍 또 만질 듯 손 들어올리지만. 그대로 다시 내리며 제 옷을 꾹 쥐었을 것이다. 쥐어서 구겨지는 옷감 물끄러미 보다가 조심히 물어보았겠지.
"조금 전에 또 어겼다고 했는데. 전에도 누군가에게 말할 일이 있었던 거에요?"
저와 같은 상황 있었을지. 혹은 다른 일이 있었던 건지. 그것 묻고 시선으로만 피가 베어나오던 자리 보았다. 살짝 미간 찡그려지는게 안타까워 그런 듯 했다.
데려갔을 리가. 자신이 황룡 선택하겠다 명확히 말한 적도 없는데 당최 무슨 소리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기척 느껴지며 아회는 바로 문을 걸어잠갔다. 쉬라는 예의상의 말도 더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로? 받아주기는 할까? 날 도와줄 수는 있나?
도와줄…… 사람이 있나?
나 하나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일각이 지나도 나를 학당 내에서 찾지 못하면 이 학당을 뒤엎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시야가 일렁인다. 다시금 뚝, 무언가 끊겨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아회는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몸을 덮던 교복이 바닥으로 사붓하게 떨어졌다. 가주님께서 자신을 어여삐 여겨 친히 하사한, 겉은 희고 속은 쪽빛 은은한 귀한 비단 옷을 걸치고, 머리는 진주가 아롱아롱 맺힌 새로운 비녀로 틀어올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임에도 아회는 자신을 단장했다.
그리고 타오르는 벽난로에 등지고 다소곳하다 못해 마치 충신처럼 앉아버리니, 화려한 소매와 옷자락이 가득 퍼진다.
어차피 무슨 짓을 당해도 이쪽이 승리할 판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지 않은가, 예비하고 대비하였지 않은가. 도망치지 말아라,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도 있으리라…….
머릿속 개운해지니 뒤늦게 제 얼굴 볼만하겠구나 싶었다. 침대 머리맡에 둔 휴지 슬쩍 집어다 엉망인 얼굴 슥슥 정리한다. 부은 건 어쩔 수 없겠지만은. 그러고선 제 옷 쥔 손 꼼지락거리며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한 명 있었다고.
우리- 라는 건 신수를 말하는 걸까. 사감을 말하는 걸까. 알고 있으니 알려달라는 말은 어쩐지 모순적이다. 알고 있는데 또 무엇을 알려고 한 걸까. 다 알고 있으면서 더 알아내려 하고. 그래야만 했을 사람. 단 한 명. 문득 머릿속에 검은 호랑이 가면 스쳤다. 딱 한 번 마주쳤었지만 그 한 번으로 여태 안 잊은게 용하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의미겠지. 그 꺼림칙함이.
"흐음. 그것도 금기라면 궁금해하진 않을게요. 그러면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말해줄 수 있어요?"
금기의 내용은 알아본들 제가 뭔가 할 수 있지도 않고 말한게 하는 것으로 또 아프게 할 테니. 그건 됐으니 10여년 전에 그를 아프게 했을 한 명이 누구냐고 물었다. 설마 그것도 금기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뭐- 직접 찾아서. 응. 어차피 결과는 똑같다.
질문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아. 이건 요구에 가까웠으니 질문은 아닐까. 계속 손 쥐락펴락 가만 두질 못 하던 온화 다시금 그의 옷깃 슬며시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 음. 그거 보여줄 수 있어요? 그거. 금기 때문에 생긴 상처."
피조차 쉬이 멎지 않는 상처가 신경 쓰여서 였을지. 아니면 다른 의도 있을지. 조심스럽게 묻는 모습은 의중 두루뭉술하게 보였을 것이다. 딱 한 번 묻고 가만히 그의 눈치 살피는 것도 그렇고.
알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차를 마시는 평균적인 시간 동안 잡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도와줄 사람을 찾고 매달리기 보다는 차라리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그러지 못했다. 도망쳐야 한다 생각했다. 그렇게 도망칠 수만 있다면 무언가 바뀔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 속단했거니와, 자신이 도망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마주한 순간 세상에 물을 끼얹은 듯 속내는 다시 식어버렸다. 자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거늘 또 자만하였구나, 내가 도망치면 형님이 학당에 올 수도 있는데, 그땐 일각이 지나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는 또 누군가의 죽음을 질리도록 볼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해를 입어 그 원성을 듣느니 차라리 맞서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미 그러기로 결심했으면서."
이미 처음 도망칠 때부터 맞서겠다 생각했으면서, 실은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여러 번 떠올리며 그 순간을 곱씹어 익숙하지 않던가. 이제 두려워만 하면 안 되는 상황 아니던가.
그리하여 아회는 공물처럼 차려입고 일렁이는 불꽃을 등졌다. 시간은 흐르고, 주변은 고요했다. 기이할 정도의 침묵 속에서 아회는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했다. 불 내음이 났다.
"그럼 그렇지."
또 나만 가슴 졸이며 두려움에 떨었겠구나, 애먼 사감님 내쫓고, 홀로 증오심과 조바심 불태우며 도망쳐야하나 말아야하나 쓸데없는 고민에 빠졌구나. 당신에겐 어차피 나도 가치로 판단되는 존재인데 무얼 바란 것인지. 허탈한 웃음 한 번을 뒤로 고개를 젖혔다.
창문이 거칠게 열리고 가을 바람이 방 안을 휘젓는다. 보기보다 야성적이게 들어오니, 역시 무 씨 집안 피는 못 속이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찾느라 감정을 쏟은 탓인가? 당신이 그럴 사람은 아니겠지마는. 아회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다소곳하게 무릎 꿇은 정자세를 유지했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입 하나는 잘 놀렸다. 여유롭지 않냐는 질문에 이어 자신에 대해 뒤를 캤는지 줄줄이 늘어놓는 모습에 평소 같으면 어떻게 아느냐며 경계하기 바빴겠지만, 지금은 놀랄만큼 평온했다.
"……선물이라, 아우를 유일한 가치로 셈하는 것은 잘 보았습니다마는."
아회는 눈을 천천히 뜨며 바닥을 더듬었다. 벽난로 앞, 러그에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바닥을 더듬고 서서히 앞으로 허리를 기울였다. 팔을 굽히자 소매가 손가락 끝을 간신히 내보이고, 머리를 숙이자 비녀가 불꽃을 등지고 난색으로 빛났다. 제 어미의 부서진 선추 조각을 소중히 하나하나 주워 모아 만든 비녀의 장식이, 머리가 온전히 땅에 닿자 그 충격에 찰랑거렸다.
"졌습니다."
머리를 온전히 바닥에 대고, 허리는 숙이니 신분 천한 아랫것이 고귀한 존재에게 절하는 것이요 이것이 패배를 선언함과 무엇이 다르랴.
"……하여 바라는 것이 무엇이온지요."
회포 따위는 풀지 않는다.
"아니면 목표하는 것이 무엇이온지 듣고자 하십니까, 도련님."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이 세상은 놀랍게도 그때처럼 온몸을 적실만큼 비를 뿌려주는 날이 적었기에.
궁기. 궁기라. 선인을 잡아먹고 악인에겐 짐승을 잡아주어 상을 내린다는 흉수. 스스로 그리 칭한 것인지 누가 붙여준 것인지 모르지만 참 잘 붙였다. 아마 그 검은 호랑이 가면이겠지. 궁기 또한 날개 달린 호랑이라 일컬어지니까. 아마 학당의 일도 그 놈이 뒷배일 것이다. 참 여러가지로 민폐다. 어째서 그렇게 살고 어째서 이런 일들 벌이는 것일까. 언젠가 다시 마주치면 물어볼까.
그런 생각 하는 것도 딱 거기까지였다. 천 풀어지는 소리에 관심 스르르 흘러가 벌어진 옷가지 안쪽으로 향했다. 붉은 철릭의 안. 하얀 소복 아래. 오래된 흉터와 새로운 상처가 그의 옆구리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아직도 핏기 보이는 그 상처 자세히 보려고 상체 기울이고 고개 숙였다. 보기 안쓰러운 듯 눈썹 내리누르고 눈 가늘게 떴으나 시선엔 묘한 흥미가 가늘게 반짝였다. 아직도 가끔 욱신거린다는 말에 손끝으로 조심히 흉터 부분을 쓸어보려 했다.
"이런 일이 있으니 인간이 마뜩찮을 만 하지. 그런데 영 사감님만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에요? 신수들도 똑같애-"
킬킬대는 소리에 신수도 거기서 거기라며 종알대다가 괜히 다른 말은 못 들은 척 상처 있는 옆구리로 시선 돌렸다. 붉은 피가 번들거리는 상처- 빤히 보다 향로 얘기에 힐끔 방 한가운데 보았다. 아직도 흘러나오는 푸른 연기에 발 두어번 휘젓자 휘휘 흩어졌다 다시 몰려온다. 저것 있으면 다 나을 것이라길래 제 옆구리 한 번 쓸어보고. 다시 그의 흉터 만져보려 했을 것이다. 가만가만 손 움직이려다 '오라비'라는 단어에 흠칫 했지만.
"음- 오라비 말이지요? 말은 전해 둘게요. 그래도 무슨 수업을 들을 지는 그 오라비 마음이니까."
그리고 학당에 제 오라비는 지금 수일 밖에 없으니까. 아회는 따지자면 선배잖아? 그렇지? 그럴 거야. 응. 그런 셈 치자. 그러니까 이제.
별 일 없을 거라며 상쾌한 웃음 짓는 하 사감 보고 온화 또한 싱긋 웃었다. 웃으며 상체 일으키곤 손으로 가볍게 그의 어깨 잡고 살짝 힘주어 민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움직여 그의 무릎 위에 앉아 그를 바라보곤. 다시 미소 짓는데 불길함보다는 음흉하달지. 역린 들고 야밤에 야산 뛰어다닐 적 지었을 미소가 그러하지 않았을지. 슬며시 상체 기울이며 손끝으로 그의 가슴팍 간지럽히듯 훑으며 평소라면 부끄러워 했을 행동 서슴지 않나 싶더니. 고개 숙여 피 스며나오는 상처에 입맞춤 하려 했다.
막지 않는다면 입술에 핏빛 물들이며 혀 끝으로 상처 훑고 고개 들었을 테고. 막는다면 아쉬운 듯 입맛 다시며 왜 안 되냐는 눈으로 고개 갸웃 기울였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멍하지만 의식 또렷한 눈이 이질적이었겠지.
아회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하다가 눈높이를 맞추듯 다리를 살짝 숙였습니다.
' 이리,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마요. 마음이 아파지잖아. 내 소원을 정말 들어주려고요? '
사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 지, 속으로 저울질을 해보던 그가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 우리 아우의 가장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 혹시 모르죠?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 지금까지 너에게 도움이 안 되진 않았다고 생각하거든. ' ' 내가 그걸 듣고 뭘 할지 힌트를 줄수도 있고? 일종의 거래예요. 나도 양심이 없는 건 아니거든. 너에게 무엇이든 못해줄까. '
친근한 목소리로 궁기가 말했습니다.
[>자유]
>>105 온화
' 인간에게 원래 호의적이지 않은 거다. 그 놈은 우리에게 없는 게 있거든. 저 향로에 든 게 그 중 하나이지. '
夏사감은 푸른 연기를 들이마셨습니다. 아주 느리게 그의 상처가 아물어갑니다.
' 내 수업을 듣는 게 가장 나을 것이다. 이 학당엔 아직 내 누이와 형님이 남아있고 그 둘은 우리와 다르게 인간을 죽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난 여의주로 어느 정도 네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말해라. '
夏사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하. '
상처에 닿는 느낌에 夏사감이 몸을 움찔 한 번 떨었습니다. 그는 그는 구겨진 표정으로 한 쪽 입술만 비틀어 웃었습니다.
어련할까. 그래도 호의적이었던 신수도 한둘 있었던 걸 보면 변수라고 할 만한 건 있어보이지만. 순간 그 놈이라 해서 또 궁기를 언급하나 했는데 맥락상 영 사감님 같았다. 사감인 신수에겐 없고 영 사감님에겐 있는 것. 뭘까. 본래 인간이라서? 모르겠다. 나중에 마주치면 물어볼까? 그럴까.
상처 내보였을 때부터 줄곧 보고 있었으니 미미하게 아물어 가는 것도 보았다. 어서 나았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멍하니 그런 생각 한 것 그는 모르겠지. 그저 그의 말에 눈동자 옆으로 데굴 굴렸다가 다시 보고 고개 끄덕였을 뿐이니.
"일이라고 할 만한 건 아직 아무 것도 없는 걸요. 전할 말은 제대로 전해둘게요."
학당 안은 신수 누구나 금지인 줄 알았더니. 역시 그 둘은 예외였다. 하긴. 그 남자 쪽은 시종일관 이빨 드러냈었다. 이러면 아회에게도 수업에 대한 귀뜸 전해야겠다고 머릿속 한 켠에 고이 적어둔다. 잊지 말자.
"후훗."
제 행동 막지 않아 기어코 새어나오는 피 취하게 할 적. 그가 몸을 떨자 저도 작게 웃음 흘렸다. 그리고 고개 들며 혀로 입술에 스며든 피도 핥았다. 신수의 피는 무슨 맛이었던가. 모든 음식 거부해도 피맛 만은 선명하게 느꼈다. 마치 제가 먹을 것은 그것 뿐인양.
"힘 같은 거 없어도 특별하죠. 나한텐. 반려의 피인데."
당연하단 듯 말한 온화 그가 옷 추스르는 것 보고 그것도 아쉬운 듯 아랫입술 살짝 깨물었다. 요전 일 때문에 가문에 신세지기 싫지만 연통 하나 보내둘까. 언제로 할까- 따위 생각하다 곧 갈 듯한 그의 말에 눈 깜빡였다.
"나아진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나아졌으니까 갈 거면 덜 나은 걸로 할래요. 응? 나 또 혼자 두려구?"
히잉. 벌써 혼자 남겨진 양 시무룩해져선 옆으로 물러나 등 보이고 웅크린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나아진게 맞으니. 그가 정 가야한다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원수에게 머리를 조아리다니! 지금껏 아득바득 살아오며 계획한 인생에서 이런 계산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일이었다. 저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리면 속내가 뒤집어지고, 당장 그때를 상기한 머리를 깨부수고 싶을 정도인데 어떻게 머리를 조아린단 말인가? 그러나 아회는 지쳤다. 그리고 새로운 수를 두었다. 도박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모든 상황을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행운에 걸어보고자 한다. 어찌 되었든 이기는 것은 자신이고, 당신의 반응은 부가적인 행운에 불과할 터이니.
"……어찌 미천한 사생아가 진정한 핏줄을 이기려 하겠습니까. 그 아래에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당신은 마음이 아프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큼 아파본 적도 없을 것이다. 아플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믿지 않는다, 그리고 흘려 넘긴다. 마치 어린 날, 사용인에게도 자신을 낮추던 때로 돌아간 듯 어떠한 쓴소리도, 감정도 담지 않고 머리만 조아리며 침묵하기 바빴다.
"……면서."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벽난로 타는 소리에 묻힐 만큼 희미한 목소리다. 같이 죽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최후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단 저 말이 우스웠던 탓이다. 당신은 결국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 입장에서 십 분만 생각해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텐데. 나를 한 번이라도.
"저를 한 번이라도, 형제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진정으로 생각했다면 저런 태도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아회는 웃음 지었다.
"저는…… 없습니다. 단 하루도 형제라 생각해본 적도, 형제라고 느낀 적도 없습니다. 늘 그러기만을 간원했을 뿐이고, 그렇기에 더욱 필사적이었지요. 당신이 언젠가는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까, 동생이라 해주지 않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형님께서 언제든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더욱 매달렸지요. 그러나 당신은 떠났습니다. 이 두 눈을 앗아가고, 그 차디찬 곳에 저를 두고."
그러나 바라는 목표 있습니다. 웃음 지은 것과 달리 목소리는 점차 떨려오더니, 이내 침묵했다. 당신은 도움을 줄 수 없다. 내 바라는 것에 도움을 줄 사람이 아니었다.
"부디 제 손에 죽어주십시오. 그게 제가 바라는 목표입니다."
되도 않는 소리임을 알지만 뱉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끔찍하여 표정도 일그러진다.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비참한 표정을 뒤로 애써 태연해보려 노력하지만 할 수 없었다.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려와 입을 벌려 소리를 내는 것에 여러 시행착오가 생겨간다.
"제가, 제가 그 뒤를 바로 따라갈 테니까, 외롭지 않게 길동무를 해드릴 테니까……."
떨리는 호흡과 함께 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자신의 심장을 죄어온다. 숨을 쉬기가 버거워 바닥을 짚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 나는 버팀목이 생겼다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그 버팀목이 없어진 걸까. 다른 사람의 손에 최후를 맞게 두느니 차라리 자신이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정녕 옳은 것일까, 실로 그 마음에 사심 없었다 할 수 있는가? 추악하고도 역한 나머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결국 조아린 몸을 더 웅크려 표정을 숨기려 들었다. 단어와 문장은 목졸린 신음과도 같이 그 속이 단단히 메여 목구멍을 강제로 비집고 나오듯, 사납게 긁히고 끝나갈 것만 같은 위태로운 숨결이 섞여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비참하게 죽기 위해 이 삶을 버텨왔으니, 그 대가로 당신 만큼은 길동무로 삼고 싶습니다. 그러니 고통 받아주세요, 괴로워 해주세요, 저를 저주하고 끝없이 깎아내려주세요……. 그렇게 당신이 비참하게 제 이름을 부르짖는 순간, 그 처절한 마지막을 보지도 못하고 시체만이 웃고 있다면, 그 썩어가는 육신이 오로지 저만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독히도 추악한 자신의 속내를 모조리 드러낸다. 품고 있던 것을 뱉어내고 나니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떨리던 입꼬리가 애써 미소를 짓고 투명한 공막에는 뜨거운 것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소리없이 숙인 고개 너머로 굵게 한 두 방울 떨어지던 것은 점차 주체할 수 없게 되어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리던 손이 이내 기어가듯 웅크린 몸을 향했다. 자신처럼 추악한 존재는 감히 당신을 만질 수 없다는 듯, 갈 길을 잃은 손이 눈물을 틀어막으려는 듯 자신의 얼굴을 덮어 가렸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아회는 끝내 품어오던 것을 고백했다.
"죽고 싶어. 그러니 나, 나와 같이 죽어줘. 함께 지옥으로 가자……. 이번엔 제, 제발, 날 혼자 두지 마……."
짙은 증오, 그리고 애정을. 아, 내 품은 모든 것이 이 모진 겨울이 다 끝나도 피어나지 않을, 이미 죽은 꽃이었음에도, 이 뒤집힌 세상에서는 죽은 꽃 또한 가장 끔찍한 감정을 양분 삼아 다시금 피어나기 마련이구나……. 숙인 고개를 뒤로 몸은 벌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물은 그칠 기미 없으나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처럼 소리내어 울지도 못했다. 경을 칠까 두려웠던 나날이 몸에 박혔기 때문이다.
이번엔 정말 나간다고 해도 미운 소리 없이 보내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저를 챙겨준들 그는 아직 사감이다. 그 부분까지 제가 침범해 방해하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서. 그가 재차 옆에 다가와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인간은 치사하고 치사한 생물이다.
"무리하는 건 아닌데. 낭군님 걱정하시니 쉬는 것도 좀 보여드려야겠네요-"
옆에 온 그를 보며 슬핏 웃곤 그의 팔 잡아 제 쪽으로 당긴다. 그리고 먼저 폭 누워 옆자리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도 누우라고. 휴식이 필요한 건 그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으니. 누울 때까지 눈 말똥말똥 뜨고 있다가 그가 눕거나 달리 반응 보여주어서야 작게 하품했을 것이다. 정신은 이제야 맑아진 듯 한데. 몸은 아니었는지. 머리 대자마자 잠기운 몰려오는 것 무섭기도 했다.
"깰 때까지 있어준댔죠? 약속이에요..."
자 약속- 이라며 그의 손 하나 잡아 새끼손가락 거나 싶더니. 그러지 않고 깍지 끼워 꼭 잡으려 한다. 그 손 당겨 제 뺨에 대며 작아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다 괜찮아. 괜찮아지게 할 거에요. 나도. 당신도..."
점점 어물어물해지는 목소리였으니 달리 말 걸지 않는다면 그대로 잠들었겠지. 말 그대로 까무룩- 하고.
도구가 아니라고? 그렇게 휘둘러놓고, 휘저어놓고, 흔들어놓고 내가 도구가 아니라고?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고? 차라리 그러지 않았다고 하지, 그랬더라면 내가 이 부질없는 희망 하나 부여잡고 빌며 스스로를 고문하지 않았을 텐데, 울부짖지 않았을 텐데, 미련을 놓을 수 있었을 텐데…….
무릎을 꿇고 엎드린 모습부터 비굴했으나 얼굴을 덮은 손과 울음을 삼키느라 한 번씩 크게 움찔거리는 몸은 아회를 추레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게 내게 어울리던 모습이겠지, 이 추한 껍질을 나는 평생이고 벗어날 수 없겠지. 흐윽, 결국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새어나올 적 아회는 얼굴을 덮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낯가죽을 뜯어내고 싶다는 듯.
당신이 단순히 어렸기 때문에, 누군가의 빛을 앗아간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회는 손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차라리 피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쏟아내서 당신 앞에서 죽어버렸으면! 그리고 몸이 굳었다.
"……흐, 흐윽."
차라리 날 증오한다 했어야 했다. 아니면 정 반대로 토닥여주기라도 했더라면, 어린 날처럼 그랬더라면 나는 이 목표를 위해 다시금 타올랐을 것이거늘, 결국 부질없구나. 속삭이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새빨갛고, 여전히 눈동자는 빛을 담을 수 없다. 은빛에 가까워진 아스라한 눈이 당신을, 정확히는 당신의 너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아회는 당신을 바라볼 수 없다.
"……."
눈물만 흐르는 사이 침묵이 유지된다. 자신의 눈에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는단 사실이 끔찍하지만, 지금만큼은 무엇보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당신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믿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비치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행운이다. 당신은 결국 이번에도 나를 내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나는…….
"흐, 흐윽."
당신은 죽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만간 죽고자 하였는데 당신은 그 죽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당신은 날 혼자 둘 것이다. 나는 그날의 약속을 기억한다.
당신은 나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증거가 없어도 되었습니다. 마음만이라도 황공합니다, 도련님." 내가 당신을 붙잡지 못했듯. 눈물 흐르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아, 겨울은 끝나지 않고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등에 닿는 촉감에 소름이 돋는다. 늦었어, 늦었다고. 우리 너무 멀리 왔잖아. 속에서는 고통에 어린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목은 이전에 동 사감에게 잠긴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가늘게 떨리던 손이 잡혔을 적, 아회는 자신의 입술을 거세게 깨물듯 다물었다. 홉뜬 한쪽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칠 기미가 없던 눈물과 함께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비녀의 장식이 찰랑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여기에 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잖아, 재미를 논하면 안 되잖아, 신기하다 하면 안 되는 거잖아……. 고개를 다시금 들던 것은, 당신이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논할 때였다. 자신의 암기를 눈치챈 것은 둘째치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죽는단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누군가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당신의 목을 치고 싶노라 얘기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던 모든 것이 간단히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너진 틈 사이에서 추락하는 것이 자신이노라 생각했다.
그래, 당신은 없다.
흐릿한 시야에 목이 보였다. 당신 또한 북부의 사람이라는 듯 새하얀 목은 필히 맥이 뛰겠지. 그렇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지금 내 손에 죽는다는 걸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도련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지만 늘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회는 자신의 비녀를 머리에서 뺐다. 머리카락이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바닥을 쓸어낸다. 뽑아든 비녀의 장식이, 어머니의 부서진 진주가 벽난로의 불꽃을 산란하며 눈부시게 빛났으나 그것보다 더 빛나는 것은 날카로운 암기라는 듯 그 서늘함 드러내는 비녀의 대 부분이었다. 그리고 아회는 비녀를 휘둘렀다.
"나는 그 무엇도 아깝지 않아, 이 개*끼야."
당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목 바로 밑, 자신의 쇄골에 비녀를 정확히 찔러 박으려 했다. 된다면 밑으로 거세게 내려 비녀를 쉬이 빼내지 못하게 대를 부러뜨리려 시도했겠지.
그리 말하며 사감의 얼굴 유심히 뜯어보았다. 필시 내밀한 축에 드는 비밀이었을 텐데도, 반응은 비교적 차분했다. 저것은 어떤 심정이지? 동요를 감춘 것이라면 대단하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 속내 도무지 짐작할 수 없으니 편치 않다. 유현은 사감의 오해─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에 대답할 생각도 않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 느릿이 내리감았다 다시금 뜬다. 본래 묻고자 했던 용건 잊지는 말아야지.
"하면 어찌 된 연유로 그리 되셨나요? 당신이 사감으로 임하고 있는 상황과 연관이 있나요? 다른 사감들은 모두 인간 아닌데도 왜 당신만 인간인지, 그리고 인간 같지 않은 몸 갖고 생존해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상대는 과연 알까? 영 사감이 존재만으로도 유현의 열망을 더없이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감들처럼 확연하게 인간과 동떨어지지 않았으며, 동시에 스스로 인간이라 여기고 있는 그 같잖은 모순이 더없이 마음에 든다. 풀어헤쳐진 가슴팍 위로 손을 가져가자 그저 잠잠하게 오르내리는 호흡만이 손에 닿았다. 아, 정말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사람 꼴 갖고 움직이는 걸까. 심장만 없고 다른 부위는 모두 온전한가? 손 떼지 않은 채 불분명한 침묵만 내려앉기를 잠시. 유현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시선은 여전히 손 간 자리에 꽂히다시피인 채다.
"만지는 것보단 눈으로 확인하고 싶네요. 단순히 노쇠하지만 않을 뿐인가요, 혹은 죽음에 준할 물리적 손상 역시 버텨낼 수 있는 건가요? 피는 흐르나요? 심장이 없다면 그런 것들도 모두 의미가 없을 텐데……. 갈라 봐도 괜찮을까요?"
심장이 없더라도 괜찮다. 몸의 심부가 없을지언정 다른 것들은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뜻이잖은가? 설령 피가 흐르지 않는다 해도 그 속은 따뜻하겠지. 몸은, 어떻게 하여도 알지 못하고 붙잡을 수도 없는 마음과는 달리 직관적이기에 좋다. 지금도 체온만은 이렇게 선명하니 말이다……. 표정 없는 낯이었으나 무엇인지 모를 광괴한 기미 눈가에 번들거린다. 아, 왜 인간의 몸은 나약해서 살갗 하나 찢지를 못하는 거지?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으나 그는 이내 방도를 찾았다. 그래, 손으로 안 된다면 도구를 쓰면 되는 것이다. 사감이 내어 왔던 찻잔을 들고 상에 내리쳐 깨부순다. 움켜쥔 손 안에 유리조각 박히는 것조차 아랑곳않고 깨어진 파편 중 큼지막한 것을 쥐었다. 이어지는 수순은 당연히─ 그것으로 사감의 가슴을 내려찍으려 드는 것이다. 양해를 구하긴 했어도 모두 구색뿐인 말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는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알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같아 보인다. 대답 기다리기엔 유현이 앎에 있어 지독히도 갈급했기 때문일지도.
무슨 생각 무슨 확신 갖고 그런 말 할 수 있었을까. 당장 눈 감고 눈 떴을 때 조차 눈앞 바뀌어 있는 것 아닐까 경계하고 고민해야 하는 현실에서. 그랬으면 하는 바람 잠결에 흘러나온 걸까.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일 헤쳐가야만 할 테니.
그러니 모든게 끝난 후에 괜찮았다 할 수 있길.
그가 내 옆에 있는 것 보며 눈 감자마자 잠들었다. 술기운 빌리지 않고 잠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그렇게 잠들면 얕은 잠에 금방 깨거나 좋지 못한 꿈에 시달리는게 일상이었지만. 드물게도 깊이 잤다. 편안한 잠에 긴장 없이 몸 맡기고 한껏 빠져들었다. 이대로면 꿈도 꾸지 않을 것 같았으나. 어김없이 꿈 펼쳐졌다. 하지만 늘 꾸는 끔찍한- 단지 기억 되감을 뿐인 꿈은 아니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그림처럼. 이제는 흐릿한 기억 속 배경이 펼쳐지고 그 한 가운데에 내가 있다. 작은 나. 어린 나. 너덧살 즈음부터 열살 무렵까지의 내가 한 폭의 그림처럼 흘러간다. 아무 걱정 없이 웃으며 뛰어노는 내 뒤로 배경이 스치고. 바뀌는 배경의 수만큼 내가 자란다. 참 웃음이 많았던 어린 아이. 적당히 얌전했고. 적당히 개구졌던. 평범했던 아이.
그랬던 아이는 열 두살 단 하룻밤에 운명이 뒤집혔다.
낡았지만 따뜻한 배경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그 날로 빠르게 휘감긴다. 결국 언제나와 같은 흐름일까. 느껴지지 않아도 기억에 선명한 피비린내 물씬 풍기며 사방 서서히 붉게 물든다. 낙엽 지듯 스러지는 육신들. 흩뿌려지는 핏빛 빗줄기. 참극 뒤에 이어지는 나의 차례. 피에 물든 검 움켜쥔 '그녀'가 내게 다가와 내 목을 쥐고 들어올리는
- 화야.
그랬을 전개인데.
- 화야. 왜 그러고 있나요.
예상치 못한 그리운 목소리. 나도 모르게 숙이고 있던 고개 들었다. 늘 보는 참혹한 과거 대신 그리운 배경과 그리운 사람 있었다. 내 기억 속 마지막이던 광기에 휩싸인 모습 아닌 내가 정말로 좋아하고 동경했던 '그녀'가 웃으며 서 있었다.
언니.
하고 부르니.
- 그래. 화야가 정말 좋아하는 - 언니에요.
하고 대답해서. 그게 너무 생생해서 꿈인 걸 알고도 지금이 현실이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버린다. 하지만 꿈이니까. 언니는 내 손으로 죽였으니까. 많이 컸다며 들뜬 목소리도. 다가와 내 얼굴 쓸어주는 손도. 실은 다 내 망상일 뿐이니까. 깨어나면 그저 허탈할 뿐이야. 그러니 이런 꿈 얼른 깨버리는게 좋을 텐데.
- 다행이다. 화야가 죽지 않고 살아서.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구나. 미안해요. 내가 그 때 조금만 더 일찍 정신을 차렸다면 화야가 무서운 일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어머. 어머- 울지 말아. 언니는 괜찮아요. 화야마저 내 손으로 해쳤다면 죽어도 죽지 못 했을 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화야 만이라도 살아주었으니까. 언니는 그거면 충분해요. 그러니 울지 말아.
어서 깨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그립고 그리웠던 사람 앞을 떠날 수 없었다. 정말로 언니였다면. 언니가 살아있었다면 해주었을 말들에 눈물 왈칵 쏟아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는 나를 낯익은 향취가 감싼다. 이제는 나보다 작은 몸이 더 큰 나를 안고 등을 토닥인다. 어긋난 시간 너머 아스라한 기억이 내게 속삭인다.
- 사실 화야는 알고 있을 거에요. 그 날. 한참 어린 화야를 내가 떼어내지 못 할 리가 없다는 걸. 미안해요. 내가 나를 잡지 못 해 어린 화야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버렸어. 미안해요. 그러니 이제 그만. 나를 내려놓고 화야의 삶을 살아. 내 죽음에 더이상 얽매이지 말고. 이제는 화야가 앞서는 거에요. 그럴 힘도. 자격도. 화야에겐 충분하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화야니까.
더는 불쌍한 사람 아닌.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반짝이는 동경이 말했다. 다정한 손길로 나를 끌어 나가는 문 앞으로 데려가주었다. 그 날. 넘지 못 했던 그 문 앞에서 멈춘 내 등을 부드럽게 밀어주었다. 높다란 성벽 같았던 문턱 너머 한 발 내디딜 때. 후후- 웃는 소리 들렸다.
- 잘 지내요. 화야. 다신 오면 안 돼요?
잘 있어. 언니. 그래도...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다.
내딛은 바닥부터 무너지며 꿈에서 점점 멀어진다. 지나온 꿈의 정경 파편처럼 스칠 적. 그 날의 편린도 있었다. 내 목을 쥐었던 손에 일순 힘 풀려 내가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을. 내가 달려들 때도 막거나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목을 내어주며 다행이다. 라며 웃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내 등 토닥이고 떨어지던 그 손을.
사실 전부 알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끌어안고 있게 해 줘. 조금만 더. 내 몸 비로소 자유로워질 때까지만.
서서히 내 몸 뉘인 곳 실감 돌아온다. 어둡기만 하던 눈커풀 너머로 희미한 기척 느껴진 것도 같다. 눈 뜨기 직전. 눈커풀 사이 작게 맺혀 떨어지는 물방울 보이지 않으려 살짝 웅크렸다. 괜히 졸음에 겨운 척. 칭얼대는 척. 손 뻗어 닿는 그를 잡으려 하며 조금 더 누워있었다. 오랜만에 좋은 잠을 잤다고 생각하며.
비녀가 부디 자신의 살갗을 꿰뚫기를, 그렇게 당신의 일그러진 낯짝을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터였다. 숨 끊어지든 말든 이젠 되었다! 당신의 빌어먹을 목표에서 나 또한 장기말이니, 나는 그 삶에서 벗어나는 것 하나면 족할 터다. 당신을 죽이는 것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의 속내를 뒤집어 놓을 것이다. 이미 몇 번이고 다짐했고, 몇 번이고 상상했으며, 몇 번이나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라 느꼈다. 염원을 담아 거세게 내리 찍었으나, 흐른 피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하, *발."
저열한 욕설이 입에서 쏟아지고 만다. 끝까지 나를 방해하시겠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진 안면은 영영 보이지 않는 눈을 덮어 가리고, 눈물 흐르던 눈은 어느새 크게 홉뜨였으며, 추악함을 느껴 괴로워하던 표정은 어느새 표독스러움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앙다문 입술에서는 어느새 피가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으니, 날선 송곳니로 제 입술 꽉 깨문 탓이다.
"도련님께서 허락하시든 말든 제 상관이지요. 천한 놈 처분을 왜 고귀한 손으로 도맡아 하시려 들까?"
눈을 마주하려는 듯하지만 실로 마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격한 감정의 파도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듯하니 화가 난 것 같은데. 비녀를 떼어놓으려 할 수록 아회는 오히려 제 목을 꿰뚫고 말겠다는 듯, 혹은 버티겠다는 듯 팔에 꾹 힘을 주었으나, 힘을 줄 수록 부들거리며 밀려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몸뚱이 탓이다. 제대로 된 대접 받지 않고 죽음 예비하고 다니던 자의 모습이었던 탓이며, 당신을 이길 수 없는 평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지랄맞은 선물이라면, 선물에게 찢겨 죽는 것 정도는 겸허히 받아들여줄 수 있지요."
표독스럽던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두 눈은 온전한 달과 같은 호선을 그어내고, 입술은 부드러이 호수 유영하는 나뭇잎처럼 말려 올라간다. 절망을 부르짖다 자결을 시도한 자라기엔 지나치게 청아한 미소였으니, 당신이 화가 났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으리라.
"도련님, 무상한 봄날은 찰나일 뿐이고, 무엇이든지 스치다 사라지는 것이 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운명을 피하지 마시지요."
당신이 뱉어낸 경고에 등골이 오싹했으나 뱉는 말을 멈추진 않았다. 어차피 내 죽는 것도 운명이다! 그 사실을 일깨우고자 하며 당신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난다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죄악 저지르고 본인의 추악함이라도 깨달았으면 하는 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을 학당에서 어떻게 빼내려고? 우스운 자 같으니. 곁에 데리고 있는다 하여 얌전히 있을 것 같던가? 그렇게 당신 곁에서 몇 번이고 죽음을 갈망하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내가 팔 하나, 다리 하나, 혹은 남은 눈, 귀, 모든 것을 잃어도 죽지 못할 것 같던가? 영영 도망치는 것을 당신은 진정 원하는 것 같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죽지 말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방법을 모색할 터인데……. 아회는 당신을 다시금 불렀다. 도련님, 하고 사근사근 부른 뒤 미소는 더욱 깊어져간다.
같은 꿈을 꾸었다. 두 사람은 같은 꿈 속에서 다른 목표를 품었다. 그리고 그 꿈에 있었단 것을 아는 것은 자신 뿐인 것 같았다. 당신은 모른다. 그날 죽은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본 것은 타인이 아니다. 타인의 껍질을 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척 하던 걸까. 미안하다며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인영을 보지도 않고, 다시금 정적만이 방을 채운다. 불청객이 있던 창문은 열려있고, 불길은 여전히 등 뒤에서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오롯이, 오로지 자신이 있었다.
한때 당신의 목숨을 끊는 것을 최후의 목표로 삼은 적이 있었다. 당신이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다짐한 것이었다. 무 씨 집안과 북부를 모두 불태우고, 그리고 당신을 죽이면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것만이 진정한 복수라 생각하여 생을 불태우며 전념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깨달음만 깊어졌다. 자신은 범인이고, 아무리 덤벼봤자 날고 긴다는 궁기에겐 털끝 하나도 닿지 못하고 죽을 것임을 깨닫자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잿더미가 되었던 날은.
바깥에서 흘러 들어온 금서를 읽은 것은. 더듬더듬, 볼록한 부분을 매만지며 손가락 끝으로 읽은 그 금서 속에서는 인간 하나가 인간 모두의 죄악을 떠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걸 읽은 나는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시던 봄날에 대해서 떠올렸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말씀하시면서, 사실은 오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속삭여주던 날을.
아회는 비녀를 부적으로 띄웠다.
그 금서로 하여금 모든 목표가 불타버렸다. 내가 당신과 우리 집안의 죄를 모두 떠안고 매달리면 그것이 봄날이겠구나를 깨달은 탓이다. 그 존재도 제 아버지를 원망했으나 그것이 신의 뜻임을 알고 겸허히 눈 감았으니 나라고 하지 못할 것이 무에 있겠던가. 오히려 그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나에게 있어 신께서 안배하신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 이후로는 늘 죽음을 예비했다.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도 분명 불탔으나, 당신의 눈이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고자 함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어디 보자. 비녀를 뺏어 찔렀다 가정할 경우엔…… 아, 이 위치가 조금 더 극적일까.
오늘 저지른 일과, 지금 저지를 일처럼. 허공에 둥실거리던 비녀는 손바닥을 깊게 스치고 지나가고 뒤로 빠지더니, 팔을 깊숙하게 찍었다 빠져나간다. 이윽고 급소를 피해 움직이자 흰 비단옷의 쇄골 근처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비녀를 뺏어 습격한 듯이, 그리고 자신은 겨우 몸을 피해 치명상은 면했다는 듯이. 그리고 어떻게든 그 습격에서 도망치려고 시도했다는 듯 옷 매무새가 흐트러지든 말든 문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더니, 온 힘을 다해 문에 몸을 박았다. 쿵! 거친 소리와 함께 몸이 바깥으로 나뒹굴었다. 구르는 동안 비녀가 쇄골 깊숙하게 박혔다.
내 목표가 무엇이냐 물었는가. 나는 당신의 눈앞에서 죽되 그 시신을 당신이 찾을 수 없길 바란다. 그렇게 나의 혼백은 지옥에 떨어지길 바란다. 당신이 그렇게 아낀다는, 허울뿐인 동생의 육신은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개의 먹이가 되고, 혼백은 지옥 구렁텅이를 기어다니고, 그 모습을 잃어 훗날 당신이 마주해도 모를만큼 망가져있으면, 그렇게 당신이 영영 알아보지 못하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봄날이 어디 있겠는지.
소란에 고개 내밀던 학우의 비명이 울렸다. 아회는 검붉은 피를 입 너머로 흘려내며 숨을 씨근거렸다. 부들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다, 순전히 계산된 행동과 함께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웅성거리는 소리는 커져갔다.
어딜 가도 당신은 내 곁에 없었는데, 어찌 내가 당신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어디 가둬보시라지.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당신의 탓으로 넘기고 나는 도망쳐드릴 터이니.
짧지만 깊은 잠 푹 자고. 일어나기 전에 덜 깬 척 미적거린다는게 그만 다시 깜빡 잠들 뻔 했다. 그러면 곤란하지. 시간 아깝게. 아직 졸음이나 피로 조금 남긴 했지만 뭉그적뭉그적 일어나 기지개하고 하품 하며 남은 잠 쫓아낸다. 그리고 옆 슥 보고. 잠들기 전 약속대로 옆에 있는 하 사감 보며 히죽 웃었다.
"바쁘다고 없어졌으면 삐지려고 했는데. 그럴 일 없어서 다행이네요-"
제게 했던 말도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켜준 건 지켜준거니 고맙지. 온화 정신은 깨었어도 몸은 늦게 깨는 편이라 침대 위 엉금엉금 기어 하 사감에게 안기려 했다. 생각 없이 꼭 안으려다 옆구리 생각에 아 참. 하고 더듬어보니 그의 붉은 철릭 말끔하여 이제 피는 다 멎었나 싶었다.
피가 계속 나고 있었는데. 저 연기가 그렇게 도움이 되었나?
향로 있을 방 한가운데 보다가 문득 제 몸도 제법 가볍다는 걸 인지했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온 몸이 욱신거려 감각이 거의 둔해질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여도 아프지 않았다. 확인차 제 몸 살피는 온화 보기에 좀 우스웠을 것이다. 저 혼자 여기저기 만져보고 움직여보고. 옷 들추고 보려다 하 사감 의식한 듯 눈치 보며 손만 슬쩍 넣어 살피는 둥. 이제 와서 새삼? 스러운 행동 끝에 그 많던 상처들이 다 낫거나 거의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자 놀란 듯 눈 크게 뜨고 깜빡깜빡 한다.
그 푸른 연기가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용하긴 용하네. 그거 분명 영 사감이 가져온 거랬지. 영 사감이라.
생각 잠시 머릿속에 갈무리해두고 당장은 하 사감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제가 자는 동안 그도 쉬었을지 어땠을지 모르지만. 덕분에 몸 상태가 훨씬 좋아진데다 꿈도 괜찮게 꾸었으니 말이다. 잠들기 전의 아픈 내색은 온데간데없이 한없이 살갑게 굴며 끌어안고 뺨 맞대 부비고- 애정 담긴 목소리로 낭군님 덕분이라거나 많이 좋아한다거나 속삭이면서- 나름 요란하다면 요란하게 괜찮아졌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얼마간은 그러고 있었을 것이고 마음 같아선 온종일 그러고 있고 싶었지만. 슬슬 바깥 바람 쐬고픈 생각도 나고 해서 잠시 나가야겠다 싶었다. 하여 제가 먼저 안길 땐 언제고 슬그머니 몸 뒤로 무르며 잠시 나갔다 오겠노라 말 꺼냈다.
"몸 풀 겸 산책 하러 나갈 테니까. 사감 방 가서 쉬어요. 일 있을 지도 모르는데 계속 잡고 있기도 미안하고."
대신 이따 또 보러 갈게요. 장난스럽게 선심 쓰듯 말하고 키득키득 웃는다. 그 뒤 하 사감이 그러라고 하면 같이 나와 하 사감 먼저 보내고. 조금 후에 저도 기숙사 나갔을 것이다.
자캐를_굴리면서_힘들었던_점 : 음~ :3 역시 잿더미와 타오르는 것을 구분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다른 캐릭터라면 일어날 수 있어, 희망을 가질 수 있어~ 하고 툭툭 털고 일어날 수도 있는? 지극히 가벼운 시련같은 부분에 대해서 이럴 줄 알았지, 이게 운명이지 등등 잿더미처럼 의욕을 내지 못하면서도 막상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한대 쥐어박아야 후련하다~ 같은 생각을 하는 그 순간을 묘사하는 거요...🤦♀️ 그리고 슬슬 비틀리기 시작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선?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묘사할 때 어떻게 해야 무야옹에게 변화의 순간이 생길까~ 골몰하면서 이입해볼 때마다 가끔 뇌정지가 오기도 해요... 얘 왜 내 뜻대로 안 굴러가지... 왜지...? 손 떠난 건 아닌데 착 붙는데 왜 얘가 나를 끌고가는 느낌이 들지...? 어... 설마 자아가 생겼나...?
자캐의_지갑에_들어있는_것 :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을 건 다 가지고 있답니다. 혹시 모를 현금과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들이요... :3c
자캐의_화장품_브랜드 : ㅋㅋ ㅋㅋㅋ 아니 이게 뭐야~!!
롬앤...? (대체)
#오늘의_자캐해시 #shindanmaker https://kr.shindanmaker.com/977489 314 어찌할_수_없는_이별을_앞둔_자캐는_결국엔_받아들인다_vs_끝까지_부정한다 : 받아들이죠. 세상이 이 지경이니 어쩔 수 없다면서 받아들이곤 해요.🤔
106 자캐가_아이돌이_된다면_포지션 : 🤔 정말 뭘까요? 한 번도 고민해본 적도 없거니와, 음... 사생활 논란이 데뷔 이전부터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그래도 굳이 정하자면요, 응, 래퍼죠~ :D 이런 애들이 평소엔 잔잔한데 갑자기 랩을 함... 맛있잖아요~
#자캐썰주세요 #shindanmaker https://kr.shindanmaker.com/1090034 374 자캐가_착용하고_있는_장신구는_무엇이_있는가 : 이거는 성 붙이고 나온 진단인데요~ 상시로 착용하는 장신구는 귀걸이 하나 뿐이라서요! :D 푸른 보석과 검은 술을 가진 귀걸이랍니다. 귀기 무 씨의 상징색 두 가지를 가지기도 했거니와 아회가 요괴를 처음 잡았을 때 아버지께서 주신 거예요. 어머니가 네게 잘 어울리는구나~ 했던 이후로 그저 간직하고 있다가 이제야 착용하기 시작했답니다. :> 과거 어머니께서 어울린다고는 했지만 추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니와 본인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서 망가져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장신구기도 하고요. 이것 말고도 마님과 화련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하사한 각종 장신구(물질적인 것으로 넘어갈 줄 알았나 봐요!)와 어머니의 유품까지 모두 포함해서 이것저것 가지고 있지만, 귀기 무 씨와 자신은 남과 같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리고 가문 내부에서 시선이 좋지 않아서 착용하지는 않고 있어요. 좋은 추억도 아니고요.
재밌는 점은 아회가 사실 장신구를 엄~청 좋아한다는 거지만요... 귀부터 시작해서 화려하게 꾸미고 싶었다나 봐요~ 그런데 자신은 수수한 것이 더 어울리기도 하고... 과유불급이란 얘기도 있고... 시선도 안 좋고... 적룡이라서 싸움날 때 목이나 귀 뜯기면 그것대로 문제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천부 장터에서 하나하나 샀던 장신구들이 화장대 구석에 까마귀 둥지처럼 숨겨져 있어요~😏
아회는 몸을 일으켰다. 쓰러지고 나서 제법 우스운 일이 이어진 탓이다. 평소엔 죽어도 뛰어오지 않을 인간들이 부축을 하질 않나, 비녀를 제거해주며 어떻게든 지혈을 돕질 않나, 다가와서 괜찮냐 묻질 않나. 무슨 일이냐 물어볼 적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잘 타일러 돌려보냈지만 걱정 가득하던 시선과 안전하게 하 사감님께 가보라는 학우들의 목소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대로였으니, 이 흉흉한 상황 속에서 누군가의 습격에서 도망친 극적인 상황은 제법 잘 연출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록."
비녀가 예상보다 깊게 찔린 것은 변수지만. 입에서 흐른 검은 피를 소매로 아무렇게나 슥 닦아낸 아회는 부적을 꺼내 붉게 물든 쇄골과 손바닥에 붙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다행스럽게 급소는 피했으니 부적을 붙여 대충 지혈만 해두면 움직일 수는 있을 것이다. 다친 몸이라 한들 지체해서도 안 될 것이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다시금 일어선 아회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시금 쓰러질 것 같았으나 버텨야만 한다.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는 꼴이 엉망이었으나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은가.
"……계십, 니까."
학당 내부에서 위험한 상황이 있었노라 여론도 만들 겸, 쫓기느라 하지 못했던 일을 제대로 끝내는 것이 중요하지. 아회는 문을 두드리며 자신의 몰골을 떠올렸다. 산발이 된 머리, 붉게 물든 흰 비단옷,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부적, 소매에 아무렇게나 찔러 꿰어낸 비녀, 입가에서 훔쳐냈으나 그 궤적 남은 핏자국……. 이대로 면담을 해도 되나 싶은 몰골이나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라 스스로 합리화 했다.
온화 가끔 그런 의문 들었다. 제가 제멋대로 굴 적마다 그냥 다 받아주는 하 사감 볼 때면 말이다. 그의 행동 기반이 무엇일까. 제가 가진 감정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형식적인 것일까? 그저 반려니까- 라는 대답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 줄곧 갖고 있었다. 갖고만 있었다. 물을 곳을 찾지 못 했으니까.
아무튼 좋은 시간 보내고. 일이 있어도 미루겠다 하면 어쩌려나 싶었지만. 가봐야 할 것이 있긴 있었나 보다. 날뛰는 형이라는 걸 보면 그 히죽대던 남자겠지. 이름을 모르니 영 떠올리니 불편하다. 다음에 마주치면 물어볼까. 대답 제대로 해줄까 싶긴 하지만. 그러자고 일어나 먼저 나가는 그의 뒤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사람처럼 손 흔드네. 뭔가 이상해.
부디 그 대화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으나 아프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똑같이 손 흔들곤 다시 방에 들어갔다. 나가기 전 잠시 제 차림과 몸 상태 정돈할 필요 있었으니까.
하여 밖으로 나왔을 때는 제법 멀끔했다. 불필요한 붕대나 천떼기 죄다 걷어내고 머리도 빗질에 묶기까지 했고. 흘린 피 많은 탓에 낯빛이 좀 희어보이는 것 말고는 평소랑 크게 다를 것 없었지 않을까. 이제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영 사감 보이거든 말이나 걸어볼까- 하고 딱 생각한 참이었는데.
"흠. 뭐. 덕분이지요."
때마침 밖에 있던 영 사감과 마주쳐 인사 대신 그런 말 하며 어깨 으쓱였다. 향로의 성분은 몰라도 출처는 알았으니. 덕분이라고 순순히 말하다가 대뜸 지팡이 꺼내는 모습 보고 픽- 실소했다.
"아이고야. 누가 보면 일 중독인 줄 알것소. 왜 그런지 알만 하지만은."
다 낫지 않은 상처가 있긴 했지만 남은 건 그냥 두어도 곧 나을 것들이라 됐다는 의미로 손 설렁설렁 흔들었다. 그 대신이라며 씩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종일 그리 돌아다녔으면 잠깐 쉬어도 될 듯한데. 시간 좀 내주시지요. 사감께서도 내게 할 말 있지 않으실지."
차든 술이든 한 잔 하면서 얘기나 하자고. 예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말 하며 제 고개 까딱였다. 영 사감 편할 대로 하란 듯.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구만. 아회는 미소를 마주하다 그럴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신수인 걸 알게 됐기도 했고, 지금까지 싸워온 것도 있으니 이제 저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낄만한 것도 없었다. 아회는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서다 한숨에 가까운 웃음만 픽, 흘렸다.
"죽지만 않으면 되었지요."
물약이 들어있는 병을 쥔 아회는 나중에 바르겠다는 듯 손바닥 위에 병을 굴리다 당신이 제안한 자리에 앉았다. 이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그때는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물론 그 상황에 감사하다. 그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고 완강하게 거부할 수 있는 명분도 생겼으니. 자리에 앉은 뒤 푸른 연기가 나오는 향로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던 아회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
이유라.
"알 건 다 알 존재가 그리 말하는 것은 형식적인 겁니까, 아니면 제대로 듣길 바라여 그런 겁니까?"
황룡 기숙사로 가라고 했던 것은 당신이었다. 아회는 병을 쥐지 않은 손으로 다시금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시든 모르든 제 상관은 아니지요……. 어차피 밝혀질 것이니. 형님께 예쁨 좀 받았습니다."
그 이전의 일도 얘기해야 하나? 아회는 술이 놓이기가 무섭게 시선을 피했다. 일단 술과 함께 대화하는 건 싫다. ……아회는 그날 이후 지독한 숙취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당분간 술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제가 먼저 그 양반 속을 좀 긁었는데, 창문을 타고 들어오더군요. 하하, 학당 보안이 좋을 거라 믿으며 육 년을 살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사실만을 얘기하는 것이니. 아회는 당신을 향해 시선을 흘긋 돌렸다. 술에는…… 여전히 시선을 두지 않고.
英사감이 경고하듯 말했습니다. 당신은 선추를 만졌습니다. 배꼽에서부터 무언가 끌어당기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당신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한 천장과 깔끔한 마호가니 책상, 의자가 반겨줍니다. 한쪽 벽엔 벽난로가 타고 있고 그 안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뱀이 똬리를 틀었다 풀었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작은 화단에는 [취급주의. 귀마개 없이 만지지 말것]이라 적힌 팻말이 꽂혀있습니다.
' 앉아라. 다과를 금방 내오지. '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킨 英사감은 당신의 반대편에 앉았습니다. 그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고 차가 가득 든 찻잔과 접시에 담긴 다과가 허공에서 연신 둥둥 떠오른 채 날아왔습니다.
' 기숙사 전과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고. 뭣 때문에 나에게 만나자 했나. '
아회는 느릿하게 답했다. 영 사감님께 가서, 포트키를 만들어주어 감사하다 할 계획이었으니. 그리고…… 모르겠다. 그 사람은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어서 마음이 조금 불편하다. 모든 것은 대가가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도움만 받아도 되는 걸까 싶으니 말이다. 일단은, 지금은 그냥... 감사하다고만 해야겠다. 나중에 대가를 넌지시 여쭤보면 되겠지. 생각을 접은 아회는 당신을 흘긋 쳐다보았다.
"……."
제안을 받긴 했지만…… 으. 마시는 순간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아회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한 병을 더 마신다면 아회는 아마 인생에서 가장 고달픈 기억을 떠올리며 고통 받으리라.
"예."
형제 싸움. 명료한 답안이다. 평온한 기색이던 아회는 순간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무슨 소리냐니, 이쪽이 물을 말이다. 부술 듯이 창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들어온 존재가 없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은 하나가 아니었다. 인간이라고 보기가.
"잠깐, 무, 무슨 말씀을……."
인간이 아니라면. 아회는 불현듯 스치는 기억을 황급히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죽지 않는다 하였지. 그 말이 진실이었단 말인가? 단순히 제 기를 꺾어놓으려 했던 말이 아니라?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게 된다. 아. 설마. 아회는 당신을 마주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약간의 .oO((이 씨(형님을 사랑한대요)끼는 대체 어떻게 올라온 거지?)) 도 있어요~ >:3
제 심정은... 아... 이거 밝히기 좀 그랬는데 뭐 어때요...
문도 아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묘사... 피폐물 집착광공들은 대다수 도망친 애를 이렇게 잡지 않던데...도 있구, 도망친 사람을 잡기 위해서는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들어오는 침입자가 긴장감을 더 주는데, 응, 딱 그 부분을 짚다니! 신선하고 충격적이면서도, 정말이지, 맛도리네요...😇
여담이지만 그 이후로 머리 정리할 때 별점 다섯개에 작가님 사상에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를 외쳤답니다...😏😏😏
선추를 잡으려 할 때 그런 경고가 들렸기에. 선추를 잡음과 동시에 얼른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어디론가 끌어당겨지는 느낌 강해지며 아 이동되는구나- 싶은 생각 들었다. 익숙해지기 전까진 좀 불편한 느낌일까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말 잘 들은 덕인지 눈을 떴을 땐 새로운 방에 있었다. 어쩐지 제일 먼저 화려한 천장이 눈에 들어와 고개를 들고 잠시 멍하니 보다가 방 안 휘휘 둘러보았다. 누구씨 방이랑은 천지차이로 깔끔하구만. 혼자 생각하고 키득대며 벽난로 속 뱀을 구경해본다. 은빛 뱀이라. 만져보고 싶은데 안 되겠지. 무슨 팻말 꽂힌 화단도 있는데 뭘까. 귀마개? 아. 느긋하게 방 구경하러 온 날이 아니라서 아쉽다.
순순히 앉으란 자리에 가서 앉은 온화 이젠 익숙하게 역린 풀어 제 무릎 위에 뉘여놓았다. 요즘 어디 나가 앉을 일 생기면 꼭 이래 두고 저 늑대 조각 만지작대는 것이 일종의 습관 다 되어간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 손 역린에 올려놓고 자세 조금 느슨히 풀었다. 앉아서 영 사감이 지팡이로 찻잔이며 다과며 허공에서 불러내는 것 구경하고. 이 자리의 이유 물을 적엔 씩 웃었다.
"내 곧 죽어도 전과할 생각은 없으니 여태 여기나 사감이나 별 관심 없었는데. 내 처지가 이래저래 바뀌다 보니 한 번은 이런 자리가 필요하겠거니 싶더이다. 사감이면서 신수 아닌 이는 영 사감 뿐이시니."
사감이면서 신수 아닌 이. 명백한 제 3자의 관점이 필요했노라 태연히 말한 온화 턱 괴고 잠시 영 사감 빤히 보았다. 영 사감의 기색 살핀다- 기보다 그냥 그러면서 생각 고르는 듯 하다. 무슨 말부터 꺼낼지에 대한 고민일까. 그 고민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흠. 작게 숨 내쉬고 눈동자 옆으로 슥 굴렸다가. 다시 영 사감 보곤 첫 질문부터 꺼내었다.
"구구절절 서론 늘어놓기 귀찮으니 바로 묻지요. 영 사감.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궁금합니다. 사감 노릇 하는 신수들이 무슨 목적 가졌는지. 이 학당에서 무엇 하고자 하는지."
일단 시작은 그리 하자며 질문 두엇 내놓고 대답 기다리려다 아. 하며 말 덧붙였다.
"혹시 사감도 금기니 뭐니 그런 것 있지는 않지? 있으면 뭐- 알아서 하시게."
금기가 있든 없든 어찌 대답할 지는 영 사감 마음대로 하라며 히죽이는 것이 참 건방지기도 하였다.
' 뱀 키우고 싶나? 저 뱀은 애쉬와인더다. 불에서 태어나서 하루 만에 불에서 죽지. 그리고... 저 알의 껍데기는 아모텐시아 라는 사랑의 묘약 재료로 쓰인다. . '
온화가 뱀을 한 번 보자, 英사감이 말했습니다. 그는 온화가 만지는 늑대 조각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 夏사감이 보고 있겠군. ' 이라 나직이 말했습니다.
' 秋사감도 있을텐데? '
짐짓 시치미를 떼듯 혹은 떠보듯 英사감이 말했습니다. 그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근 마시곤 웃었습니다.
' 그래, 언젠가는 그걸 물을 학생이 올 거라곤 예상했지. 어디서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 '
英사감이 천천히 말 끝을 늘였습니다. 그는 생각에 잠기듯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습니다. 결론이 난 것 같습니다.
' 夏사감이 용생구자 두 마리가 섞인 것은 알고 있겠지. 더불어, 용생구자 하나가 이미 죽었다는 것도. '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습니다.
' 그들이 하려던 건, 가장 폭주하기 쉬운 부분을 분리하고자 했다. 인간 중에서 쓸만한 그릇이 있다면 죽은 형제를 대신할 인간을 찾고자 하기도 했지. ' ' 죽은 형제가 그만큼 그들에게 소중했기 때문이고 夏사감이 폭주하기 쉽기도 했거든. 봐라, 이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그가 폭주한 거. '
英사감은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 금기를 어긴다 한들, 나는 죽지 않아. 금기를 발설한 대가는 황룡님이 치르시니. ' ' 폭주하기 쉬운 쪽을 만족스러운 그릇을 지닌 인간의 몸에 심고 그 성정을 좀 억누르려 한 셈이지. '
이번에 있었던 습격은 틈이 발견되었으나, 지금 상황은 그 전제조차 없었단 건가. 아회는 머리를 굴렸다.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지만 제법 괜찮은 실마리 하나 정도는 쥐고 싶었다. 형님은 어떻게 들어온 걸까. 죽지 않는다 했으니 영 사감님처럼 어떠한 존재로 거듭난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언제부터?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
아회는 당신을 마주하며 표정을 굳혔다. 반 푼의 눈으로 당신을 볼 적, 아무런 초점도 맞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선명했다. 확신.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눈동자에 무언가 드러날 수 있을 정도니, 속은 그만큼 격한 감정일 테다.
"제 형제가 맞습니다."
실은 의심하게 됐다. 형제가 맞나? 그렇다면 언제부터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지? 형제가 아니라면 대체 언제부터 형님의 껍질을 뒤집어 쓴 것이지? 당신은 계약과 격이 높은 신수에 대해 이야기했고, 아회는 잠시 고개를 숙여 소매를 자신의 입가에 댔다. 무언가를 뱉어내듯 한참이고 대고 있던 아회가 소매로 거칠게 입가를 훔쳤다.
"……."
말을 할까. 내가 당신들의 간략한 정보가 담긴 수첩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지만 같은 존재로 몰리면 어쩌지? 의심과 불신이 싹트고, 아회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거나 넘기기엔 아직 계기가 부족했다. 피를 온전히 닦아낸 아회는 눈을 감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는 학당 내부로 침입할 터입니다. 조만간 찾아가겠노라 하였고."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으리라. 아회는 잠시 그때의 대화를 더듬었다. 아. 잠깐.
"…여기에 아마 인간이 아닌 게 온 거 같은데…… 그것의 눈을 받은 게 네가 아닌 건……."
아회는 무언가 중얼거리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거, 허구한 날 쫓아와 눈알 좀 가져가라 지ㄹ…… 아니, 말도 안 되는 거래를 요구하는 그 개…… 아니, 신수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형님께선 그 존재까지 눈치채고 있단 것일 터이니…… 하나만 묻겠습니다. 혹시 당신들보다 격 높은 신수 중에서, 당신들이나 그 신수가 미움을 단단히 산 존재라도 있습니까?"
당신들이 아무리 금기에 대해 물어보았다 쳐도 답하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그때의 모습은 뭔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에 더 가까웠으니. 아회는 당신에게 묻곤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형님도 문제지만 그 눈알 신수도 있었지. 그 존재는 돕기 싫은데 면전에 대고 싫은 티를 낼 수도 없고……. 산 넘어 산이다.
애쉬와인더 라는 불 속의 뱀에게 관심을 가지니 키우고 싶냐는 말 들려와 곧장 반색했다. 껍데기가 무슨 약의 재료라는데 그건 관심 없고. 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게 귀여워- 여기 뱀들은 징그럽거나 꺼림칙한데. 게다가 하루 만에 죽는다니. 그 덧없음도 어쩐지 마음에 든달까.
조금 더 뱀 구경이나 했으면 싶지만. 먼저 용건부터 해소하는게 저에게나 영 사감에게나 좋을 듯 했다. 역린 보고 뭐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아마 하 사감 얘기겠지. 치우란 말은 없으니 이대로 둬야겠다. 저를 떠보듯 할 때는 웃는 얼굴로 그런 대꾸도 했다.
"아. 필요하면 찾아갈 거요. '그쪽' 견해도 듣고 싶긴 하니."
신수이면서 사감인 쪽의 얘기도 필요하다면 들으러 갈 것이라. 다 안다는 투로 대답했으니 됐을 것이다. 제가 자리를 청한 만큼 가벼운 서두로 대화를 시작하자 영 사감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사이 온화 제 앞의 찻잔 빤히 보기만 하고 손대지는 않고 있었다. 저걸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듯이. 이윽고 영 사감이 입 열자 차에 향했던 시선 영 사감에게로 돌아갔다.
아는 것에 대해서는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 사감이 두 신수 섞인 존재인 것. 그리고 그의 죽은 형제 있는 것. 요컨데 각 사안이 가진 문제를 인간 이용해서 해결 혹은 조치하려 했다- 이 얘기였다. 어렴풋이 그런 감은 느꼈는데 사실이었다니 놀랍다. 잠깐 무릎에 놓은 역린 콕콕 누르며 그런 걸 하려 했냐는 듯 건드려댄다. 그러다 또 손 올려 쓰다듬으며 얘기 들었다. 그런데 금기의 대가를 영 사감이 아닌 황룡이 대신 치른다라.
"그렇다면야 사양 않고 이것저것 물을 수 있어서 좋구만. 하기사. 죽지도 못 하게 해놨는데 그 정도는 받아낼 만 한가?"
키득키득. 경망스러운 웃음 소리 짧게 흘렸다. 말 잇기에 앞서 사양하지 않겠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가리지 않고 물을 셈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인간을 죽은 형제 대신하려고 했던 거요? 인간을 신수로 만들려 했나?"
그 죽은 형제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제가 들은 금기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금기를 져가면서까지 형제의 죄를 씻고 다시 살려내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 사감에게서 폭주하기 쉬운 부분을 분리한다는 건 다시 둘로 나뉜다는 의미요? 가령 그 부분 떼어내 인간에게 심으면 어찌 되는 거요. 그리고 그것 지금도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고?"
' 하루만에 자라서 알을 낳고 죽는다. 키워도 무관은 하다만. 알 낳을 땐 날 불러라. 방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걸 원한다면 그대로 둬도 좋고. '
英사감은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 이상한 거 안 탔으니 마셔라. 가끔 고향에서 오는 것들이 있긴 한데, 그것들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
온화가 차에 입을 대지 않자, 그는 턱짓으로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 황룡님은 네 마리 용과 시작점부터가 다르거든. '
무언갈 회상하던 英사감은 그리운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것을 얼굴에서 지웠습니다.
' 그 방법까진 난 모른다. 대신할 대체제로 뽑으려 했다는 것만 알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고 협박을 해대시니... '
夏사감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자신이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았습니다.
' 지금은 형제의 목을 찾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찾으면, 더 이상 안 할 생각일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외부에서 자꾸 형제들을 불러모으는 것일테고.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미간을 좁혔습니다. 밖에 있는 남은 하나도 언제 들어올 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말이죠.
' 분리가 된다면, 아마 夏사감이라는 존재 자체는 사라질지도 모르지. 인간에게 심은 쪽을 새로운 夏사감으로 쓰려 했을지도 모르고. 인간에게 심으면 어찌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라고 모든 걸 알고 있지 않아. 그리고 내 고향에서도 그런 행동을 하는 신수나 사감은 없었어. '
쯧, 그는 혀를 작게 찼습니다.
' 심장을 매개 삼아,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를 만든 자는 있었지만 그 방식과도 너무 달라. '
방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된다? 알 낳을 때 불이라도 내나. 귀여운 것 치고 관리가 까다로운가 보다. 제 평소 생활 생각하면 정말 깜빡해서 방 홀라당 태워먹을 가능성 다분했다. 키우는 건 좀 신중해질까...
제가 노골적으로 차에 손 대지 않으니 이상한 것 안 탔단다. 어쩔까- 하다가 그냥 지나가듯 툭 말했다.
"맛을 못 느끼니 먹는게 좀 힘들 뿐이오."
제대로 된 식욕이 없는 삶은 참 재미 없는 법이다. 그러니 자연히 말 많아진 것 같기도 하고.
찻잔 대신 응시한 영 사감의 표정 순간순간 바뀌는 것 보았다. 그리움? 아득하거나 아련한 무언가가 비출 듯 했는데. 그 감정의 근원과 황룡이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당장 들어야 할 것도 산더미인데 매순간 새로운 의문 쌓여간다. 곤란한 인생이야. 뭐가 그리 궁금하고 알고 싶은지. 당장 살 길만 모색해도 시간 부족할 것을.
아무튼 들은 것들부터 정리하자.
"목을 찾느냐. 대체제로 대신하느냐. 그건가. 목 찾는데는 다른 이유도 있는 듯 보였는데."
제가 알기로는 목을 찾는 것도 속죄의 일부분이지 않을까 했건만. 학당에서 나갈 수 있게 되는 조건 중에 있었으니. 헌데 그건 너무 앞서갔나. 그들끼리 입단속을 했다 하니 더는 캐낼 수 없을 듯 싶다. 하 사감에 대한 것도.
"그쪽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거군. 흠. 만일 그리 된다면 어찌 될 지 궁금해지기는 하는구만."
만일 그리 되어 지금의 하 사감이 없어진다면 제 반려는 누가 되는 것일까. 반려의 연 자체조차 무효가 되진 않을까? 갖은 생각 들길래 눈 감고 슥 한 번 밀어낸다. 생각 많이 해서 그런가 허기가 올라온다. 슬슬 차라도 마실까-
"그- 아. 그건 무슨 얘기요? 심장으로 분신 만들었다는 건. 그 고향에서 있었던 일이요?"
형님이길 바랄 뿐이지. 학생 때도 골치가 아팠노라 얘기하는 당신의 말을 타인이 듣는다면 천하의 장난꾸러기였나 싶겠지만 아회는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꿈 속에서 마주했던 그 모습도 그렇고, 가문 내부에서 깽판치고 나갔던 것도 눈으로 본 당사자인데 어찌 저 말을 모르랴.
……그렇다면 어떤 신수와 계약했는지는 알 수 없겠구나. 하기사 범인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다마는, 저렇게 된다면 대체 누구와 계약했는지 범위 자체를 좁힐 수 없게 되니 안타깝다. 그러다가도 당신의 평가에 떨떠름한 듯 입술을 꾹 다문다. 그렇구나, 형님이구나. 이 세계는 어딜 가도 형님이 문제인 건가?
"……."
사소한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건지. 역린을 가지지 않겠냔 말에 아회의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평시 품고 있던 평온함도, 해탈도 없는 무표정은 누가 귀기 무 씨 아니랄까, 온기 하나 없이 농담 들어도 삭막하게 반응할 듯 딱딱했다.
"송구하오나 벼룩을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지는 않지요. 호의를 베풀어주심엔 감사하나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이번에는 받아가지 못했던 장기 가져갈까, 글쎄. 이젠 내어줄 생각 없다. 불탈 몸뚱이에 거창한 것은 필요치 않다. 제 아무리 신수라 할지언정 믿지 않는다. 또한 당신과 짤막하게 있었던 갈등의 원인과, 그간 신수와의 싸움에서 수상할만치 온화만을 향했던 공격들을 생각하면 받는 것이 이상할 상황이었으니.
"내버려 두면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음 얻을 날이 오겠지요."
아회는 유감스럽게도 당신을 포함한 형제자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나아가, 대다수의 영적 존재와 사람도.
무거운 사랑 하니 슬쩍 생각해본게~ 온화는 앞으로 할 수 있는거나 해야하는거나 갖가지 방법 찾아둔 건 많지만 전부 포기한다는 선택지도 저어기 멀리 한켠에 아직 남아있는거 같긴 해~ 한바퀴 빙 돌아서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을 지도 모르고? 음~ 내면은 아직도 갈등 중이니까~
英사감이 빠르게 사과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더니, 자신의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습니다.
' 그럴 땐 식감이라도 있는 게 낫지. '
작은 다식과 떡이 줄지어 왔습니다. 英사감은 온화가 정리하는 것을 가만히 기다려줬습니다.
' 그렇지, 이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가 한 행동이다. 그러니까, 내가 살던 고향에는 이른바, 설녀가 존재한다. 끔찍한 전쟁이 벌어졌고 대다수가 죽어, 한 명만이 남았는데 그 설녀가 신수들이 자리 잡은 마법사 학원에 신변을 위탁했다. 아마, 그게 꽤 오래 전 일이겠지. 설녀는 외로웠기 때문에, 신수들에게 한 가지 청을 올렸다. '
작은 몸집, 어린 아이 같은 얼굴, 흰 머리, 새하얀 유카타. 제 고향에 존재하는 설녀를 떠올린 英사감은 팔을 들어, 팔걸이 위치에 맞춰 손을 흔들었습니다.
' 자신의 심장을 매개로 동족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이었지. 네 마리 신수는 그 청을 흔쾌히 들어줬다. 심장을 매개로 생명을 불어넣고 삶을 부여받고 사주팔자는 백지로, 죽음은 설녀가 죽는 날로 고정되었다. 그 꼬마 설녀가 한, 키가 이 정도 되나.... ' ' 이 곳과 다르게 그 곳의 마법사 학원은 기숙사마다 계절이 고정되어있다. 그리고 그 곳의 사감들도 나와 같이, 죽지도 늙지도 않아. '
英사감은 답변이 되었냐는 듯 온화를 응시했습니다.
' 이제 나도 갈 수 없는 곳이지만, 많이 바뀌었겠지. 그 곳도. 바뀌지 않는 자들을 제외하곤 시간이 흘렀을게야. ' ' 이야기 속의, 심장을 바친 설녀 말이다만. 말이 설녀지, 남자다. '
제 사정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을 영 사감이 사과할 이유는 없었는데. 굳이 언급은 않고 내어주는 것을 군말 없이 받아드는 것으로 배려에 대한 감사 대신한다. 갖은 다식과 떡들 보고 다식 하나 집어 입에 툭 넣고 씹으니 부드럽게 뭉개진다. 몇 번 우물대다 삼키고. 입 비기 무섭게 차 한 모금 넘겨 입가심 해버린다. 아무리 식감 즐긴들 삼킨 후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심장 매개로 분신 만든 얘기. 두말 할 것 없이 저쪽에서 있던 얘기란다. 설녀라는 존재- 아마도 종족이겠지? 동족 다 죽어 혼자 남은 설녀가 신수에게 빌어 이룬 이야기. 영 사감이 꼬마 설녀의 키 가늠하는 손 모양 보고 피식 웃었다.
죽음을 함께할 저만한 분신이라. 저도 한 번 있어보면 좋겠다. 그러면 행여나 ...그리 되어도 외롭지 않을 텐데.
표정 씁쓸히 변하는 것 숨기지 않았다. 설녀가 설남이란 것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영 사감 얘기 끝나고도 떡 하나 집어먹으며 말 없다가 삼킨 후에야 말했다.
"거기도 참 별일 다 나는 곳인가 보구만. 전쟁이니 뭐니 참. 거기 기숙사 신수들- 뭐였나. 들었는데 까먹었네. 아무튼 그네들은 친절한 듯 하니 학생들 여보단 살 만 하겠어. 음- 마법사 학원? 계절이 고정이라. 재밌네. 재주만 좋다면 몰래 드나들며 놀 만 했겠는데."
여긴 하여간 뭐 하나 친절하질 못 하고 팍팍하다며 에휴- 한숨 내쉰다. 그리고 차 한 모금 마시고. 제 하고픈 질문 꺼낸다.
"거기 사감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여기 사감들이 거기 사감들 흉내를 내는 것이오? 전에 물었는데 영 사감 당신하고 동향인 누군가라는 답 밖에 못 들어서."
그 때도 뭐 얘기하다 나왔더라. 그리 오래 전도 아닌데 기억 흐릿한 것 보고 작게 혀 찬다. 지금 것이나 생각하자. 고개 갸웃 기울여 뭐 물으려 했더라. 슥슥 뒤져보고 다음 질문 찾는다.
"그리고- 방금 못 간다 했는데. 사감은 아예 여기 잡힌 거였소? 그럼 황룡의 학생들은 졸업할 적에 어찌 되는 거요?"
'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른 기숙사로 넘어가는 걸 들키면 사감에 따라서 학생들을 벌하는 게 있었으니까. '
英사감은 그 곳의 사감들을 떠올렸습니다.
' 그 곳은 학년 대표를 맡는 학생들도 있어서 그 학생들이 규칙을 어긴 기숙사생들의 점수를 깎을 수 있었거든. 그리고 방학이 아니면 웬만하면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여기와는 다르다. 확실히. ' ' 무엇보다 그 곳은 MA님의 힘 행사가 덜하거든. '
차를 홀짝인 英사감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잠깐 자신의 지팡이를 내려놓았습니다. 나무로 된 그의 지팡이가 탁자에 작은 소리와 함께 놓였습니다.
' 그 사감들 또한 네 명이다. 청룡이 머물고 사시사철이 봄인 청궁에는 [건] 사감, 주작이 머물고 사시사철이 여름인 주궁에는 [곤] 사감, 백호가 머물고 사시사철 가을인 백궁에는 [리] 사감, 현무가 머물고 사시사철 겨울인 현궁에는 [감]사감 이렇게 넷이 있지. 이 네 명의 성격을 말해줄테니, 네가 직접 생각해봐라. '
英사감이 소파에 깊숙히 등을 기댔습니다. 그는 사감들을 떠올리듯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 [건]사감은 장난에 살고 장난에 죽는다. 앞 뒤 안재고 장난을 치고 본다. 주 된 상대는 [곤]사감인데, 대표적으로 [곤]사감의 머리색을 무지개색으로 바꾸거나, 형광색으로 바꿔서 쫓긴다. [곤]사감은 [건]사감 때문에 거의 화를 내고 산다. [리]사감은 백호에게 늘 물리거나 할퀴어지거나 굴려지기 때문에 늘 지쳐있다. [감]사감은 인간을 좋아한다. 인간 자체를 매우 사랑하지. '
거기까지 말하던 그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누가 누굴 흉내내는 건지 맞추라는 것처럼.
' 황룡 학생들은 졸업할 때 두 가지 갈래길에 놓이게 된다. 마법, 황룡과 관련된 기억을 잃고 평범하게 졸업하거나.. 하늘섬에 존재하는 가족들의 기억을 지우고 마법사가 되어서 마법사 사회로 넘어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지. 반대로 그 곳에는 도술을 배우는 황궁이 있다. 기린님들이 계시지. 그리고.....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갈래길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다. ' ' 그 곳에는 반대로 도사가 되어서 넘어오느냐, 모든 기억을 잃고 마법사로 졸업하느냐가 갈래길로 놓인다. '
英사감은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 어느 쪽이든, MA님이 관여한다는 건 알아두도록. 주변의 인식까지 바꾸는 건 그 분 아니면 못 하는 짓이니. '
그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신수가 아닌 인간이 사감이 되면,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게 된다. 궁금하다면, 직접 찔러봐도 된다. 나도 처음에 안 믿겨서 몇 년 동안, 자신에게 살인 저주를 날렸으니 말이지. '
와아........... 그............... 유현이가....................... 답레 쓰기 전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정신머리 나가버려도.........그..... 괜찮을까요.....?👀 진짜 좀 많이 나가버렸네요...🤦♀️🤦♀️🤦♀️🤦♀️
"어떤 계약이기에 이렇게 될까요. 그리고…… 의미를 모르겠군요. 이곳 출신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오신 건가요? 계약을 했다는 그자도 당신과 유사한 상태에 있나요?"
한 번에 하나만 물으라고? 하나만 궁금하지 않은데 어찌 그러나. 묻는 과정에서조차 의문이 끊임없이 연쇄된다. 그는 영 사감의 말 가뿐히 무시하고 여전하게도 저만 좋을 물음 계속해서 던진다. 그나저나 신수와 계약을 하면 저리 된다고. 처음부터 그런 조건을 전제로 한 계약이기에 죽지 않는 것일까, 혹은 부차적인 작용으로 불사가 따라드는 것일까.
"하면 당신을 죽일 방법은 전혀 없는 건가요? 혹시나 하여 첨언하자면, 이건 순수한 의문에 불과할 뿐이랍니다. 고통은 느끼지 않으시는 건가요?"
유현은 가만히 제 턱 짚고 고민을 이어갔다. 유리조각 박혀 엉망이 된 손 얼굴 가까이로 가져가자 철철 넘치듯 터진 피가 팔뚝을 타고 아래로 흐른다. 단정하게 차려졌던 옷소매 붉게 물들어갔다. 그런데도 유현은 마구잡이로 깨부숴진 유리조각 손에 박힌 것조차 느껴지지 않는지 느긋하게 검지로 제 볼 두드릴 뿐이다. 생각에 열중하느라 고통 따위 모르는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인 주제에. 별안간 느린 박자로 움직이던 손짓 멈추고 그는 서서히 손 내렸다. 어느덧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미미한 표정이었으나 늘상 짓곤 하는 무의미한 미소와는 달리, 조금도 꾸며내지 않은 진실된 웃음이다. 화유현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더할 나위 없는 열락을 느끼고 있었다.
"아뇨, 이렇게 되었으니 더 열어보고 싶네요. 이리 해도 죽지 않는다니 이토록 의합한 때가 또 있을까. 어차피 죽지 않으니 상관 없잖아요? 협조해 주신다면감사하겠습니다. 난아주예로부터누군가의살을열어젖혀그속을느껴보고싶었어요.그렇게한다면이괴로운고혈을일말이라도잊을수있을것만같아서말입니다부디한시라도내가나를……."
무엇인지 모를 말 잔뜩 중얼거리며 유현은 영 사감을 향해 반달음으로 다가간다. 앞만 보고 있기에 동작은 더없이 허술했지만 기세만큼은 금방이라도 무언가 저지를 것만 같아 보였으리라. 속되게 말해, 완전히 맛 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단 뜻이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돌연히.
영 사감은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로 말했습니다. 곧, 유현의 분위기가 바뀌자마자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학생을 다치지 않게 제압하기 위해선... 금지된 저주 패스, 제압 주문 다치니까 패스..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한 번 퉁겼습니다. 당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밧줄이 날아듭니다. 한 번에 묶는 데에 성공했다면, 아마 영 사감이 숨을 몰아쉬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 진정해라. 나는 사감이다. '
영 사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유현에게서 유리 조각을 빼내려듯 주문을 외웠습니다.
' *아씨오, 유리조각. '
*물체 소환주문
성공한다면, 유리조각은 당신의 손에서 빠른 속도로 영 사감에게로 날아갈 것입니다. 영 사감은 한숨을 내쉬곤 주머니 안에서 그보다 큰 유리병을 꺼내, 가슴께에 발랐습니다.
>>57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무야옹아~!!!!!! ㅋㅋㅋㅋㅋㅋㅋ근데 피칠?갑하고 후다닥 뛰어가니까 다른 의미로 조질 것 같아서 무서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580 반박할 수 없어서 눈물이 나요...(´°̥̥̥̥ω°̥̥̥̥`) 분... 분명 그랬다간 아주 크고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두려워요... ː̗̀(ꙨꙨ)ː̖́ 아니 이게 업보이긴 한데 화뭐시기야!!!!! 그러니까 온화한테 좀 잘하자!!!!! 협조 좀 해!!!!!
뵈는 것 거의 없다시피 한 채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짓에 불과했으니, 유현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너무도 손쉽게 제압되고 말았다. 쿵, 몸이 묶이자 가느다란 몸뚱이 그만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넘어지는 과정에서 머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다른 부위는 다쳐봤자 동작에 지장만 주고 말 뿐이지만, 머리는 사고의 기능을 담당한다. 머리에 충격을 받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말 중얼거리던 괴이한 언동 뚝 멎었다. 흡사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생각은 그렇게 갈피를 잃었다. 유현은 그대로 얼굴을 처박고 죽은 듯이 잠잠했다. 바르작거리는 낌새조차 없다. 의식이 없나 싶을 정도로 부동하는가 싶다가…… 그가 불쑥 고개를 쳐들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진정했네요. 이 자세는 대화를 나누기엔 부적절하다 사료되는데, 풀어주시겠어요?"
가만히 있다가 대뜸 괴상한 난동 부렸던 게 누구였는지는 아주 까맣게 잊었다는 듯 태연스러운 태도다.
"그리고 문답에 관해서라면, 직전에 미처 답변하지 못하셨던 부분부터 이어가면 되겠군요. 무어라 질문했는지는 아직 기억하는데, 다시 읊어 드릴까요? 무슨 계약을 맺었는지, 당신의 출신지는 어디인지, 다른 계약자의 상태, 당신을 죽이는 방법. 어서요."
아니, 그저 태연스러운 것을 넘었다. 흡사 맡겨놓은 물건 찾는 것처럼 뻔뻔하기까지 했다. 결박당해 있다는 점만 빼면 아주 제 집 안방처럼 드러누워서 요구해대는 진상이나 다름없다.
"잠시 다른 생각. 아니지. 죽는 순간 함께하는 분신이라면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이오."
표정 바뀌는 것 보고 했을 말에 태연히 다른 생각 했노라 말 돌리려다 제가 생각한 것 그대로 말했다. 표정 변화 하나도 잡아내는데 면전에서 이런 생각 하고 있다 하면 어찌 반응할까 궁금해진 탓이다. 본디 이런 류의 의구심은 유현이 특기인데. 알고 지낸 시간 적지 않으니 그만큼 닮았나 보다. 곤란허구만.
"들키면. 이잖소. 그럼 안 들키면 되는게지. 점수나 벌이 무서울까. 음. 여기처럼 수시로 집에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닌가 보오. 그럼 방학에도 집에 안 가고 있을 학생들 제법 있겠는데."
창제신의 힘 행사가 덜하다는 것은 흥. 하고 마뜩찮은 소리로 대신했다. 여기는 좋을 대로 주물러대면서 저기는 덜해? 참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하긴. 이쪽 신수와 저쪽 신수의 성격 차이만 봐도 두 말 할 것 없다. 에잉. 작게 고개 흔들고 영 사감이 내려놓는 지팡이 슬쩍 보았다. 거기는 거기 만의 고충이 있겠거니 해버리고.
여기 사감들이 저기 사감들 흉내 내는 것이냐 물으니. 성격 말해 줄 테니 직접 맞춰 보란다. 마냥 다 알려주진 않겠다 이건지. 뭐 어려울까 싶어 잠자코 영 사감의 말 들었다. 그러니까. 건. 곤. 리. 감. 이렇게 넷이고. 성격이 어떻고. 관계는 어떻고-
"어- 일단 곤 사감이 하 사감이고. 감 사감이 동 사감이고. 건 사감이- 굳이 맞춰보자면 춘 사감? 그리고 리 사감이 추 사감 같은데. 비슷은 하지만 딱 맞다 싶진 않구만. 대충 계절 맞춰 때려박았지만은."
적당히 이건가 싶은 사감들끼리 짝을 짓곤 이게 맞느냐는 눈으로 영 사감 본다. 맞으면 슬쩍 뿌듯해 했을 것이고 하나라도 틀렸으면 쳇. 하고 혀를 차며 불만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넘느냐. 남느냐. 어느 쪽도 같은 선택지라. 왜 굳이 그런 수고로움을 거치는지 모르겠군. 나뉜 대로 살게 두면 되지 않나. 사감은 아시오? 구태여 그리 인간 오거나 가게 만든 이유."
굳-이 양 측에 황룡과 황궁 두어 교류의 여지 만들어 둔 것이 참으로 의문스럽다. 그 오가는 과정에 창제신 굳이 관여한다면 더더욱.
영 사감의 슬픈 표정과 그 얼굴로 하는 말에 온화 느릿하게 눈 깜빡였다. 하 사감은 영 사감이 황룡과 붙어먹었느니 했는데. 그 과정이 본인 의지가 아니었나? 아무렇지 않게 죽지 않으니 찔러봐도 된다니 뭐니 하길래 참 나. 코웃음을 쳤다.
"죽지 않는 것 괴롭히려 찌르는 취미는 없소. 찔러도 찔러도 죽지 않으면 흥은 커녕 열만 받지. 헌데 그 말 백룡 앞에선 삼가시는게 좋겠소. 내 아는 동생만 해도 그 말 듣자마자 그럼 한 번 열어보자며 달려들 거요. 이미 경험 있다면. 거 참 유감이지만은."
말 쉬이 하는 것 보니 아마 한 번 이상은 그런 경험 있을 것 같다만. 그것도 포함해 처음으로 영 사감이 안쓰럽다 느꼈다. 죽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시도 한 끝에 그 부분 만큼은 자포자기 한 듯 보였으니까. 아. 타인에게서 금새 저와 겹쳐 보려는 것 참 좋지 않은 버릇이다. 그리 본다고 제 명 바뀌는 것 아니요 현실 그대로이건만. 피식. 자조 어린 웃음 가늘게 흘리고. 가벼운 어투로 툭 물었다.
"내 찌르는 것 대신 묻지요. 영 사감께서는 어찌 하다 사감 되셨나?"
차 마실 동안 들을 것 풀어보란 듯. 지극히 가볍고 가벼운 말투였다. 팔걸이에 팔 걸쳐 비스듬히 턱 괸 저 자세도 그렇고.
' 그렇지. 문제는, 사감들의 감이 꽤 뛰어나단 거다. 나도 학생 시절엔 일부러 학원에 남아있던 적도 종종 있었으니 그런 학생들은 적지 않았지. '
그리운 시절을 회상하듯 英사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가 당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정답이다. 나름 冬사감은 본인 성격과도 어느 정도 맞으니, 흉내는 잘 낸 셈이지. 다른 사감들은 모르겠지만. '
기쁘다는 듯 말한 英사감은 축하의 의미인 건지, 당신에게 박수쳤습니다.
' 균형이다. '
英사감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 기린 중 한 쪽은 격이 낮춰져 [무기]라는 이름으로 황궁의 사감으로 존재한다. 그 자가 다시 격을 되찾고 이 곳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도사들을 양성해, 하늘섬으로 넘기는 게 유일하다. 그리고 그만큼 사라진 존재들을 채워서 마법사 사회로 보내는 게 내 역할이다. 어느 한 쪽이 많거나 적으면 안 돼. '
그 균형이 무엇일지 英사감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 안 그래도 이미 한 번 열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같은 학생을 말하는 것 같군. '
英사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는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은 제 가슴팍을 흘긋 곁눈질로 살폈습니다.
' ..... 원래 [나]는 범죄자들을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건]사감님이 날 부르더군. 부탁이 있다면서. 그 때 이 곳의 사감들을 마주했다. 그 자리에서 몇 가지 물건, 몇 마리 신비한 동물들과 함께 보쌈 되듯이 납치 당했지. '
가볍게 이야기 한 그가 고개를 까딱였습니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난 英사감이 당신을 보며 한 마디 하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무아회가 어째서 지금까지 혹독한 북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아는가? 탈주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는 그럴 리가 없지. 아회는 사감실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부적을 태웠고, 한 걸음 성큼 걷기가 무섭게 자신의 방으로 안개가 되듯 사라져 들어갔다. 무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에잉, 두 번만 더 했다간 죽겠어. 사과도 영 못 해먹을 짓이구먼……."
이 몰골로도 오래 있을 수 없으니. 상처 부근 피떡진 부분도 정결케 하고 옷도 갈아입든지 해야겠다.
하나, 아니, 두 번의 큰 사건을 겪으니 지금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 평온을 즐겨도 되는 것인가? 금방이라도 누군가 오면 어쩌지?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다가도, 차라리 쉬는 것이 심신에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모순적인 생각이 서로 상충한다.
"……일단은."
다른 계획을 세우고 떠올리려면... 아회는 영 사감님이 만들었다는,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물약을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두고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둔다. 욕실로 들어서 얼마 있지 않아 물기가 바닥을 적시고, 부적 두엇 태우자 바람 스치며 머리의 물기 빼낸다. 방에 묻은 피도 죄 깨끗하게, 옷의 핏기도……. 비녀를 소매에서 빼고, 그 귀한 비단옷 벽난로에 넣어 태워버린다. 가주님께는 적당히 찢어져서 그랬다 변명해야지. 이윽고 새 옷 걸치며 생각 하나 떠올렸다.
목화는 지금쯤 영이가 잘 데려가서 놀고 있을까.
"……데려다 드리는 것이 낫겠지."
선물 가게로 다시금. 이제는 정 붙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정 붙여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연약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아회는 가라앉은 눈으로 비녀가 아닌 붓을 들어 머리를 틀어 올리기 시작했다. 인간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그 존재에게, 인간인지 아닌지도 모를 제 형님과 신수들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시선 피하는 영 사감 향해 온화 얄궂은 표정으로 떠들었다. 그것 가능하게 하는 신수들 여기에 있었더라도. 가능케 하는 법은 물론 안 된다고 딱 잘랐을 것 아니냐고.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저 사감이라면.
다른 사감들을 보면 그저 잘 흉내내고 있구나. 싶은 감상 뿐이지만. 영 사감은 역시 표정부터가 다르다. 원래 인간이었고 지금도 생사만 여탈당했을 뿐 내용물은 그대로이지 않나. 아. 심장이 없을테니 내용물도 좀 다른가. 아무튼. 조금 전의 반응이나 저 그리운 듯한 표정이나 보고 있으면 그냥 인간 같다. 하지만 가장 인간다운 점을 잃었으니. 스스로 느낄 이질감과 괴리감은 제가 감히 가늠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감에게도 학생 시절이 있었다니. 쉬이 상상하기가 어렵구만- 내 아버지도 종종 학당 시절 언급하는데. 지금의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상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으이. 그 아버지가 나만 할 적. 아니. 더 작을 때가 있었다고? 믿을 수가 없구만. 뭐 그런 느낌이네."
하여 이 말 만큼은 짖궂음을 덜고 보통의 어른 보듯 했다. 언행이 다소 버릇없기는 했지만.
사감들 맞춘 것 듣자 보란 듯 뿌듯하게 웃었다. 그런데 너무 쉬운 문제 아니었나 싶다. 어찌됐건 예상이 맞다니 마음 놓고 다른 생각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지. 왜 학생들을 오고 가게 하는지. 영 사감의 내력은 어떠한지 등등.
"균형이라- 진부한 이유라 재미없군. 결국 저쪽 학생들도 신수의 격 위해 이용 당하는 것 없잖아 있다는 얘기구려. 그래도 여기보단 낫나. 아무렴 여기보다는."
원래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라지만. 아무리 봐도 이 천공섬보다 저 마법사 세상이 숨 쉬며 살기에는 나아보인다. 어땠을까. 제 가문도 저도 본디 저곳이었다면 지금처럼 뒤틀릴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본들 의미 없는 헛소리다.
"아. 저런. 거 험한 꼴 보셨겠네. 안타까워."
들려온 말이나 시선 보아 이미 유현이 영 사감 거쳐간 듯 해 안타까운 웃음 흘렸다. 그 녀석- 어땠을지 환하지. 눈 돌자 제 배에 서슴없이 손가락 찔러 넣던 녀석인데. 조만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해줄 말도 많고.
"보쌈이라니! 하하! 여기 신수들은 정말 한결같았구만 그래. 사감도 어쩌다 신수 눈에 들어서는 욕만 보는가 몰러."
영 사감의 내력 간략히 들은 후엔 그리 웃으며 말했다. 어찌 왔나 했더니 보쌈이라니! 그런데 신비한 동물은 또 무언가. 여기의 요괴 같은 것인가? 또 묻기 전에 영 사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라며 남겨두고 가는 영 사감 빤히 보다가 씨익 웃었다.
기다리랬지. 얌전히 있으라곤 안 했다?
역린은 잠시 소파에 내려두고 조용히 일어나 방 안 구경에 나서본다. 책상 슬쩍 기웃거려보고. 책꽂이 같은게 있으면 겉만 슥 훑어보기도 하고. 조금 전 보지 못 했던 화단에 가서 뭐가 있나 둘러본다. 뭐가 뭔지 모르니 손 대지는 않고 전부 눈으로 보기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벽난로에 다가가 아직 은빛 뱀이 있는지 들여다본다. 있으면 움직이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겠지.
기다리는 동안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아직 창문은 열려있었으나, 바깥을 향해 부러 시선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들어오고 나갔는지 알아서 무엇 하겠나. 동 사감의 보안을 뚫고 들어왔다는 것이 중요하지. 창문을 향해 손짓하자 알아서 문이 닫힌다. 아회는 다시금 적막 속에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회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화와 영이인가? 그렇다기엔 영이는 이렇게 노크할 존재가 아니다. 바로 자신이라고 말했겠지.
"……누구시오?"
아회는 자리에서 일어나 플루 가루가 남았는지, 가루가 있을 작은 목함을 뒤적였다. 또 저번처럼 문을 두드리다 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오지는 않겠지.
'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따지고보면, 내 고향을 위해 학생들을 그 사회로 보내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말이지. 나름 만족은 하는 중이다. ...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던 적이 있었으니. 아쉽게도 [내가 살던 시기]는 가르칠 수 없었던 시대였던지라. '
英사감이 아득한 과거를 더듬다가 웃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더 나을수도 있긴 합니다.
그가 자리를 비웠을 적, 책상엔 아주 오래 되어보이는 흑백 사진이 액자에 끼워진 걸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속 남성은 긴장한 표정으로 정장 매무새를 정리하다, 누군가를 보듯 고개만 들어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이 반복됩니다. 英사감과 닮았으니,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책꽂이에는 당신이 읽기 어려운 글자로 적힌 책들이 주르륵 꽂힌 게 보입니다. 아마, 마법사 사회의 문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화단에는 주의, 귀마개 없이 절대로 만지지 말 것. 이라는 팻말과 함께 그 옆으로 몇몇 식물들의 이파리가 보입니다. 이건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오는 콩, 밈뷸러스 밈뷸토니아. 절대 건들지 말 것., 보름초, 마디풀, 부보투버, 아가미 풀... 처음 보는 풀 이름들입니다.
벽난로엔 아마 그가 말했던 [용액]이 냄비 안에서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게 보입니다.
당신은 벽난로 쪽으로 향했습니다. 애쉬와인더라 불린 뱀이 불 안에서 당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천천히 애쉬와인더의 상체가 꼿꼿하게 섰습니다. 불꽃으로 된 혀를 낼름거리던 뱀은 똬리를 풀어, 자신이 소중하게 품고 있던 알 몇 개를 당신에게 보여줬습니다. 충분히 구경했겠다 싶었는지 다시 똬리를 틀어서 알들을 모두 감췄습니다.
무엇을 합니까?
[>책장을 살핀다] [>책상을 살핀다] [>의자에 앉아 얌전히 기다린다]
>>636 아회
똑똑똑똑
말 없이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다, 당신의 물음에 잠깐 모든 행동이 멈췄습니다. 문 밖에서 작은 삑, 삑 소리가 들립니다.
다급한 노크 소리. 그때와는 사뭇 다른 소리였기 때문일까, 아회는 플루 가루를 찾던 손을 멈추더니 문을 향해 시선을 꽂았다. 삑, 삑, 작은 소리가 예민한 귀에 꽂히자 아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소리는 목화의 소리인데……. 잠시 생각하다가도, 문을 두드린 것으로 추정 되는 사람의 외침에 손을 더듬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금방 열어드릴 터이니."
지팡이를 쥔 아회는 걸음을 저벅저벅 옮겼다. 문고리에 손을 얹고, 이내 문을 조심히 열었다. 목화는 작고 조그마한 존재니 문에 쓸릴까 싶어 속도가 느렸다.
분명 병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던 조그마한 털뭉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째 조금 큰 것 같다. 아회는 시선을 맞춰주듯 무릎을 굽혀 손을 뻗고는, 손바닥 위에 올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가볍게 톡톡 움직였다. 올리면 얼마나 컸는지 확인할 수 있겠지. 동시에 목화의 숨바꼭질 이야기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조그마한 존재 덕분에 영이가 꽤 골탕을 먹겠구나. 뭐,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이기셨습니까? 참으로 장합니다, 목화. 허기가 지지는 않습니까?"
조그마한 존재가 손바닥에 올라오면 가벼이 쓰다듬어주려 했을 터이며, 고개를 살짝 들어 문을 대신 두드려 준 학생을 향해 잔잔히 감사를 표했다. 어린 학생인 것 같은데. 아직 성격 뒤틀린 기미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고맙소. 하마터면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모를 뻔했구료…… 그냥 가지 말고, 다과라도 몇 개 받고 가시게. 마침 좋은 양과자가 있다오."
제법 상냥하게 입술 달싹이고 잔잔히 미소 지었다. 아마 소문처럼 남에게 어지간하면 시비 걸지 않는 잿더미 선배라는 이름값 여실하였을 터이지.
몰래 들어온 고양이마냥 방 안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니. 참으로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서 본 건 작은 액자와 그림- 인 줄 알았으나. 움직이는 사진이었다. 간혹 도술로 족자 속 그림이 움직이는 건 보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오래되어 보이는 사진 속 인물은 아마도 영 사감이겠지. 나이가 멈추기 전이거나 그보다 젊을 때일까? 빤히 들여다보다 책장으로 넘어간다. 무슨 책이 있나- 슥 둘러본 결과. 제가 볼 수 있는 건 없단 결론이 난다. 그야 모르는 글자 투성이인데 뭘 어쩔까! 고개 절레절레 흔들고 화단 보러 갔다.
"어... 밈뷰으... 밈뷸루습. 에잇."
화단 속에 신기한 이름이 있길래 소리 내어 읽을려다 말았다. 발음 뭐 이렇게 어려워! 게다가 다 처음 보는 거다. 이것들도 넘어올 때 같이 가져온 건가? 저 쪽의 약을 만들 때 쓰는 건가. 호기심 슬쩍 가져보고 지나간다.
그러고보니 뭔가 추출해야 한댔는데. 그게 저 냄비 속에 있는 건가 보다. 부글대는 냄비도 힐끔 보고 그 아래 불에 있을 은빛 뱀 구경을 한다. 아까는 제대로 못 봤는데 지금은 저 귀여운 녀석이랑 눈도 마주쳤다! 지능이 꽤 있는 녀석인가 봐.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은빛 뱀- 애쉬와인더가 알을 보여주었다. 동그란 똬리 속 옹기종기 모인 알들도 귀엽다. 기쁜 마음으로 마음껏 보고 나니 다시 똬리를 틀길래.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여줘서 고마워. 귀엽고 예쁜 알이네. 너도 그렇고."
불 속만 아니었으면 저 매끈한 비늘을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아쉽다. 이제 애쉬와인더가 편안히 알 품도록 벽난로 앞을 떠나 방 안을 휘젓- 지는 않고 다시 구경에 나선다. 책장은 모르는 글자 투성이라 재미 없고. 책상이나 더 봐볼까. 하여 다시 책상으로 가 다른 사진은 없는지 뭔가 제가 읽을 만한 건 있는지 기웃거려 보았다.
무게감이 느껴진다. 제법 묵직하고 따끈따끈하니, 자신이 만약 조금 더 감정을 더 잘 느끼고,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면 금방이라도 뺨을 파묻고 비비적댔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던지라, 아회는 목화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줄 수밖에 없었다. ……더 정을 주면 소중해지니까.
"……오는 자도, 가는 자도 막지 않소."
덤덤하게 얘기하며 학생이 들어올 수 있게 문 주변을 지켰다.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회는 천천히 문을 닫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피 묻은 옷은 이미 벽난로 속에서 타들어가 잿더미가 되어버린지 오래고, 방은 도술 덕분에 깨끗하니.
"……무 아회라고 하외다. 올해로 6학년이니, 편히 선배나 아회라 불러주시오."
백 씨라.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범죄자 배출한 두 집안의 만남은 제법 우스울 터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둘 다 적룡인데 잘 맞는 부분 있겠지. 아회는 부드러운 방석 위에 목화가 내려갈 수 있도록 돕고는, 당신에게 편히 앉으라는 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짓을 하자 부적이 불타며 무언가 테이블 위로 안착했다. 찻잔과 접시였다.
"커피는 마실 수 있나? 마시지 못한다면 우유와 차 중 어떤 것이 좋겠는지……."
지팡이를 짚고 여유로이 걸어 찬장에 다가서더니, 찬장을 뒤적거리며 목화에게도 덤덤하게 물었다. 아마 이쯤 두었을 터인데…….
성급했다. 드러내지 않고자 했던 모습을 너무도 무방비하게 보이고 말았다. 모순적이게도 그는, 언제나 무감했기에 드물게 동한 감정에 더없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의 과도한 충동은 발화를 지나자 급속하게 식어 버렸고, 유현은 냉정을 되찾았다. 그 다음으로 행한 것은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좋을지에 관한 셈이었다. ……역시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양 몰염치하게 구는 편이 가장 낫겠지. 그는 비척비척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눈길에 묻어나는 미묘한 집념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기회만 생긴다면 방금 같은 짓 언제고 다시 시도하리라. 유현은 습관처럼 머리칼 정리하려다 뒤늦게 제 몰골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지하고 나서야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통증 몰려든다. 그는 영 사감을 향해 곳곳에 유리 박히고 찢어진 손 느긋하게 흔들어 보였다.
"아, 언제 이런 상처가. 과경엔 다친 곳 없었는데 방금 생겼군요. 제압이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치료해 주시겠어요?"
사실상 자해를 한 주제에 뻔뻔하기는. 거짓부렁 무척 자연스럽다.
"사감이라는 자리는 얼마나 중요한 역이기에 그 자체로 계약의 조건이 되나요? 그러고 보면 나머지 사감들도 모두 범상한 존재는 아닌 듯한데 말입니다. 이 학당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자들이 사감 노릇하며 여기에 묶여 있는 거죠?"
그보다는, 마법사 사회? 전혀 모를 이야기에 눈매 미미하게 좁혀진다. 그는 조금 전에 박차고 일어났던 자리에 다시 앉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꽤 내부에 꽂힌 사진이 많았는지, 몇몇 사진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팔락이며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눈 앞에 보인 첫 사진은....
피칠갑 된 정장을 입은 채 연기가 피어오르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英사감의 사진입니다. 밑에 XXXX. XX.XX. 라 적혀있습니다. 날짜를 보아, 최소 그가 100년 이상은 산 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연기가 계속 움직이는 것을 보아, 마법사 사회의 사진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밑에 무어라 더 적혀있지만, 당신이 읽을 수 없는 문자입니다. 아마, 마법사 사회의 문자 같습니다.
다른 사진들도 봅니까?
[>본다] [>보지 않는다]
>>673 아회
' 어, 어... 우, 우유요..! '
후배가 우물우물 대답했습니다. 그는 아회의 말에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 그, 그... 저... '
우물대던 후배가 무언갈 말하려던 순간, 방석 위에서 한 번 앞구르기 하다가 까르르 웃는 목화의 삑삑 소리에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목화는 두 발로 당당하게 섰습니다.
별사탕!!!
이번에도 별사탕이 목화의 선택인 듯 합니다.
' ....... '
후배는 어딘가 안절부절합니다.
[>후배에게 말하라 한다] [>그냥 둔다]
>>678 유현
' ....... 말이나 못하면. '
英사감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지팡이 끝을 유현에게로 가져갔습니다.
' *에피스키 '
*작은 상처를 치료하는 주문.
상처가 아물어가는 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탁한 액체가 담긴 병을 하나 꺼내, 당신의 손에 부으려 했습니다.
' 쓰려도 참아라. 효과는 끝내주니. '
참아야 할 듯 합니다.
' 사감이란 자리는 균형을 잡는 존재이지. 그리고 일종의 거름망이 되어준다. 이 곳의 사감들은 그런 역할이야. 내 고향은.... 신탁을 전달해주는 역할이었지. 심부름꾼 그 자체나 다름 없다. '
英사감이 나직이 말했습니다. 그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 꽤 많은 의미가 담겨있지만, 나도 전부 알지는 못해. 뭐가 가장 듣고 싶나. 많이는 말 못해준다. 여기에서의 세월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
무엇을 물어보겠습니까?
[>마법사 사회의 신수들] [>마법사 사회의 사감들] [>사감이 거름망인 이유] [>그 외?]
살짝 열었는데도 튀어나오는 사진들에 대체 얼마나 쑤셔넣고 있었던 걸까 싶다. 얼결에 흐트러진 사진들 보다 한 장 집어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피투성이 영 사감이 특이한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저거 아버지도 갖고 있는 건데. 이 사진도 배경이 움직이는 걸 보면 저쪽 사진은 다 이런가 보다. 재밌네.
그런데 누가 이런 모습을 찍어준 거지? 왜 이런 사진을 보관하고 있는 거고? 날짜는 대강 이해하겠는데 이 글자는 모르겠다. 에잇. 다음 거 다음 거!
방구석, 테이블보가 깔린 원목 테이블 위 작은 찬장을 뒤적거리던 아회는 우유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앉은 자리가 아닌, 구석 자리의 오크 원목으로 된 테이블 위에는 찬장 말고도 여러가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회는 그 구석이 놓인 제법 큰 목함의 걸쇠를 열었다. 딱, 소리가 나며 냉기가 흐르는 목함 속에서 과실로 만든 음료가 든 병을 손가락이 스쳐 달그랑 소리가 나고, 잠시 뒤적거리다 차게 식은 우유가 든 병이 손에 딸려 나왔다. 손가락을 퉁기자 부적이 코르크 마개와 병에 달라붙고는, 당신이 있는 곳을 향해 둥실둥실 날아간다. 이내 마개가 홀로 열리더니 당신 앞에 놓인 잔에 우유를 따르고 다시금 스스로 마개를 닫는다. 이후 아회의 손에 쥐여 목함 속에 들어갔을 적, 아회는 당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목화 또한.
"……별사탕이라, 알겠습니다. 앞구르기를 하실 정도로 장성하셨으니 오늘은 세 개를 드리도록 하지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손님 대우를 형편없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걸까.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잘라 접시 위로 옮기고 나서야 아회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듣는 인간은 하나 뿐이고, 신수는 입이 무거운 존재요."
그러니 이야기 해도 괜찮다는 듯, 아회는 접시와 작은 병을 내려 놓으며 맞은 편에 앉았다. 밑면에 설탕이 알알이 박힌 가수저라(加須底羅) 두 조각과 까눌레가 접시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병에는 우유에 넣을 수 있게끔 꿀에 허니스틱이 담겨져 있었다. 아회는 목화를 위해 별사탕 두 개를 담은 손바닥만한 접시 또한 목화 앞에 놓아주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앨범을 더 뒤적였습니다. 사진 하나가 당신의 눈길을 끕니다. 흰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채 어딘가 퀭해 보이는 남성의 앞에 英사감으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 남학생이 지팡이를 빼며 웃는 사진입니다. 한복 차림인 것은 물론, 훨씬 더 키가 작고 앳된 모습으로 보아, 학생 시절의 英사감인 듯 합니다. 계속해서 지팡이를 앞으로 빼는 모습이 반복됩니다.
XXXX.XX.XX.이라 적힌 글자를 보니, 처음 본 사진보다 훨씬 과거에 찍힌 사진 같습니다. 사진 밑에 적힌 글귀가 보입니다. 첫 사진과 동일해 보이는 문자가 적힌 것을 보면, 아마 英사감의 본명인 듯 합니다.
쓰리더라도 눈 지지는 듯한 통증에 비한다면야. 빠르게 나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그는 들이부어지는 쓰라린 감각 가만히 참아내었다.
영 사감의 대답을 들으면 당연하게도 또다른 의문들 잇따라 떠오른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곧장 질문거리 입 밖에 내놓으려 했으나, 이어지는 말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많이는 말 못 해준다고. 가장 가치 있을 질문을 추려야 했다. 이제는 말끔한 손으로 탁자 위에 턱 괸 채 침묵한다. 느릿하게 두드리는 손짓 어김없이 따라붙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지나며 뚝 멈춘다. 그는 느슨하게 풀어졌던 자세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하면, 우선은 이 물음으로만 만족해야겠네요. 이 학당의 존재 의의가 뭐지요? 애당초 거름망 역을 주면서까지 비상한 존재들 이곳의 사감으로 앉혀 두어야 할 이유 하며, 하필 그 장소의 형태가 매년 수많은 학생들이 들락거리는 학당이어야 할 이유가 따로 있나요?"
황급히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흰 두루마기에 지친 얼굴 한 남성과 명백히 학생으로 보이는 소년 있었다. 이곳과는 다른 느낌의 한복 차림을 한 소년이 지팡이를 빼어드는 동작이 반복되는 사진을 제법 본 듯 하다. 그러다 앞서 본 피칠갑 정장 사진을 집어와 두 피사체를 번갈아 보았다. 정장 차림은 성인이라 지금과 위화감이 그다지 들지 않는데. 이 학생 모습은-
"뭐야 귀여워-"
여태 본 사진들과 현실의 영 사감과는 동떨어졌지만 그래도 같은 인물이구나 싶은 느낌 남은 것이 기묘하기도 하고. 지금 모습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명랑한 모습이 귀엽다. 옆에 있었으면 종일 품에 끼고 데리고 놀았을 것이다. 하- 상상하니까 뭔가 안고 잔뜩 쓰다듬고 싶어지네. 품이며 손이며 근질근질해-
두 사진에 동일하게 쓰여있는 글자는 읽지 못 하니 넘겼지만. 연달아 보니 궁금해지긴 한다. 아마도 이름 같은데. 그러고보니 무엇이었을까. 영 사감의 본명은.
그 사진들에 푹 빠져있던 탓일까.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 미처 깨닫지 못 하고 다시금 사진 뒤적였다. 하는 김에 튀어나간 것들 집어서 다시 넣기도 하고. 그 중 하나 집어서 뭐가 찍혔나 보았다.
당신은 한 장 더 보기로 했습니다. 사진이 무언가 이상합니다. 머리에 피가 흐르는 붕대를 감은 英사감이 어색하게 웃고 있습니다. 흙먼지 가득한 상태로 손을 휘젓는 걸 보아, 찍지 말라고 했지만 찍힌 것 같습니다. XXXX.XX.XX로 적힌 날짜를 보니, 처음 본 사진이 찍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같습니다.
....... !!! 이 글자는 읽을 수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이 때를 절대 잊지 마라.
"미안하다 할 필요는 없소. 내 타인에게 사과할 일 없듯 그쪽이 백 씨 가문의 자제라서 사과할 이유 없지."
나긋하게 얘기하며 목화 손으로 가볍게 간지럽힌다. 북부에 나쁜 사람만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라. 순수한 자. 나는 악인이란다. 네게 베푸는 것도 널 어린 나를 겹쳐보았던 욕심이자 위선이지. 속내의 얘기는 꺼내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아가, 가기 전에."
아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적 태웠다. 종이봉투 속으로 준비해준 간식이나 여타 사탕 같은 먹거리 순식간에 담기더니만 아회는 당신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 어떤 것도 그대 잘못이 아니야. 누군가 그대를 농질의 가문이라 몰아가며 욕한들 그 말에 휘둘릴 필요 없지. 내 그대에게 베푸는 온정이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희망고문이 될 수도 있겠으나 선택은 본인의 몫이오. 단, 하나는 기억하게. 주먹 하나면 평정되는 것이 적룡이야."
그러니 조심히 들어가거라. 다음에 또 보고. 상냥히 속삭여주며 배웅하려 했던가. 위선. 여전히 위선이다. ……너는 이 온정을 벗 삼아 악인의 삶 살지 않았으면 한다.
앞선 사진들이 흥미로웠기에 다음 것을 볼 때도 별 생각 없었다. 또 무슨 흥미로운 모습 담겨있나.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았다. 제 기분만큼 가벼운 정경은 아니었지만.
부상 당한 것이 분명한 영 사감과 흙먼지 날리는 주변. 그리고 아래 적힌 글씨. 저도 읽을 수 있는 글씨로 전쟁과 이 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헌데 전쟁은 무엇이며 이 때는 언제인가? 단박에 이 사진은 영 사감의 중요한 부분일 거란 감이 왔지만. 동시에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것도 있었다. 하여 문이 열리고 영 사감 들어와도 딱히 시치미 떼거나 하지 않고 사진을 든 채 인기척 나는 쪽 보았다.
"미안하실 것 없소. 나도 가만 있던 건 아니었으니."
사진첩 펼쳐놓은 그대로 그 사진 들고서 온화 말했다. 뭔가 안고 있는 영 사감이 제가 무엇 하고 있었는지 깨닫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시선 마주치면. 손가락 사이로 사진 들어 보이며 담담하게 물었다.
"이보시게. 영 사감님. 아까 했던 말 중에 가르칠 수 없는 시기 있었다 하셨지요? 그것이 여기 적힌 전쟁과 관련 있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은. 거기서 무엇 하신 거요?"
멋대로 보았다고 당장 쫓겨날 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금이 아니면 물을 기회 없을 것 같으니. 내쫓는대도 좀 버텨보잔 각오 속으로 하며 영 사감의 대답 기다렸다.
다른 사감이었으면 이런 유도리는 없었을 텐데. 전에도 든 생각이지만 영 사감은 학생에게 너무 무르다. 저번에도 굳이 기다렸다가 약을 주질 않나. 이번에도 그렇고. 그리고 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뭔가 생각나긴 했지만. 일단 영 사감이 왔으니 사진을 좀 더 보기로 한다. 제가 본 것을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라 하길래 새삼 놀란 눈으로 사진과 영 사감 번갈아본다. 그러니까 대충 열서넛 쯤이겠지? 우와- 이렇게 봐도 도저히 같은 사람 안 같다. 분명 닮았으니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이해는 되지만. 우와.
"요 쪼그만게 딱 내 취향인데. 아. 어. 아까 백호한테 늘 시달리는 사감이 리 사감이라 했잖소. 요 얼굴 퀭하니 그런갑다 했지. 거기 신수도 영 점잖지만은 않은가 보오."
킥킥 웃으며 사진 도로 내려놓는다. 가까이 온 영 사감이 사진첩 넘겨 다른 사진 보여주자 얼른 본다. 뭔가 수업인가? 약을 만드는 것 같았는데 아무리 봐도 연기 자욱해지는게 실패한 것 같다. 영 사감도 실수했다고 설명하길래 피식 웃었다.
"그렇구만- 뭐 누구나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는 하지요. 마지막이라. 그래도 그 분은 사감이 계속 기억할 테니 그것으로 괜찮지 않나 싶으이."
잊을 수 없음이 괴로움 될 때도 있지만. 추억 속 인물이라면 두고 두고 기억하는게 좋지 않겠는가. 더 보겠느냐 묻길래 냉큼 고개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래.
"여 다닐 적 벗은 없었소? 몰래 연심 품었던 이라던가- 한때 풋풋하게 놀았던 이라던가- 응?"
오. 다행히 대화의 흐름이 좋았는지 영 사감 웃으면서 서랍에서 무언가 꺼냈다. 다른 사집첩은 아니고. 기록장인가. 주술로 꽁꽁 닫아놓은 곳에서 꺼내는 것 보니 그만큼 소중하단 것이겠지. 괜히 호들갑 떨지 않고 얌전히 그 속에서 꺼낸 사진을 보았다. 조금 더 자란 영 사감과 한 여자아이. 더 가까이 오란 듯 팔을 당기는 모습에서 제가 하 사감 대할 때 생각이 나 살짝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얼굴이 근질거린달까. 그런 기분이라.
사진을 보며 영 사감의 얘기 듣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기척에 고개 돌려 시선으로 영 사감 쫓았다. 벽난로의 솥으로 간 영 사감이 마저 한 말은 그다지 좋지 못 한 첫사랑의 마무리였다. 허나 확인조차 못 해 본 감정이니 첫사랑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아마. 전쟁도 없고 형벌도 없었다면 이 둘은 다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친구로든. 연인으로든. 조용히 조심히 사진 내려놓으며 명랑하게 떠들었다.
"뵈는 것과 다르게 풋풋하셨구만. 그래. 이런 것 있으니 궁금하다 얘기해달라 조르지요. 음. 찔러보길 잘 했네."
가라앉은 목소리가 짤막하게 중얼거린 말은 구태여 사족 달지 않았다. 두 세상이 비슷하고 아니고를 생각할 수 있는 건 영 사감 뿐이니. 듣고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결국 여기도 저기도 같은 창제신의 손바닥 위이니. 다른 것 같아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하겠지. 달리 말하자면 어딜 가나 다 사람 사는 세상이기도 하고.
솥을 휘젓던 영 사감은 그 안에 든 약을 병에 나눠 담았다. 그 중 하나를 제 앞에 두며 가져가라길래 군말 없이 집어들었다. 약효는 이미 써봐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다 혀 차는 소리에 키득. 웃어버렸지만.
"거 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고생도 많소. 리 사감마냥 퀭해지지 말고 몸 좀 잘 챙기시구려. 죽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은 것 아니고 피로하지 않은 것도 아니잖소. 내 본의 아니게 그 고생에 한 술 얹는 기분이라. 눈밑 꺼먼 것 보면 괜히 죄송스러워진단 말이오."
주절주절. 그런 얘기 하며 약병 챙겨 주머니에 넣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할 말 있는데 쉬이 하지 못 하고 말 고르듯. 제 뺨 긁적이기도 하며 흠- 작게 소리 내다가 별 것 아닌 듯 툭 하니 말한다.
"사감 덕을 이것저것 많이 받기만 하니 이리 말 하기 좀 민망하지만은. 내 부탁 하나 있는데 듣기라도 해주실 수 있소?"
"아이고. 그런 부탁은 내 혼날 것이 뻔한데 하겠소? 뭐- 그이한테도 그렇고 다른 사감들한테 못 할 부탁이긴 하지. 신수한테는."
능청스레 받아치며 흐흐. 웃긴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더 고민하고 있었다. 선뜻 말해보라 한 것은 고마우나 제가 이 부탁을 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과한 참견이거나 혹은 괜한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리 생각하면 이제라도 말을 무를까 싶다가도. 말이나 해보자는 생각 불쑥 솟아든다.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 있으니 뭐라도 해서 나쁠게 있겠냐. 그래도 역시 쉽게 말 꺼낼 수 없어 서론만 슬그머니 더 늘어놓는다.
"그- 요전에 들었는데. 무 오라비. 그러니까 적룡에 무 아회라는 학생한테 뭔가 해주었다지요? 귀걸이를 만지면 학당에 곧장 돌아올 수 있게 된다 하던가. 사감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은. 무 오라비가 남이 주는 것을 선선히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 잘 알기에. 그렇기에 영 사감께 하는 부탁인데."
으음. 서론 늘여도 본론 꺼내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라. 미간 잠시 찡그린다. 앓는 소리도 작게 내었다가 에휴. 한숨 짧게 내쉬었다. 그러고서야 말했다.
"사감께서 담당도 아니고 무 오라비가 직접 말 한 것도 아니나. 그럼에도 내 속에 걸려 부탁 한 가지 올립시다. 무 아회. 그 학생이 졸업할 적까지만 가까이 지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굳이 찾아가고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학당 내에 보이거든 말 붙여주고. 이전 날처럼 계기가 있거든 같이 있어주거나. 그런 정도면 되오. 그저 조금 눈여겨보다가 손이 필요하다 싶으면 영 사감께서 빌려주시고 그러기만 하면은."
생각이 덜 정리된 듯 자꾸 늘어지려는 말 스스로 멈춰 잘랐다. 설명이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일단 부탁할 것은 꺼냈으니. 잠시 입 꾹 다물었다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이러한 부탁. 드려도 되올는지요. 영 사감님."
표정 관리하느라 대신 손에 힘 꾹 들어갔다. 저 모르게 자란 손톱이 살 파고들어 아릿했다.
담당인 황룡도 아닌 기숙사의 학생을 도와달라는 부탁. 솔직히 제 욕심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다. 영 사감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주었지만 아회는 어떨까. 괜한 참견이라며 혀 차는 것으로 끝나면 약과려나. 그렇지만 아무리 신경 안 쓰려 해도 그 날- 술김에 내비친 그 편린이 마음 쓰였다. 날카로운 검날보다 위험하고 무서운 그것. 언젠가 그것이 아회 끌고 갈까 봐 무섭다. 끌려가는 것에 아회가 저항하지 않을 것이 무서운 것이다. 그래보였으니까. 그 날 그 아회는.
"...나는. 나야 뭐 주변에 곧잘 기대니까는 괜찮으이. 내 신경 쓸 여력까지 무 오라비 주시게. 그래주시면야 내 감사하지."
저는 됐으니 남이나 신경 써 달라는 건 역시 어린애의 억지 같을까. 그래도 마음 만은 진심이니 부디 참고해 주었으면 한다. 그동안 마음 한 켠에 눌리던 것 가벼워져 편히 숨 내쉬곤. 신나게 돌아다니는 털뭉치를 저도 보았다. 키울거냐고 물으면 당연히-
"키워야지요! 요괴도 짐승도 아닌 것이 복슬복슬해뵈니 무 오라비네 털뭉치 같구만."
목화라 했던가. 고녀석처럼 지능이 있어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귀여우니 좋다. 저 먹으라고 내어줬던 떡 한 조각 집어 손에 들고서 퍼프스캔 향해 이리온 우쭈쭈쭈- 를 시도해본다. 순순히 오면 폭 안아서 떡조각을 먹여주었겠지만. 곧장 오지 않는 잔망을 부렸다면 직접 잡으러 가는 소란을 살짝 피웠겠지.
???: 우후후!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 ─, 친히- 대답해드리지요! (머리 샤라방방 넘기며 아가씨 오호호홋 포즈!) 아회: ……사람마다 각자의 선호하는 범주가 있다고들 한다오. (질색) 에유아회: 거, 작은 아회는 뭘 그렇게 꼬아서 말하나? 작가님 취향은 잘 알겠습니다 하면 될 것을. ???: 지금 이 ─을 페티쉬라 표한 거예요?! 정말이지, 무례한 사람들이야!
너희 계속 나 패면 저기 있는 아회처럼 광공의 늪으로 보내버릴 줄 알아-!!!! ((자아분열!!))
1. 180cm 아가씨 캐릭터성이 돋보이는데 주된 오라방 "우후후훗! 이 ─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군요? ……어라? 넋을 잃은 게 아니라 임페리오 마법에 당한 거잖아? 아-! 싫어, 싫어-!! 그냥 예뻐서 넋 잃은 거라고 해줘, 일 하기 싫단 말이야, 일어나─!" < 풀스윙 싸대기 갈김 "음- 으음- 음- 3시간 정도 생각했는데 말이죠? 역시 귀찮아... 아, 어디 나 대신 일해줄 오러 없나... 응? 벌써 퇴근 시간이라고요...? 내가 3시간 동안 고민하느라요? 아-! 후후훗! 이 ─, 드디어 시간 마법을 개발한 것이 분명해요, 그야말로 '완벽'!"
2. 197cm 호쾌하고 느긋한데 얘가 오러인지 범죄자인지 모를 다크히어로 캐릭터성이 주된(집착광공 역전세계) 무야옹 "형제, 오늘도 좋은 하루야, 그렇지? 아닐 리가 없지. 내 편한 휴식을 방해했는데 당연히 좋은 하루가 되어야지. 아니면 끝나고 주마등으로 오늘 하루까지 닿는 순간에 도달했을 때 비참하지 않겠나?" < 머리 짓밟고 이러고 있음 "이거 놓아! 형님 뵈러 가야 한단 말이야! 우리 집에! 토끼같은데! 동시에! 여우같은!! 형님이!! 기다리고 있는데 야근이 무슨 말이야!!! 우리 형님 혼자 주무시면 안 된다고 내가 안심을 못 한다고!!"
물론 그리 말하는 그는 별달리 불만까지는 갖지 않고 있었다. 이 세상 본래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법이니 고생길 탓하기는 무의미한 짓이다. 그나저나, 생존을 위해서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멀거니 눈만 깜빡인다. 그 비인간적인 자들이 보통의 사람이 떠올리는 '인간적인' 이유 때문은 아닐 테고…… 어떤 이유에서든 인간이 멸종하는 상황은 아직 바라지 않는 모양이지. 그것에도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 여기던 사실 하나에 의문을 갖게 되자 의심 역시 수없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사감들은 무엇을 거르는 거죠? 과거엔 그 거름망 역이라는 것 잘 해냈나 보지요?"
궁금한 점 없을 리가 있나. 그는 사감이 묻기도 전에 이미 또 질문을 마친 상태다. 유현은 어깨 가볍게 으쓱하고는 영 사감을 또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저 드물게 발생한 실수였거나, 농질이 저처럼 학당과는 무관한 이상성을 지닌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기회 있을 때 묻기로 했다. 치미가 말하길 저 역시 백룡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지. 만일 백룡에게 걸러지지 않은 더 큰 영향력을 받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비슷한 일 이미 몇 번을 체감해 보았기 때문이다. 영 사감처럼 불사도 아닌 다른 인간을 상대로 방금 전의 난동을 똑같이 부리고도 남았겠지.
상대가 바빠 보이니 유현은 더 붙잡지 않기로 했다. 저를 갈라 보아도 된다 허락해 준 것이며 바쁜 와중 내어준 시간만 해도 영 사감이 상당히 양보해 주었음을, 염치는 없지만 눈치는 있기에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유현은 잡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 사감을 구경하고만 있다.
오오~ 가장 먼저 금요일 아침은 푹 주무시기예요! 가능하다면의 이야기지만요. 캡틴은 늘 바쁘셨어....😭
저도 갱신이에요~ 으음.... AU를 앞두고 조금 갑작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요 며칠간 생각해 본 결과 지금이 이 말을 해야할 때인 것 같네요. 4인스레 전환으로 체제를 변경하기 전에도 잠깐 꺼냈던 말인데, 최근 저의 준비된 체력이 모두 소진된 관계로... 한동안은 활동을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졌어요.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여러분이나 어장 자체의 문제는 절대 아니고!!! 그냥 저 개인의 기분과 정신력 문제랍니다😉👍 제 기복이 어떨지 쉽게 예상하지 못해서 언제까지 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관계로 당분간은 구경만 하게 될 것 같은데, 혹시 괜찮을지... 조심스럽게 여쭈어봐요....🥺
집갱하면서... 잠시만요....😇 캡틴, 혹시 여기에서 설정 검사를 맡아도 될까요...? 웹박수 말고... 응... 그냥 그 친구 설정을 오픈하려구요.
>>981 유현주의 체력 이슈는 변경 이전에도 들었으니 이해할 수 있답니다. 어장도 체력이나 멘탈이 필요하니까요.😊 쉬는 동안 가끔 얼굴 비춰주시거나 인사만 해주셔도 저는 정말 기쁜 걸요. 단지 요즘 너무 무리하신 건 아닐까 걱정이 되네요...🥺 부디 푹 쉬시고 쌩쌩한 컨디션으로 돌아오시길 바라요!😇
《희곡 요 씨》 천하태평으로 소문난 '요' 가문 출신. 압도적인 머글친화 가문을 뛰어넘어 박애주의자 성향에 가까운 가문으로, 오죽했으면 요 씨 집안을 떠올린다면 지팡이 디자인을 비롯한 각종 예술에 정평이 났다는 장점 보다 '그 미친 인류애로 똘똘 뭉친 가문' 소리가 먼저 나올까.
선조는 이름 없는 예술가로, 세상을 떠돌다 우연찮게 흘러 들어간 머글 사회에서 그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고, 돌아왔을 적 노래 한 수 지어 올린 것이 가문의 기원. 후대들은 선조의 뜻 이어 소리와 악, 춤, 연극, 그리고 지팡이에 새기는 문양 등등 각종 예술 분야에서 활약하고 대대손손 이어지고 있다. 또한 예술 아래에서는 머글과 혼혈, 나아가 스큅과 순혈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도 지금까지 내려오니, 애초에 ~주의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주류. 그렇다고 여타 머글친화 가문과 달리 순혈주의자와 마찰이 생기진 않는다. 대신 저 가문…… 내가 집필하는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면 어떨까……? 같은 맑은 광기만 있어 초상권 침해가 좀... 아니 많이... 아니 과도할 뿐이지...
제 감각에 몸 맡겨 물아일체되는 성향 지대하니 자신들의 예술적 재능을 몸소 바치고 혼란 속에서도 소신을 직접 주장한 탓이다. 어쩌고 보면 혼란스러움이 정상 되어버린 가문. 때문에 여간 독특한 사람이 제법 많다 전해지니, 그 제멋대로의 재능이 어디로 튈지도 모른다. 어떤 자는 순혈주의자 앞에서 머글을 사랑하란 노래를 부르다 혀가 잘리고, 어떤 자는 머글과 순혈의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집필해 그 대본을 뿌리다 고소 당해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청구받은 적도 있다.
당장 삼 대 독자 여령을 보아도 그러하지 아니한가? 어떤 학교를 졸업했는지도 알기 어려운, 베일에 싸였던 존재가 혜성처럼 신문에 약 4p 분량의 머글 찬미 시를 집필하며 마법사 사회에 성공적으로 나도 요 씨 집안 사람이라 데뷔한 것은 물론이요, 무서운 속도로 공채 합격을 하더니 오러 일을 뛰질 않나, 마법약 재능 살려 이젠 제 이름 내걸고 마법약 부업까지 뛴다. 이름이 뭐더라, 모두의 안녕과 능률상승을 불러주는 마법의 가ㄹ…… ……이게 진짜 미쳤나?
《과거》 여러모로 대단한 녀석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독기 품고 살아온 자. 아는가? 유달리 마법약에 능한 것이 떠돌며 배운 것이라더라. 이는 한때 요 씨 집안을 시기하던 사용인 있으며 자신의 아이와 여령을 바꿔치기 하였으니, 덕분에 가림빛에 버려진 여령은 목숨 버릴 뻔하였으나 정신 오락가락하는 마법사 손에 거두어져 자랐더란다. 학교도 못 다니는 것은 물론이요 마법을 주먹구구식으로 배울 정도였다. 요 씨 집안의 사람이 우연히 마주하고 가주 똑 닮았다며, 거기다 돌아가신 마님께서 출산 후 아이에게 주었으나 잃어버렸던 목걸이 차고 있는 아이라며 데려오기 전까지는 뒷골목 생활을 전전해왔고, 그 덕에 눈치와 위기 감지하는 직감은 대단하였다. 머리도 잘 돌아가는 편이긴 했으나 주도면밀하고 영리한 녀석은 아니었다. 자존심 버릴 줄 알지만 자존감은 지대하게 높았고, 험지 깊은 곳에서 굶주리던 과거를 기억하여 독하기는 또 독했다. 한때 빼앗긴 삶이 있다 보니 권력욕이 대단하여 더 위로 오르고 싶어했다. 정확히는 권력을 쥐는 순간의 과정을 즐겼다. 그 사이에서 콩고물 떨어져 영감 얻으면 된다는 모습에 요 씨 집안 가주가 그리도 총애하더라. 당연할 법도 하다! 잃어버린 아이인데다 필히 걸작을 쓸 녀석이니.
다만 여령은 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결론 도달했으니 사용인이 한 순혈주의자 가문의 사주를 받았음을 알았고, 그 가문을 찾아 잡기 전까지는 내 절대 이 화를 풀지 않으리라 다짐했더란다. 그리하여 오러 되었다. …기실 그것도 있다마는 오러 되면 사건사고 현장에서 영감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일념 하나로 박봉 인권 최하위 길을 걷는 것 고사하는 것이겠지…….
일단 동화학원의 위키 설정을 읽어보고 짜본 거긴 한데, 원작 기준으로는 녹턴 앨리의 뒷골목에서 자란 녀석이 알고 보니 공작가의 금지옥엽…… 같은 로판 느낌의 아이겠어요!🤔 요지는...
1. 마법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오러가 될 수 있는지 2. 판매?하?는 마법약이 좀 야매()인데 이걸로 혹시 문제가 되진 않는지...(?) 3. ……이런 애가 엮일만한 아이가 있을지...?
1. 마법 재능이 있는 학생들은 일단 마법 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학원에 따라 다르지만, 요 씨의 경우엔 작은 학원에서 졸업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아니면, 동화학원이라 친다면....... 이건, 이건 청궁 감입니다! 참고로 학원의 사감들도 학원 졸업생이긴 해요.
그게 아주 먼~~~~과거여서 그렇지.. ':3c
2. 걸리지만 않으면 만사 OK이니, 가명이나 다른 이의 신분을 훔치는 걸 추천드려요☆
3. 폭식, 탐욕, 나태, 교만... 정도겠네요! 탐욕은 무엇이든ㅡ특히, 안구ㅡ 가지려고 하고 있고 나태는 귀찮으니까 그냥 임페리오로 끝내버리자☆ 이고 교만은, 천상천하유아독존 같은 느낌이니까요. 약간 폭군 스타일이 더 가미 된 궁기라고 해야하나. .:3c 폭식은.. 예, 그냥 날뛰는 식인살인마이니까요. 원하시는 녀석으로 골라잡아주시길☆
황룡 들어갈 적엔 빈손이었는데. 나올 땐 왠 노랑한 털뭉치 하나 들고 나왔다. 허어. 이것 참. 예정에 없던 반려동물 품에 안고 피식 웃었다. 준다니까 냉큼 받아오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제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싶다. 뭘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잘 먹고 잘 자고- 그러기만 해라 욘석아-"
팔로 받치듯 안은 퍼프스캔 쓰다듬으니 제 기분 아는지 모르는지 삑삑 울어댄다. 좋다는 건가 싫다는 건가. 아무튼 일단 이름부터 지어줘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제 방 있는 적룡 향해 걷는데 저멀리서 세 아이 팔랑팔랑 뛰어온다. 푸른 두루마기 하나와 검은 두루마기 둘이다. 저보다 머리 하나 작은 그 아이들은 오자마자 세 방향에서 저를 끌어안는 통에 퍼프스캔이 눌리지 않게 한 손에 들고 머리 위로 올려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달린 아이들- 제 동생들은 마냥 즐겁게 떠들어댔다.
"언니! 언니! 방에 갔는데 없어서 찾으러 갈려고 했어! 어디갔다 이제 와!" "가긴 어딜 가- 잠깐 산책했지. 어이쿠. 이 녀석들. 흔들지 말어. 넘어진다." "누이 혼자만 놀고 치사해- 우리랑도 놀아줘요-" "언니 혼자 재밌는 거 했지 그치- 어? 그거 뭐야? 뭐야 응?" "아이고- 떨어지면. 나 좀 놔주면 보여주마. 도망 안 갈 테니까." "약속?" "약속. 그래 약속-" "와아-"
흑룡 쌍둥이 중 하나가 제 머리 위로 올린 퍼프스캔을 눈치 채고 관심 갖길래 저 놔주면 보여준다 하니 냉큼 떨어진다. 나머지 둘도 물러나서 겨우 해방되자 휴- 한숨 내쉬며 샛노란 퍼프스캔 내려 보여주었다. 단박에 쌍둥이들 입에서 와아! 탄성 나오고. 청룡의 예온도 안 그래도 큰 눈 더 크게 뜨고 신기해했다. 셋 다 눈치 보아하니 데리고 놀고 싶어하는 것 같아 정원 한 켠으로 가서 셋 사이에 내려놓아 주었다. 이제 잠시간 쌍둥이들과 놀아주게 될 퍼프스캔을 뒤로 하고. 온화 고개 돌려 예온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묻고 싶던 말 꺼냈다.
"헌데. 예 누이야. 네들 뭐 하다가 이리 오고 있었누? 적룡 방향이잖냐." "응? 웅? 아! 수일 오라버니 방에서 놀았어!" "그려? 그런데 왜 벌써 가고." "수일 오라버니가 외출한데서! 집에 간대!" "흐음. 집에? 뭣허러?" "새 옷 가지러 간댔어! 올 때 간식 갖다준대! 할매표 간식!"
이 셋이 수일의 방 가면 늘 잘 시간 다 되어서야 나오곤 하는데. 아직 저녁 무렵일 쯤 나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 일이란게 집에 가는 것이라. 예온 말로는 새 옷 가지러 간다 했으나 필시 그것 아니겠지. 온화 허공 향해 피식 웃었다.
황룡에 가기 전. 제 방에서 하 사감 배웅할 적. 복도 끝머리에서 힐끗 보였다 사라진 인영 하나를 제가 모를 리가 있을까.
도화 학당 정원에서 아이 넷 모여 옹기종기 놀고 있을 무렵. 수일은 홀로 본가에 도착했다. 어딘가 불편한 낯빛의 수일 잠시 대문 앞에서 들어가길 망설였다. 허나 이내 어쩌겠냐는 듯 한숨 내쉬고 그 안으로 걸음 내디뎠다.
해가 저물어감에 따라 분주히 돌아다니는 가문원들이 번갈아 수일에게 인사 건넸다. 아이고 도령 오셨소. 저녁은 자셨나. 고새 키가 큰 것 같으이. 하하호호 웃으며 말 걸어오는 가문원들과 한 명 한 명 말 나누고 나면 그가 왜 여기 왔는지 잠시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을 지나쳐 조용한 복도에 한 발만 내디뎌도. 불쑥 치솟는 생각에 잠깐 풀렸던 얼굴 다시 굳었지만.
"......"
아버지이자 가주님의 집무실로 가는 복도는 이 저택에서 가장 조용했다. 어딜 가나 사람 있고. 마당이며 후원에 아이들 뛰어다니고.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찬 저택인데. 이 긴 복도만 유일하게 사시사철 낮밤 없이 조용했다. 절로 숨 죽이게 만드는 이곳을 거침 없이 걸어갈 줄 아는 인물은 그가 아는 사람 중에 온화가 유일했다. 숨 막히는 분위기 따위 엿 먹으라는 듯 위풍당당하게 걸어가 집무실 문을 열어젖히는 모습은 온화 외엔 본 적 없었다. 그래. 이 문. 안과 밖 나누는 이 구조물이 언제부터인가 가장 두려운 존재 되어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니지. 그 날부터였지. 그 날부터-
"후..."
똑똑.
"들어오너라."
숨 한 번 고르고 문 두드려 기척 내니 문 안에서 묵직한 목소리 돌아왔다. 회답 없었다면 돌아서 나가버렸을 것을. 회답 있었으니 도망갈 수도 없게 되었다. 수일 다시금 숨 고르며 천천히 문 열었다. 두툼한 나무문 열면 가장 먼저 먹향 물씬 풍겨나오고. 다음은 항상 흐르는 위압적인 공기가 수일 맞이했다.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 재촉해 겨우 그 안으로 한 걸음 내딛고 등 뒤로 문 닫으면 저도 모르게 등줄기로 식은 땀 한 줄 흘렀다. 그렇다 해도. 숨 쉬는 것초자 힘들어도. 들어온 이상 말을 해야 했으니. 천천히 허리 숙였다 들고 자리에 앉아계신 아버지- 류 가의 가주 향해 예를 올린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가서 앉아 있거라. 이것만 보고 가마." "...예."
서둘러 제 용무만 고하고 물러나고픈 마음 굴뚝 같으나. 앉으라 하였으니 앉아야만 했다. 삐걱삐걱 굳은 듯한 다리 채근하여 저 안쪽 마련된 자리 하나에 앉으면 가시밭에 앉은 듯한 불안과 좌석의 기묘한 편안함으로 한층 속 복잡해진다. 다른 생각 할 틈도 없이 어찌저찌 제 속 달래고 있으면 드륵. 의자 밀리는 소리 나고. 곧 맞은편에 류 가의 가주 와서 앉는다. 그 즈음 겨우 속 추스른 수일이 목례 가볍게 하자 가주- 온일은 되었다며 한 손 들어보였다. 그리고 손수 찻잔에 차 따라 수일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요전날 일 치렀다 하더니. 몸은 괜찮으냐." "예. 괜, 찮습니다. 사감께서 잘 보아주십니다." "그러냐? 다행이구나. 네 어릴 적부터 몸 여렸지 않니. 이제는 쉬이 탈 나지 않는 듯 하여 내 걱정 제법 덜어주는구나." "가주님께서 잘 챙겨주신 덕입니다." "허허. 인석. 이젠 예법도 빠릿하고. 잘 컸다. 내 아주 뿌듯해." "아. 하하..."
...예법이 빠릿하다. 그 말에 수일 과거 떠올린다. 한창 집안 규율이며 예절이며 배울 적. 유달리 엄하게 지도하던 온일을. 다른 건 몰라도 가문 내 고유한 것을 배울 때는 친자식들조차 엄히 다루셨다.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었다. 틀리거나 배움이 늦으면 맞기도 했던 그 기억은 같은 배움을 받았던 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온화조차 예법 만큼은 지켰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저런. 차가 식겠다. 무엇 하니." "아. 예."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수일 잠시 든 생각에서 깨어나 얼른 대답했다. 그리고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들어 소리 없이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제법 긴장이 풀려 속까지 차분해진다. 그러나 그 차분한 속 한켠은 알고 있었다. 온일이 그에게 이리 대하는 것은 들어야 할 것을 수월히 듣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걸. 그래. 결국 그는 오늘 이 자리에 그에게 주어진 업을 수행하고자 왔을 뿐이니. 그 사실 새로이 떠올리며. 한 모금 더 마시고 찻잔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히 자세 고쳐 앉고 나면 온일에게서 필히 답해야 할 질문 들어온다.
"그래- 내 너에게 저번 서신 보낸 후로 시간 그리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허나 그 사이에도 학당은 이 일 저 일로 시끄러웠으며. 이번엔 사감들까지 대대적으로 움직였다지?" "그렇습니다." "허면 필시 무언가 변하였거나. 혹은 보이게 된 것 있겠구나." "이번... 소란이 너무 큰 규모인지라. 다 파악하진 못 하였습니다." "허허. 그럴 법 하지. 너조차 휘말렸다니 참으로 안타까워. 그러나 늘상 혼란 뒤에 드러나는 것도 있는 법이다." "......" "네 몸 성하니 오늘 한낮 정도는 시간 있었겠지. 그래. 어떠했니?"
온일이 말 빙빙 돌려 하고 있었지만. 실상 묻는 것 정해져 있었다. 일전의 서신- 온화에게 벌을 내렸으니 그것 잘 수행하는지 지켜볼 것. 그리고 온화의 반려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 어느 것도 쉬이 답할 수 없었다. 보고. 듣고. 제 머리로 생각한 것도 있으나. 차마 이번 만큼은. 이번만은 생각 그대로 내었다간 아니될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온일을 거스를 수도 없으니.
입 안 한 번 꾹 깨문 수일 숨 내리누르며 답을 꺼내었다.
"오늘 오전. 이른 시간부터 쭉 살피었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보지 못 했습니다. 보고 듣기로 상당한 부상을 입어 사감이 별도로 살피기까지 하였답니다." "허어. 그 사감이 그리 움직였다라. 적룡만 그러했느냐?" "아닙니다. 타 기숙사. 특히 황룡의 사감께서는 황룡을 나와 모든 학생들의 치료를 돕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 네 나올 때까지 방에 있더냐?" "제가 나오기 얼마 전 즈음 식사를 위해 나가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그래. 누구와 가더냐." "혼자였습니다." "옆에 누구도 없이?" "예."
짧은 문답이었지만 수일에겐 영겁과 같은 문답이었다. 실수한 것 없겠지. 제대로 대답한 것이겠지. 머릿속 혼란해지는 것 드러내지 않으려. 자꾸만 온일의 안색 살피려 하는 것 애써 막아야 했다. 그런 수일의 노력 무색하지 않게. 온일로부터 은혜로운 말 돌아왔다.
"그래!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조금 더 시일 두고 볼 것을 내 괜히 재촉했구나. 고생했다." "예. 감사합니다." "음. 그럼 나가보거라. 온 김에 네 어미에게 들렀다 가렴. 한 번 보고 싶다 하더구나." "예. 물러가보겠습니다." "오냐."
마지막까지 실수 없이 예를 취한 수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일 다시 잡는 말 없었다.
등 뒤로 문 닫고. 복도에 발 디뎌 몇 걸음 떼자마자 큰 숨 터지는 것 참을 수 없었다. 흐하! 내내 숨 참고 있다 내쉰 것처럼 숨 내뱉자 머리가 아찔하기까지 하다. 저 안에 있던 시간 끽해야 차 한 잔 마실 시간이었다. 그마저도 찻잔 미처 식기도 전에 다시 집무실 문 열고 나왔다. 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더 이 짓을 해야 할까. 아찔함과 동시에 드는 자괴감에 번지는 쓴웃음 감출 수 없었다.
조용한 복도 채 벗어나기 전에 그런 생각 든다. 차라리 끝내버린다면. 도망쳐버린다면 속이라도 편할까.
"...그럴 리가."
어리석은 자문자답이었다. 이 기분은. 이 감정은 죽어도 풀리지 않으리라. 마른 세수 슥 내린 수일 다시 걸음 떼어 그의 어머니 머무르는 안방으로 향했다.
저녁 훌쩍 지나 어둑한 밤. 수일은 자고 가지 그러냐는 어머니의 권유 뒤로 한 채 본가 나섰다. 지금부터 가면 통금 전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 새 옷과 동생들 줄 간식 꾸러미 들고 조용해진 마당 가로질렀다. 배웅도 인사도 없는 이 시간이 저녁 무렵 왔을 때보다는 훨씬 편해서. 아무 것도 모를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 들었다. 그 마음 만큼 소리 죽여 대문 밖으로 나왔는데. 문 밖에 누군가 있었다. 그늘진 인영에 수일 흠칫 놀랐지만 이내 그 누구 알아보고 미간 찡그렸다.
"...게서 뭐 하쇼. 형님." "음. 아끼는 아우가 집에 와선 나도 안 보고 가려 하니. 내 친히 배웅 나왔단다." "배웅은 무슨. 됐으요. 들어가소." "에이. 사양할 것 없단다. 저 앞까지만 같이 가자." "됐다니ㄲ" "잔말 말고 가자꾸나. 수일아. 네 마음에 담은 말 나 아니면 누구에게 하겠니?"
밖에서 기다리던 이는 수일과 온화의 손윗 남매인 일향이었다. 가벼운 외출복 차림의 일향은 한사코 배웅 사양하는 수일의 심정 어떠한지 다 안다는 듯이 말하고 한 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달리 피할 수도 없는 학당 가는 외길이라. 수일은 싫어도 그 뒤를 쫓을 수 밖에 없었다. 캄캄한 골목길. 가벼운 걸음 하나와 무거운 걸음 하나 나란히 이어졌다.
가문의 저택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지고. 앞뒤로 나뉘었던 걸음 나란히 이어질 즈음. 일향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문 열었다.
"네 졸업 앞두고 학당 과히 시끄럽더구나. 너는 괜찮니?" "보면 모르나. 말짱하지. 온화 그 기지배만 어디 돌밭에 구르나 넝마 됐드만." "아하하. 화야는 늘 그랬지. 응. 기억하니? 너도 나도 여즉 어릴 적에. 공놀이 하다 옆으로 튄 공에 제 몸 던졌잖니. 거기 있던 애기한테 공 맞는다고. 자빠져서 손바닥 죄 까져놓고 울지도 않았지-" "...그랬나? 난 기억 안 나는데." "그래? 음. 그럴 수도 있지. 어릴 때는 다 잊는 법이지 않니."
남들 들었다면 그저 형제간에 추억 얘기 하는 듯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일향이 그리 말했더라도. 수일에겐 그리 들리지 못 했다. 구태여 그에게 어릴 적 얘기 하는 것은. 아버지에 이어 그를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그 얘기에 온화가 끼어있다면 더더욱. 하여 불편한 기색 감추지 않고 드러내니 나란히 걷던 일향 그저 웃을 뿐이었다.
"후후후. 옛날 얘기가 그리도 싫으니. 그 때에나 지금에나 달라진 것은 없을 텐데." "형이나 그렇겠지! 나는... 나는 아닌 거 알잖아."
인적 없이 적막한 거리에 일순 수일의 목소리 솟구친다. 동시에 걸음도 멈춰서. 일향 또한 멈춰서 수일 돌아보았다.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떨리는 손 감추려는 듯 품에 안은 짐 꽉 쥔 수일이 억누른 목소리로 말 이었다.
"형은. 한 번도 안 해봤으니 내 기분 알 리가 없잖아. 내 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하나하나 아버지... 가주님께 고해야 하는 내 심정을. 나라고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온화는 나를 미워하고..."
수일 목소리 잔잔하게 떨려 곧 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꾹 눌러 참는 모습은 온화와 많이 닮아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일향 엷게 미소 지었다. 그런 일향 노려보는 수일의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담담한 목소리가 말했다.
"화야가 너를 미워하는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니란다. 음. 미워하는 것도 아니지. 가끔 그 아이가 표현이 격해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네 생각만큼 널 그리 여기지 않아." "그러면 왜 나한테만 그렇게 화를 내는데. 저번에도 내 멱살 잡고 윽박질렀다고. 지가 그렇게 된게 나 때문이라고. 내 탓이라고..." "그걸 듣고도 감이 잡히지 않니? 화야가 아는 것은 네가 아버지께 화야의 일을 고하는 것 밖에 모를 텐데? 그게 화야가 그렇게 된 이유는 아니잖니." "그러니까 그게... 어...? 형. 형님. 설마..." "둔하긴. 화야는 이제 다 알아. 다 안단다. 화야 자신에 대한 것. 그리고 그 날에 있었던 사실."
평소와 같이 평온한 일향의 목소리가 전해준 말은 수일에게 크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온화가 다 안다면. 이제 다 알아버렸다면. 그러면...
"그러... 그러면. 그럼..." "그렇다 해도 화야는 널 미워하지 않아. 단지 조금 실망했고. 슬플 뿐이지." "다 알면서 미워하지 않을 리가..." "미워하지 않아. 너도 알잖니. 화야는 그런 아이라는 걸."
일향이 손 들어 수일의 어깨 가볍게 두드렸다. 다정한 손길은 잠시 그 어깨 감싸안고 놓아주었다. 수일 혼자 생각할 시간 주려는 듯. 몸 돌려 가문 쪽으로 향한 일향 작게 중얼거렸다.
"화야는 늘 기다리고 있단다. 그렇지만 너무 늦기 전에 마주하렴. 너도 알다시피. 그 아이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 "그럼 나는 여기서 돌아가마. 곧 통금이니 얼른 가야지? 가서 푹 쉬어. 수일아."
다정하기 때문에 때로는 매정한 형제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등 뒤로 멀어지는 발소리 들으며 수일 제법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찌나 한참을 서 있었던지. 결국 통금 지나 비척비척 기숙사에 들어와 방으로 가는 모습 있었더란다.
지금으로부터 여섯 해 전. 온화 열 두살이며 수일 열 세살일 적. 가문이 뒤집어지는 폭주 사건 있었다. 다수의 아이들과 가문원 사망하고 온화는 나을 수 없는 광증 발현하게 된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알려지기로는 폭주한 가문원 셋이 아이들 자는 방 덮쳤다 알려졌지만. 실은 숨겨진 사실 하나 있었다. 그건 아이들 방에 걸어둔 봉인 누군가가 풀어놓았기에 폭주한 가문원들이 들이닥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 누가 폭주할 지 모르는 류 가문이기에 어린 아이들 자는 방은 특히 신경 써서 봉인을 걸어두곤 했다. 그러나 그 날은 그것 없었다. 그것만 있었다면 그런 참혹한 일은 없었을 텐데. 그 봉인만 성했더라면.
그 날 밤. 자다 깬 수일이 뒷간에 간다며 봉해둔 문을 열어놓고. 그대로 두고 가지만 않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