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따지고보면, 내 고향을 위해 학생들을 그 사회로 보내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말이지. 나름 만족은 하는 중이다. ...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던 적이 있었으니. 아쉽게도 [내가 살던 시기]는 가르칠 수 없었던 시대였던지라. '
英사감이 아득한 과거를 더듬다가 웃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더 나을수도 있긴 합니다.
그가 자리를 비웠을 적, 책상엔 아주 오래 되어보이는 흑백 사진이 액자에 끼워진 걸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속 남성은 긴장한 표정으로 정장 매무새를 정리하다, 누군가를 보듯 고개만 들어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이 반복됩니다. 英사감과 닮았으니,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책꽂이에는 당신이 읽기 어려운 글자로 적힌 책들이 주르륵 꽂힌 게 보입니다. 아마, 마법사 사회의 문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화단에는 주의, 귀마개 없이 절대로 만지지 말 것. 이라는 팻말과 함께 그 옆으로 몇몇 식물들의 이파리가 보입니다. 이건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오는 콩, 밈뷸러스 밈뷸토니아. 절대 건들지 말 것., 보름초, 마디풀, 부보투버, 아가미 풀... 처음 보는 풀 이름들입니다.
벽난로엔 아마 그가 말했던 [용액]이 냄비 안에서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게 보입니다.
당신은 벽난로 쪽으로 향했습니다. 애쉬와인더라 불린 뱀이 불 안에서 당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천천히 애쉬와인더의 상체가 꼿꼿하게 섰습니다. 불꽃으로 된 혀를 낼름거리던 뱀은 똬리를 풀어, 자신이 소중하게 품고 있던 알 몇 개를 당신에게 보여줬습니다. 충분히 구경했겠다 싶었는지 다시 똬리를 틀어서 알들을 모두 감췄습니다.
무엇을 합니까?
[>책장을 살핀다] [>책상을 살핀다] [>의자에 앉아 얌전히 기다린다]
>>636 아회
똑똑똑똑
말 없이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다, 당신의 물음에 잠깐 모든 행동이 멈췄습니다. 문 밖에서 작은 삑, 삑 소리가 들립니다.
다급한 노크 소리. 그때와는 사뭇 다른 소리였기 때문일까, 아회는 플루 가루를 찾던 손을 멈추더니 문을 향해 시선을 꽂았다. 삑, 삑, 작은 소리가 예민한 귀에 꽂히자 아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소리는 목화의 소리인데……. 잠시 생각하다가도, 문을 두드린 것으로 추정 되는 사람의 외침에 손을 더듬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금방 열어드릴 터이니."
지팡이를 쥔 아회는 걸음을 저벅저벅 옮겼다. 문고리에 손을 얹고, 이내 문을 조심히 열었다. 목화는 작고 조그마한 존재니 문에 쓸릴까 싶어 속도가 느렸다.
분명 병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던 조그마한 털뭉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째 조금 큰 것 같다. 아회는 시선을 맞춰주듯 무릎을 굽혀 손을 뻗고는, 손바닥 위에 올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가볍게 톡톡 움직였다. 올리면 얼마나 컸는지 확인할 수 있겠지. 동시에 목화의 숨바꼭질 이야기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조그마한 존재 덕분에 영이가 꽤 골탕을 먹겠구나. 뭐,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이기셨습니까? 참으로 장합니다, 목화. 허기가 지지는 않습니까?"
조그마한 존재가 손바닥에 올라오면 가벼이 쓰다듬어주려 했을 터이며, 고개를 살짝 들어 문을 대신 두드려 준 학생을 향해 잔잔히 감사를 표했다. 어린 학생인 것 같은데. 아직 성격 뒤틀린 기미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고맙소. 하마터면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모를 뻔했구료…… 그냥 가지 말고, 다과라도 몇 개 받고 가시게. 마침 좋은 양과자가 있다오."
제법 상냥하게 입술 달싹이고 잔잔히 미소 지었다. 아마 소문처럼 남에게 어지간하면 시비 걸지 않는 잿더미 선배라는 이름값 여실하였을 터이지.
몰래 들어온 고양이마냥 방 안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니. 참으로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서 본 건 작은 액자와 그림- 인 줄 알았으나. 움직이는 사진이었다. 간혹 도술로 족자 속 그림이 움직이는 건 보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오래되어 보이는 사진 속 인물은 아마도 영 사감이겠지. 나이가 멈추기 전이거나 그보다 젊을 때일까? 빤히 들여다보다 책장으로 넘어간다. 무슨 책이 있나- 슥 둘러본 결과. 제가 볼 수 있는 건 없단 결론이 난다. 그야 모르는 글자 투성이인데 뭘 어쩔까! 고개 절레절레 흔들고 화단 보러 갔다.
"어... 밈뷰으... 밈뷸루습. 에잇."
화단 속에 신기한 이름이 있길래 소리 내어 읽을려다 말았다. 발음 뭐 이렇게 어려워! 게다가 다 처음 보는 거다. 이것들도 넘어올 때 같이 가져온 건가? 저 쪽의 약을 만들 때 쓰는 건가. 호기심 슬쩍 가져보고 지나간다.
그러고보니 뭔가 추출해야 한댔는데. 그게 저 냄비 속에 있는 건가 보다. 부글대는 냄비도 힐끔 보고 그 아래 불에 있을 은빛 뱀 구경을 한다. 아까는 제대로 못 봤는데 지금은 저 귀여운 녀석이랑 눈도 마주쳤다! 지능이 꽤 있는 녀석인가 봐.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은빛 뱀- 애쉬와인더가 알을 보여주었다. 동그란 똬리 속 옹기종기 모인 알들도 귀엽다. 기쁜 마음으로 마음껏 보고 나니 다시 똬리를 틀길래.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여줘서 고마워. 귀엽고 예쁜 알이네. 너도 그렇고."
불 속만 아니었으면 저 매끈한 비늘을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아쉽다. 이제 애쉬와인더가 편안히 알 품도록 벽난로 앞을 떠나 방 안을 휘젓- 지는 않고 다시 구경에 나선다. 책장은 모르는 글자 투성이라 재미 없고. 책상이나 더 봐볼까. 하여 다시 책상으로 가 다른 사진은 없는지 뭔가 제가 읽을 만한 건 있는지 기웃거려 보았다.
무게감이 느껴진다. 제법 묵직하고 따끈따끈하니, 자신이 만약 조금 더 감정을 더 잘 느끼고,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면 금방이라도 뺨을 파묻고 비비적댔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던지라, 아회는 목화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줄 수밖에 없었다. ……더 정을 주면 소중해지니까.
"……오는 자도, 가는 자도 막지 않소."
덤덤하게 얘기하며 학생이 들어올 수 있게 문 주변을 지켰다.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회는 천천히 문을 닫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피 묻은 옷은 이미 벽난로 속에서 타들어가 잿더미가 되어버린지 오래고, 방은 도술 덕분에 깨끗하니.
"……무 아회라고 하외다. 올해로 6학년이니, 편히 선배나 아회라 불러주시오."
백 씨라.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범죄자 배출한 두 집안의 만남은 제법 우스울 터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둘 다 적룡인데 잘 맞는 부분 있겠지. 아회는 부드러운 방석 위에 목화가 내려갈 수 있도록 돕고는, 당신에게 편히 앉으라는 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짓을 하자 부적이 불타며 무언가 테이블 위로 안착했다. 찻잔과 접시였다.
"커피는 마실 수 있나? 마시지 못한다면 우유와 차 중 어떤 것이 좋겠는지……."
지팡이를 짚고 여유로이 걸어 찬장에 다가서더니, 찬장을 뒤적거리며 목화에게도 덤덤하게 물었다. 아마 이쯤 두었을 터인데…….
성급했다. 드러내지 않고자 했던 모습을 너무도 무방비하게 보이고 말았다. 모순적이게도 그는, 언제나 무감했기에 드물게 동한 감정에 더없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의 과도한 충동은 발화를 지나자 급속하게 식어 버렸고, 유현은 냉정을 되찾았다. 그 다음으로 행한 것은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좋을지에 관한 셈이었다. ……역시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양 몰염치하게 구는 편이 가장 낫겠지. 그는 비척비척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눈길에 묻어나는 미묘한 집념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기회만 생긴다면 방금 같은 짓 언제고 다시 시도하리라. 유현은 습관처럼 머리칼 정리하려다 뒤늦게 제 몰골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지하고 나서야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통증 몰려든다. 그는 영 사감을 향해 곳곳에 유리 박히고 찢어진 손 느긋하게 흔들어 보였다.
"아, 언제 이런 상처가. 과경엔 다친 곳 없었는데 방금 생겼군요. 제압이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치료해 주시겠어요?"
사실상 자해를 한 주제에 뻔뻔하기는. 거짓부렁 무척 자연스럽다.
"사감이라는 자리는 얼마나 중요한 역이기에 그 자체로 계약의 조건이 되나요? 그러고 보면 나머지 사감들도 모두 범상한 존재는 아닌 듯한데 말입니다. 이 학당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자들이 사감 노릇하며 여기에 묶여 있는 거죠?"
그보다는, 마법사 사회? 전혀 모를 이야기에 눈매 미미하게 좁혀진다. 그는 조금 전에 박차고 일어났던 자리에 다시 앉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