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개운해지니 뒤늦게 제 얼굴 볼만하겠구나 싶었다. 침대 머리맡에 둔 휴지 슬쩍 집어다 엉망인 얼굴 슥슥 정리한다. 부은 건 어쩔 수 없겠지만은. 그러고선 제 옷 쥔 손 꼼지락거리며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한 명 있었다고.
우리- 라는 건 신수를 말하는 걸까. 사감을 말하는 걸까. 알고 있으니 알려달라는 말은 어쩐지 모순적이다. 알고 있는데 또 무엇을 알려고 한 걸까. 다 알고 있으면서 더 알아내려 하고. 그래야만 했을 사람. 단 한 명. 문득 머릿속에 검은 호랑이 가면 스쳤다. 딱 한 번 마주쳤었지만 그 한 번으로 여태 안 잊은게 용하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의미겠지. 그 꺼림칙함이.
"흐음. 그것도 금기라면 궁금해하진 않을게요. 그러면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말해줄 수 있어요?"
금기의 내용은 알아본들 제가 뭔가 할 수 있지도 않고 말한게 하는 것으로 또 아프게 할 테니. 그건 됐으니 10여년 전에 그를 아프게 했을 한 명이 누구냐고 물었다. 설마 그것도 금기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뭐- 직접 찾아서. 응. 어차피 결과는 똑같다.
질문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아. 이건 요구에 가까웠으니 질문은 아닐까. 계속 손 쥐락펴락 가만 두질 못 하던 온화 다시금 그의 옷깃 슬며시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 음. 그거 보여줄 수 있어요? 그거. 금기 때문에 생긴 상처."
피조차 쉬이 멎지 않는 상처가 신경 쓰여서 였을지. 아니면 다른 의도 있을지. 조심스럽게 묻는 모습은 의중 두루뭉술하게 보였을 것이다. 딱 한 번 묻고 가만히 그의 눈치 살피는 것도 그렇고.
알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차를 마시는 평균적인 시간 동안 잡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도와줄 사람을 찾고 매달리기 보다는 차라리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그러지 못했다. 도망쳐야 한다 생각했다. 그렇게 도망칠 수만 있다면 무언가 바뀔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 속단했거니와, 자신이 도망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마주한 순간 세상에 물을 끼얹은 듯 속내는 다시 식어버렸다. 자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거늘 또 자만하였구나, 내가 도망치면 형님이 학당에 올 수도 있는데, 그땐 일각이 지나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는 또 누군가의 죽음을 질리도록 볼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해를 입어 그 원성을 듣느니 차라리 맞서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미 그러기로 결심했으면서."
이미 처음 도망칠 때부터 맞서겠다 생각했으면서, 실은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여러 번 떠올리며 그 순간을 곱씹어 익숙하지 않던가. 이제 두려워만 하면 안 되는 상황 아니던가.
그리하여 아회는 공물처럼 차려입고 일렁이는 불꽃을 등졌다. 시간은 흐르고, 주변은 고요했다. 기이할 정도의 침묵 속에서 아회는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했다. 불 내음이 났다.
"그럼 그렇지."
또 나만 가슴 졸이며 두려움에 떨었겠구나, 애먼 사감님 내쫓고, 홀로 증오심과 조바심 불태우며 도망쳐야하나 말아야하나 쓸데없는 고민에 빠졌구나. 당신에겐 어차피 나도 가치로 판단되는 존재인데 무얼 바란 것인지. 허탈한 웃음 한 번을 뒤로 고개를 젖혔다.
창문이 거칠게 열리고 가을 바람이 방 안을 휘젓는다. 보기보다 야성적이게 들어오니, 역시 무 씨 집안 피는 못 속이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찾느라 감정을 쏟은 탓인가? 당신이 그럴 사람은 아니겠지마는. 아회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다소곳하게 무릎 꿇은 정자세를 유지했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입 하나는 잘 놀렸다. 여유롭지 않냐는 질문에 이어 자신에 대해 뒤를 캤는지 줄줄이 늘어놓는 모습에 평소 같으면 어떻게 아느냐며 경계하기 바빴겠지만, 지금은 놀랄만큼 평온했다.
"……선물이라, 아우를 유일한 가치로 셈하는 것은 잘 보았습니다마는."
아회는 눈을 천천히 뜨며 바닥을 더듬었다. 벽난로 앞, 러그에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바닥을 더듬고 서서히 앞으로 허리를 기울였다. 팔을 굽히자 소매가 손가락 끝을 간신히 내보이고, 머리를 숙이자 비녀가 불꽃을 등지고 난색으로 빛났다. 제 어미의 부서진 선추 조각을 소중히 하나하나 주워 모아 만든 비녀의 장식이, 머리가 온전히 땅에 닿자 그 충격에 찰랑거렸다.
"졌습니다."
머리를 온전히 바닥에 대고, 허리는 숙이니 신분 천한 아랫것이 고귀한 존재에게 절하는 것이요 이것이 패배를 선언함과 무엇이 다르랴.
"……하여 바라는 것이 무엇이온지요."
회포 따위는 풀지 않는다.
"아니면 목표하는 것이 무엇이온지 듣고자 하십니까, 도련님."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이 세상은 놀랍게도 그때처럼 온몸을 적실만큼 비를 뿌려주는 날이 적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