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면 다신 안 볼 거다. 같은 말 아무렇지 않은 척 던지긴 했지만 제일 큰 일 난 건 온화 속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더 물러날 곳 없이 몰아가놓고 그 다음은 어찌하려고 했던 걸까. 누구보다도 사람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고. 체온과 실감이 필요한 사람은 온화였다. 그렇지만 그것 제대로 표현하는 법 애시당초 몰랐으니. 실수에 실수를 거듭할 수 밖에. 그 실수로 인해 끝내 모든 것을 잃는대도.
온 신경이 뒤에 있었다. 그럴 거면 뒤돌아있지나 말던지. 그리 생각한들 혹시나 하는 상황 마주할 용기 없어 이러고 있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 제 팔 제가 꽉 쥐고. 입술 저러다 동강나겠다 싶을 만큼 물고. 어느새 눈까지 꼭 감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일 초가 영겁 같은 순간. 뒤에 있을 그의 기척이 더 멀어지지 않고 가까워지며 나가지 않겠다는 말까지 들리자. 아니. 그 말까지 기다릴 것 없이 뒤에 느껴지자마자 돌아서 그의 품에 매달리듯 안기려 했다. 제 팔 대신 그의 옷 움켜쥐고 품에 얼굴 묻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거. 해주지 않아도 돼요. 그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돼요. 당신 못 하는 거. 내가 다 할게요. 그러니 나 아플 때 옆에 와줘요. 도저히 못 버티겠을 때 옆에만 있어줘요. 많은 거 안 바랄게요. 그 하나면 돼요..."
또 우나 싶으나 용케 울지는 않고 꿋꿋이 버티며 또박또박 말하고도 고개 들진 않았다. 보나마나 얼굴 엉망이니까. 고개 푹 숙이고 있다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이는 말 있었다.
"그리고. 모진 말 많이 해서. 미안해요. 안 해도 될 말 하게 해서 아프게 한 것도. 괜히... 나가라고 한 것도."
필수였을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관계이니 우여곡절이니 굴곡이니 많을 법 하다만. 그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감정 추스른 듯한 온화 숨 한 번 훌쩍 하더니. 옷 쥐었을 손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상담... 많이 남았어요? 아니면. 오늘은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는데..."
많이 남았으면 어쩔 수 없고... 라며 은근히 여운 남기는 것 보면 분명 상황 만족하여 내내 숨었던 여시짓 빠끔 드러남이 분명했다.
아회가 충동적으로 제안하고, 도망치고, 또 충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은 불안의 역치 탓이어요. 사람은 불안한 상황에 오래 노출되면 그 불안이 디폴트 값이 되어버려서, 조금만 편해져도 본능적으로 이건 내 디폴트 값이 아니라며 나는 자연스럽게 위험을 추구하게 되거든요... 이건 비단 불안만이 아니라 공포, 쾌락, 의심과 같은 여타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감정에도 해당된답니다.😏
다른 말로 의심병과 불안, 공포까지 동시에 도진 무야옹은 집사가 손만 들어도 저게 날 쓰다듬으려고 해! 하면서 허공에 대고 하악질을 할 수밖에 없는거죠~🤦♀️
아직 면담이 남아 가야한다고 하면 어쩔까 싶었지만. 다행히 그럴 일 없이 제가 마지막이란다. 제게 시간 쓸 것을 염두하고 그런 건지 모르지만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듯 하니 그저 좋을 뿐이었다. 고개 숙인 채로 베시시 웃으며 그의 옷 꾹꾹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제게도 물을게 많지만- 하는 말에 살짝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물어볼 거... 그럴 만한게 있나?
당장은 감 잡히는게 없어 눈 깜빡깜빡하다가 피 얘기에 고개 돌려 조금 전까지 앉았던 자리 본다. 여즉 흥건히 남은 핏자국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고. 다 게워내는 것 아닐까 싶을 만큼 피 쏟던 하 사감의 모습 재차 떠올라 희미하게 미간 찡그렸다. 그가 인간이었으면 지금 서 있던 건 고사하고 숨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하며 다시 하 사감 보았다.
"치우는 건 내가 천천히 해도 돼요. 그보다 지금은 아프지 않아요? 그렇게나 토했으면서."
이미 안겼지만은 재차 확인하듯 그의 가슴팍에 손 대어본다. 옷 아직도 피범벅인 채인지. 달리 외상은 없는지. 조심히 본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조금 세게 눌렀을 지도 모르겠다.
역린? 시야?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순간 팟 하고 떠오른다. 아회랑 있었던 술자리. 역시 다 보고 있었구나... 그래 사실 그걸 생각하면 제가 그렇게 화 낼 처지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스스로 마음씨가 좋지 않다고 해도 제 성질 다 받아주고 지금도 넌지시 말만 하는 것 보면 나름대로의 배려 해주는구나 싶다. 아회에게도 그럴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아들었지만 괜히 내색은 않고 그를 살펴보았다. 조금 힘주어 눌렀을 뿐인데 쑥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급히 손을 거둔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어 놀란 것도 있었다. 제가 안겨있는 것도 부담이 될까봐 살짝 떨어지려 했다. 피를 토하길래 속이 상한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나보다. 또 어기게 될 금기였다거나. 이건 쉽게 낫지 않는다거나. 그런 말 들으며 어찌해야 하나 전전긍긍하다가 일단은 쉬게 해야 할 거 같아 그의 팔 잡고 제 침대로 이끌려 했다.
"말 안 해도 더 안 누를 테니까. 이리 와요."
세게 당기면 아파할까 꼭 쥔 손과 달리 억지로 당기지도 않는게 그를 무슨 금지옥엽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싶다. 힘만 안 썼을 뿐 고집스럽게 그를 이끌어 침대에 걸터앉히고 저도 그 옆에 앉으려 했다.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가슴팍 또 만질 듯 손 들어올리지만. 그대로 다시 내리며 제 옷을 꾹 쥐었을 것이다. 쥐어서 구겨지는 옷감 물끄러미 보다가 조심히 물어보았겠지.
"조금 전에 또 어겼다고 했는데. 전에도 누군가에게 말할 일이 있었던 거에요?"
저와 같은 상황 있었을지. 혹은 다른 일이 있었던 건지. 그것 묻고 시선으로만 피가 베어나오던 자리 보았다. 살짝 미간 찡그려지는게 안타까워 그런 듯 했다.
데려갔을 리가. 자신이 황룡 선택하겠다 명확히 말한 적도 없는데 당최 무슨 소리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기척 느껴지며 아회는 바로 문을 걸어잠갔다. 쉬라는 예의상의 말도 더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로? 받아주기는 할까? 날 도와줄 수는 있나?
도와줄…… 사람이 있나?
나 하나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일각이 지나도 나를 학당 내에서 찾지 못하면 이 학당을 뒤엎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시야가 일렁인다. 다시금 뚝, 무언가 끊겨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아회는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몸을 덮던 교복이 바닥으로 사붓하게 떨어졌다. 가주님께서 자신을 어여삐 여겨 친히 하사한, 겉은 희고 속은 쪽빛 은은한 귀한 비단 옷을 걸치고, 머리는 진주가 아롱아롱 맺힌 새로운 비녀로 틀어올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임에도 아회는 자신을 단장했다.
그리고 타오르는 벽난로에 등지고 다소곳하다 못해 마치 충신처럼 앉아버리니, 화려한 소매와 옷자락이 가득 퍼진다.
어차피 무슨 짓을 당해도 이쪽이 승리할 판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지 않은가, 예비하고 대비하였지 않은가. 도망치지 말아라,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