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말하며 사감의 얼굴 유심히 뜯어보았다. 필시 내밀한 축에 드는 비밀이었을 텐데도, 반응은 비교적 차분했다. 저것은 어떤 심정이지? 동요를 감춘 것이라면 대단하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 속내 도무지 짐작할 수 없으니 편치 않다. 유현은 사감의 오해─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에 대답할 생각도 않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 느릿이 내리감았다 다시금 뜬다. 본래 묻고자 했던 용건 잊지는 말아야지.
"하면 어찌 된 연유로 그리 되셨나요? 당신이 사감으로 임하고 있는 상황과 연관이 있나요? 다른 사감들은 모두 인간 아닌데도 왜 당신만 인간인지, 그리고 인간 같지 않은 몸 갖고 생존해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상대는 과연 알까? 영 사감이 존재만으로도 유현의 열망을 더없이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감들처럼 확연하게 인간과 동떨어지지 않았으며, 동시에 스스로 인간이라 여기고 있는 그 같잖은 모순이 더없이 마음에 든다. 풀어헤쳐진 가슴팍 위로 손을 가져가자 그저 잠잠하게 오르내리는 호흡만이 손에 닿았다. 아, 정말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사람 꼴 갖고 움직이는 걸까. 심장만 없고 다른 부위는 모두 온전한가? 손 떼지 않은 채 불분명한 침묵만 내려앉기를 잠시. 유현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시선은 여전히 손 간 자리에 꽂히다시피인 채다.
"만지는 것보단 눈으로 확인하고 싶네요. 단순히 노쇠하지만 않을 뿐인가요, 혹은 죽음에 준할 물리적 손상 역시 버텨낼 수 있는 건가요? 피는 흐르나요? 심장이 없다면 그런 것들도 모두 의미가 없을 텐데……. 갈라 봐도 괜찮을까요?"
심장이 없더라도 괜찮다. 몸의 심부가 없을지언정 다른 것들은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뜻이잖은가? 설령 피가 흐르지 않는다 해도 그 속은 따뜻하겠지. 몸은, 어떻게 하여도 알지 못하고 붙잡을 수도 없는 마음과는 달리 직관적이기에 좋다. 지금도 체온만은 이렇게 선명하니 말이다……. 표정 없는 낯이었으나 무엇인지 모를 광괴한 기미 눈가에 번들거린다. 아, 왜 인간의 몸은 나약해서 살갗 하나 찢지를 못하는 거지?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으나 그는 이내 방도를 찾았다. 그래, 손으로 안 된다면 도구를 쓰면 되는 것이다. 사감이 내어 왔던 찻잔을 들고 상에 내리쳐 깨부순다. 움켜쥔 손 안에 유리조각 박히는 것조차 아랑곳않고 깨어진 파편 중 큼지막한 것을 쥐었다. 이어지는 수순은 당연히─ 그것으로 사감의 가슴을 내려찍으려 드는 것이다. 양해를 구하긴 했어도 모두 구색뿐인 말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는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알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같아 보인다. 대답 기다리기엔 유현이 앎에 있어 지독히도 갈급했기 때문일지도.
무슨 생각 무슨 확신 갖고 그런 말 할 수 있었을까. 당장 눈 감고 눈 떴을 때 조차 눈앞 바뀌어 있는 것 아닐까 경계하고 고민해야 하는 현실에서. 그랬으면 하는 바람 잠결에 흘러나온 걸까.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일 헤쳐가야만 할 테니.
그러니 모든게 끝난 후에 괜찮았다 할 수 있길.
그가 내 옆에 있는 것 보며 눈 감자마자 잠들었다. 술기운 빌리지 않고 잠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그렇게 잠들면 얕은 잠에 금방 깨거나 좋지 못한 꿈에 시달리는게 일상이었지만. 드물게도 깊이 잤다. 편안한 잠에 긴장 없이 몸 맡기고 한껏 빠져들었다. 이대로면 꿈도 꾸지 않을 것 같았으나. 어김없이 꿈 펼쳐졌다. 하지만 늘 꾸는 끔찍한- 단지 기억 되감을 뿐인 꿈은 아니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그림처럼. 이제는 흐릿한 기억 속 배경이 펼쳐지고 그 한 가운데에 내가 있다. 작은 나. 어린 나. 너덧살 즈음부터 열살 무렵까지의 내가 한 폭의 그림처럼 흘러간다. 아무 걱정 없이 웃으며 뛰어노는 내 뒤로 배경이 스치고. 바뀌는 배경의 수만큼 내가 자란다. 참 웃음이 많았던 어린 아이. 적당히 얌전했고. 적당히 개구졌던. 평범했던 아이.
그랬던 아이는 열 두살 단 하룻밤에 운명이 뒤집혔다.
낡았지만 따뜻한 배경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그 날로 빠르게 휘감긴다. 결국 언제나와 같은 흐름일까. 느껴지지 않아도 기억에 선명한 피비린내 물씬 풍기며 사방 서서히 붉게 물든다. 낙엽 지듯 스러지는 육신들. 흩뿌려지는 핏빛 빗줄기. 참극 뒤에 이어지는 나의 차례. 피에 물든 검 움켜쥔 '그녀'가 내게 다가와 내 목을 쥐고 들어올리는
- 화야.
그랬을 전개인데.
- 화야. 왜 그러고 있나요.
예상치 못한 그리운 목소리. 나도 모르게 숙이고 있던 고개 들었다. 늘 보는 참혹한 과거 대신 그리운 배경과 그리운 사람 있었다. 내 기억 속 마지막이던 광기에 휩싸인 모습 아닌 내가 정말로 좋아하고 동경했던 '그녀'가 웃으며 서 있었다.
언니.
하고 부르니.
- 그래. 화야가 정말 좋아하는 - 언니에요.
하고 대답해서. 그게 너무 생생해서 꿈인 걸 알고도 지금이 현실이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버린다. 하지만 꿈이니까. 언니는 내 손으로 죽였으니까. 많이 컸다며 들뜬 목소리도. 다가와 내 얼굴 쓸어주는 손도. 실은 다 내 망상일 뿐이니까. 깨어나면 그저 허탈할 뿐이야. 그러니 이런 꿈 얼른 깨버리는게 좋을 텐데.
- 다행이다. 화야가 죽지 않고 살아서.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구나. 미안해요. 내가 그 때 조금만 더 일찍 정신을 차렸다면 화야가 무서운 일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어머. 어머- 울지 말아. 언니는 괜찮아요. 화야마저 내 손으로 해쳤다면 죽어도 죽지 못 했을 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화야 만이라도 살아주었으니까. 언니는 그거면 충분해요. 그러니 울지 말아.
어서 깨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그립고 그리웠던 사람 앞을 떠날 수 없었다. 정말로 언니였다면. 언니가 살아있었다면 해주었을 말들에 눈물 왈칵 쏟아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는 나를 낯익은 향취가 감싼다. 이제는 나보다 작은 몸이 더 큰 나를 안고 등을 토닥인다. 어긋난 시간 너머 아스라한 기억이 내게 속삭인다.
- 사실 화야는 알고 있을 거에요. 그 날. 한참 어린 화야를 내가 떼어내지 못 할 리가 없다는 걸. 미안해요. 내가 나를 잡지 못 해 어린 화야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버렸어. 미안해요. 그러니 이제 그만. 나를 내려놓고 화야의 삶을 살아. 내 죽음에 더이상 얽매이지 말고. 이제는 화야가 앞서는 거에요. 그럴 힘도. 자격도. 화야에겐 충분하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화야니까.
더는 불쌍한 사람 아닌.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반짝이는 동경이 말했다. 다정한 손길로 나를 끌어 나가는 문 앞으로 데려가주었다. 그 날. 넘지 못 했던 그 문 앞에서 멈춘 내 등을 부드럽게 밀어주었다. 높다란 성벽 같았던 문턱 너머 한 발 내디딜 때. 후후- 웃는 소리 들렸다.
- 잘 지내요. 화야. 다신 오면 안 돼요?
잘 있어. 언니. 그래도...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다.
내딛은 바닥부터 무너지며 꿈에서 점점 멀어진다. 지나온 꿈의 정경 파편처럼 스칠 적. 그 날의 편린도 있었다. 내 목을 쥐었던 손에 일순 힘 풀려 내가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을. 내가 달려들 때도 막거나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목을 내어주며 다행이다. 라며 웃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내 등 토닥이고 떨어지던 그 손을.
사실 전부 알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끌어안고 있게 해 줘. 조금만 더. 내 몸 비로소 자유로워질 때까지만.
서서히 내 몸 뉘인 곳 실감 돌아온다. 어둡기만 하던 눈커풀 너머로 희미한 기척 느껴진 것도 같다. 눈 뜨기 직전. 눈커풀 사이 작게 맺혀 떨어지는 물방울 보이지 않으려 살짝 웅크렸다. 괜히 졸음에 겨운 척. 칭얼대는 척. 손 뻗어 닿는 그를 잡으려 하며 조금 더 누워있었다. 오랜만에 좋은 잠을 잤다고 생각하며.
비녀가 부디 자신의 살갗을 꿰뚫기를, 그렇게 당신의 일그러진 낯짝을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터였다. 숨 끊어지든 말든 이젠 되었다! 당신의 빌어먹을 목표에서 나 또한 장기말이니, 나는 그 삶에서 벗어나는 것 하나면 족할 터다. 당신을 죽이는 것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의 속내를 뒤집어 놓을 것이다. 이미 몇 번이고 다짐했고, 몇 번이고 상상했으며, 몇 번이나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라 느꼈다. 염원을 담아 거세게 내리 찍었으나, 흐른 피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하, *발."
저열한 욕설이 입에서 쏟아지고 만다. 끝까지 나를 방해하시겠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진 안면은 영영 보이지 않는 눈을 덮어 가리고, 눈물 흐르던 눈은 어느새 크게 홉뜨였으며, 추악함을 느껴 괴로워하던 표정은 어느새 표독스러움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앙다문 입술에서는 어느새 피가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으니, 날선 송곳니로 제 입술 꽉 깨문 탓이다.
"도련님께서 허락하시든 말든 제 상관이지요. 천한 놈 처분을 왜 고귀한 손으로 도맡아 하시려 들까?"
눈을 마주하려는 듯하지만 실로 마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격한 감정의 파도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듯하니 화가 난 것 같은데. 비녀를 떼어놓으려 할 수록 아회는 오히려 제 목을 꿰뚫고 말겠다는 듯, 혹은 버티겠다는 듯 팔에 꾹 힘을 주었으나, 힘을 줄 수록 부들거리며 밀려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몸뚱이 탓이다. 제대로 된 대접 받지 않고 죽음 예비하고 다니던 자의 모습이었던 탓이며, 당신을 이길 수 없는 평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지랄맞은 선물이라면, 선물에게 찢겨 죽는 것 정도는 겸허히 받아들여줄 수 있지요."
표독스럽던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두 눈은 온전한 달과 같은 호선을 그어내고, 입술은 부드러이 호수 유영하는 나뭇잎처럼 말려 올라간다. 절망을 부르짖다 자결을 시도한 자라기엔 지나치게 청아한 미소였으니, 당신이 화가 났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으리라.
"도련님, 무상한 봄날은 찰나일 뿐이고, 무엇이든지 스치다 사라지는 것이 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운명을 피하지 마시지요."
당신이 뱉어낸 경고에 등골이 오싹했으나 뱉는 말을 멈추진 않았다. 어차피 내 죽는 것도 운명이다! 그 사실을 일깨우고자 하며 당신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난다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죄악 저지르고 본인의 추악함이라도 깨달았으면 하는 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을 학당에서 어떻게 빼내려고? 우스운 자 같으니. 곁에 데리고 있는다 하여 얌전히 있을 것 같던가? 그렇게 당신 곁에서 몇 번이고 죽음을 갈망하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내가 팔 하나, 다리 하나, 혹은 남은 눈, 귀, 모든 것을 잃어도 죽지 못할 것 같던가? 영영 도망치는 것을 당신은 진정 원하는 것 같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죽지 말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방법을 모색할 터인데……. 아회는 당신을 다시금 불렀다. 도련님, 하고 사근사근 부른 뒤 미소는 더욱 깊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