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자하니 학당 문 잠겼을 적에도 이런 시늉 하나 안 하던 사감들이 이제와 돌아다닌들 더 큰 불안만 생기지 않을까. 아. 이제는 사감들이 나서야 하는 일 생겼나보구나. 그런 불안 슬금슬금 퍼져 후일 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아니다. 제가 이런 걸 생각할 이유 무엇이 있으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솔직히 궁금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는 것은 고해둘까.
"그 비린내 나는 놈. 일전 수업 때 뒷산 호수에 있었지요. 요괴도 이미 그 때부터 모아두고 있던데. 거 뒷산에 쥐구멍 있나. 별별 놈들이 들락거려."
이미 늦은 말이지만은 그가 사감 노릇하겠다는데 저도 학생 노릇해야 하지 않겠나. 제 아는 것 그것 뿐이라 말하고 뻑뻑한 몸 움직여 다리 바꿔 세웠다. 향로의 연기 덕에 통증 줄었다지만 사실 몸보다 정신머리가 앓는 것이 크다. 그저 자세 바꾸는 것 만으로도 스스로 고통스럽다 느낄 정도로.
겨우 자세 바꾸고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제 앞에 무릎 꿇은 하 사감 보았다. 아무도 안 죽었다던가. 미안하다던가. 무슨 이유 때문에 더 빨리 찾을 수 없었다던가. 무언가 사정 있어 인간은 죽일 수 없다던가. 뭔가 말은 많이 하는데. 잘 안 들린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싶다. 말 다 듣고도 한참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뭔가 말은 해야 할 것 같아 굳어가는 머리 두드려 생각이란 걸 해본다. 하고. 하고. 또 하고. 생각 거듭한 끝에 내뱉은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하 사감님."
무릎에 비뚜름히 기댔던 고개 들었다. 목 빳빳이 세우고서 하 사감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가 저나 누구 죽을 뻔 하였다고 역정을 내었습니까? 더 빨리 도우러 오지 않았다고 타박하길 했습니까? 왜 그제야 왔는지. 왜 인간 못 죽이는지. 그런 것 따져들었습니까? 사감님. 하 사감님. 그것들은 당신께서 염려하시는 것이지 제게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물며 제가 그 때 그리 분노한 이유조차 아닌 것을."
흐리멍텅하던 붉은 눈에 다시 떠오른 분노 있었다. 그 순간. 인어 앞둔 순간 다시 떠올린 탓이다.
"모르시니 알려드리지요. 예. 친절히 두 번 읊어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빌어먹을 물짐승 새X 그 자리에서 죽이지 못 해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 미칠 것 같습니다. 거기에 하 사감님께서 나타났든 아니든 뭘 했든 아니든 다 제쳐두고. 제 손으로 끝장내지 못 하고 후일의 여지를 남긴 것이 내장 비틀릴 정도로 분이 찬단 말입니다..."
그 때 죽였어야 했는데. 뭐가 됐든 그 자리에서 목을 치고 혀를 베어 다신 노래하지 못 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결국 그리하지 못 한 것은 제 역량의 부족함이었다. 억눌린 채로 광기에 삼켜질 뻔 했음에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여즉 저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단전에서부터 불길 치솟아 속부터 뒤집어지는 듯 하나 아직 성치 않은 몸에 격한 감정은 무리였다. 말 마친 후엔 숨 낮게 고르곤 눈에서도 분노의 빛 지웠다. 다시 처연하게 흐려진 눈 두어 번 깜빡이고. 숨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감으로 오셨으면 사감의 일만 보시지요. 그래서. 왜 그 놈들이나 인간에게 손을 못 댑니까. 그것 말 할 수는 있으신가 봅니다?"
하 사감에게 말 할 수 없는 것 있음을 알고 있는 온화였으니. 그것 걸고 빈정거리는 투였다. 뭐는 말 못 하면서 그건 말 할 수 있냐. 그런 식으로 말이다.
당신이 나의 입장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마음 하나 헤아릴 줄 모르는 자의 이기적인 발언에 어떻게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아온다 믿을 수 있을 원동력 자체를 부정 당하며 처절하게 짓밟혔다. 그보다 더 이전에는 바라는 삶을 쳐다봤다는 대가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 모든 당사자가 뱉는 말을 쉬이 믿을 수 있냔 말이다.
"……그 고대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줄은 알고?"
보아라. 자신이 봄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모르지 않던가. 어쩌면 알고도 저렇게 구는 것일 수도 있다. 아, 그렇다면 배로 끔찍할 터다. 애초에 우애니 무어니 당신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인가. 이 사실을 왜 지금껏 부정했을까, 오로지 나만 이 상황에서 당신이 그런 감정을 가졌으리라 기대하고 속에 담았던 것이고, 당신은 그 끔찍한 망상 속에서 내 좋을 대로 휘둘린 존재일 뿐이다. 얼마나 같잖은가. 그때 카페에서 만나 내게 정을 운운하던 것도 결국 허울 좋은 겉포장에 불과했을 텐데 나는 또 좋을대로 생각하여 그 기준에 맞춰 판을 다짐했구나……. 긴 세월 동안 쌓은 끝없는 망상과 의심이 다시금 당신을 멋대로 생각하고 틀에 박아버리며, 제멋대로 단정짓기 시작했다.
"손 대지 마!"
당신의 손이 제 손에 닿았을 때는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더니, 꽃을 내려놓고자 관 근처로 손이 닿았을 때는 앙칼지게 반응했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살벌한 기백 발하다가도 당신의 말에 날카롭게 숨을 뱉었다. 실소에 가까운 비웃음은 한 번이면 족했다. "어련하시겠어." 비아냥대듯 단어를 뱉는 흐름에 조롱기가 묻어있었다. 당신이 죄다 도륙하고 떠나버린 뒤 나는 그들의 원망을 온전히 받아내야만 했는데. 당신을 그 모습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되도 않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낙인이 찍혀 처절하게 바닥을 기었는데. 그게 잘못이 아니라며 되려 자신의 정을 탓하다니. 지나가던 개여시가 웃을 상황이리라.
"……내가, 정을 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아회는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쭉 뻗어 올려 온전히 시선을 마주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귀에 매달린 검은 귀걸이가 살랑였다.
"내가 호위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같이 밤을 지새우고, 침대 위로 부르며 입술 위에 속삭이든 말든 모두 나의 자유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냔 말이야……. 아."
아회는 눈을 치켜떴다.
"설마…… 욕심인가? 어차피 정조관념 박살난 세상이겠다, 아우라 해도 피 반절밖에 섞이지 않았으니 음험한 마음이라도 품으셨나? 생각해 봐, 내게 가장 효율적인 일이니, 가치를 재니 하기 전에…… 스스로 돌아봐도 이상한 점이 정녕 없었나?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볼 필요는 없거늘. 욕망에 솔직해져 봐, 어차피 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정말 사적인 욕심이 없을 거라 생각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우스움 어렸다. 역하기 짝이 없어.
"솔직히 말해, 동생이란 이름을 앞세워서…… 손에 쥐고 짜둔 판 위에서 제멋대로 흔들고 싶잖아? 어떻게 해보고 싶은데 다른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정을 독차지 하니 속이 뒤틀려 그러는 건 아니냔 말이야……."
인어의 궤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아라, 저 형님 흉내를. 정을 운운하듯 나지막이 경고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다. 학당의 벗에게 정을 주든, 호위에게 정을 보이든 저가 무슨 상관이라고! 아회는 어떤 대답을 듣든 천천히 예를 갖췄을 것이다. 쥐었던 주먹을 펼쳐 당신의 뺨을 향하려 들었다. 뺨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려 하며 아회는 미소 지었다.
"형님, 아, 형님…… 그렇다면, 형님은 앞으로도 줄곧 제게 찾아오시겠군요."
아회는 혀 끝을 느릿하게 내밀듯이 하더니 자근, 하고 가볍게 깨물었다. 한때 자신이 꿈 속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혀를 깨물어 죽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따라하듯. 잇새의 혀가 한쪽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입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 미천한 아우는 성공하는 순간까지 시도할 터이니 말입니다……. 혹시라도 그 고매하신 계획에, 그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지독히도 무감한 웃음 뒤로 아회는 눈 천천히 감았다.
"……설마 천하의 무사빈이, 미천하고 아둔한 아우의 계획을 몰랐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지요?"
놀라지 말란 말 하지 않았어도 온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기분에 눈썹 하나도 까딱 않고 있었다. 금기. 그놈의 금기. 정신 온전치 못 하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아마도 금기 걸었을 그 존재에 대한 것이나. 그걸 굳이 제 앞에서 꺼내며 피 토하는 하 사감에 대한 것이나. 결코 올바른 생각은 아니었으며 그런 생각 담긴 시선 역시 곱지만은 않다. 그의 옷과 바닥 적시는 피를 그저 성가신 것 보는 눈으로 물끄러미 응시한다. 토하는 소리 반. 말 반. 그렇게 겨우 말하던 하 사감이 결국 다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적. 온화 잠시 눈 내리감으며 작은 한숨 내쉬었다. 역시나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 형제에게 이 이상 갈궈졌으면 하나 봅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것을."
쯧. 작게 혀를 찬 온화 비틀거리며 몸 움직였다. 무릎으로 걸어 하 사감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제 손으로 하 사감의 얼굴 감싸 들어올리려 했다. 한 손으로 턱 받치고 한 손에 제 두루마기 소매 쥐어 그 턱에 낭자한 핏자국 닦아주려 했다. 여전히 냉담한 태도였지만 손길 미세하게 떨리며 그를 보는 눈 역시 마냥 차갑지만은 않았다.
"그래요. 금기가 어찌됐든. 사감들이 그 망할 놈들에게 손 못 댄다는 건 알았으니. 어떻게든 해보아야겠지요. 내 분도 못 풀고 가만히 당해줄 생각은 없으니."
들으라는 듯. 혹은 혼잣말인 듯. 그리 중얼거린 온화 잠시 하 사감 바라본다. 안타까운 반려를 향한 애정인지 여즉 해소되지 못 한 분노의 잔재인지 모를 것이 붉은 눈동자에 일렁인다. 느릿하게 눈 깜빡리고 더 다가가거나 물러나지도 않은 채 온화 툭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