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무슨 상황. 그것도 제가 이해를 해줘야 하는 걸까. 이미 많은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중인데. 제 본가도 아닌 학당에 치고 들어온 침입자 막겠다고 몇 번을 나섰는데. 그를 포함한 사감들 폭주도 잠재워줬는데. 이 이상 이해를 해야 하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하 사감은. 그는 또다시 미안하다 말했다. 제가 인어를 앞두고 눈에 핏줄 터져가며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곧장 오지 못 한 것을. 그건. 그건 상관없다.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와도 아무 것도 못 했을 것 아닌가. X친 인어를 잡든 홀린 학생들을 막는 것이든 무엇도 못 했을 거잖아.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 방금. 그런데 뭐?
"아프냐고...?"
왜 그 말이 그렇게 꽂혀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가 사감의 일에만 충실하고 나가주었으면 혼자 잠이나 자고 회복하여 좀 더 나은 상태로 보러 갈 수 있었을 텐데. 나가란 말을 들어야 나갈 것인지. 피투성이로 앉아 제게 물었다. 아프냐고. 많이 아프냐고.
"하하."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제가 들어도 모래마냥 메마른 웃음이었다.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목에서 버석이는 모래가 돌아다니는 것 아닐까 싶은 건조한 웃음 연신 흘리며 몸 수그렸다. 어느새 제 몸 감싼 손에 힘 꽉 들어갔다. 아프냐고. 그걸 물어? 지금? 잘못 쥐었는지 검에 뚫렸던 옆구리에서 불안한 감각 느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쥐어뜯을 듯 잡았다가 손 확 걷었다. 동시에 단 하나 걸쳤던 두루마기 벗어옆으로 내던지며 고개 치켜들고 악을 쓰듯 소리쳤다.
"어디 한 번 직접 보고 판단해보시지요! 예! 내가 지금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미칠 것 같은지!"
고성과 함께 드러난 몸은 전장이라도 구른 듯 성한 곳이 없었다. 이미 다쳤던 곳 덧난 것은 물론이요 방금 쥐어뜯은 옆구리는 둘러놓은 붕대가 희미하게 붉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자잘하게 까지고 부딪힌 자국 또한 선명했다. 붕대와 약 바른 천 탓에 겨우 속옷만 걸쳤지만 지금의 온화는 부끄러워 하는 기색 따위 없었다. 다시금 차오른 분에 거친 숨 몰아쉬며 찡그린 눈으로 하 사감 볼 뿐이었다.
"많이 아프냐고. 그래 아파 죽겠습니다! 분하고 아픈데 내 무력하기까지 하니 그냥 저 밖에 몸 던져 뒤져버리고플 만큼 미칠 것 같다 이 말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뭐? 상담? 면담? 아프냐고? 많이? 지금 나 놀리십니까? 하 사감님! 미안하다 밖에 할 줄 모르면 오질 말던가! 못되먹은...! 이! 뭐 하나 해주는 것도 없는 반려야..."
온화 바락바락 소리지르더니 복잡한 감정 결국 설움으로 귀결된 듯 울음 터뜨렸다. 다 큰 처자가 맨살 다 내어놓고 처량맞게 우는 꼴이란. 그만한 꼴불견도 달리 없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가쁜 숨 끄윽끄윽 내쉬며 축 늘어뜨린 어깨 들썩이며 눈물 펑펑 쏟아내었더라.
세상이 바뀐다. 아회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벗어났으니 이제 일각을 버텨야 한다. 포부는 좋았고, 이미 목숨은 포기할 생각이었으니 미련 없다마는 오기가 있었다. 지난번 체력 단련 때 빌어먹을 신수가 눈알 가져가라 했던 것을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치나, 그때처럼 단박에 잡히고픈 마음 없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영 사감님을 찾을까? 그래서 황룡을 택하겠노라 얘기할까? 아냐, 이건 너무 앞서갔어. 그렇게 된다면 내 가문은 어쩌려고? 내 운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을 고작 술래잡기 하나에 쓴다니, 안 된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적당히 숨으면? 신수가 아직 학당에 있다. 눈치없게 나타나더니 여기 있었냐며 계약이니 뭐니 떠벌리다 또 제멋대로 활개칠 것을 생각하기가 무섭게 골이 아팠다. 형님 마주하면 두 배로 골치가 아프겠지! 가만히 있는 것은 보류다.
"……그러면 어쩌지."
아, 곡옥으로 갈까, 어차피 신의 악의를 받은 몸이다. 나 찾을 적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것 보고 부질없음 약간이라도 느낀다면 이것도 괜찮은 방법일 테다. 아, 그러고 보니 마님의…….
한 시가 아까운 상황이나 아회는 잠시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 *같은 여자를 왜?"
그 빌어먹을 여자의 집을 내가 왜 생각했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감정을 겨우 참고있는 중인데. 아회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 벽난로를 타서 다시금 숨어버리자. 본가에 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영이도 지금쯤이면…….
"……젠장."
방 앞에 도달했을 때, 그제야 깨달았다. 정신이 없어 흘려넘겼던 아침 보고. 오늘 면담이 있다 했던가. 입속으로 단어 하나가 씹어 삼켜진다. 걸쭉하고 천박한,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욕설이니 뱉을 필요 없다. 아, 젠장. 차라리 영 사감님을 기다릴 걸. 그 존재는 그나마 학생을 인간으로 대해주는데 하필 신수랑 마주할 게 뭐야. 그것도 좋은 감정 없고 업보만 쌓인 신수를 이 상황에서.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 오랜 시간 잘 버티던 정신이 몇 번이고 한계에 다다랐었다. 그래도 매번 버텼고. 정 아니될 땐 과한 일탈로 해소하려고도 했고. 갖가지 무던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언제나 노력이 무색하게 만드는 건 현실이었다. 제깟게 뭘 해봤자 뭐가 되겠냐고 조롱하듯. 사방에서 더한 것들 덮쳐왔다.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기댈 곳이 필요했다. 의지할 곳이 되어주었으면 했다. 온전히는 아니어도. 제 앞에서만큼은 제 편이 되어주었으면.
그냥 지금 말없이 안아주기만 하였어도. 그거면 다 되었을 텐데.
우는 제게 해준 것은 토닥이는 것 뿐이었다. 한참을 있었으면서. 그 뿐이었다. 또 그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서. 어쩌면 몰라서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고. 평소라면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 없었다. 최소한의 위로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려 했다. 그래. 당신이 고작 그 정도라면. 더는 기대 안 할란다. 안 바랄란다. 온화 훌쩍대면서 울음 그쳤다. 손으로 눈물 닦아내며 숨 어느 정도 고르고. 벌떡 일어나선 먼저 일어난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움직였다. 옷장 열어 아무 옷이나 잡히는 대로 꺼내며 말했다.
여즉 물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사나웠다. 아마도 새로 지은 옷인 듯. 본 적 없을 엷은 보랏빛 웃옷과 긴 치마 한 벌 거침없이 꿰입더니 거울 보고 머리까지 매만지는게 당장이라도 제가 나갈 것 같다. 나가서 누구와 어울리려 그리 단장하나 싶을 만큼.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단 한 순간도 하 사감 보지 않았다. 그 말 할 때에도.
"대신 그건 알아두세요. 지금 당신 여기서 나가면. 나 다신 반려로 못 볼 줄 알아요. 내가 이 학당 나갈 때까지 당신 어떻게 대할지 보고싶거든 나가요."
말 마치고 온화 방 한 가운데에 섰다. 하 사감 등지고. 그가 뭘 하든 저와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팔짱 끼고 의연하게 서 있기만 하였다. ...그러나 의연한 척한 뒷모습과 달리 팔 맞잡은 손 희어질 정도로 세게 쥐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다시 터질 듯한 울음 참느라 입술 꾹 깨물고 있었다. 지금의 온화로서는 최선의 표현이었으니. 이제 부디 이 신수가 눈치 좀 챙겨주길 바라면 되지 않을까.
몇 분 남았지. 아마 이제 많아야 이 분 정도 지났을 터다. 13분만 더 숨으면 되는데, 일각 안에 모든 것을 해결을 봐야 하는데. 입구에 몸을 기댄 모습부터 불만이 뚝뚝 묻어나오는 듯하고 목소리까지 저러니, 아회는 진심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충동이 솟아오르자 억누르고자 무진 애쓰며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 도망치면 저 작자도 쫓아올 것이 뻔하다. 세상은 언제나 내 고통에 열과 성의를 아끼질 않는구나…….
"……면담을 할 때가 아닌 듯합니다."
마음이 조급했다. 하나도 벅차며 언제 쫓아올지 모른다. 애초에 형님은 제 방이 어딘질 알고 있었다. 제 생일에 선물 보내준 그 끔찍한 순간을 잊을 리가 없어 조급한 나머지 그리 말했고. 짧은 순간 생각해 보니 이유 없이 제가 사감에게 아니꼬움 표출한 듯하여 덧붙였다.
"저는 몸 멀쩡하고 심신 또한 멀쩡하니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사감님께서도 목소리 듣자 하니 지친 듯하신데, 무리하지 아니하고 형식적으로만 마무리하여 쉬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제발 그쪽이거라 해석하며 자리로 향하나, 여전히 심상 조급하여 앉지 않고 맴돌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성질 내거나 도망치지 않아 다행이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