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지 않아도. 그 바람 말로 하지 않아도. 온화 줄곧 어떤 틀도 채우지 않고 아회 지켜봐왔다. 보이는 대로 눈에 담으며 가끔 장난스레 속에 감췄을 모습 들춰보려 했지만은. 결국은 그리 되어 오늘과 같은 자리 만들어졌으니 아회 그런 염려 하지 않길 바란다. 지난 삼 년간 줄곧 한결 같았던 시선 이제와 바꿀 사람 아니었으니.
"오라비가 그렇다면야."
가벼운 사과에 아회 대꾸하거든 저도 어깨 으쓱이며 그랬다. 이제 이 정도 대화는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는 듯. 분위기는 격해지지도 침잠하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 하고픈 말 주고 받고. 잔 부딪히고. 그 안에 담긴 술로 목을 축일 뿐이다.
그리고 온화 돌아보았을 적 아회 기침했다. 급히 소매로 입 가리는 것 보며 그럴 줄 알았단 듯 큭큭 웃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앞서 마셨던 것과 그 술의 독함이 배 이상 나는데 갓 술맛 본 아회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에 눈물 고여가며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을 양껏 감상하다 제 쪽으로 눈 돌아오자 히-죽 웃었다. 오늘 중 가장 얄미운 표정 아니었을까. 병 주고 약 주고 하듯 강정까지 내밀었으니 더욱 그랬겠지.
"내 뭐라 그랬소. 독하다 했잖은가? 그걸 그리 홀라당 마시니 그렇지 으이?"
어떠냐는 제 물음에 가랑이 찢어진 뱁새 되었다는 양 말하길래 그만 웃음 크게 터질 뻔 했다. 그래도 이번엔 잘 참아 작게 키득이는 걸로 넘기고 아회 입에 강정이나 물려주었다. 그리고 저만 한 잔 더 따라 마시다가 앞에 놓이는 곶감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듯 숨 흘렸다. 재차 잔 가득 채워 연거푸 세 잔을 마시면서도. 곶감 손 대지 않으며 말문 열었다.
"오라비야. 이것 맛있던가? 내 본가에 주방 할매가 곶감이며 떡이며 빚는 솜씨가 일품이라. 나도 그렇고 내 남매들도 그렇고 할매가 아주머니일 적부터 그 분 손에서 나온 간식 먹으며 자랐지. 지금도 어린 동생들은 매일 간식으로 먹고 있을 테고."
어린- 동생들. 기껏해야 열살 남짓한 아이들. 한 때는 저도 그랬던 그 나잇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나도 어릴 적엔 이것들이 그렇게 맛있었지- 특히 이 곶감은 수 오라비랑 향이 오라비가 좋아해서 가끔 내 것 남겨두었다가 오라비들 주고 그랬어. 주방 가서 몇 개 더 얻어먹기도 하고. 헌데 지금은. 아무 맛도 안 나. 그냥 질겅질겅 씹는 그것만 있지."
담담하게 말하며 그제야 온화 손이 곶감 집어들었다. 쫀득하고 달달한 곶감을 잇새로 물고 지익 물어뜯어 입안에서 씹었다. 우물. 우물. 술 마실 적엔 기침이라도 나왔다면 지금은 그저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여 입안의 것을 씹고 곤죽이 되면 꿀꺽 삼킨다. 맛을 음미하거나 즐기는 기색 같은 건 면중에 없었다. 먹다 만 곶감을 화선지 뭉치라도 보는 양 멀거니 보다가 소반에 다시 내려놓고 술병 들었다. 이번엔 아회 잔에도 반 잔 채워주고 제 것은 가득 채워 훌쩍 마셨다. 이젠 기침도 없이 조금 가라앉았을 뿐인 목소리로 말 이어갔다.
"아까- 자리 앉았을 적에. 나더러 어째 이러하냐 물었던가. 가벼이 말하자면 내 아버지에게 경거망동하다 혼쭐이 났고. 무거이 말하자면 가주께 내 행실 옳지 못 하다 책망 받고 벌까지 받았지. 누구도 허락 하지 않았는데. 어찌 내 마음대로 반려 만들고 삶을 추구하려 하느냐고."
두서없는 얘기인 듯 주절주절 늘어놓고 놓았던 곶감 들어 다시 한 입 물었다. 풀이라도 씹듯 우물거리는 얼굴에 감정 없었다. 그렇다고 취기도 없고. 아회 지었던 그 허망한 표정처럼.
예상치 못한 독함이 습격해 기침을 하니 정신이 아찔하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거나 그에 준하는 고통이 암습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속부터 시작해 머리 전체가 후끈한 것 같더니, 이내 멍해지려 하니 영 익숙하지 못하고 이대로도 괜찮은가 생각 들었지만, 그마저도 왜 괜찮다 생각해야 하지 싶다. 깊은 생각을 하더라도 금방 흩어지는 감각을, 아회도 인지하지 못했다. 하물며 취기 오른 탓에 감정적인 부분이 드러나니, 히죽 웃는 모습에 얄밉다는 듯 뚱하니 쳐다보는 것 아닌가.
"독하다는 걸 그리 물처럼 마시면서……."
아랫입술 느릿하게 툭 튀어나온다. 강정 자근자근 씹고 곶감 줄 적엔 툭 튀어나온 입술 언제 그랬냐는 듯 만면에 상냥한 미소 가득하다. 당신은 어느덧 연거푸 세 잔을 마시니, 시야 조금씩 늦게 따라오는 듯한 반 푼의 눈이라도 그 모습 정확히 담겼다.
"응. 맛있더구나. 탐이 날 정도야."
그런 존재가 있었구나. 동생들도 지금은 먹고 있을 것이란 대목에서 눈만 느릿하게 감았다 뜬다. 이야기를 경청하듯 자세 편히 변하니 세운 무릎 당겨 안듯 하며 거기에 제 고개 툭 기댄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안온하고 부드럽던 과거 이야기는 점차 무거워진다. 곶감 집어들어 기계처럼 씹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회는 술잔이 반쯤 채워지자 느릿한 손길로 잔의 아랫부분이 아닌, 윗부분을 집게처럼 집어 들었다.
"그랬구나. 그리하였어."
허망한 듯한 표정 반 푼의 눈에 담기고, 아회 눈 느릿하게 내리깐다. 의미없이 바닥을, 그리고 손에 쥔 술잔을 보던 눈길이 당신을 향해 올라간다. 상처 투성이에 숨도 고르지 못하였으나, 어떻게든 회피하고자 말 돌리던 모습을.
"화야, 두렵더니. 삶을 추구하려 든다 경을 칠까, 그렇게 계속 거부하면 네 삶을 끝낼까 두려운 것이더니."
잔 속의 금빛 술이 가볍게 일렁였다. 입가로 술잔 가져다대기 전에도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초점은 맞지 않아도 그 모습 가만히 지켜보고 있음은 확실하다.
"나는 네가 어떠한지 모른단다. 포기하고 싶은지, 그 사실이 쓴 것인지, 조언 구하고자 이야기 한 것인지, 극복하고 싶은 결의가 속에 있는지, 그도 아니면 자신에게 싫증이 나는지……. 다만 삶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란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
술잔을 들어 아무렇게나 넘겼다. 독한 느낌에 눈 잠시 감기며 미간에 작은 주름 패였다. 다행스럽게 기침은 나지 않는다. 슬슬 취기 오른 탓이다.
"가문에서 허락이 안 됐다 한들 네 잘못이 아닌 지당히 옳은 일이란다. 너는…… 허락하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해냈잖니. 옳지 못하다며,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 운명의 노를 저어 항로를 개척하였는데 섬에 도달할 수 없을 리가 없잖느냐. 낯부끄러운 말이다마는, 나는 그리 생각한다. 너는 삶을 추구하고…… 끝내 원하는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와 다르게 너는 가능해. 지극히 낙천적이며 이상론적이다. 본디 이런 성미였던 모양이다. 무엇에도 따스함을 찾아보려 하고, 그 따스함에서 사랑을 느끼며, 끝내 이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
"너의 삶이란다. 인간이 선택한 것 중 가장 나은 선택을 하였을 뿐이니 길은 열리기 마련이란다. 그러니 네 마음 가는 대로 하렴. 아버지의 진노가 반려 잃은 신수의 진노보다 무섭겠더니…. 찻주전자를 걷어차고 그 탁상에서 뛰어다녀도 인간이 대수겠느냐."
잠시 입 다문다. 벗어날 방법은 여럿 있겠으나 조언하지 않고 낙천적인 이야기만 하였다. 자신이 제안할 수 있는 것은 감히 짐작하건대 당신이 거절하겠지. 대신 나지막이 웃음 흘렸다. 부스스 흩어지는 웃음에 취기 묻어있다.
어느 부위가 쓸모 없을지는 영혼 떼어다 준 적 없어 모르겠다. 그는 알아서 하라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다 이어진 말에 눈 조금 키운다. 도술 도와주겠단 이야기에 비하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주제라. 사지 온전한 편이 생활에 편하니 되도록 신체 멀쩡히 유지하려고는 해도, 시각에 대단한 애착은 없다. 어차피 언제라도 돌연 기능 다할 눈이고, 맞바꾸다 외려 악영향을 받는다 해도 크게 달라질 처지는 아니니……. 느슨하게 팔짱 낀 채 검지만 까딱 들려 제 팔 안쪽을 툭툭 느린 간격으로 두드린다. 보라는 듯 고민한단 티 내는 것이었다.
"제 눈은 어떤 식으로 가져갈 생각이죠? 만약 지금 당장 내어준다 말한다면 물리적으로 뽑아 가기라도 하는 건가요? 그리고 또, 완전한 양도가 아닌 대여라 하니 이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기한은 정확히 얼마고, 어떤 조건으로 빌려줄 예정인가요? 당신의 눈은 기능적으로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질릴 만치나 캐묻기는 여전하지만 이는 백룡으로서 자제할 수 없는 본능 같은 것이다. 그보다는, 유현은 이번엔 무작정 발 빼고 보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늘 그렇듯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양 평온한 기색이었으나…….
"……저희 사감님이 누구를 닮았는지 알 것 같네요."
몸으로 익히는 익숙한 수업을 마주하게 되자 눈살 미묘하게 좁혀들지 뭔가. 설마하니 저 양반도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아니, 당초 누가 가르치든 간에 땅의 성질 자체가 이런 것이라면 어쩔 방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속히 가르침을 체화하는 수밖에.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약한 몸은 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시작하자마자 균형을 잃고 비실비실 바닥에 주저앉기부터 했다. 잽싸게 일어나는 것조차 생각대로 되질 않아서 한참 밍기적거리고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대로 버틸지가 관건이다. 과연 종잇장같은 몸, 이번에는 말을 들을까?
언젠가 소꿉동무에게 넌지시 제 얘기 흘린 적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것을 꾹 눌러 드러낸 적은 처음이었다. 그야 쉬이 할 수 있는 말도 아닐 뿐더러 어릴 적 그 날 이후로 제 얘기 할 만한 상대 만들지 않기도 했다. 얘기한들 현실이 달라지나. 제 처지가 달라지나. 입 밖으로 낼 수록 선명해지는 현실에 정신 놓지나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그러니 줄곧 저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도 알려하지 않으며 그리 살아왔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영영 그 주박 벗어나지 않으리라 몇 번을 되내었을까.
짤막한 얘기 내어놓고 고개 고정된 양 소반만 응시했다. 빈 잔 내려두고 곶감 씹으니 진득한 알맹이가 잇새에서 뭉개져 심히 불쾌하다. 기억 속의 맛은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되어 이제 맛 아는 것 먹어도 여물 씹는 듯이 기분 언짢을 뿐이었다. 하지만 술만 마셔서는 살 수 없으니. 억지로 한 입 두 입 목구멍으로 밀어넣고 그 위에 술 덮으며 살아왔다. 지금도 넘기기 무섭게 술 마셔서 입안의 잔재 씻어내듯이.
그리하였어. 아회에게서 말 들리고 시선 느껴졌으나 온화 돌아보지 않았다. 아회 취한 자세처럼 무릎 한 쪽 세우고 그것 만이 기댈 곳이란 듯 위태로이 기대고서 잠시 초점 놓고 허공 응시했다. 생기 없이 허공 보는 눈 가끔 살아있음 증명하듯 깜빡인다. 눈빛 그러해도 정신 놓은 것은 아니라 아회 하는 말들 차근히 귀담아 들었다. 취기 탓인가. 혹은 아회 본디 그런 사람이었나. 직전까지도 예상치 못 했던 언동이 낯설어야하건만 그렇지 않아 신기하다. 어쩌면 그들 호숫가에서 언성 높였을 적보다 조금 더 안쪽. 본래의 아회 엿본 듯 하여 되려 기분 생소해졌다.
"...내 오늘만 이 말 몇 번을 하는가 모르겠네. 무 오라비가 그런 눅진한 소리 할 줄도 알았나."
아회의 취기 어린 웃음 뒤로 제 실없는 웃음 소리 가늘게 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웃음 유지 못 하고 잠시 일그러지다 이내 잠잠해졌다. 덜컥. 술병 든 온화 각 잔에 술 채우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라비 말대로 할 수 있다면. 오라비 말처럼 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헌데 오라비야. 내가 살아있음으로서 누군가 해를 입을 것이라 해도. 그럼에도 내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옳을까? 그 누군가가 오라비가 될 지도 모른다 해도?"
술병 놓은 손은 제 잔 들지 않고 아회의 손으로 향했다. 그 가는 손 조심히 마른 낙엽이라도 다루듯 신중히 들어 제 쪽으로 당겨 제게 닿게 하려 했다. 평소 치던 짖궂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 한느 온화 표정 착잡했다. 아회 손 빼지 않는다면 그대로 손 끝으로 제 목 닿게 했을 것이다. 매끈한 살갗 아닌 그 살갗 마냥 달라붙은 검은 띠 위로. 조금만 문질러도 느껴졌을 것이다. 밋밋해보이는 띠에 복잡한 문양 촘촘히 새겨져 무언가 용도 있겠거니 싶은 느낌이.
손을 더 둘지. 거둘지는 아회에게 맡긴 채 말 계속했다.
"나는 가족보다 집안 내력이 문제요. 까마득히 옛날 어느 선조가 저주를 만들었지. 사람이 사람을 피로 묶는 저주. 주혈의 술이라 부르는 이 저주는 누구든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종으로 삼아 부릴 수 있게 해주나. 피와 피를 강제적으로 섞는 것이기에 동시에 부작용도 생기었어. 이 저주를 이은 자 그리고 엮인 자는 누구든 광증의 씨를 그 몸에 같이 품게 된 거요. 약만 잘 쓰면 일생 광증 발현하지 않고 온건한 삶 보낼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도 적지 않게 나왔지요. 광증은 한 번 드러나면 낫게 할 방도 없기에- 아니. 낫게 하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빠르니 전부 죽었소. 내가 열 두살 되었을 적. 가장 동경하며 따랐던 사람이 광인 되어 달려들었을 적에도."
한 마디. 두 마디. 말 잇는 동안 제 눈에만 보이는 핏물 서서히 차오른다. 주저앉은 다리 적시고. 허리 가라앉히는 핏물 속 붉게 물든 손 있었다. 크고 작은 무수히 많은 손. 어느새 거의 떨구듯 숙인 고개 아래로 이야기 이어진다.
"당시 그 밤엔- 그 방엔 나와 같은 아이들 한데 모여 자고 있었소. 어른도 서넛 있었으나 거진 아녀자들이라. 피에 눈 뒤집힌 이들이 날붙이 들고 들이닥쳐도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 하였어. 나라고 달랐을까. 그저 보는게 다였어. 내 앞에서 차례대로 죽어 떨어지는 육신들이 만개한 홍련화 흩어지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지. 그러다 내 차례 되었을 때. 내가 가장 따르고 아꼈던 사람이 내 목을 쥐고 가슴팍에 칼 꽂으려 할 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내 눈도 뒤집었어. 광증에 몸 내맡겨 그 사람의 손 뜯고 목에 여린 이빨 박아넣어 숨을... 끊었지. ...그 직후 달려온 어른들이 남은 광인들 죽이고 나는 살아남았으나. 이미 광증 터진 나를 어찌 할 수 있었을까. 본래라면 죽였어야 했을 숨이나. 이전에 나와 같은 사례 없었다는 이유로 차후를 지켜보자며 이것 걸어 살려두더군. 본래라면 광증으로부터 아이 지키는 금주이지만 내 것은 내 본능을 억누르고 언제든 나를 죽일 수 있는 목줄이네. 이것 버티는 기한이 성년 될 적까지 이니. 내가 무얼 하든 결국 이 학당 나설 쯤엔 내 삶도 끝인 게야."
제 목에 금주의 띠 둘러지던 그 날부터-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원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깊이 관여하지 않으며 다만 제 여생을 추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고작 열 두살이던 나이에 스스로 한 다짐 지키려 얼마나 애썼던가. 이제와 생각해보면 학당 들어올 적 혀 잃은 것은 그 여파였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사람 좋아했던 제가 더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제 목을 조였으니.
"내 오만방자함에 아버지는. 가주님은 화를 내신 것이 아닐세. 오라비. 그저 내 처지를 일깨워주신 것이지. 내가 무얼 이루고 얻은들 내 숨은 그들이 쥐고 있으니. 삶에 괜한 미련 갖지 말라고. 그러니 그런 벌을 내리셨지. 내 여태 귀히 여겼던 인연. 내 연모하는 반려님. 다 내려놓으라는 벌을..."
참으로 자비롭지 않나. 행여나 마지막 괴로울까 손수 그런 말씀 해주시는 것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술잔 들어 마신다. 그저 밍밍한 물과 같은 술 꿀꺽 넘기고 나즈막히 흘리는 말 있었다.
"그이가 화를 낸다 한들. 예서 나가지 못 하는 이가 무엇 할 수 있을까. 허면 적어도. 내 마지막은 그이에게 주어야지. ...지금은 그저 그것 만이 내 갈 수 있는 길 같어. 오라비야..."
낙천적이고, 이상적이며, 사랑을 찾는 이야기는 그렇게 좋은 조언도 위로도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잘 안다. 세상은 어릴 때 읽은 동화가 아니다. 그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따위의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을 위해서라면 발버둥 쳐야 한다. 그 발밑에 무엇이 깔려도 행복으로 외면해야 하는 세상이다. 신조차 정명하지 못하고 뒤집어졌는데 이상으로만 설파하는 온전한 행복이 존재할 리가 없다. 취기로만 한 꺼풀 벗겨진 속내를 드러내고, 아회는 눈을 감았다.
"술김에 뱉는다고 정정해 주련."
첫 술인 주제에, 술김에 뱉는다고 잘도 얘기한다. 웃음도 오래 가지 못하는 씁쓸한 세상 속에서 당신 또한 진실을 한 꺼풀 벗어낸다. 살아있음으로 해를 입는다는 말에도 여전하던 아회의 미소는 자신의 손을 쥐어 당신의 목에 댔을 적 옅어져 간다. 눈을 다시금 떠 검은 띠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예민한 감각으로도 무언가 새겨졌음은 알 수 있었다. 그 근원을 짚어볼 수 없을 터이니 손을 천천히 거두려 들었다.
"……."
실로 무례하나, 당신의 선조가 만든 저주는 욕심의 말로이자 업보란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쥐고자 피를 섞어내고, 광증을 품는 위험이 있어도 얻어내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한낱 범인인 자신은 그 의중을 알 수 없다. 수 대에 걸쳐 내려온 당신 또한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에 좋은 생각을 품을 수 없어 입을 다물게 된다. 혹시라도 가시를 쏟아내 원치 않는 상처를 입을까 싶어서. 날붙이 들고 들이닥쳐 수많은 살육이 벌어지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때 당신은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웠을까, 당신 또한 그렇게 누군가를 죽였다고 하였을 적, 광증이 꽃 피었으나 차후를 지켜보자며 살려두었다는 말을 직접 들은 당신의 기분은 어땠을까.
"내가 네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힘내, 다 괜찮을 거야, 희망은 있어… 그것이 모두 무슨 소용이니, 네 지금 느끼는 것이 그런 감정이라면, 그 감정이 승화되는 시간까지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지."
기실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끔찍했고, 지금처럼 내심 체념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음을 알겠지마는 거기까지다. 그 기분이 어째서 들었을까. 그 자체를 이해하기엔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을 해하려는 자를 죽였으면 칭찬을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자신 지키기 위해 날뛰어 광증을 얻었으면 영광의 증표라 귀히 여겨야 하지 않나. 눈 너머 감정이 침잠한다. 아회는 채워진 술잔을 다시금 한숨에 들이켰다. 독한 술도 연거푸 마시니 이치는 멀어지고 옳고 그름의 분간은 느슨해진다. 아회는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화야. 처지를 일깨운 것이라 믿고 그 길밖에 없노라 생각해도 좋지만, 지금 당장 속단하여 내려놓지는 말아, 방법은 많잖아."
상냥한 목소리다. 마지막을 논하기엔 너무 어리다며 다시금 이상론을 설파할 듯, 너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얘기할 것만 같은 담담한 목소리를 뒤로 아회는 미소를 지었다. 휘어 올라가는 입꼬리는 지극히 평온하여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끔 만드는 것만 같다.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미소였다마는. "네가 끔찍하게 여겨서 그럴 뿐이지." 날씨가 좋다는 듯 사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이 어렸다.
"선조의 저주에서 비롯된 부작용 하나로 운명이 정해졌노라 얘기하는 것도 억울한데, 주변에서는 그 운명을 일깨웠노라 꾸짖고, 그 끝을 멋대로 정해두며, 네 기본적인 권리를 휘두르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면, 그리고 자신은 수를 쓰고 싶지 않다고 굳게 다짐하면, 응, 어쩔 수 없지……. 하물며 나조차 이기심을 이유로 눈을 받지 않고 너를 돕지 않으니 체념하고 싶다면 말릴 명분이 없어……. 나의 업보가 있으니."
그 가면 산산이 부서진다. 낙천적이고 사랑스럽던, 그 모든 성미 또한 자신이라면.
"하지만 화야, 행복은…… 그리고 사랑은 쟁취해야 오는 거야. 실은 너도 알잖아. 얻은 것을 계속 쥐고 싶다면, 당연히 선택이 필요하지. 버릴 것은 버리고, 쥐어야겠다 생각하는 것은 쥐어야 한다는 걸……. 물론 찝찝하겠지. 어찌 생명에 경중을 재고, 광증 받아들이는 것이 쉽겠니?"
그 모든 성미를 불태우고 첨예하게 칼날로 만들어 벼려진 것도 자신이다. 온전히 술기운에 몸 맡기며 보드랍고 성긴 웃음 만면에 가득히 꽃 피워냈다.
"그러니까, 네 죄책감을 대신 짊어지면서 원망하며 회피하고 싶은 대상을 만들고 싶다면 얘기해 줘."
그는 상대의 위협적인 손짓에 눈 조금 깜빡거리기만 할 뿐이다. 부을 간덩이조차 없어서 겁나지 않은 탓이기도 하고, 원체 굼뜬 편이라……. 반응 시원찮으니 장난칠 보람 없는 인간이다. 혹시나 금 가거나 지문이라도 묻었을까 싶어 손 거두어지자 그는 안경을 벗고 천으로 렌즈를 닦았다. "안경에는 가급적이면 손 대지 말아주셨으면 하네요. ……아, 그러고 보니 당신도 지문이 있나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신수의 지문 여부까지 궁금해하는 건 아마 이 인간밖에 없으리라.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 제안, 저 외의 다른 인간들에게도 물어 보셨나요? 그랬다면 죄 거절당했겠군요."
아까도 영 불충분한 대답 주더니 이번에도 그렇다. 어느 정도 대가를 언제 치를지도 알려주지 않아서야 누가 혹하기는 할까? ……화유현이 그 혹하는 당사자이긴 하지만, 그는 생각이 그리로 기울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잃음이 확정된 눈이었고, 일이 잘못되어 원하는 만큼의 이득 얻지 못한다 해도 큰 유감이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달리 말해 웬만큼 상식 있는 인간이라면 무턱대고 좋다 답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제게는 꽤 나쁘지 않네요. 가져가시죠."
물론, 화유현은 상식에서 엇나간 인간이었기에 선뜻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미약하게 굳은 어조로 그가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인간은 땅에 발 붙이고 사는 편이 더 낫다 생각해요."
특별히 빠른 말투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조금 전보다 말하는 속도 미묘하게 빨랐다. 딴에는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다.
"척 지긴 모르겠고, 그저 소질 부족일 가능성은요?"
그게 이리도 신기한 일인가. 하기야 완전히 엉망인 게 아니라 몇몇 부문에서는 소질이 들쭉날쭉하니 특이해 보일 수는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에 관해 더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비틀비틀 다시 일어나니가 무섭게 또 바닥이 요동친다. 아무리 운동신경 없는 인간이라 해도 이 정도면 적응할 만도 한데, 종잇장 인간의 바닥엔 과연 더 아래의 밑바닥이 있을 것인가?
.dice 1 3. = 1
1~2.다갓님 이렇게라도 확률을 올려 보겠습니다(성공) 3.밑바닥에도 바닥이 있다는 걸 난 몰랐고
시야에 붉은 물 일렁인다. 출렁이며 올라오는 물 속에 잠겨 살았다. 성큼 불어나는 그것에 못 본 척 하였으나 고개 돌린다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한 것 아니라 한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 그 뿐이라. 날이 갈수록. 해가 거듭될수록. 저를 집어삼키기 위해 차오르는 광기의 핏물 앞에 그저 눈 감기만 하였다. 깊이 잠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망령의 손길 느껴져도 도망칠 생각조차 않았다. 가끔 눈을 떠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볼 뿐이었다. 늘 위가 아닌 아래를 보고 살았다.
위를 보면. 나가고 싶어지니까. 원하게 되니까. 제 처지를 잊고 위로 향햔 손이 잡은 것이 미약한 거미줄 임을 깨닫는다면 지독히도 슬플 테니까.
아회의 손 가져온 것은 저였으나 거둔 것은 아회였다. 그 손이 제 목의 띠 매만지고 물러나는 것 붙잡지 않았다. 손길 닿았다 멀어지는 것 느끼며 조곤하게 이야기 풀어놓았다. 류 가의 금술에 대한 것. 사실 밖으로 누설해서는 아니되는 이야기지만. 아회에겐 어쩐지 다 풀어놓고 싶었다. 보기 드물게 낙천적인 말을 해서 그럴까. 그런 아회에게 위로 받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체념한 듯 제 마지막은 반려에게 주어야지 읊조렸지만. 그저 온전히 그러하고픈지도. 혼란한 듯 알 수 없었다.
재차 술병 들었다. 본래 이리 들이키는 것 아닌데 오늘은 날이 제대로 잡혔달지. 내용물 움푹 줄은 것 보고도 또 잔에 금빛 술 채웠다. 아회의 잔에 반절. 제 잔에 가득. 헌데 이 오라비. 계속 주어도 될까. 착잡한 기분 사이에 그런 생각 불쑥 드는 것 보니 저도 참 어쩔 수 없나보다. 얌전히 술병 내려놓고 아회 보았다. 술김에 그렇다 생각해 달라더니. 술 들어갈 수록 본질에 가까워뵈는 것은 기분 탓일까.
녹슬어 굳게 잠긴 함 두들겨 열었더니 천상에서 내려온 듯 보드라운 천 드리워있어 참으로 곱다 생각했다. 그래. 누구나 이리 진귀한 것 품고 있지 싶었는데. 천 너머 예리한 칼날 서늘히 빛 발하였다. 그 날이 제 얼굴 비추며 속삭여온다. 내 너를 다 알 수는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나. 내 할 수 있는 것은 있으니. 네가 바란다면 그리 해주마.
어쩜 그리 아름답게 웃으며 말할 수 있나. 그저 술기운일까. 온화 고개 비뚜름히 기울여 아회 바라보았다. 곱게 웃으며 속삭이는 아회 물끄러미 응시하다 픽. 가는 웃음 흘렸다. 그제야 얼굴 조금 풀려 웃음 서렸다. 부드럽게 속삭여오는 말에 사뭇 진지한 표정 짓다가도 얼마 가지 못 하고 슥 풀렸다. 평소만치는 아니지만 느슨해즌 표정의 온화 그리 말했다.
"오라비야. 거 몇 잔 마셨다고 이리 취했나. 응? 깜빡 잠들겠는데. 엎어지기 전에 이 동생 무릎이라도 내어드릴까?"
그러면서 제 허벅지 찹찹 두드리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농은 아니고 정말 눕는다면 내어주겠지만 아회가 그럴까. 술기운 올라온 것 보면 그럴 것도 같은데. 어느새 시덥잖은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고마우면서도 낙심하게 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겉으로는 기분 제법 나아진 티 내었다. 묘하게도 정말 그랬으니.
"실은 나도 어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여. 방금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은. 눈 감고 뜨면 그건 아닌 것 같고. 돌아서면 또 아닌 것 같고. 하루 한 자리에서만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하니 어찌 내 몰골 챙길 여력이 나겠나. 허나 아무리 내 고민스럽다 한들 누군가에게 내 감정 대신 얹어주고 원망 받아내게 할 생각은 없네. 그리하기엔 마땅한 대상 없고. 고통스럽다 한들 결국 이것 내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무엇도 아니되리란 걸 알거든. 그래.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쥘지. 그리고 무엇을 끊어낼지. 내가 정해야만 하는 것이지."
그 모든 방식을 체념으로서 수용할 것인지. 광증으로서 베어낼 것인지. 결국 전부 제가 택할 일이었다. 그 말 제게 되새기듯 손 한 번 쥐고 펼쳤다. 빈 손 멍하니 보다가 들어올려 아회의 볼 콕 누르려 했다. 히- 하고 웃으며.
"오라비에게 얘기한 건 일전에 그 속 내가 들쑤신 전적도 있고. 이 꼴 하고서 대충 얼버무리면 안 하느니만 못 하잖나. 내 어찌 이 꼴 되었고 내 내력이 그러하다- 그것만 알아주면 됐네. 들어줘서 고마우이. 피 나눈 오라비들보다 아회 오라비가 제일이구만."
속없는 듯 실실거리며 말하고 무릎에 고개 툭 기댔다. 취기 없는 붉은 눈이 천천히 깜빡이고. 가늘게 벌어져있던 입술 문득 그런 물음 꺼냈다. 슬그머니 화두 돌리듯. 그냥 궁금한 듯.
치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손을 보던 그는 당신의 손을 보더니, 당신의 지문과 동일한 모습으로 지문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 있었지? 거절해서 나무에 올렸어. 근데, 걔가 살아 돌아왔다면 걔한테도 눈 빌려줄 거야. '
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치미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거의 다짐이었습니다.
' 나는 많은 걸 가져가지 않아. 네 한 쪽 눈 시력을 영구히 나에게 내놓으면 되니까. 가끔 내가 네 몸으로 뭘 볼 거란 것 정도? 그리고 내가 원할 때마다 원하는 장소로 가서 전체를 보기만 하면 돼. 안 보면, 뒹굴 정도로 굉장히 아파질건데ㅡ 뭐, 그건 내가 신경쓸 건 아니고. 대신에 가장 멀리, 가장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거잖아? '
이, 이 나쁜!!! 치미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 어느 쪽 눈을 내놓을래? '
당신의 대답에 따라, 가져갈 생각인 듯 합니다.
' 보통 인간도 하늘 날고 싶어하지 않아? ' ' 아우들도 나한테서 나는 법 배웠는데. '
신기한 인간이네, 치미는 덧붙이듯 말했습니다. 그는 무언갈 재어보듯 유현의 두 눈을 바라봤습니다. 어느 쪽으로 할 지 고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아무리 소질 없다고 해서 이 정도로 소질이 없을 리 있나? '
치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습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유현이 중심을 잡는 걸 보곤 으음. 하고 턱을 쓸었습니다.
' 잘 하네? 어떻게 버티는지는 안 것 같고. 그럼 동시다발적으로는? '
그가 한 쪽 발을 탁, 탁 두 어번 정도 땅에 두드렸습니다. 당신의 주변에 동시다발적으로 진동이 느껴집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품은 마음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를 쉽게 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고, 누군가의 감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며, 그 아픔을 같이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가능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회라는 존재는 삭막한 사람이며, 누군가의 감정에 공감하기엔 자신 몸 보존하기도 힘든 지경인데다, 아픔을 품어주기엔 아픔을 줄 수도 있으니. 말을 고르고 골라서 기껏 위로한다고 쳐도 기만이 되는 건 아닐까, 심장에 비수를 꽂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큰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괴로워하면 어쩌나……. 술잔이 채워지고 마실 때마다 거듭되던 고민은 점차 흐려지고 이치를 분간할 수 없게 되다, 당신에게 속삭이게 된다. 괴로움을 떠맡길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웃음이 서리니 이 즉슨 마주 웃어주는 행위이라. 보드라운 미소 면전에서 떠나지 못하고 취했냐는 물음에는 아예 작은 소리 내어 웃어버린다. 숨결 두어 번 뱉는 것에 가깝지만 웃음이라 확실하게 칭할 수 있으리라.
무릎을 베고 누우면 편하겠지, 필시 그럴 터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어도 반려 있는 사람 무릎에 어찌 머리를 베고 누우랴. 아무리 취했어도 이 정도는 분간이 가나 보다. 자그마한 담소를 보아 하니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다마는, 이걸로 정말 괜찮은 걸까 싶다. 그마저도 술기운이 괜찮노라 멋대로 단정 지으려 들기에 아회의 속내는 다시금 자아와 술기운의 싸움으로 혼잡해진다.
"……이해한단다. 네 일이지, 응…. 무얼 한다 한들 네 인생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는 것 알아주렴."
그리고 마음이 바뀌거나, 정하다가 괘씸한 존재가 생기면 꼭 얘기해 주고. 소곤소곤 얘기하다가도 볼을 콕 눌리자 눈썹이 위로 슥 올라간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듯 눈을 크게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사람 좋게 히, 하고 마주 웃어버린다. 웃음이 이리도 헤픈 자였는지 원.
"응, 알아줄게. 앞으로도 얘기하고 싶은게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하고……."
술잔을 다시금 비우려는 손짓이 느리고 몽롱하다. 아회 본인은 모르지만 취기 탓에 손가락에 술 찰랑여 두어 방울 튀었다. 그럼에도 쭉, 들이켰을 적 당신의 질문에 한 방울이 결국 입에 들어서지 못하고 주륵 흘렀다. 소매로 아무렇게나 입술에 흐른 술 닦아내며 아회는 탁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형님."
아직 소매를 입에서 치우지 못했지만 긴 속눈썹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깃털처럼 호선으로 나부끼고, 눈썹은 살짝 내려가는 것이 입매까지 미소로 온전히 이루어진 모양이다. 우리 형님은, 다시금 그렇게 운 떼더니 당신을 온전히 마주하며 사근사근 이야기했다.
"설산을 호령하는 영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귀한 피를 물려받은 직계, 세상에 한 번 날까말까한 천재, 출중한 인품으로 많은 사람이 따르고 닿고 싶어 하지만 한낱 인간이 모질고 험한 설산을 오를 수 없으니, 그저 그 위에서, 해 바로 아래에 우뚝 서 역으로 비치는 그림자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아회는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형님을 보았던 때를 어찌 잊을까. 아득히 닿지 못할 설산 위에서 고고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하던 그 고아함을, 흐르는 기품을, 가슴에 선명하게 내리박히던 동경을. 자신은 닿을 수 없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을. 후한 평가를 뒤로 아회의 눈이 점차 침잠한다. 비록 무언가를 담지 못하는 눈이다만 그 순간만큼은 선명하고 진득했다.
"그런 존재가 한낱 필부인 나를 위해 직접 내려왔단다……. 오로지 나를 사랑해주었고, 젖은 몸도 품어주시며, 그 밤을 같이, 단 둘이서 지새웠으니, 그 작태가 참으로 역하고 증오스러운 분이지 않니. 나는 당장이라도 마주하면 그 자리에 침을 뱉고 싶고, 다가오면 멱살을 틀어쥐어 고운 옷차림을 망치고 싶으며, 눈을 마주치면 그 눈을 후벼파고 싶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 그 행복한 원인을 걷어차고 끔찍한 노성만 지르길 바란단다. 죽기 전엔 내 이름을 부르며 저주하길 바라고, 죽는 순간엔 지켜보며 웃는 존재가 나였으면 해……. 필히 그 순간은 아름답겠지."
음험한 저 밑바닥 오만 감정이 그득히 깔린 눈빛. 내버려 두면 일을 칠 것 같은 심해 속의 눈. 깊다 못해 눈 전체에 들어찬 증오심과 환멸, 죄책감, 자기혐오, 그리고……. 소매로 가린 입은 여전했고, 아회는 시선을 내리깔며 천천히 눈을 피했다. 깊은 호선은 더 가늘어지다, 취기에 뺨이 발그레 달아오를 적 소매 너머로 가느다란 미소가 드러나자 무언가가 모습을 잠시 드러낸다.
"내가 기억하는 형님은 말이지, 오로지 나만을 사랑해주는 존재였거든. 예나 지금이나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거야. 평생. 만일 바뀐다 해도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소지를 잘라버리면 평생 내 원하는 만큼 약조할 수 있고, 목을 자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게 되겠지…. 그러니,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고, 죽여도 내가 죽여야 할 만큼 증오스러운 분이란다."
증오로 잘 포장했지만 애정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운 말이요, 사랑이라기엔 그 범위를 재고해야 했다. 가족의 애정이라고 보기엔 그를 넘어서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끔찍하기 그지없는 무언가를 감히 감정이라 표할 수 있을까. 술기운이 순간 드러난 끔찍한 감정을 숨기며 다시금 비단처럼 보드랍고 몽롱한 웃음을 얼굴에 그려준다. 입을 가린 소매를 내리며, 빈 잔을 까딱이는 손길이 느릿하다.
지문 없는 손이라니 신기하군. 아마도 매끈했을 손 빤히 바라보았다. 유현은 지난번 치미의 입 찢어지며 저를 씹어먹으려 했던 그때의 모습을 돌이켜 본다. 상황이 급박했고 또한 시야 불분명해 또렷하게 보진 못했지만, 형상 자체가 이질적으로 어그러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인간의 피부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라면…… 적어도 본모습이 인간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으리란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리고 태연하게 꺼내는 저런 소리도 정상 아니고. 이제 보니 제안이 아니라 강요였던 모양이다. 저 작자가 처음부터 어떻게든 뜻 밀어붙일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순순히 응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유현은 땅에 발 붙이고 살고 싶었다…….
"하면 요구의 빈도는 어떻죠? 지나치게 잦은 빈도, 가령 하루나 이틀 사이 몇 번씩이나 되는 빈도라면 어렵겠네요. 그리고 당신이 무언갈 보길 원하게 된다면 저 역시도 알게 되는 식인가요? '보지 않음'의 기준은요? 시간제한이 있는 건가요, 제가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경우의 의지를 기준으로 하는 건가요? 그리고, 계약의 파기가 가능한지도."
역시나 질릴 정도로 묻는 말 많다. 물론 이 정도도 인간식 협상이나 계약 조항에 비협조적인 치미에게 맞추어 간략하고 대책 없이 치르는 계약이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왜 저리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제안하나 했더니, 역시나 목적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학원 내부에 적당히 쓸 눈 하나 심어놓는단 뜻이잖은가.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문제라도 되나? 학원 보안은 진작에 엉망이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불의의 위험 닥쳐 온다 하더라도 그는 책임감이나 후회를 느끼진 않을 터였다. 유현은 모든 것을 흥미 위주로 바라보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것보다 뛰어난 눈 빌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탐구열과 의구심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부당한 계약이나 제 눈의 안위 같은 것쯤이야 아무래도 좋다. 유현은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였다. 무엇이든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마음 이끌리는 대로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태도, 그리고 눈빛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이 짐작은 아마 틀린 데 없으리라. 그는 쓰고 있던 안경 천천히 벗어 내리고는 허공 바라보며 짧게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역시 버린다면 이쪽이다.
"왼쪽이요. 혼동하실까봐 누차 말하자면, 회색 쪽을 말하는 거예요."
제 왼쪽 눈을 분명하게 가리키기까지 하니, 치미라는 양반 또 말 끝까지 안 듣고 저지를까 하는 걱정 여지껏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땅과 씨름해야 했다. 치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까닭은 상대가 대답할 의사 사라지게끔 하는 소리를 해서였지만, 무엇보다도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방법이 조금 도움이 되기는 했고 어떤 의도로 이 짓 하고 있는지도 알지만, 어째 느는 것이라곤 쥐꼬리만한 균형감각밖에 없는 듯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는 치미 덕에 체력 보충을 해야겠단 생각 이번에만 벌써 두 번째로 하는 중이다…….
하필 계약하는 상대가 본인 좋을대로 말하고 사는 용이라, 도움이 안되어서 계속 물어보게 만드는 유현이와 유현주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도캡이 뭘 말하는지는 아마ㅡ.. 다들 아시리라..... 예.. .개떡같이 말하는 거 같은데 그거 제가 졸려서 지그금 어휘력이 약간 많이 안좋아여....
>>111 치미의... 추종자...? 유현이가 들으면 눈 가늘게 뜨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들었다는 표정 짓는대요~😗거래는 했지만 치미형님 유현이한테 안 좋게 찍히셔서....(?)
앗 절대 들키지 말아아지 오늘부터 한쪽눈에 흑염룡 봉인됐다는 설정으로 안대 하고 다녀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온화 혼내도 오구둥둥은 같이 하나고요ㅋㅋㅋㅋ!!!! 역시 온화가 최고야... 못 때리고 있으면 더 뺀질거리니까 정수리에 핵꿀밤이라도 먹여주는 거예요!ヽ(•̀ω•́ )
>>112 안 좋게 찍혔어? 어... 갈굼의 낌새가 느껴졌?나? ㅋㅋㅋㅋㅋㅋ 요 눈치 빠른 뇨속! >:3 가리고 다니면 안 들출거 같으냐 보이자마자 당장 옆구리에 끼고 안대부터 아웃시켜버린다~~ 그리고 핵꿀밤 꿍! 한 다음에 무릎에 앉혀놓고 무슨 일 있었는지 낱낱이 불으라고 다 불때까지 안 놓아준다고 어- 어... 설득(?)해야지~
절반 농으로 제 허벅다리 내어줄까 했더니 머리카락이라도 닿았다간 목숨 보전하기 어렵겠다는 둥 한다. 얼근히 취해보이는데 저 정도 사리분별은 가능한가 보다. 고개 툭 꺾이면 그대로 폭 쓰러져버릴 것 같은데. 정 아니면 베개라도 주냐. 그리 말하고 아회 빤히 보았다. 그 외에는 뭐. 농 치는 것이나 연신 샐샐 웃는 것이나. 어딜 봐도 취해보인다. 취해서 홍홍한 아회를 학당 안에서 보게 되다니. 제 얘기 털어놓은 것보다 귀한 것 보는 날이거니 싶었다.
"괘씸한 존재라. 그래. 영 거슬리는 것 생기거든 얼른 쫓아가 일러드리지."
취기에 하는 말들이래도 듣기에 나쁜 것은 아니라. 외려 듣기 좋은 말들 뿐이라 괘씸한- 이라 했을 적 누군가 떠올랐음에도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뵈도 제 오라비고 그의 벗이다. 졸업까지 얼마 안 남은 지금. 굳이 사이 틀 이유는 없으니. 다만 곧 가닥 잡힐 제 결심 고하기 위해서라도 맡작업은 해두어야지. 다시금 넘기는 술 한 잔에 그런 생각들 같이 담겼다.
그런 푸근한 분위기가 제 물음 하나에 슬그머니 일변했다. 아회의 형님은 어떤 사람이느냐고. 궁기- 가 아니라 아회가 기억하고 아회가 알고 있는 형님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고. 취했어도 당황한 듯 입가에 술 한 방울 흘린 아회가 그것 닦듯 소매 올렸지만. 그 소매 내려가는 것은 한참 뒤였다. 모든 말이 다 흘러나온 후에.
아회가 차근히 풀어놓은 것은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는 듯한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 지금도 생생한 기억을 손 끝으로 훑으며 읊조리는 고저 없는 목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격렬한 흔들림 없이 우아하게 나락으로 떨어져내려 이윽고 그 바닥에 닿은 것 같은- 닿아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빛을 잃은 눈이 저렇게까지 선명히 감정을 담을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부드러이 형님이라 읊조릴 때부터 아회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저리도 진한 것이었나. 적룡의 기질 터뜨릴 적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 있었다. 차라리 잿더미 들쑤셔 화상 입는 것이 백번 천번 나을 만큼.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 할 깊고 스산한 감정 같은 무언가의 편린을 아주 잠깐 엿본 기분이 들었다. 혹은 그마저도 착각이거나.
현실과 현실 아닌 곳 사이 어딘가 헤매는 듯한 정신 되돌린 것은 아회가 술 청하는 소리 들렸을 때다. 그 순간 흠칫. 하며 제 몸 제 자리 실감한 온화 멍한 눈으로 아회 보았다. 그리고 끔뻑끔뻑 하다가 고개 끄덕이며 술병 집어왔다. 이도 저도 아닐 땐 그저 마시는게 답일 때도 있지. 암 그렇고말고.
"어. 어어. 그려. 마셔야지. 응."
말도 좀 어벙하게 했지만은 술 따르는 손만큼은 정확했다. 각 잔에 술 채워주곤 병 내려놓기 무섭게 바로 잔 비웠다. 한참 마셨음에도 갓 마신 듯 목구멍 찌르르한 느낌에 고개 돌려 작은 기침 내뱉곤 그제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었다.
"내 일 잘 풀릴 것 만큼. 오라비 일도 잘 풀렸으면 싶구만. 그리도- 그렇게도 무서운 것. 속에 품고 어찌 평생을 살까. 언젠가 헌 옷 벗듯 훌훌 놓는 날 오길 바라. 진심이여."
그 날의 형태는 아회가 정할 것이니 그저 그런 날 어서 오길 바란다 말하고 아회 보았다. 멀거니 뜬 눈 두어번 깜빡이다 휘릭 굴러 얼굴 옆으로 향한다 싶더니. 막을 새도 없이 온화 손 올라와 아회 귀를 건드리려 했다. 그 귀에 걸린 검은 귀걸이를 말이다.
"이잉. 내 이것 묻는다는 것 여태 깜빡했구먼! 몸에 걸치는 것 고작해야 비녀 한 벌이던 오라비가 왠 일이랴. 응? 것도 요로코롬 시꺼먼 것을 보란 듯이 달았네잉. 누가 주었는감? 아이구. 혹여 그 누가 손수 달아주기라도 했나? 요래 내 방 올 적에도 한 것 보면 말이네-"
여느 계집아이 떠들듯 조잘조잘 늘어놓으며 검은 귀걸이 유심히 살피려 했을 것이다. 직전까지 그런 얘기 해서 그런가. 새까만 귀걸이에 혹시-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연스레 무시하고 어서 얘기해보라며 아회 채근하기나 했다. 그 방정맞음으로 분위기 띄우려는 듯이.
언제까지고 방에만 있으면 나을 것도 안 낫는다는 말 들었다. 수일에게 말이다. 아. 수 오라비가 한 말만 아니었으면 기분이 좀 덜 더러웠을 것을.
그래도 틀린 말이 아니니 해 질 무렵 산책을 나갔다. 두루마기 헐렁하게 걸치고 밖에 나가 학당 안을 느긋하게 돌아다닌다. 한 손은 허리에 맨 역린이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걸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결국 정원수 사이 그늘진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으휴- 하고 한숨 몰아쉬어야 했다.
역시 그 때 좀 더 필사적으로 도망칠 걸 그랬나-
잘그락.
"으응?"
바닥 짚은 손에 무엇 걸려 집어보니 아니나다를까. 별사탕이다. 만쥬 때 마냥 시간과 장소 가리지 않고 나오는 이것에 피식 실소했다.
그래. 뭐라도 보여줘라. 기분 전환이나 하게.
뚜껑 열어 양 슬슬 가늠해보고. 입 안에 쏟아넣었다. 으적으적.
.dice 1 4. = 3
1. 과거를 환상으로! 2. 숨겨진 진실을 한 번! 3. 무지개를 토해보자! 4. 동물의 귀와 꼬리가 뿅!
류온화의 오늘 풀 해시는 자캐가_생일인데_아무도_몰라준다면 음~ 아무에게도 말을 안 해서 몰라주는 걸 테니까 딱히~? 온화 본인도 가끔 깜빡할 걸~ 뒤늦게 알고서 너 언제 생일이었네 왜 말을 안했어 이런 말 하면 히히 웃어넘기지~ 늦게라도 뭐 좀 줄텨? 하고 능청 피우거나~
TV에서_귀신이_기어_나온다면_자캐는 에? TV가 모죠? (댕청) 도화엔 없는 걸~ 비슷하게 치환해보면~ 책에서 요괴 같은게 튀어나오려고 한다던가? 그럼 당장 역린이로 쑤신 다음에 활활 태워버려야지~ 그 다음 잿가루는 바다에 뿌려버린다~ >:3
자캐식으로_난_널_더_이상_못_믿겠어 오호~ :3
"어이. 보소. 하 이거 참 나 웃음도 안 나오는 구만. 네 전에 내게 어찌 했는지 기억 안 나는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무엇 했는지 기억이 안 나? 허. 허 참! 가증스럽긴... 헛소리 그만하고 봐줄 때 꺼져. 나는 더 이상 널 믿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아무리 유현이 저 좋을대로 구는 인물이라 해도 저만한 수준은 아니다. 정확히는 저만치 방종한 행동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역시 인간도 아닌 데다 저리 굴어도 될 힘이 있어 그런 걸까. 속내 어찌되었건 실질적으로는 평범한 소시민이자 미성년 학생밖에 되지 않는 그로서는 탐탁지 않은 상황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능력 없다. 지난번에도 간신히 도망치는 것밖에 하지 못했지 않나. 그마저도 사감이 막아주어 산 것이지, 다른 곳으로 향했더라면 결국 탈진해 잡아먹히는 운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뭐, 제게 거부할 권리 없다면 그냥 진행하시죠. 답 정해져 있는 마당에 이것저것 견주어 보는 것 무의미하고. 당신 말대로 그리 비싼 값은 아니란 건 맞으니까."
더럽게 까다롭군. 유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속된 표현은 쓰지 않는 편이었으나 저 자의 성미 표하기엔 이 말이 제격이라. 그에 맞추어 태도도 미묘하게 불손해진다. 그다지 예의 차리지 않고 싶은 기분이냐면 그렇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억울한 상황에 대한 불만과 분노라기보단 그저 저 작자 곁에 있기 꺼려진다는 쪽의, 말하자면 귀찮음과 불편에 가까운 태도였다. 사실 그리 분통스럽진 않았던지라……. 날 적부터 죄인의 핏줄이며 제 근간조차도 당초 제 것이 아닌데 종살이 하기쯤이야. 그는 한쪽 눈썹 치켜올리며 재촉하듯 상대를 바라보았다.
죽이는 상상 해 보라면서 몰입을 어렵게 만드는 소리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 짧게 그런 생각 스치다가 이내 지워내었다. 잡념 떠올린 시간에 가르침 따라가는 편이 더 나으리라. 그나저나 상상은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 건가? 우선은 저 자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땅을 엎어 보려 한다.
앗 온화 진단이잖아!!!! 호로록!!!! >:3 읽고 가장 먼저 감상 포인트 생각난 건 맛 부분인데, 지난번에 온화는 매운 거 잘 못 먹는다고 했던 것 같고~ 매운 건 미각이 아닌 통각이고, 맛 잘 못 느끼는 입맛에는 매운 게 너무 강한 자극이라 잘 못 먹는 걸까~하는 궁예가 생각났어요🤔
욕은 원래 진심전력을 담을수록 더 기깔나고 생생해지기 마련인데, 진심으로 욕을 하기엔 이 인간 성격이......(유현: 오... 흥미로운데 더 해보세요)(🤦♀️) 애초에 욕을 할 정도로 쉽게 화를 내지도 않는 성격이고, 욕을 자주 하면 어휘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라 일부러 자제하는 편이기도 하네요.
더럽게 까다롭군 ←이 정도도 유현이 한 서술치고는 굉장히 과?격?한 표현이네요. 그 이상의 욕은 시켜 봐도 시리한테 한국어 시키는 수준으로 영혼이 없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
아녀자의 것을 어찌 함부로 사용하랴, 하물며 아회에게는 휴대용 베개가 있었다. 도술로 드러내는 꼬리를 베개라고 칭할 수 있겠냐마는, 아회의 꼬리는 여타 평범한 범의 것이라기엔 더 크고, 두꺼우며, 북슬북슬하니 털이 길어 범 닮아 줄무늬만 있는 영물이나 장모종 고양이의 것에 가까웠으니 충분히 사용할 수도 있을 법하다.
"으응. 그렇지이."
죽일 수 없다면 쥐어 패는 방법도 있겠거니. 보드라운 분위기에서 속삭이나, 과거에는 필히 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으리라. 그래, 본디 상냥함이란 그 안을 더 깊게 바라보아야 진정한 속내가 드러난다 하지 않던가. 풀어졌다면 당연히 나오고, 그 너머를 술을 통해 본다면……. 선인도 그 안의 심연 있기 마련인데 과연 필부가 없으랴. 더 했더라면 더 했지 덜하리는 없으리라. 아회는 결국 속내를 풀어놓고 만다. 그것도 끔찍한 일부를.
"……후흐."
그래, 일부를.
고해성사 끝나고 세상 모든 달콤한 것 끌어안고 세상 사랑스레 웃는 모습에서 괴리감 선명히 느껴진다. 과거에 있던 온통 달콤한 기억과, 어느 순간 깨져버리고 이지러진 증오가 함께 공존하더니 그 밑바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겠노라 꿈틀거린다. 아마 이 의지가 바닥난다 한들 감정은 억지로 삶의 끝을 보고자 뒤틀리며 육신을 움직이려 들겠지. 어쩌면 그 감정이 모든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르나, 그 깊이를 감히 필부가 알기엔 마치 신이 내린 한때의 저주처럼 너무나도 깊고 아득하였다. 모두 '형님'이라 불린 자의 작품이리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자의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거리가 있지 아니한가. 그리 믿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으응, 천천히 마셔야지. 그렇지?"
그러니까 술잔 채우는 것을 늦게 깨달았을 테야. 아회 상냥한 웃음 만면에 그려내고는 잔 받았다. 당장 마시지는 않지만 곧 마실 것처럼 술잔 가만히 들고 있으며 당신 응시했다. 다행스럽게 그 끔찍한 감정은 사라진 듯하다. 다시금 심연 속으로 기어가, 그 속에서 암약하고 있으리라. 금빛 술을 몇 번 찰랑이던 아회는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술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취기가 올라 당최 어떤 맛인지, 어떤 느낌인지도 너무 쉬이 잊어버렸지만.
"고마워, 너밖에 없구나…… 응, 네 일 잘 풀리듯, 나의 일도……."
무서운 일인지는 모른다. 그저……. 속내로 삼킨 생각을 뒤로 아회는 당신을 순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내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을 새도 없이 귀를 건드리려 했으니 당연하다. 잔을 내려놓는 순간을 일부러 노린 것은 아닐 테고, 궁금증 때문이겠지. 하지만 닿으면 안 된다는 본능이 먼저였기 때문일까, 품 속에 숨겨진 검붉은 부적이 소리 소문도 없이 불탔다.
"ㅇ, 아, 이건, 그게……. 그러니까."
귀가 있을 곳에 귀가 없고 대신 머리 위로 무언가 돋아나니, 검은 바탕에 흰 얼룩, 속은 선홍빛 어린 범의 귀요, 품 넓은 옷 사이로 두툼하게 툭 튀어나온 것 있으니 일전에 장모종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어림잡아 세 척에서 네 척 되는 기다란 꼬리였다. 아회는 자연스럽게 꼬리로 입가를 꾹꾹 누르며 뺨을 붉혔다. 귀걸이의 존재가 자신도 익숙하지 않고 영 수줍다는 듯.
"ㅇ, 영 사감님이 선물로 각인해주신 거란다. 학당으로 쉬이 돌아가라고……. 그래서, 함부로 만지면 그 장소로 이동이 되는 주술이 걸려있어서, 만지지 못하게 해서 미안. 네가 학당 문으로 날아갈까 싶어 그만."
더 얘기하면 괜히 부끄러워. 괜히 꼬리를 합 물어 입을 다문 아회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도톰한 꼬리 끝이 몽실몽실 살랑였다.
점심이 되면 잊을 것만 같지만 답레를 쓰는 육신은 동일하니까요... 나의 육신은 무의식을 알아서 잘 읽겠지요... 응, 이상한 말이다마는 그래요. 괜찮을 거야... 잠들고 잊겠지만 해야 할 일을 했다 믿을래요... 응... 그런 거야... M자 탈모 발레리노 둘도 인정했는4ㅓㄹ....
술 배울 적 가장 먼저 들은 말 있었다. 술은 마시되 술에 취하지 말라고. 마시면 필연적으로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술인데 어떻게 취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 말 떠오를 때마다 종종 궁금했는데. 오늘에서야 알 것 같다. 아마도 어렴풋이겠지만 말이다.
낭낭하게 술기운 오른 아회는 자잘하게 이 말 저 말 잘 하더니 슬쩍 던진 물음에 평소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을 부분까지 틈새 정도나마 내비쳤다. 정말 뜻 밖의 수확이었으나. 동시에 여태 마신 술이 핏속에서 싹 물러가지 않을까 싶을 만큼 깊고 어두운 심연이었다. 무서운 것. 온화 그것 그렇게 표현했다. 흉흉하다던가 음험하다던가 음습하다던가- 그런 말 많지만 다 집어치우고 딱 하나. 무서운 것이라 하였다. 제가 가진 깊이로는 재단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만큼 깊고 깊은 무언가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으니.
게다가 그런 것 품고서 저렇게 웃는 이를 어찌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아회 사랑스레 웃을 적 제 내장까지 소름 돋는 착각 들었다. 그 쭈뼛한 감각이 아마 오늘을 오래도록 잊지 못 하게 되는 계기 되리라. 모든 것이 잘 풀린 후라도.
"...그런 무서운 소리 해놓고 웃긴."
술 따르며 툭 하니 중얼거렸다. 나즈막히 뱉은 말이었으니 안 들렸을 수도 있겠다. 하물며 지금 같은 상태로는 들리는 것도 듣는 것도 가물가물 할 지도 모르지. 어물어물 하는 것 보라. 먼저 술잔 비우고 저를 보는 아회의 시선 잠시 마주했다. 술로 번뇌 씻은 듯 말간 눈동자가 색 잃은 구슬 같다. 그랬던 눈이 제 돌발행동에 동그랗게 커졌다. 놀랐구나- 하고 놀리려는 것도 잠시. 손 대려던 귀 없어지고 대신 생겨난 귀와 쑥 튀어나온 꼬리의 등장에 쭈뼛함이니 무서움이니 싹 날아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역시 술 제법 마셨으니 말이다. 단숨에 미소 활짝 피며 분위기 일변했겠지.
"뭐- 뭐야 이거?"
처음 반응은 그저 깜짝 놀란 듯 했다. 눈 커지고 입 딱 벌어지고. 평소 말투 잊고 그리 중얼거렸으니. 하지만 아회에게 불행히도 온화의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뭐야. 뭔데 뭐야 이거! 세상에 세상에나-"
귀걸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말 들리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온화 그저 눈 반짝반짝 빛내며 귀와 꼬리 번갈아보고 있었다. 보기만 했을까. 슥 옆으로 돌아앉으며 허공에 수상한 손놀림을 하는가 싶더니 대뜸 아회 끌어안으려 했다. 무슨 짐승 습격하듯이 와락 안고 한 손으론 귀를 한 손으론 꼬리를 쥐고 쓰다듬고 간질이고 조물거리고 등등등- 평소의 장난보다 짖궂은 손놀림으로 아회의 정신 쏙 빼놓았을 것이다.
"뭐야 이거 귀여워- 이거 이거 귀랑 꼬리만 나올 수도 있었던 거냐구- 귀여워- 와하 귀 복슬복슬해 꼬리 보들보들- 어떡해 너무 귀여워- 오라버니 이렇게 귀여웠단 말야? 이런 걸 여태 숨겼어? 안 되겠다 괘씸죄야- 히히- 아으아 귀여워-"
손놀림 뿐만 아니라 거의 폭격 수준으로 쏟아붓는 '귀여워' 공격도 한 몫 했겠지만은. 탓하기엔 온화 표정 정말 행복해 보였을 터다. 이대로 툭 쓰러져 성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음, 아무래도 이제 어장에 남은 사람은 ㅇㅎ라인 3명밖에 없지요.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었고, 그럴 수밖에 없게 되고. 그렇다고 떠나신 분들을 탓하는 건 아니랍니다.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요. 주말 진행도 요원하거니와 일상에도 어려움이 있으니 그런 고민을 하는 건 당연하고, 또 캡틴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혹시라도 이런 말을 드려서 죄송하다 같은 생각이 드셨더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좋답니다. 저였어도 당연히 얘기를 꺼냈을 상황이니까요. 이해할 수 있거니와 오히려 서로 선택하고 의견을 나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감히 의견을 내자면 2번에 조금 치우쳤답니다. 조금 나쁜 말이지만 현재 상황극판의 상황을 보면 1번을 선택한다고 쳐도 반짝하고 올라섰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생길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기껏 리부트로 열었는데 다시금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그것만큼 아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완전히 닫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캡틴께 맡기고 싶어요. 하지만 역시 욕심이 있어서 그런지, 이 부분은 살포시 옷깃이라도 잡아보고 싶네요...😂 각 캐릭터마다 서사가 있고, 그 설정들이 하나하나 매력적이라 놓치기가 아까운 심정이라서요, 네...
의견을 조금 드리자면, 스토리 진행을 하되 슬로우 어장으로 기조를 바꾸는 것은 어떨까 싶어요. 캡틴께서 어장을 잇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스토리의 끝을 보시고 싶다는 전제 하에서요. 스토리 출석이 한 명이더라도 이제 남은 사람은 충성참치(?)밖에 없으니 갑자기 사라질 일도 없을 것 같고...🙄 진행하는 날짜가 굳이 정해지지 않더라도 시간이 나면 평일에도 한 두턴 정도만 잇고, 처리하는 방식으로 바꿔도 괜찮고요...
무작정 인원수가 부족하니 부캐를 추가하자는 너무 성급하고 좋지 않은 방향(임시방편이죠, 아무래도...?)이기도 하고... 응. 그렇답니다. 일단은 2번에 기울어져 있어요, 저는. 욕심쟁이라서 어쩔 수 없는 걸...! 말이 마구 헛나오네요. 으으으...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이대로 완전히 끝을 내버릴까, 가 있기는 있어... 요.. :) 그렇지만 아직.. 아직 안 풀린 이야기들이 많은 걸..>!!!!! 아직 아이들이 보고 싶은데..!!!! 의 갈등 그 자체랍니다😂😂
5명만, 하다못해 4명만 되더라도 제가 어떻게든 괜찮을 거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사실, 음.... 뭐 가신 분들을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죠. 각자 사정이 있으실 것이고 제 이야기에 완전히 질려버리셨을 수도 있고. 많이 허망하긴 한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보면, 지금 거의 그 상태거든요. 전체 스레가 아닌, 1:1:1:1 스레 같은 느낌이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게 커요.
부캐는 제가 도저히 그 부캐들까지 다 다르게 보지 못할 거 같아요..ㅠ 그래도 슬로우 어장은, 고려해볼게요. 의견 고마워요 아회주. 사실 이런 결정을 내릴 때가 가장 고민됩니다......!! 어째야 하나, 이거.
>>207 음... 어느 정도는 예상한 주제네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정~말로 고민되는 사안이라 생각하는 시간이 길었어요.... 왜냐면 3번 의견도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저 역시도 여러분들과 캐릭터들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조금 지친다고 해야 할지... 참. 이 부분은 절대로 스레의 화력 문제 때문이 아니랍니다! 정말이에요! 오너의 만성 기력부족 때문에 스레가 장기화되면 이런 경우가 많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장기 스레를 선호하죠🤦🏻♀️ 그러니까 혹시라도 미안한 마음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3번 의견을 고민하면서도 이대로 스레를 끝내 버리기엔 너무 아쉬운 것도 사실이고, 2번을 확실하게 선택하기엔 제 기량이 문제고……. 캡틴이 제시하신 의견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도 아회주의 슬로우 어장 전환 의견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이런 의견도 괜찮다면 조심히 제시해 볼게요....😗
거부하면 어떤 의미로든 좋은 꼴 못 본다 인정한 시점에선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눈의 기능만 고려하자면 손해만 있을 건 아니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그는 이제야 알 것도 같아졌다. 유현은 치미의 행동을 지켜보다, 그가 금방 휙 튀어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자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큰 기대는 않았지만 역시 이 정도로는 완전히 묻어버리는 건 불가능인가? 곧장 다시 도술을 쓸까 하던 차에 훈련이 잠시 중단되었다.
"거래부터 한 다음 마저 이어가는 쪽은요?"
치미로부터 받는 교습 더 이어가기는 사실 달갑지 않지만 이왕 대가까지 내었는데 대강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저 작자가 반격까지 한다니 정말 꺼려지지만, 인간을 아주 데굴데굴 굴리다 못해 신변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르지만, 도움이 된단 것은 사실이니 효율의 측면에서 고려한다면 그만둘 수 없다. 그는 치미를 향해 몇 걸음 걸었다. 그리고 가깝지는 않으나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상대방을 쳐다본다. 얼른 거래부터 하고 보자는 듯.
뒤집힌 세상 속에서 정명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다. 공정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정상적이지 못하단 취급받을 것이요, 달리 말하자면 이 세상에 누구보다 잘 적응한 사람은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신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서글서글 웃는 낯짝이 보드랍다. 그리고 분위기는 다시금 급변한다. 어차피 이 분위기 계속되면 좋지 아니함을 술김에도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본디 제 본성을 절제하는 것이 무의식에 각인된 존재였는지. 서슬 퍼런 칼날이 비단도 아닌 복슬복슬한 귀와 꼬리에 가려졌다.
"아, 응……? 그, 그러니까."
귀걸이를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님을 잘 알겠다. 꼬리를 입에 합 물던 것을 급히 뗀다. 역시 이런 꼬리와 귀가 흉측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 이외의 존재로 보이는 것이 어찌나 흉측한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다. 반 푼의 눈에다 술기운에 시야가 일렁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눈빛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험의 신호가 머리 한구석에 뒤늦게 켜졌으나, 이미 늦은 찰나였다. 도망치려는 몸보다 대뜸 끌어안는 팔이 더 빨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술잔을 겨우 사수하는 것엔 성공했지만, 몸은 사수하지 못해 둥글게 뜨인 눈동자는 작아지고 당황에 입 뻐끔거리기를 반복했다.
"자, 잠깐, 잠깐만…! 수, 술. 술 쏟아, 그러, 그, 그게─"
심히 놀랐던 것인지 꼬리가 펑, 부푼다. 무아회 인생 대략 20년 채 될까 말까. 그 나날 동안 이렇게 무자비한 꼬리와 귀의 습격이 있었냐면, 없었다. 아니,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어머니라도 꼬리와 귀가 톡 튀어나온 자신을 보고 새된 비명을 지르더니 어쩜 이리 사랑스럽냐며 끌어안고 무자비한 입술 세례를 보냈어도, 이렇게까지 폭격 수준으로 귀여워 세례를 보내지는 않았다! 하물며 아직 형님도 손을 못 댄 꼬리인데! 대답은 해야 하는데, 쏟아지는 문장 중에서 뭘 쥐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술기운은 고사하고 당황스러움에 세상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나, 난, 귀엽지 않아……."
겨우 뱉은 말을 뒤로 가까운 시야 사이에서 보이는 얼굴이 행복해 보여 혼을 내지도 못하겠는지 입술만 꾹 다문다. 그래, 행복하면 되었지. 물끄러미 당신 보던 아회는 눈 감았다. 행복 위해서야 뭐, 수치스러움 정도는 내어줄 수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펑 부푼 꼬리 끝이 느릿느릿 흔들리기도 했고. 다른 것보다 중한 것 있지 않은가. 술기운 속에서도 떠오른다. 아… 난 이제 사감님께 죽었다.
자캐는_원칙주의vs융통성 : 유동적이에요. 기본적으로 원칙을 고수하려 하지만 가끔은 융통성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니, 하지만 원칙주의인 면이 조금 더 깊어요. FM이라고 해야 할까요...
후회한_선택의_상황을_꿈속에서_다시_마주한다면_자캐는 : 어차피 꿈에서 깨면 모두 희망고문이라나 뭐라나, 이런 부분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사람이라서요, 다시금 후회하는 선택을 한답니다. 달라지는 일 없이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뭘 저질렀는지 제대로 곱씹고 가슴 속에 새겨야 한다면서요.
자캐가_최종보스인_던전의_이름 : 몽환포영
이지 않을까요~ :D 지역 이름은 빛이 닿지 않는 설산이고, 그 가장 깊숙한 곳에 은거하며 플레이어를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감각으로 지켜보는 컨셉일 것 같아요~
어차피 쉬이 벗어나지 못하리란 것 알지만, 적어도 거리라도 두면 심적인 대비는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 특별히 음험한 짓 더 하려는 속셈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보단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한 발짝 물러나고 싶은 욕구부터 참아야 했다. 한쪽 눈이 가려지고,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 귓가에 들려온다. 그는 짧은 사이 그 모든 것 유념하려 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눈 속 깊은 곳을 불로 지지는 듯한 격통이 몰아쳤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무감각한 생각 짧게 스친다. 이럴 거라면 처음부터 눈꺼풀을 고정하기라도 했다면 더 나았을 텐데. 반사적으로 눈 감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고통은 한순간이었기에,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고 버티는 일은 고되기는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일순간 멎었던 숨 내쉬며 아래로 숙여지는 상체 버텨 세운다. 그는 통증에 흘러난 식은땀을 대강 훔쳐내고는 가장 먼저 제 왼쪽 눈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다. 본래부터 희뿌연 눈앞이었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없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지난번 일시적으로 눈이 잠겼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 눈을 감은 것과도 어둠을 응시하는 것과도 다른, 암흑이되 검지 않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각. 가뜩이나 눈 시원찮은데 하나만 남았으니 무언갈 가늠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아직까지도 거친 숨 천천히 고르며, 유현은 눈살 가늘게 좁히고 상대를 쳐다보았다. 감정 담아 찌푸린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함이었다.
오해를 당한 것 같으나 굳이 절절하게 변명할 필요는 없겠다. 그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 입 안으로─ ……방식이 상당히 불쾌했다. 내가 온화한테도 이런 추행은 당한 적 없건만. 그는 주먹 들어 상대를 후리고 싶단 충동을 느꼈지만 능히 참아내었다. 해봤자 제 주먹이 종잇장 접듯 찌그러질 게 뻔했고, 지금 이 행동이 필요에 따른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인지 모를 것이 입 안에 들어찬 감각이 느껴진다. 한순간 뱉어서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단 생각도 들었으나, 그랬다간 그저 눈 하나 잃은 인간 될 듯하니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 달갑지 않은 상황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도 명령을 따라야 했다. 유현은 그것을 얼른 삼켜낸 후 입 떼어내고선, 제 입술 박박 닦기부터 했다. 물론 눈은 감은 채로.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태도 당당하니 어떻게 보면 사실로 보일지도 모르나, 그냥 잡아뗐다는 뜻이다. 나름 생각했다 어쩐다 해도 사실상 강매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유현이 눈 깜짝할 리 없었다. 강매 아닌 선의라 해도 이 양심 없는 인간에겐 무의미했을 테고. 여하간 격하게 입 닦아낸 그는 치미의 말이 떨어지자 내리감았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한순간에 달라진 시야가 낯설다 못해, 아직 거리감이 맞지 않는다. 담을 수 있는 정보량 역시 다소 과하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치미를 마주보았다. '넘겨준다'라는 어휘에 걸맞게 상대에게서 변한 부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힘들이지 않고도 무언갈 식별할 수 있으니 확실히 쾌적하다 느껴진다.
"제가 빌린 정도로 쓸 수 있는 범위는 당신 시야의 일부인가요, 아니면 전부?"
시야에 익숙해지기 위해 천천히 여러 방향으로 눈을 굴려 보았다. 가장 멀리, 그리고 높이 보는 눈이라 했던가. 아직까지는 그만한 체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보다 더 멀리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유현은 제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눈으로 더 먼 어딘가를 보고자 해 보았다.
온화 그 동안 살면서 억누르던 것은 비단 사람을 향한 애정 뿐 만이 아니었다. 금주로 광증은 막았대도 그 여파로 인한 제어가 안 되는 힘 탓에 무언가 잡거나 만지는 쉬운 것도 하지 못 하는 시절 있었다. 특히 손의 아귀힘이 어찌나 셌던지 어른 손의 손가락 골절 정도는 쉽게 일으켰다. 그러니 그보다 어린 아이 혹은 동물은 오죽했을까. ...그대로 살 수는 없으니 힘 다루게 하기 위해 쉬이 망가지지 않을 무기와 악기로 힘 조절을 배웠다. 1년여간 용 쓴 덕에 어찌저찌 보통 사람에 가까운 구실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었으면 학당은 고사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내력으로 저보다 약한 동물은 의식적으로 멀리 하고 살았는데. 힘조절이 용이한 이 시점에 귀엽디 귀여운 귀와 꼬리를 단 사람이 있다? 그것도 제가 아끼는 사람이? 이걸 눈 돌아가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다른 의미로 꾹 눌러온 욕망 그야말로 마음껏 발산하는 온화였던 것이다.
"우후후- 후후 후후후 귀여워라- 산만한 덩치도 위엄 넘쳐서 멋있지만 요로코롬 귀랑 꼬리만 나온 것도 최고야- 온갖 내숭 다 떨어놓고 이런 귀여운 걸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귀여워- 아회 오라버니 너무 귀여우셔요-"
놀란 아회가 무어라 중얼대긴 했지만 욕망 뿜뿜 중인 온화에게 제대로 들리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놀란 탓에 부푼 꼬리가 온화의 그... 형용 못 할 웃음을 더 짙게 만들었다. 잘 쳐서 황홀한 표정 지었다고 하자. 몹시 행복하고 황홀한... 그런 웃음 띄고서 능수능란한 손길로 폭신푹신한 꼬리 쓰다듬고 털결 훑었다. 귀를 만질 때는 어떠했다. 민감한 선홍빛 살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귀 뒤쪽을 살살 긁어주고 엄지로 털의 결 따라 쓸어주며 실로 어마어마한... 행동 이어가고 있었다.
"어허. 오라버니가 귀여운지 아닌지는 이 화야가 정하는 것이어요- 히히- 꼬리 이렇게 통통하게 부풀려놓고 그런 말 하긴- 귀여워 귀여워 엄청 귀여워요- 하루 종일 옆에 두고 꼬리만 만지고 싶을 만큼 귀여워- 꼬리에 빗질도 해주고 응- 절대 못 집어넣게 하고 온종일 옆에 둬버릴까보아-"
범상치 않은 말들까지 술술 나오니 이제 위험한 거 아닌가?! 싶을 쯤. 온화 문득 어디선가 시선 느껴졌다. 어쩌면 기분 탓일지 모른다. 하지만 눈이 저절로 그 시선 느껴지는 곳으로 향하니. 거기엔 때마침 역린이 있었다. 침대에 기대 세워둔 채로 늑대 조각이 정확히 이 쪽을 향한.
그러고보니 역린으로 제 상황 볼 수 있다고... 아... 이런 걸 혹시... 망했다. 라고 하나...?
"아. 하하..."
역린의 존재인지 시선인지 깨달으니 붕 떴던 정신 제자리로 착 돌아오며 단숨에 흥이 싹 식었다. 식기 뿐일까. 등골 쭈뼛해지기까지 했지. 아회 입장에선 금방이라도 넘어뜨릴 듯 달라붙던 온화 갑자기 뚝 멈춰서 헛웃음 흘리더니 또다시 돌변해버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 보이는 것처럼 어색한 웃음 흘린 온화 아회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졌다. 만지고 쓰다듬느라 흐트러뜨린 머리나 옷깃 같은 건 제대로 정돈해주고 말이다.
"무어... 내가 원체 털 많은 짐승 좋아하다 보니 오라비에게 실례를 했구만. 놀라게 해서 미안허이...? 하하. 하..."
어쨌거나 귀여워와 쓰다듬 폭격은 멈췄으니 아회로서는 다행인- 건 아닐까. 부디 다행이길 바란다. 온화 다시금 옆으로 떨어져 앉아선 빈 잔에 술 가득 채워 마셨다. 이미 취기는 거의 날아갔지만 말이다.
끼야아악 꺄악!(후다닥) 얼마나 맞을지 가늠해보고 많이 맞겠다 싶으면 일단 튀지만... 체력소모 대비 맞는 회수를 따져봤을 때 손해다 싶으면 도망가다가 잡혀주지 않을까요...ㅋㅋㅋㅋㅋㅋㅋ 아니면 오냐오냐 자란 반려동물처럼 '온화가?나를 때릴 리가 없잖아' 이러고 방심하고 있다가 맞고 당황할지도요~😙
범은 그 풍채요 위용이 대단하며 자태 신비로우니 인간들은 외경 담아 산군이나 산신령이라는 칭호를 내렸다더라. 하물며 제 아무리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사생아인데다 자신을 눈 보이지 않기까지 하는 무가치한 존재로 봐도 범으로 변했을 때나 꼬리 드러날 적에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그만큼 대단한 존재가 지금 당신의 앞에서는 큰 고양이가 되어버렸으니, 아회는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애정에 공포심을 느꼈다. 웃음소리에 꼬리 끝이 바르르 떨리고,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 그, 그게. 화야, 정말로, 자, 잠깐-"
웃음 짙어질 적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지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술기운이 날아갈 듯 날아가지 않을 듯, 순간의 상황을 온몸과 정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던 도중 능수능란한 손길에 잔 황급히 내려두며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감각이 예민한 탓이 아니었다. 이것은 본능의 문제요 유달리 아회는 무 씨 집안의 가계 도술 이어받은 사람 중 본능에 치중한 쪽에 가까운 편인 탓이다. 꼬리도 살살 쓸고 귀 뒤를 살살 긁어주고, 털의 결을 쓸어주기까지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참으려 노력했으나 어디 본능을 참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이것만큼은 죽어도─
가르릉, 가르릉, 골골골…….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입을 틀어막아도 목에서 울리는 골골송을 어떻게 참아내랴. 아회는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내지 존엄성이 바스스 흩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틀어막은 손을 서서히 올려 얼굴을 덮어 가렸다. 와중에도 착실하게 목에서부터 가르랑거리는 소리 울린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잃어버렸겠다, 꼬리 못 집어넣게 하며 옆에 두겠다는 제 형님보다 무시무시한 발언이 이어지더니 이내 손길이 뚝 멈춰버렸다. 가릉가릉 소리도 덕분에 멈췄다마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멈춘 것이지?
"……응?"
손을 슬쩍 치우니 수치심에 달아오른 뺨과 어안이 벙벙한 눈빛이 당신을 향한다. 어색한 웃음과 슬그머니 떨어지는 모습도 그렇고, 옷깃 정리해줄 적엔 반박자 늦게 따라오는 뇌 덕분에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참을 눈만 깜빡였다. 이게, 지금이라도 존엄성을 챙겨줘서 다행이긴 한데……. 고양이란 본디 한 번 쓰다듬으면 앞발로 톡 밀어낼 때까지 쓰다듬어줘야 하는 법. 하물며 술까지 걸친 몸으로는 "화야, 혹시…… 어디 마음에 안 들었어?"하고 물어보게 되어버린다. 그렇게 뱉어버리며 꼬리 다시금 입으로 합 물다가,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어 아회의 시선이 도르륵 어딘가를 향했다. 당신이 멈추기 직전 보았던, 역린 있는 곳으로.
"……아."
아. 그렇구나… 나 아까 뭔 말 했더라. 아, 그렇지. 진짜 죽었네. 아회는 싸해진 상황 속에서 꼬리를 문 입을 작게 벌렸다. 꼬리가 툭, 도 아닌 폭…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지더니, 이내 정적만이 내려앉는다. 손이 아까 황급히 내려둔 술잔을 찾아 소반을 더듬거리더니 이내 술을 쭉 들이켠다. 무슨 맛이 나는지도 모르겠고 살려만 달라.
억지로라도 눈 주겠다며 거래를 종용한 이유는 그것 때문인가 보다. 다른 곳을 보아야겠다 마음먹자 갖가지 광경이 상에 맺히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이런 눈으로도 학당만은 보지 못한다고. 불규칙하며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광경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그만 볼까 하던 때에, 어느 곳에서 시선이 멈춘다. 푸른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 ……한 번도 만난 적 없건만 어딘지 낯익은 자다. 그는 저 남자를 어디에서 만났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 그래. 지난번 별사탕 소동의 환상에서 보았던 것 같다. 그때도 무엇인지 모를 모략 꾸미는 투로 혼잣말을 하더라. 이번에도 비슷한 광경인 것으로 보아 모르긴 몰라도 저 자는 이런 종류의 암약이 특기인 모양이다. 궁금증이 일어 남자의 모습 쭉 응시하던 중이었다. 유현은 어느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결국은 이 역시 '시선'이니 마주치는 경우도 있는 것 아니겠나. 상대는 조용히 하라 했을 뿐 보지 말라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눈 깜빡이다 시선 그대로 두었다. 상대에게 더 보여줄 것 있다면 하라는 듯.
***
"네, 어련히 하죠. 그런데 원거리를 들여다보는 중에 이 눈의 시선을 느끼는 일, 흔한 경우인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만약 역린의 시선이 거기 없었더라면 조금 더 엄청난 일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인 아회조차 질겁할 정도의 애정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그저 귀와 꼬리 만으로 만족했을까? 술김에 혼란한 것도 있겠다 전신 변해보라 채근하고 채근하여 기어코 제 방에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 들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아회 목에서 냥속들 특유의 울림소리가 났을 적에는 말이다.
꼬리가 부푸는 것만 해도 엄청난데 덜 변한 채로 목 울리는 소리까지 낸다? 이걸 어떻게 참느냐고!
라는 생각이 머릿속 지배하여 귀와 꼬리 내놓은 채로 옆에 두겠다는 둥 어마무시한 소리 내뱉을 적 마치 경고하듯 느껴진 역린의 시선 덕에 일은 더 나아가지 않고 그쳤다. 오싹하게 식어서 멈춘 것도 있지만 반쯤은 제 자신을 억눌러 참은 것이라. 옷깃 정리해 주는 중에 아회가 답지 않게- 뭐가 마음에 안 들었냐며 꼬리 무는 것 봤을 때는 그대로 다시 이성의 끈 놓아버릴 뻔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찌어찌 참아내고 나니 옆에서 아회도 상황 깨달은 듯 물었던 꼬리 폭 떨어... 꼬리가 폭...
"...으아아..."
다시금 치솟는 번뇌에 그만 얼굴 가리고 작게 앓는 소리 내고 말았다.
이럴 때 뭐라 그러더라. 정신 나갈 것 같애? 진짜 그 말 대로다. 더이상 저 모습 보고 있다간 지금보다 더한 일 생길 것 같다. 끝끝내 커다란 호랑이 쓰다듬고 말 거야! 안 되지. 그건 진짜 안 돼. 그러니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후."
얼굴 가린 채 심호흡 한 번 하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다. 그래. 이제 마실 만큼 마시기도 했으니 이만 자리 파하자고 해야겠다. 결심 딱 먹고 손 내린 다음 한 손으로 아회 어깨 살포시 잡으려고 했다. 기필코 다시 쓰다듬을 생각은 없었으나. 다른 손으로 엄지를 치켜들며 그런 말을 한 것은 조금 전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냐는- 꼬리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지. 이 말을 차마 그냥 넘기지 못 했음이리라.
"오라비의 꼬리. 완전 최고였어. 어. 진짜."
음- 말 나온 다음에 망했다고 생각하면 뭐하니. 이미 저지른 것을.
이미 쌓은 업보에 한 획을 더해버렸지만 온화 후회는 없었다. 그래. 후일은 후일의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다. 까짓거 좀 뻔뻔해지자. ...마주하고도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사감실은 가지 말어. 응. 수업도 그 쪽은 피하고."
그 쪽이라 함은 굳이 설명 안 해도 알 것이라 믿겠다. 그렇지만 저는 가야 하는데. 언제 가지... 뭐라도 들고 갈까... 당장 고민해봐야 답은 안 나오니 저나 아회를 위해서도 자리부터 파해야겠다. 하여 아회 어깨 두어번 툭툭 두드려 주려 하며 말 덧붙였다.
"허면 오늘은 이만 할까. 오라비도 충분히 많이 마신 듯 하고. 아. 갈 적에 이것 줄 테니 가져갈테요? 그늘진 곳에 두기만 하면 맛 상하지 않고 오래 가거든."
온화 말하며 가리킨 것은 직전까지 마시고 있던 금빛 술병이다. 이미 아는 맛이고 절반 이상 남았으니 졸업 전까지 홀짝홀짝 마시기에 좋을 것이다. 단지 이것이 아회 생애 마지막 술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지... 아. 저도 포함인가.
치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는 화난 것 같으면서도 슬픈 것 같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 무슨 말이야?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걸 느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거? '
당신의 물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혹은 질문 내용이 황당했던 건지 치미의 미간이 구겨졌습니다.
' 내 눈은 요괴들도 알아채지 못해. 만약, 알아챘다면... 그거 태초의 어머니 아니야? '
설마, 자신들을 만든 창조자가 귀히 여기는 생물이 있을까. 그는 무언갈 생각하다가 누군가가 생각난 듯 두 눈을 깜빡였습니다.
' 천부에 있는 빵집 주인은 볼 수 있을 걸? 그 인간은 태초의 어머니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인간이니까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것도 설명이 되거든. '
그러면 말이 된다고 말하듯 그가 말했습니다.
' 너, 지금 그 여자 보고 있어? '
응? 방금 당신이 본 사람은 남자 아니었던가요?
치미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 ...... '
남자는 말 없이 손을 까딱였고 뱀 한 마리가 기어와, 발치에서부터시작해서 어깨로 휘감고 올라갔습니다. 그가 만족한 듯 미소지었고 쓰러진 남자를 치우라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였습니다. 코가 말린 불가살 가면을 쓴 남자가 들어오더니, 쓰러진 사람을 끌고 어디론가 걸어갔습니다. 바닥에 끊겨진 피로 된 붉은 길이 이어졌습니다.
' .... '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서 손가락 태핑을 잠깐 하더니만은, 종이에 무언갈 적었습니다. 그는 당신이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감긴 눈이 곱게 휘었습니다.
종이가 팔락이며, 당신의 눈에 보이는 위치에 펼쳐졌습니다. 글씨체를 감추기 위해서인 것처럼, 굉장히 크고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보는 것도 하지 말아달라는 의미였는데. 보길 원한다면 한 가지 말해줄 수 있는 게 있어. 조만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거야. 어느 쪽이 더 네게 가치있는 판단일까.
그는 그 종이를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습니다. 다른 곳을 봅니까, 눈을 감습니까, 더 봅니까?
학당을 특정하여 보지 못하게 한 것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곳은 치미에게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무언가가 얽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쉬이 분간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 치미를 바라보았다. 저 자 인간이 아님에도 생동한 감정을 탐하는 그로서는, 이 물음을 도저히 넘길 수가 없다.
"그건 무슨 감정인가요?"
……묻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시선 저편으로 고정하고 있다. 피와 뱀, 가면을 쓴 다른 남자. 그리고 조금 전의 장면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양 정확하게 자신을 겨냥한 전언. 유현은 직감했다. 저 남자는 위험한 자다. 나름대로는 자신을 너그럽게 봐주는 중인─용납하기는 어렵지만, 사실이긴 했다.─ 치미와는 달리 허튼수작이라곤 전혀 통할 것 같지 않다. 저 자가 누구인지, 재미있는 일이란 무엇인지, 어떤 존재이기에 치미의 눈을 간파할 수 있는지. 의문은 많았으나 우선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 재미있는 일 곧 닥칠 것이라면 기회는 언젠가 다시금 다가오리라.
"빵집에 들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런 모양이네요. 신께 미움 사긴 싫으니 제 안위를 위해서라도 그만 보아야겠군요."
그는 거짓을 고하기로 했다. 때마침 신의 집착이라는 좋은 핑계도 있으니 둘러대기도 편했다. 정체 모를 남자에 관해 이야기하기엔, 조금 전에 말했듯 치미에게는 신뢰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 말했다가 도리어 치미가 그 남자 유심히 보라 명령하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강제 당하게 된다면 그는 거부하지 못하리라. 유현은 푸른 머리 남자를 응시하던 시선 이번엔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만하면 적응도 되었으니 이번까지만 시험해 보기로 했다.
1:1:1:1(우와...)은 찬성하지마는, 이전 기수의 경우에는 친목 문제라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이 부분은 1:1:1:1이 성립된다는 조건 하에 어장을 세우고 나서 천천히 토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물론 요즘엔 그 기준이 유해지고 캡틴의 권한이 강화된 것으로 알고 있으니 괜찮겠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
서로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공존할 수 있는, 기실 동일한 종류의 감정에서 발원했다고들 하는, 그에게 있어선 가장 모호하고도 요원한 감정의 총합이다. 신이 집착하는 인간과 신에게 애증 가진 존재. 무언가 연관이 있을까? 그는 치미의 얼굴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평소처럼 캐묻지는 못했다. 익숙지 않은 시야에 적응하는 동시 상대의 세밀한 반응을 관찰할 여력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
유현은 익숙해지면 일을 시키겠단 이야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척인지, 대답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지. 최대한 미숙한 체를 할까 하며 벌써부터 꾀부릴 속셈부터 떠올리는 중이었다. 물론 그 생각 정말 행동으로 옮길지는 지금 보는 광경부터 처리하고 난 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시야가 또 다시 전환된다. 이번에 보인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익숙한 장소의 풍경이었다. 학당에 다니며 몇 번은 올랐던 그 산. 특별할 것 없는 광경이었으나 한쪽에 무언갈 뭉쳐놓은 듯 붙어 있는 것들이 보인다. 요괴들이 저들끼리 모여 있었다. 요괴에 관해 박식하지 않은 그라도 무엇인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어쩔까, 짧게 고민 스친다. 잠시간 옹기종기 모인 그것들의 모습 응시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방금 전 보았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라 했었지. 좋을대로 끼워맞춘 비약일지도 모르나 그 남자와 학당에 벌어지는 여러 사태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 든다. 그는 몸으로 고생하는 것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주것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맞닥뜨린 상황에 휘말릴 때의 일이다. 아주 모호한 실마리라도 얻은 이상 그도 그 재미란 것 기다리고 싶어졌다.
다시 눈을 뜨자 평범한, 그러니까 당장 앞에 있는 것만 보이는 '비교적' 보통에 가까운 시야가 그를 반겼다. 유현은 조용히 치미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존엄성마저 흩어지고 말았다. 세상 살며 이렇게까지 불합리한 적이 있었나?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 아니, 좀 깊게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괜찮은 축인가……? 눈 잃고, 신수에게 강제 계약을 강요 당하며, 신에게 노골적인 악의를 받고, 제 형님과 생사결을 벌여야 하는 운명에 놓였으니 이 정도야 괜찮은 것 같다. 그렇지만 기분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한 것은 역린의 흉흉한 기운 때문이었다. 아무리 모든 것에 초연한 아회라고 해도 술 마시다 꼬리 드러냈단 이유로 죽고 싶지 않다는 욕구 정도는 있다. 꼬리 툭 떠굴 적 앓는 소리가 들리자 아회는 절대 아니라는 듯 역린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뇌가 반박자 늦게 따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얼굴 똑같이 감싸쥐긴 했지만 서로 다른 고통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쪽은 술기운이 무엇인지 제대로 체감하고 있고, 저쪽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고. 얼굴 가리고 있자니 어깨에 손이 닿는다. 아회는 눈만 슥 들었다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입을 작게 벌렸다.
"얘가 진짜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그 말을 꼭 했어야만 했냐는 듯 세상 황당한 표정 짓다가도 한숨 푹 쉬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이 방까지 뛰어와서 무아회 나오라며 죽이려 들기라도 하겠나……? 제발 아니길 바란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이 학당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겠지, 끔찍하다. 당신의 조언에 아회의 눈이 결국 질끈 감긴다.
"……그래, 조언 고맙구나."
아주 고마워 미칠 지경이다. 술기운이 반쯤 날아간 기분이 들어 한숨 한 번 더 푹 쉬고. 손가락을 들어 까딱였다. 귀와 꼬리가 푸른 불꽃과 함께 훅 사라지더니, 아회는 술병 물끄러미 바라보듯 고개 돌리다 잠시 고민했다. 그래, 첫 술이 마지막이 될 리가 있겠나, 앞으로도 술을 자주 찾을지도 모르고, 이참에 받는 것은 좋겠다마는─
"……마지막 술은 아니지?"
당신과 비슷한 생각 하더니만, 아회는 끌끌 웃었다. 웃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소극적인 감정표현이지만, 이 정도면 어디랴. 당신의 어깨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려 하며 아회는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슬 도망…… 아니, 자리를 파할 시간인 것 같기도 하니. "고맙게 받으마. 대신 답례 정도는 줘도 괜찮겠지?" 그리 얘기하고는, 지팡이 짚으며 천천히 일어서려다 잠깐 뒤로 두 걸음 걸었다.
아…… 그렇지, 나 술 마셨지…….
"……혼자 갈 수 있으니 배웅은 말고. 만일 바깥에서 소란 일어도 문 열지 말고. 알겠지? 그림자 통해 어떻게든 도망쳐보마."
하 사감님 뛰어올지도 모른단 소리다. 아회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돌아가자마자 영이를 불러서 문부터 걸어 잠그자 해야겠다. 아니, 가문에 서신을 써달라 할까? 신수의 노여움 받았노라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유폐되나? 그럴 것 같은데. 복잡한 속 뒤로 몸은 비틀비틀 잘도 움직였다. 그리고 멈칫.
77 자캐는_아침형_인간_vs_저녁형_인간 아침형 인간입니다! 의?외라고 해야할지 움직이는 일 싫어하고 밥도 깨작깨작 먹지만 수면시간만은 잘 지키고 있어서 다행히 <망한 생활습관 3관왕>은 피했네요👀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아침형 인간이라고 해서 딱히 아침에 기운이 넘치는 건 아니지만요~?
기상 직후 유현: 😑(비실비실...)(부스스....)
231 자캐가_자신_있게_다룰_수_있는_도구 어... 평범하고 나약한 학생이라서 거창한 건 없고... 붓? 펜? 부적? 근데 도술도 잘 쓰는 편이 아니네요(착잡해짐)
336 자캐는_가족들과_어느_정도_교류하는가 부모: 유전자 제공자, 타인, 명목상 보호자. 가끔 귀찮게 간섭함. 형제: (없음)
나중에 무슨 말을 듣거나 할 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건 말해야했다. 무아회의- 그러니까 범 되었을 적 꼬리 털결은 가히 천상의 비단 같았노라고. 물론 제 반려의 꼬리털도 좋았지만 늑대의 것과 범의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렇고말고. 게다가 아회의 꼬리는 여느 범과 달리 털 풍성하고 길고 폭신하여 그 감촉이 남달랐-
"크흠. 내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 뿐인 것을."
온화 혼자 머릿속에서 폭주하는 말 튀어나가기 전에 자르고 얼른 다른 말로 덮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여기서 더 말로 꺼냈다간 후일이 감당 안 될 듯 했다. 그러니 적당히 가지치기를 하고. 제 조언에 질색하는 아회 보며 낄낄 웃었다. 말이야 고맙다지만 저 속 어떨지 충분히 가늠되기 때문이다. 저도 다를 것 없기도 하니. 그래도 제 생각 읽은 듯한 말 했을 때는 큰 웃음 터뜨려 버렸지만은.
"흐. 하하! 아하하! 아니되게해야지! 오라비랑 술자리가 고작 한 번이라니 아쉬워서 눈 못 감어!"
두 팔로 제 몸 감싸며 깔깔 웃는데 아까보단 살만 해서 그럴까. 아회 일어날 적 술병 들고 같이 일어나 챙겨주다가 한 쪽 눈 찡긋- 했다. 답례 안 주면 내 받아내러 갈 거요. 하고 말하듯이.
"아이고- 그리 뒤로 걷는데 제대로 갈 수는 있것소? 가다 길 잃는 건 아닌가 몰러."
배웅 나오지 말라는데 걷는 모양새 어째 불안하다. 그리고 바깥에서 소란 어쩌니 하는 것도 조금 걸릴까. 역시 억지로라도 배웅 해줄까 하다가 그냥 문 밖에서 안 보일 때까지 내다보기로 하였다. 계단 잘 짚어가는 것만 봐도 안심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 하며 비틀대는 아회 바라보던 중 당연하지만 뜻밖의 말에 눈 둥글게 커졌다. 곧 휘익 접어 곱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요. 오라버니야. 부디 다음엔 오라비가 즐기는 것으로 자리 가집세. 무엇이든 좋으니."
다음. 꼭 다음이 있길 바라며 아회에게 술병 들려주고 나가는 것 지켜본다. 방 밖으로 나가진 않았지만 문틀에 기대어 가는 뒷모습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계단 혹은 모퉁이를 돌아 그 긴 옷자락도 하얀 터럭도 끄트머리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온화도 방 안으로 들어가 문 닫는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요, 운명을 매듭짓는 수단이다. 이름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인과가 생겨나니 율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어떠한 관계가 생기고, 그에 따른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니, 상대에게 어떠한 일이 생겼을 때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것이 분노이든, 슬픔이든, 통쾌함이든.
귀기 무 씨가 있는 북부의 지역은 유달리 삭막했다. 요괴가 들끓었고, 척박했으며,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당연스럽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일까, 무 씨 집안에서 이름이 가지게 되는 의미는 더욱 컸다.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서로의 유대감은 더 깊어지게 되나 인간은 죽기 마련이다. 삶은 덧없고, 미련을 가지게 하며, 끝내 결심을 흐트러지게 했다. 하여 귀기 무 씨에서는 호위대에 입단한 자들의 이름을 없앴다. 그것이 제 가문의 사람이거나, 이름 없는 가문의 사람이거나, 저 멀리에서 북부를 위해 온 명망 있는 가문의 사람일지언정. 호위대에 입단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죽이는 의식을 치르면 그 이후로 존재는 사라졌다. 애칭도, 별칭도 짓지 않고 오로지 호위라 불리는 존재로 양성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기였으니, 이들이 이름을 되찾는 순간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어린 날의 아회가 있었다.
이름을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으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이름을 불리지 못하고 유령이라 불리던 자신과 가문을 잃고 이름마저 잃어버린 존재가 서로 마주한 날이 있었다. 그 존재에게서 들끓는 증명의 욕구를 보았을 때, 아회는 깊은 갈망에 휩싸였다. 동질감을 느끼며 존재를 증명하고, 증명받고 싶었다. 그렇게 아회는 있어서는 안 될 금기를 저질렀다. 한때 맹 모 씨였을 자이나 이름을 죽인 호위에게, 감히 새 이름을 붙였다.
무영(無影).
자신의 곁에 늘 있어주리라 믿어, 그림자가 겹쳐 없어 보이는 존재나 다름이 없으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에서 잊힌 존재이던 자신이 겹쳐 보여, 그리고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 믿어 그런 이름을 주었다. 그렇게 인과율이 생겼다. 매듭이 지어졌으며, 피할 수 없는 과오가 생겼고, 선조의 지혜를 우습게 여긴 벌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이 두렵지 않았으나 이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영원한 것은 없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앞으로도.
자신과 함께 죽을 운명을 걸을 자였으나, 이젠 그 존재라도 살았으면 했다. 이 지독한 운명에서 놓아주며 자유로이 삶을 갈망하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호위대주에 오른 너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 위상을 드높이겠지. 지독한 죄책감이 가슴을 옭아맸다. 네게 죽으라는 명과 함께 이름까지 주어놓고, 정작 나는 네게 삶을 명하는구나. 내가 네게 죽을 운명을 주었음에도!
아회는 천천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은 불안을 떠안고 다시금 기어 와 어깨를 붙잡아 속삭였다. 웃음기 어린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쟁쟁히 울리는 것 같았다.
얘, 결국 정을 준 너의 탓이다. 알량한 온정 베푼 너의 업보다. 너는 결국 이름 가진 것에 대한 죽음이 닥쳐왔을 때,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너는 상실감을 얻고, 공포와 슬픔을 다시금 품을 것이다. 너는 버틸 수 있느냐? 네가 직접 이름을 준 존재로 하여금 너는 무너지겠구나, 결국 해저도 갈 수 없게 되겠구나……. 그러니 어찌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느냐, 네 처지를 알았어야지. 그리고 목소리는 다시금 깨달음을 주었다. 아회는 손에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올렸다. 오로지 앞만 쳐다보는 시선이 공허하다.
귀기 무 씨는 과거부터 도술보다 예禮와 무務를 숭상하며 그 재능 출중하였으니, 타고난 힘과 기교는 이들을 패왕으로 이끌 자질을 충분케 하였으나 그 선조는 타 존재를 찍어누르고 억압하지 아니하며 풍류를 벗 삼던 고고한 성정 지녔으매, 그 힘으로 하여금 제사장을 호법하는 삶을 선택하였으니 그 충성심은 번견과 같고 긍지는 용과 같았다. 그러나 선조는 제사장이 옳지 못한 길으로 가더라도 맹종하여 그 뜻 따라 반기를 들게 되었으니, 이들은 신을 해하려는 시도로 북부에 유폐된 이후에도 주인 되는 자의 충심을 따랐을 뿐, 죄를 지었으나 후회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뜻을 확고히 했다. 천인공노할 발언이나 귀기 무 씨는 무인務人의 긍지 드높으며 호법 자체에 큰 의미를 둠에 자긍심 가진 고매한 집안이니, 이 맹목적이고 뒤틀린 충심을 갸륵히 여긴 제사장들은 비록 북부 출신이라 한들 다시금 손 뻗어 가문의 명맥 잇게 하는 자비를 보였다.
그러나 귀기 무 씨는 무인의 긍지만이 높은 것이 아니었으니, 한때 책사策士 또한 대를 이었으며 그 존재는 귀기 무 씨를 패왕이라 불리던 것에 일조해 가문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러나 선조가 반기를 일으켜 북부에 유폐된 이후에는 더 이상 패왕이 될 수 없기에 이들은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며, 역사의 뒤안길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듣자 하니 궁기의 등장 이후 명맥조차 제대로 잇지 못할 만큼 무너져가던 가문에 홀연히 나타난 존재 있으니, 이는 수 세기 만에 다시금 나타난 책사였다. 과감한 결단과 더불어 정세를 쉬이 읽으니 그 눈치가 보통이 아니어 여러 제사장 가문과의 맹약 얻어내고 신뢰를 회복해 무 씨 집안을 다시금 북부의 고고한 무인 가문이노라 그 위상을 다시금 드높이기 시작하였다더라.
그러나 그 존재의 외견은 고사하고 이름도, 나이도, 소속도 알 수 없으니 마치 은거하는 기인 같으며 가주가 신임하여 그 정체를 앞장서 숨겨주니, 가주 무 준서의 호呼인 맹호猛虎를 바탕으로 그 뒤에 숨어 보호받는 존재라 하여 그 명칭 암호闇護라 불리었다. 정체를 가늠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단서, 암호라 불리는 귀기 무 씨의 책사는 맹호의 신임을 크게 얻어 푸른 혼불 그려낸 검은 부채를 하사받았다 하니, 그 부채 든 자가 암호일 터였다.
"─엽 씨 가문의 여식은 능력과, 야망이 있는 자이나 성미가 급하고 직설적이며, 욕심이 있다. 그러니 유일한 직계인 자신이 아닌 방계를 널리 본다는 가주의 말과 경쟁구도에 있는 방계의 아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
그리고 무영은, 무릎을 꿇은 채 그 푸른 혼불 그려진 검은 부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핑계일 뿐, 엽 씨 가문의 가주는 딸을 끔찍이 아껴 아이가 이른 나이에 자신과 같은 정쟁에 뛰쳐들지 않길 바라 하루라도 더 후계자 책봉을 늦추는 것이나, 가주 또한 솔직하지 못하며 신중함을 몇 번이고 거듭하다 결국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성정을 지녔다. 이처럼 부모 자식 간의 대화가 없으니 자식이 상황을 이해할 리도 없거니와 아무리 냉철한 엽 씨 가문의 가주라 할지언정 그 방계들이 후계구도를 입에 올린 이상 후일 책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을 터인데, 딸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그 끝을 홀로 짊어지려 하니 실로 우유부단한 자다."
아회는 부채를 느긋하게 팔랑였다. 부채를 흔들 때마다 혼불이 일렁이는 듯했다. 암호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그래, 어릴 적의 호였을 뿐이다. 한자 또한 지금과는 달랐다. 그만큼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단 뜻이겠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호는 어느덧 귀기 무 씨의 숨겨진 책사의 이름이 되었고, 자신이 기회를 쥘 수 있게 도왔으니.
"여식은 지금 약이 바짝 오른 상태이지. 방계에서는 득달같이 제 아이 봐주십시오 하고 있으며, 갑작스럽게 관념을 깨고 후계구도를 넓히는 어미의 독단적인 행동에 입지가 좁아졌지 않으냐. 마음만 같다면 방계를 제거할 궁리를 하고 있겠으나 그 아이에게는 명분이 없지. 그러니 가주님께서 노골적으로 방계를 밀어준다는 명분과 제사장의 도리를 일깨우면, 이는 도화선이 되어 알아서 타오를 터다. 그리고 그것이 네가 할 일이다. 너는 주어진 것을 가지고 가라."
아회는 눈을 잃은 직후에도 방황할 수 없었다. 유일한 후계자는 악명 드높은 범죄자가 되었고, 가문은 쇠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탓할 것이 있으면 모두 단합한다 하였던가? 사람들은 귀신같이 가장 약하고 만만한 아회를 탓했다. 사생아만 없었더라면 가문이 이렇게 될 일은 없었다며 눈을 부라렸으니, 배척과 위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날이 갈수록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급급한 상황에서 아회는 필사적으로 살아남고자 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조리 해내 그 쓸모를 증명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들었다. 숨겨오던 발톱까지 드러내었으니 가주의 눈에 드는 것은 당연했다.
"……주군, 아무리 주군이라 한들 가주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무 준서라는 자는."
그리고 가주를 마주했을 때, 아회는 자신의 강점을 깨달았다.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다. 오로지 가문만을 위해 헌신했고, 인간보다 무인이라는 자긍심을 더욱 사랑하는 자야. 과연 집안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모를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 어떤 감정도 섞을 수 없는 시선. 뒷방에 틀어박혀 소리나 듣고 살던 자신은 누구보다 가문의 상황을 잘 알았다. 하물며 그 사이에 섞일 수 없었으니 제3자나 다름없는 시선으로 가문을 평가할 수 있었고, 어떤 사람이든 자신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타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강점을 파고들어 가주 앞에서 뜻을 밀어붙이자 길이 열렸다. 가문의 중대사에 대해 시험하였을 적, 자신이 내놓은 결단을 높이 산 가주의 신임을 얻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아회는 점차 가주의 권한을 등에 업을 수 있게 되었고, 학당에 입학할 적엔 귀기 무 씨의 책사 자리에 앉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여타 제사장 가문에서도 들고일어날 사안입니다. 멸문지화라뇨!"
무영은 그런 아회의 뒷사정과 결단력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번 사안은 북부의 가문도 아닌 무려 곡옥의 가문이 엮여있으니 중대사이지 않을 수가 없어 감히 불충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 단호히 입을 벌리는 무영을 바라보던 아회는 부채를 팔랑이던 것을 멈췄다.
"영아." "예, 주군. 하문하소서!" "팔 년 전, 맹 씨 가문이 서로를 산제물로 바치겠노라며 도륙하고 그 이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때." "!"
무영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맹 씨 가문은 한때 무 씨 집안의 호위를 받던 촉망받던 제사장 집안이었으나, 그 안에서 분열이 생기고 제각기 산 제물을 바치겠노라 서로를 도륙하다 자멸한 가문이자, 무영의 본가였기 때문이었다. 아회는 그 참사 속의 유일한 생존자인 무영을 이해하나, 지금은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부채를 접었다.
"그들이 입을 열었느냐?"
무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가문이 불타고 수많은 피가 튀었을 때 도운 자가 있긴 했으나 이는 모두 이해타산에서 계산된 행위요, 제대로 된 선의라고 할 자는 없었으니. 외면받았던 과거를 떠올리듯 무영의 표정이 구겨지며 입이 딱 다물리자, 아회는 혀를 끌끌 찼다.
"오늘 선택받지 못하면 내일 산 제물이 되어 죽는 자들이다. 서로에게 협력한다 한들 그것은 선의가 아니다. 내가 행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큰 이득을 쥐여주는 은恩이 될 수도 있는 법, 혼란은 신의 뜻이요 유흥이자 안배이니 이는 당연한 이치요 섭리이라. 신을 받드는 그들이 어찌 신의 뜻을 거절하랴?" "……." "뒤집어진 세상에서 정명한 이치를 논한다면 이는 그 이치를 논할 수 있을 만치 강자이거나, 신의 뜻을 거절하는 광인에 불과하다."
북부의 자가 신의 뜻을 이야기하니 모순이 따로 없으나, 신앙은 자고로 훌륭한 명분이지 아니한가. 신 앞에서 누가 자비를 논할 수 있으며 반문할 수 있을까, 하물며 제사장 가문이라면……. 아회는 느릿하게 생각을 떨쳐내며 몸을 움직였다. 툭, 부채를 접어 입술 밑 오목한 곳에 대며 눈을 가늘게 뜨자, 무영은 아회가 말한 것또한 명령이며, 그 처지를 깨달았고 맹종하겠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기에."
아회는 제 앞에 엎드려 절하는 존재를 감흥없이 내려다 보았다. 감히 이 아둔한 머리를 굴리건대, 패왕이 될 수 없다면 패군이 되는 수밖에 없으니, 남은 책사들은 북부에 유폐될 적 그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가문의 영달과 고결함을 위해 모조리 그 자취를 감추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다르다. 이미 더럽혀진 가문이니 패왕도, 패군도 될 수 없음을 안다.
평시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긴장감이리라. 물론 근 몇달 간 학당은 언제고 위험이 도사렸으며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일이 가득했다. 사감을 제압하거나 하는 일과 같이 비현실적인 일이 넘쳤으나, 그때의 긴장감과는 결이 달랐다. 이건 현실적인 일에 대한 긴장감이었다. 요괴가 보이지 않는다 하였지.
"……."
그렇지만 자신이 알 바는 아니다. 듣기 좋은 노래를 벗 삼고, 소란스러운 바깥에 신경 쓰지 않는다. 모든 일과가 종료된 이후에는 자신이 가져야 할 시간이 있었거니와, 지금은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이에게 엽 씨 가문의 여식과의 접선을 명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그 여식의 마음을 흔들고자 우연치 않은 만남에 성공했으리라……. 물론 어린 여식의 마음 가지고 노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다. 때로는 연정도 패로 써야 하는 법.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이니.
아회는 고요히 먹을 갈았다. 기숙사 내부의 벽난로 앞에서 난을 치기 위해 준비하듯.
[>나가지 않는다]
523볼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아이 우는 소리와 같아◆ws8gZSkBlA
(4/qinFfqQs)
하루 일과를 마친 그 밤. 온화 제 방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긴 머리 빗질하고 있었다. 갓 씻고 나와 향 좋은 기름 바르고 빗질 슥슥 하니 제법 기른 머리가 차분하게 내려앉는다. 한동안 머리 자라는 것도 모르고 지냈는데. 생각해보면 제 머리는 꽤 빨리 자라는 편이었다. 희안하게 말이다.
창문 살짝 열어놓고 그리 느긋한 시간 보내고 있는데. 어쩐지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니. 눈치 채는 것이 늦었을 뿐일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소란 인지하고 귀 기울이니 소란 다음은 노랫소리까지 들려온다. 몹시 감미롭지만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불쾌한- 노랫소리. 다행히 이끌리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여 온화 제 방에 계속 머무르기로 하였다.
아직 몸 곳곳 붕대 투성이이니. 괜히 나서서 덧나게 할 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가지 않는다]
525볼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아이 우는 소리와 같아◆ws8gZSkBlA
(4/qinFfqQs)
평시엔 그리 붙어 있지 않던 요괴들이 뭉쳐 있는 모습 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요괴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다. 그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짐작이 간다. 기다리던 소란 드디어 벌어진 모양이다. 바깥은 시끄럽건만 어디에선가 상황에 맞지 않는 노랫소리가 들리고……. 밖으로 나간다면 필시 여기저기 치일 것만 같다는 직감이 머리를 스친다. 귀찮으니 나가지 않고 눈이나 써 볼까? 그런 생각도 들지만, 기껏 준비한 상황이 무엇인지 정도는 몸으로 확인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늘어져 있던 몸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덩치가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그와 동시에 지난번 겪었던 것과 비슷한 통증이 느껴진다. 부려먹을 때 신호는 어떻게 보내는지 이제 알 것 같군. 하지만 눈만 좀 찌푸려질 뿐 버틸 만은 해서, 유현은 느릿이 눈 깜빡이다 고개 들어 치미의 얼굴을 눈에 담는다. 가뜩이나 불친절한 작자인데 지금은 기분까지 안 좋아 보이니 이것저것 묻는다 해도 제대로 대꾸해줄 것 같지 않다. 그는 치미의 말에 고개 까딱한 후 그리로 걸음 향한다. 빨리 가라 하니 화유현치곤 드물게 뛰듯이 빠른 걸음까지 해 주며.
그러고 보니 치미는 이곳만은 들여다보지 못해 거래를 통해 제게 원하는 것을 보도록 했었지. 찾는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이곳에 온 걸까? 더 물을 분위기가 아닌 듯하니 우선은 물러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정말, 진정으로, 체력을 좀 길러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벌어지는 사태는 모르겠고 몸이 지친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는 치미가 원하는 광경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방 안에서도 들었던 수상한 노래가 여기에서 시작한 것이었나? 보편적 인간의 심미에는 감미롭게 들리는 목소리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이끌림이 느껴진다. 섣불리 다가갔다간 저 역시도 정신 잃을지 모르니 그는 지켜보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지켜보는 일일 뿐이지 앞서서 무언가를 해결하는 쪽이 아니다. 유현은 모습 드러나지 않도록 몸을 숨긴 채 남자와 학생들의 무리를 지켜본다.
베개 밑으로 숨는 모습에 아회는 안도하면서도 착잡한 심정을 감추려 애썼다. 털뭉치 끝이 삐죽 나온 것을 보니 이러다 들킬 듯싶어 지팡이를 쥐려는 듯 손 뻗곤 이불을 몰래 움직여 덮어 가려주려 시도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지만 알고 있다. 이 정적에 안도하면 안 된다. 문이 강제로 열리자마자 머리는 상황을 파악했다.
"하."
잡으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이곳에서 맞서 싸우면 자신이 현저히 불리하며, 그렇다고 저 앞을 정면돌파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을 마치기가 무섭게 도망치려는 듯 몸을 빙글 돌렸다. 어떤 나라의 복식일지 모르나 허리를 동여매는 방식의 흰 옷깃이 소매와 함께 너풀거리고, 갈아둔 먹이 발치에 채여 휘청였음에도 지팡이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성큼성큼 벽난로를 향해 검은 족적이 남는다. 그 끝에서 무언가를 뿌리자 불은 옥빛 찬연히 빛나고, 아회는 망설임 없이 입을 벌리며 불길 속으로 투신했다.
"적룡 기숙사 밖으로."
노랫소리가 투신할 적에도 정신을 혼란케 하였으니,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나았다. 이대로라면 많은 것이 죽고 다칠 것이라 본능이 부르짖었기에.
당신은 이번에도 노래에 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또한, 머리 전체를 천으로 덮고 검은색 일색인 옷을 입은 남성이 노래를 계속 흥얼거립니다. 사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만ㅡ 그다지 좋은 상황 같진 않습니다. 남자를 멀리서 관찰하듯 몸을 숨긴 유현이 보입니다.
남자는 당신을 발견하지 못한 듯 노래를 연신 흥얼거립니다. 듣다보면, 몽롱해질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한 걸음씩 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부적을 바닥에 전부 떨어뜨리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홀린 게 분명해보이는 송 보리와 무 아회가 보입니다.
[>남자를 역린의 먹이로 주려한다] [>유현에게 다가간다] [>남자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561 유현
당신은 가만히 몸을 숨겼습니다. 남자는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고 학생들은 천천히 산 위로 올라갑니다. 노래는 계속해서 몽롱해질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당신과 시야가 공유된 존재가 화난 건지, 눈 쪽에서 찌르는 듯한 격통이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 .... '
홀린 게 분명해보이는 송 보리가 천천히 남자에게로 걸어갑니다.
[>자유]
>>566 아회
당신이 이불로 덮어주자, 목화의 털이 일제히 삐죽!! 섰다가 다시 사르르 가라앉았습니다. 적룡 기숙사 밖으로 도망칩니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당신의 귓가를 간질입니다.
당장 이리로 와. 산에는 아주 맛있는 먹을 것도 많단다.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네가 다 잡아줄 수 있어. 그리고 우리 모두 있을 곳으로 가자.
남자는 학생들을 이끌고 위로, 위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그리로 가서 뭘 하려는 거지? 생각해 보니 요괴들도 없다고 했었지. 설마 끌고 가서 요괴 먹이로 주기라도 하려고? 눈에 익은 얼굴 하나가 그 안에 섞여 있지만 그다지 나서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계속 보고만 있으려 했는데, 은근하게 계속되던 통증이 일순 극심해진다.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뭘 어쩌라는 건지. 이렇게 굴 거면 보내기 전에 지시 사항 명확하게 정리해 주기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곳을 보라는 뜻인지, 저 광경이 못마땅한 건지, 그도 아니고 저로선 짐작가지 않는 이유라도 있는 건지. 유현은 통증 제법 잘 참아내는 편이었으나 그것이 언제까지고 이 감각 버틸 수 있단 뜻은 아니었다. 그는 한숨처럼 긴 숨 조용히 내쉬고는, 숨어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팔짱 끼고 태연스레 가락 사이에 끼어들었다.
"뭘 하시는 중이죠?"
치미 그 자가 무엇은 원하는지 모르니 무엇이라도 해 봐야겠다. 마침 저쪽도 눈치챈 것 같으니, 어차피 숨는 것은 더 의미도 없을 테고.
기숙사 밖으로 도망쳐도 소리는 귀를 맴돈다. 귀를 틀어막으며 일단 되는대로 달렸다. 어디로 가야만 이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지? 혼란한 상황만큼 머리도 혼란히 갈피를 잡아가기 위해 돌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차 귓가부터 시작해 속내까지 짜르르 울리기 시작하고, 본능은 지금 당장이라도 비녀를 빼 귓구멍이라도 찔러버리라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넘어갈까보냐, 그럴 일은 없을 터다, 차라리 비녀를 지금……. 손이 머리를 더듬으려 귀에서 떨어졌을 적, 몸이 우뚝 멈춘다.
손을 떼었구나.
무언가가 발목을 붙잡아 그대로 자신을 깊은 어딘가로 끌고 갔다. 잠시 우뚝 멈췄던 몸은 비틀거리며 어딘가를 향하고, 다소곳한 발걸음 뒤로 드러난 모습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였던 것인지 귓가 바로 밑 목이 거센 무언가에 할퀴어져 붉은 핏방울 맺혀있었다.
"……."
본디 귀기 무 씨는 호법을 중시하여……. 지팡이 쥔 손길 너머로 온후한 미소 밉가에 맴돈다. 남성이 명하면 바로 공격하겠다는 듯.
온화의 외침에 보리가 자신에게 손 대지 못하도록 탁, 소리가 나도록 쳐냈습니다. 남자를 지키듯 그 앞에 섰습니다. 아회 역시 자신의 앞에 선 것을 본 남성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습니다. 가려진 천을 위로 올린 그가 멍한 표정으로 당신들을 응시합니다. 입가엔 문신이 새겨진 남자가 당신들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 모두, 가야할, 곳으로.... 보내,주고... 있어.... '
남자는 유현에게 느릿느릿 대답했습니다.
' 막으면, 너희... 때문에..... 더, 많이... 들어, 갈지도.... 몰라... '
보아하니 온화 역시 어찌저찌 이곳까지 온 모양이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그리로 시선 잠시 향했다. 송보리와 암호에게 다가서는 듯하니 그쪽은 더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 유현은 다시금 정체 모를 남자에게 눈길 돌렸다. 그리고 이내 눈 조금 키우며 의문한다.
"당신……."
꿈에서 본 적이 있는데. 아니, 그저 본 정도가 아니다. 유현은 잠시나마 꿈에서 저 남자가 된 적이 있었다. 뒤늦게 지난 꿈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저 자는 그때도 노래를 부르는 일을 하는 듯했는데…….
"산 위에는 뭐가 있죠? 학생들이 왜 거기로 가야 하는지도 알려 주시면 좋겠군요. 가야할 곳이라는 게 요괴 아가리 속이리라 저는 추측하는데, 제 짐작이 맞을지도 궁금하네요."
남자가 친절히 다 대답해줄 거라 기대는 않았지만 그는 이런저런 질문 한 번쯤은 던져 보았다. 그렇게 대치하던 도중 익숙한 울림이 발 밑으로 퍼졌다. ……이 감각을 익숙하다 여긴다니, 치미 그 작자한테 제대로 배운 것은 맞나 보다. 부적 하나가 힘을 잃더니, 땅 밑으로 거센 진동 내달리며 보리에게로 향하려 한다. 일단 땅 아래 처박히면 적어도 시간은 끌릴 듯해서.
분명히 제대로 겨냥하고 제대로 뻗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송 보리가 제 주먹을 피했고- 그 순간을 노린 듯 옆구리에 차가운 것이 푹 찔렸다. 얇고 길고 차가운 것- 그러고보니 직전. 아회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돌아보니 지팡이 대신 검을 든 아회가 제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오라비야... 내 꼬리 좀 그리 만졌기로서니... 이러는 건-"
커헉! 말 차마 잇기 전에 목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것 입 밖으로 내뱉었다. 새빨간 덩어리가 바닥으로 철퍽 쏟아졌다. 어찌해야 하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송 보리의 발길질이 제 다리 걷어찼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당황한 지금 중심 잃고 비틀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 비틀거림으로 옆구리에 꽂혔던 검 뽑히며 환부에서 피 솟구치고 입으로는 재차 핏덩이 토해냈다. 쿨럭! 넘쳐흐른 피가 턱부터 그 아래 서서히 적셔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래서 안 하던 짓. 하는게... 아닌데."
한 손으로 옆구리 틀어쥐지만 지혈 한 것도 아니니 피가 멈출 리가 있나. 부적을 쓰고 싶으나 그럴 정신이 없다. 점차 다리에도 뜨끈한 것 줄줄 흐름 느끼며 역린 쥐었다. 검집 째로 쥐고 송 보리 향해 휘둘렀다. 조금 전은 철저히 계산한 움직임이었다면. 지금은 정신끈 붙들고 거의 악에 받친 듯한 몸짓이었다.
아, 목적지는 산의 호수라는 뜻인가. 말이 좋아 돕는다 말하는 것이지 죄다 익사 시켜버리겠다는 뜻이다. 저 좋을대로 말하는 방식으로 보아, 남자는 예상 이상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인 듯싶다. 일반적인 인간도 어찌 대해야 할지 어려울 때 있는데 저 자에겐 대체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다소 난감하다 느끼면서도 쉬이 접하지 못할 저 괴이한 인간상에 흥미가 동한다. 그는 어느덧 한 발짝씩, 남자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왜 모두 물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생각하는 건가요?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을 텐데."
그리고 어느 순간 확 달려들어 남자의 입 틀어막으려 했다. 대놓고 경계하거나 공격하려 들면 막는 듯하니 평범하게 대화하려는 척을 해 본 것이다. 흥미도 흥미지만 당장 입 다물게 해야 대화를 하든 심문을 하든 수를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중요한 쟁점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 방심한 탓인가? 그는 저도 모르게 그 목소리 실로 아름답다 느끼고 만다. 온전한 정신 아득하게 멀어지기 직전, 짧게 혀를 찰 정도의 시간만은 있었다.
검을 휘두르기가 무섭게 머리가 맑아졌으나 이미 늦었다. 파고드는 감각과 이어지는 발길질에 피가 튄다. 반 푼도 안 되는 눈으로도 모든 것이 담겼다. 찰나의 시간을 뒤로 고개를 돌리는 것도 순간이었다. 일전에 겪었던 것이 있었다. 개여시에게 당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아니, 그것을 훨씬 웃도는 감정이 속내를 깊게 침투해 뒤흔들기 시작했다. 맑아진 머리는 온전히 소리를 듣게 하니.
"너구나."
과거 학당에서 수업을 들으러 갈 적, 목화가 아프다 했을 적. 들려왔던 그 노래가. 조그마한 생명을 해치려 들게 만들던 그 노래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피냄새는 짙어지고 감정은 그럴수록 고요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암약하더니, 이젠 난데없이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던 존재. 가뜩이나 신수들이 사감을 흉내 내며 제멋대로 활개치는 것도 거슬리는데 이젠 바깥에서 온 것이 명백해보이는 것이. 칼 쥐었던 손목을 잘게 털었다. 부적이 손에 쥐여지더니 온화 옆구리 퍽 쳐내려 들었다.
의식은 목적 잃은 난선처럼 그저 부유하는 것만 같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서 있나 의문이 들다가도, 어디선가 흘러오는 비릿한 향에 고개 느릿이 돌아간다. 아, 저편에 피가 낭자하다. 참을 수 없이 그리운 맥동이, 끝없이 끼얹어서라도 느끼고픈 온기가. 정신 나간 이 답지 않은 차분한 걸음 그리로 향한다. 쓰러진 자 앞에 이르러 그는 온화에게 손을 뻗었다. 온건한 손길이 아니었다. 피 멎고 쏟아내길 반복하는 그 자리를 손으로 헤집으려 들었을 테다.
저번 천부에서 마주쳤을 적엔 품에 안아도 도망도 안 치더니 오늘은 미꾸라지 마냥 잘도 피하는구나! 마음 같아선 소리 내어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입 열고 배에 힘 주는 순간 위아래로 피 뿜을 것이다. 아이고 답답해! 분해! 이럴 때 역정 나는 것 보니 저도 어쩔 수 없는 적룡인가보다. 옆구리 화끈거려도 일단 뭐든 조져야겠으니.
"꼬리값치고 너무 비싼. 아흐! 아이고 거 살살 좀 하소!"
저 찌른 후 정신 돌아온 아회가 옆구리에 부적 붙여줄 적 그리 호들갑 떨었으나 마냥 호들갑 만도 아니었다. 실제로 꽤나 아팠고. 그래도 부적 붙일 때마다 들썩이면서도 피하지는 않아 곧 옆구리 출혈 멈춘다. 그래봐야 이미 피투성이지만은. 적어도 지혈은 되었으니 조금 운신 괜찮을-
"잌!"
갑작스럽게 흔들리는 땅에 이번엔 몸 주체 못 하고 자빠졌다. 털석 엉덩방아 찧는 정도였지만 이미 너덜한 제 몸에 가해지는 충격으로는 엄청났다. 정수리까지 치솟는 고통에 숨도 못 쉬고 자빠져있다가. 드득. 흙바닥 긁는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일어설 적엔 뿌드득 소리 났다. 이를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턱에 힘줄 서 있었다.
"물비린내 나는 X끼... 비늘 바르듯 살점 바르고 인두로 살살 지져버릴까...!"
무슨 짐승에게서나 날 법한 목 긁는 소리와 함께 온화 기어코 그것 뽑았다. 검집 벗겨지며 역린의 서슬퍼런 날이 드러난 것이다. 여태 헛손질 했듯 또 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 온화 눈은 실핏줄 슬슬 터지며 벌갰다. 되든 안 되든 일단 갈겨보겠다는 의미다. 그 결심 떨어지자마자 어디서 나온 힘인지 세차게 달려 역린으로 인어 꿰뚫으려 했다. 그 목 한 중간을.
개여시. 그 순간부터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끝도 없이 자신이 늘 이 세상의 일부이자 언제이든 죽을 수 있는, 아무런 재능이 없는 범인임을 인지하게 됐다. 그 사실만큼은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넘어갈 수 있고, 두 번은 재고하게 되며, 세 번은 의심하게 되고.
끝내 오늘, 그 참아오던 잿더미를 누군가 발로 걷어찼으니 바로 당신이다.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들어가길 바란다고? 본인이 강제로 끌고가면서 들어가길 바란다 논한다는 것인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입을 벌려 노래를 부르더니 학당 사람들을 맘대로 홀리는 것이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아니, 아니다. 땅이 아프다고 하였던 목화의 말을 다시금 상기하니 잘 알 것 같았다. 저것이 나를 방해하고, 넘어뜨릴 것이며, 불태울 것이다. 고작 저딴 것 때문에 내가. 부적을 붙이며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아회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누가 누구의 친구라고?"
숨기고 있던 오만함에 불이 붙는다. 검에 묻은 피 휙 털어내지도 않고, 간도 보지 않으며 그대로 칼 앞으로 쭉 뻗었다.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면 목이나 입을 찢어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만 그렇게 되면 비명 또한 노래가 될 수 있다. 지금 해야할 것은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 것이지 아니한가. 하여 다리를 노렸다. 다리를 거세게 베어 무릎 꿇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여.
땅바닥 흔들려 주저앉았을 적. 바로 일어나지 못한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유현 때문이었다. 단단히 홀린 눈 하고 오더니 대뜸 옆구리 환부에 손가락 꽂았을 때엔 오늘이 기어코 죽는 날인가 싶었다. 기껏 붙인 부적 무색하게 뚫리자마자 유현의 손 잡아채어 내치려 했다. 얼마나 더 홀릴지 모르니 일단 떼어내야 했다.
그리고 한시라도 더 빨리 멀어지기 위해 인어에게 달려들어 그 목 조지는가 했는데.
"허? 이런 TB!!!"
분명 목을 뚫어버리려 했건만 어째서 저 희멀건 쭉정이가 떠안느냔 말이다! 두고 두고 쓸모가 없구만. 저것부터 족쳤어야 했어!
라는 온갖 생각 담긴 눈이 보리 향했다가 다시 인어에게 향했다. 이번엔 참지 못 하고 벌린 입으로 또 한 웅큼 토해내고. 악에 받친 고함 내질렀다.
"거 잘 됐다! 아까부터 어슬렁어슬렁 거슬리던 참인데! 그래 내 다음엔 심장 찔러줄테니 그것도 넘겨보시지! 네놈이 뒤지던 저 쭉정이가 뒤지던 내 알 바냐! 비늘 발라버릴 물짐승 X끼야!!!!!!!"
피 섞인 발악 하며 재차 쥔 역린으로 인어의 목 다시 내려친다. 저것 물어뜯고 포식해버려라!!!!!!
또 다시, 어느 순간 모호하고 몽롱하던 의식이 별안간 명징해진다. 지난번 개여시 때와 유사한 듯 다른 기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피로 흥건하게 젖은 제 두 손이다. 그것을 확인하자 새까만 수륜 일시에 확장된다. 당혹인가? 혹은 그저 흥분했을 뿐? 무엇이 되었든 이 순간 그가 어떤 이유로든 크게 동요했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피의 주인 되는 자는 멀리에 있지도 않았다. 시선 끌어올리자 곧장 보이는 모습 올려다보며, 그는 응당 해야 할 것 아닌 다른 말부터 입에 올렸다. 아, 손끝으로 느꼈던 맥의 감각 아직껏 선명하다. "내가 이러는 동안, 시간은 얼마나 지났어?" 그 감각 더 생생히 느껴야 했는데……. 그리고 그는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확인했다. 습관처럼 옷자락 털려 하다 손이 지저분하니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조금 뒷전에 서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잠시 파악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은, 끼어들어도 혼잡해지기만 할 테니 일단은 가만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거기로 가려면 꼭 당신 노래 들어야 하나요? 맨정신으로는 가면 안 되나. 가기만 한다면 이리 서로들 다툴 필요 없지 않나요."
백룡 기숙사의 홀린 녀석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었다.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금술을 쓰든, 제사장 가문이든, 그것을 저 존재에게 쓰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죽을 녀석이면 죽을 것이고 살 것이면 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 불청객을 막아세우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검을 휘두를 적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이 공격을 피할 수 있게 잡아채지 않아도 공격은 빗나갔을 것이다. 검으로 베어 그 끝이 땅을 향한 자세 그대로 아회는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궁기 말이 맞네.
당신을 쳐다보는 눈이 온전히 뜨여 있었다. 궁기. 그 두 글자에 온몸이 굳은 밀랍인형처럼 혼란한 전시에 우두커니 서 당신만 쳐다보았다. 방금 궁기라 하였지. 빠졌던 조각이 들어맞는다. 저 존재가 인어다. 그리고 저 존재가 온 이유는 궁기의 명령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형제가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 잘 알았다. 만일 이것이 독단적인 상황이라면 지금쯤 온 산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찾아 죽이려 들었을 테니.
"……."
그런데, 형님이 왜. 어째서? 이전부터 들었던 생각이었다. 10년 전 그렇게 떠나놓고서,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학당을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어째서 하필 이 순간이지? 어째서 자신에게 아량껏 자비를 베풀었지? 어째서? 바라지 않는 것을 왜 이제 와서 모조리 이루어주려 하고, 동시에 행하려 들지? 지팡이의 손잡이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숨을 후, 뱉었다. 잡념이다. 망념이고, 불필요한 찌꺼기에 불과하다. 보아라, 저 멍청한 존재를 통해 무엇을 해내려 한단 말인가? 자신의 형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을 사용하지 않는 존재가 친우니 무엇이니 지껄이는 저것에게 대체 무슨 쓸모를 찾았단 말인가. 아니다, 아니다……. 이지러지는 속내 뒤로 부정하던 감정과 긍정하던 감정이 서로 상충하더니 뇌리를 온전히 스쳤다.
"하, 하하……. 친구는 무슨, 지랄하네."
그 말을 끝으로 아회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얗게 물들었던 손에 힘이 빠지고,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방해되는 것을 치워야 한다. 아회는 잘 알고 있었다. 지킨다 해도, 자신이 다시금 지키지 못하고 공격할 것을 알았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비틀거리며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들어 검을 다시금 역수로 쥐었다. 이내 제 옆구리를 강하게 찔러박으려 했을 때 보인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하였다.
제 옆구리 후벼놓고도 태연하게 얼마나 그러고 있었냐 묻는 유현 향해 온화 던져준 대답이었다. 실은 그것보다 길지만 이 급박한 상황 속에 그것 어떻게 재고 있을까. 그러니 눈 깜빡할 순간이었다고. 대충 일갈하고 곧장 그 자리 등졌다. 더 급한 사안 코 앞에 닥쳤으니.
역린이 인어의 목 뚫고 곧장 잡아빼었으니 다시 소리 못 낼 것이다. 다음은 아예 떨어뜨려주마. 그리 마음 먹은 것도 잠시였다. 흐르는 피 보며 히죽 웃은 것 찰나. 인어의 품에서 떨어지는 인형의 목 보고 다시 이 갈았다. 빠드드득- 저러다 이 부서지는 것 아닐까 싶을 만큼 힘 들어갔으니 그 소리 또한 섬찟했다.
"이 짐승 X끼가 보자보자하니까..."
온화 지척에 있었으니 아회 향해 하는 말들도 다 들렸다. 사감들 언급하는 것도 들었다. 벌겋게 터진 눈에서 금방이라도 피눈물 흐를 것 같다. 과히 힘 준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목에도 붉은 실자국 넘실넘실 번지며 어렴풋이 어느 문양 만들어낸다. 붉은 선으로 이루어진- 연꽃 닮은 문양을.
"내 오늘 네 목은 못 떼어도 그 혓바닥은 기필코 잘라주마. 당장 그 주둥이 벌려!!!"
이젠 고함과 동시에 피 뱉으며 역린 들었다. 높이 든 역린의 날에서 희디 흰 빛 반짝인다 싶더니. 인어의 잘도 나불거리는 입 향해 내리찍히려 한다. 혀 끊고 그 목도 뚫어버리리라!
목이 베이는 순간 끝인가 했더니, 조종하는 인간들 외의 다른 대책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금 멀쩡하게 목소리 내는 남자를 바라보며 제 턱 언저리 살살 두드린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직접가면 더 좋겠다 말하는 상대의 말에 그는 조금 고민하다 이야기를 돌렸다.
"……이건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인데 말이죠. 당신, 령도에서 풍어가를 부르던 사람이었죠?"
제 발로 간다는 투의 말 꺼냈지만 진심일 리 없다. 그저 조금이라도 관심 돌리려 했을 뿐이지. 그래서 그는 주의를 끌 만한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그때 그 꿈 더 꾸었다면 저 자에 관해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도리 없는 일이다. 이내 그는 또 틈을 노려 도술을 사용했다. 남자 발치의 흙이 뱀처럼 길게 솟아나 꿈틀거리더니, 남자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상대의 목구멍 안까지 흙으로 꽉 메워버리겠단 일념으로. 죽일 정도의 공격을 해 봤자 목숨줄 여럿 있는 듯하니 안 죽이되 입 다물게 하는 수밖에.
아, 찔렸다. 보아라,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니 자신이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 아니던가, 죽을 수도 없었는지 허리만 옅게 스치고 말았다. 형님께서는 자신의 결정이 보고 싶다며 당신을 불렀다고 하였으니, 홀렸음에도 몽롱한 눈길은 당신을 향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죽여도 내가 죽여야 한다고 진작 마음 속에 품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깊은 속내가 있지 않았나. 자신도 인정하지 못하며 일깨우지 못하던, 진정한 결정이 무엇인지 그 속내를 보고 싶었던 것일까.
"……."
본다 한들 의미없다. 어차피 결정을 내린들 지켜보지도 않을 존재임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직접 와서 보라고 얘기할 의지도 없다. 애초에 설산 위의 영물이 아니던가, 자신과 같은 하늘을 바라본들 그 높이가 다르니, 자신이 결정 내리고 그 모습 보여준다 해도 흘긋 내려다볼 뿐일 테다. 그리고 감정은 한때요 감흥없이 새로운 것 찾으려 들겠지. 가라앉은 눈빛을 숨기듯 눈이 감겼다.
본디 이만큼 왔다면 본능적인 반항심이 들 법도 하지만 넋을 뺏긴 탓인지 그런 생각도 들지 못했다. 본능마저 무너졌으니 비척비척 걷다, 고개 돌렸다. 결정이 보고싶다 하였으니 보여주겠다는 듯 당신, 인어의 앞 지켜내듯 막아선다. 평온하나 표정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다시금 검 들고 올렸다. 그리고 또다시, 성공할 때까지 제 속내 깊게 찌르려 들었겠지.
기세 좋게 역린 내리쳤지만 과하게 피흘린 탓인지 끝내 한 번 더 먹이는 것 실패했다. 빗나가기 무섭게 시야 흔들리며 몸 비틀거렸다. 곧 쓰러질 것 같은 탈진감이 발밑에서부터 차오른다. 지금은. 지금은 안 되는데. 저것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하는데! 다급한 마음과 달리 몸은 버텨주질 못 했고 쓰러지기 직전 누군가의 등에 툭 기대졌다.
익숙한 감각. 익숙한 하얀 두루마기. 여태 코빼기도 안 비치다 다 죽어갈 쯤에야 나오나. 기쁨보다 원망이 앞선다. 시야 바깥으로 스스로 칼 찌른 아회 보았을 때엔 분함이 치솟는다.
전에 없이 타오르는 심정에 목의 문양 점점 선명해져갔다. 검은 띠 둘러진 채로 피어나는 연꽃 한 송이. 아니. 서서히 옆으로 번져가는 것이.
"읏..."
하 사감의 뒤에서도 느껴진 돌풍에 잠시 모든 생각이 끊겼다. 감정도 심정도 일제히 멈췄다가 주위 잠잠해지고 인어 사라진 것 깨달았을 때 울분 섞인 비명으로 터졌다.
"아아악... 아아아악...!!!"
학당을. 아회를. 유현이를. 저를! 이렇게나 헤집어놓고 그리 사라지면 다인가! 다음엔 반드시 기필코 그 목 끊어버릴 것이다. 다시 마주칠 적엔 그 목에 역린 박고 이로 물어 숨통을 끊어버릴 것이다! 비린내 나는 짐승새X!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놈들 전부!
제 손으로 얼굴 가리고 온 몸으로 쥐어짜듯 비명 지르다 뚝 끊긴다. 의식의 실 끊긴 몸뚱이가 지면 위를 굴렀다. 벌어진 환부에서 붉은 피 줄줄 흘리며. 어느새 목덜미 깨끗해진 채로.
인간에겐 이런 문화가 있단 식으로 거짓 대꾸라도 해 볼까 했는데 이젠 그조차도 귀찮아졌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 끄덕이며 하겠단 의사 표했다. 우선 백룡 기숙사부터라면, 나쁘지 않다. 신기하단 듯한 시선 치미에게 노골적으로 꽂힌다. 이 작자에게도 의외의 배의가 있기는 했다는 건가? 그리 큰 배려는 아니었지만 여하간.
훈련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아까도 생각했듯 이미 대가를 내어줘 버린 이상 배울 수 있을 때 배워 두어야 하니 싫어도 방법 없지.
"기왕이면 시작한 이상 끝은 제대로 보아야겠네요. 조금만 더 어울려 주시죠."
어깨에 힘 쭉 빼면서 피로한 티 내면서도 유현은 이렇게 말했을 테다. 어울려준다면, 화유현은 아마 이 뒤로 한참은 데굴데굴 구르는 시간을 가졌으리라.
갑자기 푸는 tmi! 유현이 말투는 기본적으로 해요체에 문장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하십시오체를 간혹 섞어 쓰는 정도예요. 하지만 본인도 인식하지 못한 어투가 있는데, 특별히 멀게 느껴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말할 때는 말투가 조금 더 공손해지는 편이랍니다. 정확히는 하십시오체의 빈도가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어요. 말투는 더 공손해지는 데 반해 겉치레로나마 있던 예의는 덜해지고요.
이번 일상에서 치미를 상대로 말할 때.... 대체로 더 공손한 말투를 쓰고 태도도 꽤 불손했었죠....... 치미씨가 마음에 안 든대요....😗(하지만 저는 그런 치미씨를 좋아합니다 진짜임!!!)
온화가 아회가 술을 마실 적, 하 사감은 스스로의 싸움 중이었습니다. 연신, 무릎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달달달 떨던 그는 나가려는 것처럼 연신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춘 사감과 같이 바둑 두던 영 사감은 한숨을 깊게 내쉴 정도였기에 치미가 기어가듯이 하 사감에게 다가갔습니다.
' 아우야, 뭐가 그렇게.... 신경쓰여? '
거의 기어가듯 하 사감에게 다가가서 매달린 치미가 하 사감의 상태를 알았는지 히죽 웃었습니다.
' 본능이랑 싸우는 중이네? ' ' 설마 또... '
영 사감이 지팡이를 들자, 치미는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하 사감에게서 떨어졌습니다.
' 저 눈,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쪽인데... 누가 술 마시나봐? '
그 말에 모든 사감들의 시선이 하 사감에게로 꽂혔습니다. 하 사감은 그 시선을 애써 피하며 동 사감을 무릎에 재운 현진 도사에게 다가갔습니다.
' 오, 인간 죽이려고? ' ' 누이, 이번 수업에 적룡 남학생, 무 아회라고 걔 가면 그 학생 좀ㅡ ' ' *릭투셈프라 '
*간지럼을 태우는 주문
영 사감의 지팡이 끝에서 나간 주문이 하 사감에게 제대로 명중했고 그는 바닥에 웅크린 채, 간지럼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영 사감이 차가운 표정으로 하 사감을 내려다봅니다.
' 그 학생도 제겐 소중해서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 ' 야... 힉..!! 너...!! '
몸을 뒤틀며 어떻게든 버티려 하는 하 사감을 가만히 보던 그가 시선을 돌렸습니다.
' 학생에게 개인 억하심정 넣은 수업 사주를 왜 합니까. ' ' 내 역린으로 그럼 저 모습들 다 보고만 있어? ' ' ....... '
>>770 8죄종은 그대로 가요! 다만, 차이가 좀 생겨여!!!! 얘네랑 가족 설정 가능해졌고 얘네 포획 가능하다 정도?(????)
>>771 국장은 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패여있고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왓어여 30후반~40초반이고.... 국장실에 없으면 100%머글사회로 갔단 뜻이에여. 어깨도 넓고 보통 단추 2, 3개 정도 푼 와이셔츠 입고 다닙니다. 순혈이냐, 혼혈이냐, 머글이냐를 따지자면.. 머글 출신이고 사별한 아내, 딸이 있어여:3
한때 아회는 평범한 삶을 간절히 바랄 때가 있었다. 비록 사무친 추위 속에서 살긴 했지만, 가끔 무 씨 집안과 교류를 하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이나 방계의 가족들을 보면 평범한 삶이 그토록 샘이 났다. 어머니의 품만이 아닌 아버님께도 안겨 안정을 얻고, 형님과 도란도란 얘기를 하며, 사용인들에게 유령이나 사생아 취급을 받는 게 아니라 담소를 나누며 그 사이에 섞이는 기분은 과연 어떨까?
그렇지만 주어진 운명은 아회에게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함을 탐낸 대가를 받아 갔다. 그렇게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과 거리가 있었으며, 형제는 궁기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 집안을 뒤집어엎었고, 자신은 눈을 잃었으며, 사용인들은 그날을 기점으로 득달같이 몰려들어 자신을 탓했다.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며 원망을 쏟아내는 순간을, 자신이 품은 증오심을 기억한다.
삶을 부르짖은 덕분에 입지를 다져 가주의 권위를 등에 업은 이후로는 평범함을 추구할 수 있었다. 차라리 그 알량한 증오심보다 생존에 대한 욕구가 더 컸더라면, 그렇게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그 순간을 뼈저린 고통이라 합리화하고 내려놓은 뒤 새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과 같은 감정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회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평범한 삶을 탐내었을 때 내린 벌이 이미 마음 깊숙한 곳에 각인된 탓이었다.
평범한 삶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내포했다. 탐낸 죄로 다시금 피바람이 불 것 같아 두려운 것도 있었으나, 이번엔 피바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어린 나이에도 아회는 알고 있었다. 차라리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자신이 품은 증오심은 아주 예전부터 시작되었거니와, 그 증오심은 삶의 원동력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또한 형제가 궁기의 이름을 가지게 된 이후로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은 어떠한 힘이 없는 범인凡人임을 상기했다. 자신은 운명을 뒤집을 수 없음을 일찍이 깨닫자, 증오심이 비틀려 평범을 추구할 일도 없었다.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을 터이니, 그렇게 새롭게 살게 된 삶은 비록 가시와 깨진 유리로 점철되었으나 마음만큼은 편하였다.
"……."
그렇게 몇 번이고, 몇 년이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살았다. 조금이라도 무른 생각을 하게 되면 평범의 대가를 떠올리며 범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상기했다. 채찍으로 고행을 하며 얼마나 걸었는가, 그 수를 셀 수 없고 익숙해졌다 생각하였거늘 단 한순간만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젠 더 채찍을 들 힘도 없거니와 칠 곳도 없었다. 등은 너덜너덜하다 못해 그 뼈를 드러내는 것 같았고, 다리는 짓무르고 파리가 끓는 것 같다.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증오심은 자신이 원망하는 타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자 산산이 무너져버렸다. 경가의 노를 젓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져 삶이 너울에 휩쓸리기만을 기다리듯, 벽난로마저 꺼버린 암실 속 침대에서 가만히 누워있던 아회는 생각했다.
이대로 포기하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평범한 삶을 원한 대가로 끔찍하게 죽는다 하더라도, 그 평범함의 편린 정도는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겐 이미 그럴 기회도, 자격도 충분했다. 황룡을 선택해 다른 세계로 넘어가 영영 고통에서 도망칠 수도 있을 것이고, 땅신령의 선택을 받아 지선이 되어 유유자적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회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그러쥐었다. 몸은 덜덜 떨리고, 점차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눈도 감지 못했는데 깊은 곳에 각인된 공포는 무자비하게 눈에서 물을 떨궜으나 아회는 깊은 감정에 잠겨 그마저도 자각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삶. 그 대가는 얼마나 클까.
이번엔 또 누가 어떻게 죽게 될까, 이번에도 학당의 무고한 학생이 죽을 뻔했다, 영이가 죽을 수도 있다. 화야나 현이가 죽을 수 있다. 싫다. 두렵다. 또 자신 때문에 누군가 죽는 건 이젠 싫다. 사람들은 자신을 탓할 것이다. 이젠 세울 입지도 없다. 자신은, 자신은……. 후들후들 떨리던 몸을 웅크리며 아회는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그렇게 한참을 떨던 아회의 몸이 우뚝 멈췄다.
"……애초에 바란 적도 없었어."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두려움은 충동을 낳는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다. 싫은 것이 있다면, 때로는 희생해야 하는 법이다. 타인의 죽음이 두렵다면. 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된다. 정신을 차리고자 환부를 움켜쥔 손에 힘이 풀렸다. 복부를 감싼 붕대가 붉게 물들고, 아회는 그 상황에서 기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을 적, 움켜쥐어 덧났던 환부는 누군가 붕대를 갈아주었는지 말끔하고, 하루의 시작을 위한 단장을 마칠 적엔 목화를 위한 별사탕까지 새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 호위가 정성껏 준비한 것이 분명하고, 그의 충심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나 어째서 이렇게까지 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여 면담이 준비되어 있으나 오늘 하루는 자유로이……."
잠든 사이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울림 좋은 목소리가 귀에 닿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째서 이렇게 했지, 그것보다 이름이 뭐였지. 무릎을 꿇은 무영을 한참이고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무영이 고개를 들었다.
"명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
반사적으로 입을 뗀 아회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얼굴을 가릴 너울을 뒤집어 쓰고, 지팡이를 짚었다. 긴 옷깃이 나부꼈다.
"외출할 터이니 너는 따라오지 말거라." "목화 님은 어찌할까요?" "……쉬게 두어라. 지난번 일로 많이 놀라셨을 터이니 이번에도 비슷한 일을 겪게 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숙사에 두실 겁니까?" "사감님께 데려다 주거라. 같은 신수이니 귀히 여길 터이며, 염치가 있다면 돌봐주겠지. 마침 너도 해야할 일이 있지 않더냐."
어련히 할 일이 있겠지. 대답은 듣지 않는다. 아회는 지팡이를 짚고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부적이 불타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무영은 한숨을 쉬며 의복을 재정비했다. "용께서 목화님과 놀아주시겠다 하셨답니다. 가시지 않겠습니까. 별사탕도 있다 하더이다." 아회는 학당 밖으로 나서고자 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이대로 걸어 북부까지 가버릴까,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배꼽부터 끌려가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너울 속을 달구던 뜨겁던 볕의 기운도 싸늘한 공기에 식어버리고, 남은 온기마저 뺏고자 하던 한기는 몸을 더듬는다. 아회는 익숙한 추위에 눈을 떴다. 포트키를 받은 이후 써본 적이 없었기에 어떤 방식으로 도달하는지 알지 못했건만, 이런 느낌이었구나. 새삼 신묘하다 속 좋게 생각하던 것도 어머니의 관 주변을 보자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발자국.
아회는 눈을 홉떴다. 자신의 것은 아니다. 호위의 것인가? 아니다. 자신에게 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주님의 것인가? 그 작자가 어머니를 신경 쓸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형님? 아니다. 그 인간이 여기 올 일은 없다. 올 이유도 없다. 인간을 흉내 내는 요괴였다면 진즉 무 씨 집안의 도술에 걸렸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신수? 미쳤다고 영험한 존재가 북부에 발을 들이겠나? 사용인? 아니, 여기에 발 들이면 목 떨어짐을 알 텐데 모험을 즐긴다고?
"……."
그렇다면, 이 불청객은 누구지? 아니, 누군들 상관은 없다. 어차피 행할 일은 하나다! 발자국을 보자마자 스친 추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회는 발걸음을 천천히 돌렸다. 차분한 존재, 그것을 넘어 잿더미에 가까운 아회라 할지언정 눈 돌아버리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 일이 있었으니 제 비밀에 다가가는 것일 터다. 하물며 어미의 묘에는 자신이 지금껏 보낸 서신이 있었다. 그걸 읽기라도 하였더라면.
고통에 눈을 떴다.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어느 정도로 아픈 지는 모르겠지만. 아파서 눈을 떴다. 눈을 뜨는 것조차 아팠지만.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
"......"
흐릿한 시야가 제대로 상을 잡기 시작하며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산발로 펼쳐진 제 머리카락이었다. 곱게 빗질 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산발이 된 채 흩뜨려져 있고. 그 아래는 침대였다. 익숙한 촉감의 침대보 위에 누워 있었다. 그 상태로 눈을 굴리자 반쯤 엉망이 된 방 안도 보였다. 망할 것들이 짓밟고 간 흔적이다. 찢어진 책이라거나. 부서진 소반이라거나. 발자국 투성이가 된 두루마기라거나.
아. 최악이다.
방이 엉망인 걸 보고 더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저는 달리 치워주는 사람도 없고. 도움 될 만한 사람을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어떡하랴. 너덜너덜 넝마 같은 몸 질질 끌고 다니며 청소부터 했다. 타인의 흔적이 남은 것들 모조리 끌어모아 문 옆 구석에 쌓아놓고. 손수 빗질과 물걸레질로 쓸고 닦고 하니 좀 깨끗해졌다. 더분어 환기도 시켜서 조금 개운해지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깨끗해진 방과 달리 제 몸이 역으로 더러워졌기에 씻어야 했다. 이 방에서 가장 귀찮은 '청소'가 남은 것은 정말 한숨 밖에 안 나오는 일이었다.
그 뒤로 반 시진에 걸쳐 어찌저찌 씻고 나와서 또 반 시진 동안 수건으로 머리 둘둘 감고 너덜한 몸에 약이니 붕대니 부적이니 둘둘 휘감고- 겨우 끝내고 나니 다음은 배가 고파졌다. 망할 몸뚱이. 앞서 밝혔듯 제 혀는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라 공복을 느껴도 입맛은 없었다. 뭘 먹어도 게워낼 것 같고. 그러니 그나마 성하게 남아있던 방석 끌어와 침대 옆에 두고 털석 주저앉아 침대에 기댔다. 머리 마저 말리고 빗질도 해야 했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수건만 풀어 대충 던져놓고 침대에 기대 눈 감았다. 오늘은 더이상 아무 생각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짙은 무력감은 사람을 글러먹은 상태로 몰아가기에 매우 적합하다. 한 번 그 상태에 빠져본 적 있다면 두 번 세 번 빠지기 쉬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제 경우에는 그것 길어지면 일시적으로 정신이 퇴화하니. 경계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시라도 좋으니 다 내려놓고 무의식에 몸을 내맡기고 싶어.
그러나 언제나 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비틀려 왜곡되어버려. 봐. 지금도. 누가 이 평화를 깨뜨리러 왔잖아.
친절한 기척에 눈만 떴다. 명백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침대에 기댄 채로 멍하니 허공 보다가 한 손 들어올렸다. 검지와 중지 세워 가로로 그으니 문의 잠금 풀리고. 문고리 쥐어 돌리는 시늉 하니 철컥 문 열린다. 그리고 손 내리면 알아서 문 움직여 방문객이 침입하기 딱 좋은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일련의 소동이 마무리되고 며칠이 지났다. 학생 몇이 의식을 잃고 날뛰다 다쳤을 뿐 결과적으로 사건은 큰 사고 없이 무사히 해결되었다. 어차피 적당히 해결될 문제였다면 역시 가만히 숨어서 관망하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그놈의 눈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다. 여하간 유현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다친 곳 없이 말짱했고, 특별히 가고픈 장소도 없다. 안 하던 고생을 했더니 몸이 쑤셔서 움직여야겠단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가만히 시간만 보내려 했는데……. 지나가는 학생들이 언뜻 흘린 대화를 듣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영 사감은 현재 학생들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참, 그러고 보니 언젠가 영 사감에 관해 캐물어야겠다 생각했었지. 여전히 몸은 쑤시지만 동기가 생긴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는 느릿느릿 일어나 한창 바쁜 직장인 훼방 놓기로 했다.
어머니의 묘는 극비였다. 그동안 스산하기 짝이 없는 곳을 잘도 간다며 사용인들은 끔찍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려 들었고, 가문의 방계들마저 흉계를 꾸밀지도 모른다며 멸시하는 시선을 감내하면서까지 그 존재를 숨기려 들었다. 원내의 기숙사조차 믿을 수 없었던 아회에게 있어 어머니의 묘는 성역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 곳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곳에 시체가 있었노라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지켜오던 비밀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성역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입에도 담지 못할 추측을 앞세우며 어머니의 시체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하겠지. 아무리 가주의 권한을 등에 업었다 해도 어머니와 관련된 일에서 가주의 권한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개입할 명분도, 권한도 없으니 어머니의 시체를 불태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 가루를 얼어붙은 호수 위로 뿌려버리고 말 것이다.
그 일만큼은 절대 두고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모든 일이 끝나면 령도의 양지 바른 곳에 묻어드리려 하였는데, 그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의 모멸감을 견뎌왔는데.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고? 안 된다! 어머니의 주변을 호법하듯 지키던 아회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
아회는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점점 수축하는 반 푼어치도 하지 못하는 눈동자 하나였다. 차라리 사용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찢어 어머니에게 목을 바쳤을 것이다. 신수였다면 그들이 기고만장하며 앞세우는 빌어먹을 여의주이니 뭐니를 뽑으려 들었을 테고, 학생이라고 해도 살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시야에 담긴 풍경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요한 장소에서 웃음이 흘렀다.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품에 꽃이 있었다. 왜? 당신이 왜 꽃을 안고있지? 그것도 직접 꺾은 꽃을?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으나, 정작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신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꽃을 꺾었음을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이 죽였기 때문이다. 당신을 만났다는 죄로, 자신은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어머니께서는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이 추모를 한다고, 이 자리에 발을 들인다고? 이 자리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 사람이, 아니, 모르겠지. 어떤 의미인줄도 모르고, 이 자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엇을 바쳤는지, 무엇을 다짐했는지 당신은 모르겠지. 그러니 자리를 비켜주겠노라 하겠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흘렸겠지…….
어디선가 툭, 끊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아회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마치 가지 말라는 듯 붙잡는 것처럼 앞으로 다급히 다가가며 손을 쭉 뻗었으나 그 속도가 정상적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긴 소매가 나부끼고, 쭉 뻗은 양손이 목을 향했다. 그대로 아회는 멱살을 부여잡은 채 당신을 땅에 메다꽂으려 시도했다. 함께 넘어지든 말든, 꽃이 휘날리든, 눈발에 파묻히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대화를 하다 보면 한 번도 격양된 적이 없었던 목소리는 감정을 억누르려 무진 애를 써도 짙은 분노가 부르르 떨리며 틈새를 비집고 나왔고, 거친 숨결에 어깨가 위로 크게 올라가다 아래로 부르르 떨리며 내려가길 반복했다. 멱살을 틀어쥐려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희뿌연 입김이 입가에서 흩어진다. 목과 볼에는 핏대가 섰고, 한쪽만 홉뜬 눈은 정확히 당신을 응시하려 들었다.
문 밖의 기척이 문 안으로 들어온다. 일정 거리 이상 들어왔다 싶을 쯤. 늘어뜨린 손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열렸던 문 누가 민 것 마냥 스르르 닫혔다. 창문 닫은데다 차양막까지 내려 방 안 어둑해진다. 적막한 방이었지만 작은 숨소리 하나는 들렸을 것이다.
하 사감이 들어와 뭘 하건 무슨 말을 하건 온화 가만히 있었다. 얼핏 보면 그대로 잠든 듯 보인다. 그래도 진짜 잠든 건 아니니까 움직이긴 했다. 하 사감이 놓은 향로의 연기 흘러와 한 모금 들이마신 듯 했을 때. 긴 숨과 함께 무력하게 늘어진 몸 세워 하 사감 향해 돌아앉았다. 가문에서 보내준 붉은 두루마기를 입은 것도 아니고 달랑 걸치기만 한 몸이 삐딱하게 앉아 하 사감 올려다보았다.
"...미안하고. 자시고 할게 있으신가. 사감님들이 학생 번거롭게 하는 것 한 두번도 아니고. 괘념치 마시지요. 하 사감님."
삐딱한 자세와 달리 공손한 말투였지만 지금은 그렇기 때문에 더 껄끄럽지 않을까. 목이 머리 주체 못 하듯 옆으로 툭 꺾이자 부스스한 머리도 따라 흘러내렸다. 기울어진 머리 가누기 귀찮은지 그 상태로 느릿하게 하품하곤 다리 한 쪽 세워 슬쩍 기댔다. 붕대 반 맨살 반인 몸 더 가리려 하지 않고 그리 앉아 다시금 입 열었다.
척 보기에도 분주해 보인다. 그는 이것저것 조치를 취하는 사감의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구경했다. 흔히 아는 천공섬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과 양상으로 작동하는 물건들. 그라고 해도 흥미 가질 법한 광경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항이 무엇인지 잊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더 기이한 것이 영 사감의 상태이니, 유현은 사감이 제게 다가오자 한눈 팔기도 그만두었다.
"약간의 근육통, 그리고 트라우마 호소 정도의 증상도 봐 주나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간 쫓겨날지도 모르니 일단 아무런 소리나 대충 주워섬긴다. 그는 사감이 대답하기도 전 잽싸게 더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려 했을 테다.
"……트라우마는 농담이었어요. 그것보다는, 사감님의 사적인 인적사항에 관해 묻고 싶어서요. 잠시 시간 있으신가요? 없으셔도 내어준다면 기쁘겠네요."
본래도 알고 싶은 대상에는 돌진하는 기질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훼방 놓는 덴 다 이유가 있다. 어렴풋이 느끼기에도 이 사감은 다른 사감들에 비해 유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 까탈스러운 거래자에 비하자면, 영 사감은 솔직히……. 말 아끼겠다.
기억을 지우는 것도 관심은 가지만 당장 필요하지는 않으니 일단은 넘긴다. 영 사감은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순순히 응해줄 요량인가 보다. 하기야 백룡 학생은 저뿐인 것도 아니고. 지금껏 비슷한 일 몇 번 정도는 겪어보지 않았을까. 그는 사감이 내어준 자리에 가 앉았다. 내어준 다과는 제법 정갈했다. 하지만 차분히 입 축이며 말 고를 생각은 없다. 유현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그에게 화가 났느냐. 그 물음에 붉은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묻는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냔 듯. 물끄러미 응시하던 눈 곧 아래로 떨구어졌다. 고개도 함께 내려졌으니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든 걸 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기 싫은 것일 지도. 슬슬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과 바람 따라 흘러오는 푸른 연기 보며 느즈막히 입 열었다.
"그래요. 화 났습니다. 한들 사감님 하실 말씀 하나 뿐이겠지요. 미안하다. 아니면 어쩔 수 없다. 이래뵈도 뻔한 말 듣는 것엔 이골이 난 지라. 사실이야 어떻든 아니라고 하렵니다."
사실 화고 뭐고 아프고 나른해서 머릿속이 제대로 돌지 않아 무감각해졌음이 맞지만. 좋을 대로 해석하란 듯 무책임한 말 툭 던져놓았다. 상담 하러 왔다 했을 때도 똑같았다.
"상태가 어떠하느냐. 물으셨는데. 무슨 상태를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찔리고 쑤셔진 후유증이 어떠하느냐는 건지. 그 물비린내 풀풀 나는 놈 잡아 찢어죽이지 못 해 아쉽지 않느냐는 것인지. 다 지긋지긋하다 느끼지는 않는지. 하도 짚이는 것이 많은데 무엇을 물으시는지요? 하 사감님."
콜록. 하나 하나 읊던 목소리 조금 격앙되기 무섭게 기침 새어나왔다. 잔기침 한 번에 쇠 긁는 숨소리 흘린 온화 천천히 숨 고르고 덧붙였다.
"그리고. 가령 그 중 하나를 염려한다 하신대도. 무엇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까짓 인간 상태 살펴주신들 위협 여전하고 현실 그대로이니. 이 면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하 사감님."
이전에도 버릇없게 부르던 사감의 호칭이 지금은 꼬박꼬박 존칭과 함께 말 끝마다 따라붙었다. 선 긋듯이.
한낱 사생아가 고매한 도련님 멱살을 쥔다니, 예전 같았으면 혼이 나는 것으론 끝나지 않고 눈 뒤집어진 사용인들의 화풀이로 죽기 전까지 두들겨 맞았을 행동이나 지금은 아니다. 집을 나가버린 희대의 범죄자에게 어찌 자비가 필요하겠는가. 꽃을 가져온 이유를 거창히도 둘러대는 당신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 멱살을 쥔 손 중 하나를 풀었을 적 이어지는 말에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주먹만 쥐었다.
"영민한 대가리가 여기에선 안 굴러가나?"
예의도, 격식도 차리지 않는다. 형제의 우애는 내던진지 오래다. 이 장소에 발 들인 이상 외지인일 뿐이다. 멱살 쥔 손에 힘을 주며 옷깃을 더 거세게 그러쥘 적, 아회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 섬찟한 눈길로 당신의 눈을 마주하려 들었다.
"죄 도륙하고 떠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꽃을 가져오며 본가에 발을 들여……."
내가 죽어갈 때도 오지 않던 새끼가. 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꼴이 가증스럽다. 당장이라도 혀를 저미면 당신은 얌전히 입을 벌려줄까, 목을 베어 바치고자 하면 목 내어줄까. 아니겠지, 이것도 상황을 읽고 쓸모를 찾으며 가늠하겠지. 공포심마저 억누르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등골을 훑었다.
"아니면 재미 좀 보러 왔나? 제 동생놈이 북부에 봄이 올 거라 했으니 얼마나 같잖았겠어……. 여전히 삭막한 꼬라지 보니 내가 더 넓히기 요원하겠다 위안이라도 하러 왔냔 말이야, 응?"
고개를 기울일 적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한 번 터진 증오를 쉬이 갈무리할 수 없음을 본능이 깨달은 탓이다.
듣자하니 학당 문 잠겼을 적에도 이런 시늉 하나 안 하던 사감들이 이제와 돌아다닌들 더 큰 불안만 생기지 않을까. 아. 이제는 사감들이 나서야 하는 일 생겼나보구나. 그런 불안 슬금슬금 퍼져 후일 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아니다. 제가 이런 걸 생각할 이유 무엇이 있으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솔직히 궁금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는 것은 고해둘까.
"그 비린내 나는 놈. 일전 수업 때 뒷산 호수에 있었지요. 요괴도 이미 그 때부터 모아두고 있던데. 거 뒷산에 쥐구멍 있나. 별별 놈들이 들락거려."
이미 늦은 말이지만은 그가 사감 노릇하겠다는데 저도 학생 노릇해야 하지 않겠나. 제 아는 것 그것 뿐이라 말하고 뻑뻑한 몸 움직여 다리 바꿔 세웠다. 향로의 연기 덕에 통증 줄었다지만 사실 몸보다 정신머리가 앓는 것이 크다. 그저 자세 바꾸는 것 만으로도 스스로 고통스럽다 느낄 정도로.
겨우 자세 바꾸고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제 앞에 무릎 꿇은 하 사감 보았다. 아무도 안 죽었다던가. 미안하다던가. 무슨 이유 때문에 더 빨리 찾을 수 없었다던가. 무언가 사정 있어 인간은 죽일 수 없다던가. 뭔가 말은 많이 하는데. 잘 안 들린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싶다. 말 다 듣고도 한참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뭔가 말은 해야 할 것 같아 굳어가는 머리 두드려 생각이란 걸 해본다. 하고. 하고. 또 하고. 생각 거듭한 끝에 내뱉은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하 사감님."
무릎에 비뚜름히 기댔던 고개 들었다. 목 빳빳이 세우고서 하 사감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가 저나 누구 죽을 뻔 하였다고 역정을 내었습니까? 더 빨리 도우러 오지 않았다고 타박하길 했습니까? 왜 그제야 왔는지. 왜 인간 못 죽이는지. 그런 것 따져들었습니까? 사감님. 하 사감님. 그것들은 당신께서 염려하시는 것이지 제게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물며 제가 그 때 그리 분노한 이유조차 아닌 것을."
흐리멍텅하던 붉은 눈에 다시 떠오른 분노 있었다. 그 순간. 인어 앞둔 순간 다시 떠올린 탓이다.
"모르시니 알려드리지요. 예. 친절히 두 번 읊어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빌어먹을 물짐승 새X 그 자리에서 죽이지 못 해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 미칠 것 같습니다. 거기에 하 사감님께서 나타났든 아니든 뭘 했든 아니든 다 제쳐두고. 제 손으로 끝장내지 못 하고 후일의 여지를 남긴 것이 내장 비틀릴 정도로 분이 찬단 말입니다..."
그 때 죽였어야 했는데. 뭐가 됐든 그 자리에서 목을 치고 혀를 베어 다신 노래하지 못 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결국 그리하지 못 한 것은 제 역량의 부족함이었다. 억눌린 채로 광기에 삼켜질 뻔 했음에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여즉 저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단전에서부터 불길 치솟아 속부터 뒤집어지는 듯 하나 아직 성치 않은 몸에 격한 감정은 무리였다. 말 마친 후엔 숨 낮게 고르곤 눈에서도 분노의 빛 지웠다. 다시 처연하게 흐려진 눈 두어 번 깜빡이고. 숨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감으로 오셨으면 사감의 일만 보시지요. 그래서. 왜 그 놈들이나 인간에게 손을 못 댑니까. 그것 말 할 수는 있으신가 봅니다?"
하 사감에게 말 할 수 없는 것 있음을 알고 있는 온화였으니. 그것 걸고 빈정거리는 투였다. 뭐는 말 못 하면서 그건 말 할 수 있냐. 그런 식으로 말이다.
당신이 나의 입장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마음 하나 헤아릴 줄 모르는 자의 이기적인 발언에 어떻게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아온다 믿을 수 있을 원동력 자체를 부정 당하며 처절하게 짓밟혔다. 그보다 더 이전에는 바라는 삶을 쳐다봤다는 대가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 모든 당사자가 뱉는 말을 쉬이 믿을 수 있냔 말이다.
"……그 고대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줄은 알고?"
보아라. 자신이 봄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모르지 않던가. 어쩌면 알고도 저렇게 구는 것일 수도 있다. 아, 그렇다면 배로 끔찍할 터다. 애초에 우애니 무어니 당신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인가. 이 사실을 왜 지금껏 부정했을까, 오로지 나만 이 상황에서 당신이 그런 감정을 가졌으리라 기대하고 속에 담았던 것이고, 당신은 그 끔찍한 망상 속에서 내 좋을 대로 휘둘린 존재일 뿐이다. 얼마나 같잖은가. 그때 카페에서 만나 내게 정을 운운하던 것도 결국 허울 좋은 겉포장에 불과했을 텐데 나는 또 좋을대로 생각하여 그 기준에 맞춰 판을 다짐했구나……. 긴 세월 동안 쌓은 끝없는 망상과 의심이 다시금 당신을 멋대로 생각하고 틀에 박아버리며, 제멋대로 단정짓기 시작했다.
"손 대지 마!"
당신의 손이 제 손에 닿았을 때는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더니, 꽃을 내려놓고자 관 근처로 손이 닿았을 때는 앙칼지게 반응했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살벌한 기백 발하다가도 당신의 말에 날카롭게 숨을 뱉었다. 실소에 가까운 비웃음은 한 번이면 족했다. "어련하시겠어." 비아냥대듯 단어를 뱉는 흐름에 조롱기가 묻어있었다. 당신이 죄다 도륙하고 떠나버린 뒤 나는 그들의 원망을 온전히 받아내야만 했는데. 당신을 그 모습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되도 않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낙인이 찍혀 처절하게 바닥을 기었는데. 그게 잘못이 아니라며 되려 자신의 정을 탓하다니. 지나가던 개여시가 웃을 상황이리라.
"……내가, 정을 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아회는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쭉 뻗어 올려 온전히 시선을 마주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귀에 매달린 검은 귀걸이가 살랑였다.
"내가 호위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같이 밤을 지새우고, 침대 위로 부르며 입술 위에 속삭이든 말든 모두 나의 자유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냔 말이야……. 아."
아회는 눈을 치켜떴다.
"설마…… 욕심인가? 어차피 정조관념 박살난 세상이겠다, 아우라 해도 피 반절밖에 섞이지 않았으니 음험한 마음이라도 품으셨나? 생각해 봐, 내게 가장 효율적인 일이니, 가치를 재니 하기 전에…… 스스로 돌아봐도 이상한 점이 정녕 없었나?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볼 필요는 없거늘. 욕망에 솔직해져 봐, 어차피 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정말 사적인 욕심이 없을 거라 생각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우스움 어렸다. 역하기 짝이 없어.
"솔직히 말해, 동생이란 이름을 앞세워서…… 손에 쥐고 짜둔 판 위에서 제멋대로 흔들고 싶잖아? 어떻게 해보고 싶은데 다른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정을 독차지 하니 속이 뒤틀려 그러는 건 아니냔 말이야……."
인어의 궤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아라, 저 형님 흉내를. 정을 운운하듯 나지막이 경고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다. 학당의 벗에게 정을 주든, 호위에게 정을 보이든 저가 무슨 상관이라고! 아회는 어떤 대답을 듣든 천천히 예를 갖췄을 것이다. 쥐었던 주먹을 펼쳐 당신의 뺨을 향하려 들었다. 뺨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려 하며 아회는 미소 지었다.
"형님, 아, 형님…… 그렇다면, 형님은 앞으로도 줄곧 제게 찾아오시겠군요."
아회는 혀 끝을 느릿하게 내밀듯이 하더니 자근, 하고 가볍게 깨물었다. 한때 자신이 꿈 속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혀를 깨물어 죽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따라하듯. 잇새의 혀가 한쪽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입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 미천한 아우는 성공하는 순간까지 시도할 터이니 말입니다……. 혹시라도 그 고매하신 계획에, 그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지독히도 무감한 웃음 뒤로 아회는 눈 천천히 감았다.
"……설마 천하의 무사빈이, 미천하고 아둔한 아우의 계획을 몰랐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지요?"
놀라지 말란 말 하지 않았어도 온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기분에 눈썹 하나도 까딱 않고 있었다. 금기. 그놈의 금기. 정신 온전치 못 하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아마도 금기 걸었을 그 존재에 대한 것이나. 그걸 굳이 제 앞에서 꺼내며 피 토하는 하 사감에 대한 것이나. 결코 올바른 생각은 아니었으며 그런 생각 담긴 시선 역시 곱지만은 않다. 그의 옷과 바닥 적시는 피를 그저 성가신 것 보는 눈으로 물끄러미 응시한다. 토하는 소리 반. 말 반. 그렇게 겨우 말하던 하 사감이 결국 다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적. 온화 잠시 눈 내리감으며 작은 한숨 내쉬었다. 역시나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 형제에게 이 이상 갈궈졌으면 하나 봅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것을."
쯧. 작게 혀를 찬 온화 비틀거리며 몸 움직였다. 무릎으로 걸어 하 사감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제 손으로 하 사감의 얼굴 감싸 들어올리려 했다. 한 손으로 턱 받치고 한 손에 제 두루마기 소매 쥐어 그 턱에 낭자한 핏자국 닦아주려 했다. 여전히 냉담한 태도였지만 손길 미세하게 떨리며 그를 보는 눈 역시 마냥 차갑지만은 않았다.
"그래요. 금기가 어찌됐든. 사감들이 그 망할 놈들에게 손 못 댄다는 건 알았으니. 어떻게든 해보아야겠지요. 내 분도 못 풀고 가만히 당해줄 생각은 없으니."
들으라는 듯. 혹은 혼잣말인 듯. 그리 중얼거린 온화 잠시 하 사감 바라본다. 안타까운 반려를 향한 애정인지 여즉 해소되지 못 한 분노의 잔재인지 모를 것이 붉은 눈동자에 일렁인다. 느릿하게 눈 깜빡리고 더 다가가거나 물러나지도 않은 채 온화 툭 물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는 무엇이 그런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제가 여태 무슨 말 했더라. 차근차근 짚어보다 갈궈진다 했던 것인가 싶었다. 글쎄. 반려라 해도 좋을 듯 시비를 걸어오던 수업 생각난다. 저 하나도 못 믿겠다던 말도. 온화 시선 옆으로 굴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안 할 분들은 아니신 듯 보이던데."
여즉 학당 내에 있는 걸 보면 마주칠 때마다 영 좋지 않은 상황 나올 것이 눈 앞에 선하다. 과연 그가 하지 말라 한다고 하지 않을까. 형제 싸움까지 가지만 않는다면 두고 두고 치근거릴 것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괜찮느냐는 물음엔 더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괜찮느냐니. 무엇이? 불쑥 솟구치는 사나운 생각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금 제가 괜찮아 보이느냐. 울먹이고픈 마음과 아무래도 좋다. 매 순간 생각을 놓아버려는 몸이 서로 부딪힌다.
하 사감의 앞에 무릎으로 서서 그 오가는 생각과 감정이 담긴 눈으로 한참을 응시했다. 그러다 버티는 것 힘든지 무너지듯 스륵 주저앉는다. 휴. 한숨인지 날숨인지 길게 내쉬고 나즈막히 대답했다.
음험한 마음이라도 품은 것이 아니냐니, 하물며 그 주체가 제 형제라니! 적룡의 현자니 무어니 하는 자가 뱉기에는 실로 천박하기 그지없는 언행이었다. 이 말로 하여금 당신의 그 단단한 속내가 뒤집어지거나 흠집 하나 나지 않겠지만, 일단 뱉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씻어내는 방법…… 아니지, 얘기하기엔 아깝지. 그래서 그 쓸모있는 자가 어떻게 굴었는지도 얘기하기엔 아깝지, 응."
평생 궁금해 하라지. 네 아비가 쓸모 운운하며 내 혼인시키려 들었던 것도, 겪은 수모도, 내가 죄 씻어내기 위해 무슨 짓 벌이려는지도 모두 다물어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귀걸이로 시선이 닿는 것을 깨닫자 아회는 이죽이듯 한쪽 입꼬리만 올린다. 아마 당신은 모를 테지. 사실 그쪽 동생이 이리 치장하는 것에 환장한단 사실을. 사생아니 고결함이니 그런 시선에서 눈치만 보느라 모아둔 귀한 장신구들 감히 착용하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살았다는 것도. 내가 당신 모르는 것처럼 평생 몰랐으면.
"그래, 간섭하고 싶고 궁금하다면 어쩔 수 없지. 아쉽기도 해라, 만일 당신이 욕심 있었다고 말했더라면…."
나는 그 욕망에 어울려줄 생각 있었는데. 지근거리에서 입술 달싹이고는 눈 휘었다. 나를 애정하든, 욕망하든. 그리 했더라면 기꺼이 응했을 텐데. 그렇게 당신이 애정 쏟으면 나는 당신에게 의미가 더 깊어지고, 그 속에 뿌리를 내리겠지. 마침내 당신이 내게 쏟는 애정이 정점을 달할 때, 내 대업을 이룬다면, 당신이 품을 상실감은 얼마나 클까……. 그 순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실이 아쉬운 나머지 표정이 저도 모르게 애달파진다.
"……알고 싶습니까? 당연히 고해야겠지요."
뺨을 더듬더듬 쓸어보는 손길이 상냥하다. 신도 아니고, 라. 북부 사람이 신을 운운하니 변절자와 같단 생각이 스쳤으나 억누른다. 알지 못한다면 알려주겠다는 듯, 잿더미처럼 가라앉듯 느릿하게 미소 고치는 모습이 말 잘 듣는 상냥한 동생에 돌아간 것에 가까웠다. 바란다면 어울려주마.
"대신……. 듣기 위해서라면, 아주 잠시간…… 아, 일각一刻 동안 어떠한 살생도 없어야 합니다. 이 아우는 피를 보는 것이 두렵거니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으니까요. 혹시 모르지요, 그 일각이 지나면 형님께서 이 아우에게 바라던 소원을 하나 들어줄지도 모릅디다. 하지만 세우던 계획을 철회하라는 것은 싫어요. 이건 제게 소중한 걸요."
손을 떼며 머뭇거리는 듯하던 아회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감히 자신이 손댈 수 없다는 듯 가만히, 갑작스레 무언가 깨달은 듯 얌전해진 태도 고수하더니 제 귀걸이가 익숙하지 않다는 듯 귀 주변을 더듬었다.
상황? 무슨 상황. 그것도 제가 이해를 해줘야 하는 걸까. 이미 많은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중인데. 제 본가도 아닌 학당에 치고 들어온 침입자 막겠다고 몇 번을 나섰는데. 그를 포함한 사감들 폭주도 잠재워줬는데. 이 이상 이해를 해야 하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하 사감은. 그는 또다시 미안하다 말했다. 제가 인어를 앞두고 눈에 핏줄 터져가며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곧장 오지 못 한 것을. 그건. 그건 상관없다.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와도 아무 것도 못 했을 것 아닌가. X친 인어를 잡든 홀린 학생들을 막는 것이든 무엇도 못 했을 거잖아.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 방금. 그런데 뭐?
"아프냐고...?"
왜 그 말이 그렇게 꽂혀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가 사감의 일에만 충실하고 나가주었으면 혼자 잠이나 자고 회복하여 좀 더 나은 상태로 보러 갈 수 있었을 텐데. 나가란 말을 들어야 나갈 것인지. 피투성이로 앉아 제게 물었다. 아프냐고. 많이 아프냐고.
"하하."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제가 들어도 모래마냥 메마른 웃음이었다.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목에서 버석이는 모래가 돌아다니는 것 아닐까 싶은 건조한 웃음 연신 흘리며 몸 수그렸다. 어느새 제 몸 감싼 손에 힘 꽉 들어갔다. 아프냐고. 그걸 물어? 지금? 잘못 쥐었는지 검에 뚫렸던 옆구리에서 불안한 감각 느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쥐어뜯을 듯 잡았다가 손 확 걷었다. 동시에 단 하나 걸쳤던 두루마기 벗어옆으로 내던지며 고개 치켜들고 악을 쓰듯 소리쳤다.
"어디 한 번 직접 보고 판단해보시지요! 예! 내가 지금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미칠 것 같은지!"
고성과 함께 드러난 몸은 전장이라도 구른 듯 성한 곳이 없었다. 이미 다쳤던 곳 덧난 것은 물론이요 방금 쥐어뜯은 옆구리는 둘러놓은 붕대가 희미하게 붉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자잘하게 까지고 부딪힌 자국 또한 선명했다. 붕대와 약 바른 천 탓에 겨우 속옷만 걸쳤지만 지금의 온화는 부끄러워 하는 기색 따위 없었다. 다시금 차오른 분에 거친 숨 몰아쉬며 찡그린 눈으로 하 사감 볼 뿐이었다.
"많이 아프냐고. 그래 아파 죽겠습니다! 분하고 아픈데 내 무력하기까지 하니 그냥 저 밖에 몸 던져 뒤져버리고플 만큼 미칠 것 같다 이 말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뭐? 상담? 면담? 아프냐고? 많이? 지금 나 놀리십니까? 하 사감님! 미안하다 밖에 할 줄 모르면 오질 말던가! 못되먹은...! 이! 뭐 하나 해주는 것도 없는 반려야..."
온화 바락바락 소리지르더니 복잡한 감정 결국 설움으로 귀결된 듯 울음 터뜨렸다. 다 큰 처자가 맨살 다 내어놓고 처량맞게 우는 꼴이란. 그만한 꼴불견도 달리 없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가쁜 숨 끄윽끄윽 내쉬며 축 늘어뜨린 어깨 들썩이며 눈물 펑펑 쏟아내었더라.
세상이 바뀐다. 아회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벗어났으니 이제 일각을 버텨야 한다. 포부는 좋았고, 이미 목숨은 포기할 생각이었으니 미련 없다마는 오기가 있었다. 지난번 체력 단련 때 빌어먹을 신수가 눈알 가져가라 했던 것을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치나, 그때처럼 단박에 잡히고픈 마음 없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영 사감님을 찾을까? 그래서 황룡을 택하겠노라 얘기할까? 아냐, 이건 너무 앞서갔어. 그렇게 된다면 내 가문은 어쩌려고? 내 운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을 고작 술래잡기 하나에 쓴다니, 안 된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적당히 숨으면? 신수가 아직 학당에 있다. 눈치없게 나타나더니 여기 있었냐며 계약이니 뭐니 떠벌리다 또 제멋대로 활개칠 것을 생각하기가 무섭게 골이 아팠다. 형님 마주하면 두 배로 골치가 아프겠지! 가만히 있는 것은 보류다.
"……그러면 어쩌지."
아, 곡옥으로 갈까, 어차피 신의 악의를 받은 몸이다. 나 찾을 적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것 보고 부질없음 약간이라도 느낀다면 이것도 괜찮은 방법일 테다. 아, 그러고 보니 마님의…….
한 시가 아까운 상황이나 아회는 잠시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 *같은 여자를 왜?"
그 빌어먹을 여자의 집을 내가 왜 생각했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감정을 겨우 참고있는 중인데. 아회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 벽난로를 타서 다시금 숨어버리자. 본가에 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영이도 지금쯤이면…….
"……젠장."
방 앞에 도달했을 때, 그제야 깨달았다. 정신이 없어 흘려넘겼던 아침 보고. 오늘 면담이 있다 했던가. 입속으로 단어 하나가 씹어 삼켜진다. 걸쭉하고 천박한,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욕설이니 뱉을 필요 없다. 아, 젠장. 차라리 영 사감님을 기다릴 걸. 그 존재는 그나마 학생을 인간으로 대해주는데 하필 신수랑 마주할 게 뭐야. 그것도 좋은 감정 없고 업보만 쌓인 신수를 이 상황에서.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 오랜 시간 잘 버티던 정신이 몇 번이고 한계에 다다랐었다. 그래도 매번 버텼고. 정 아니될 땐 과한 일탈로 해소하려고도 했고. 갖가지 무던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언제나 노력이 무색하게 만드는 건 현실이었다. 제깟게 뭘 해봤자 뭐가 되겠냐고 조롱하듯. 사방에서 더한 것들 덮쳐왔다.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기댈 곳이 필요했다. 의지할 곳이 되어주었으면 했다. 온전히는 아니어도. 제 앞에서만큼은 제 편이 되어주었으면.
그냥 지금 말없이 안아주기만 하였어도. 그거면 다 되었을 텐데.
우는 제게 해준 것은 토닥이는 것 뿐이었다. 한참을 있었으면서. 그 뿐이었다. 또 그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서. 어쩌면 몰라서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고. 평소라면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 없었다. 최소한의 위로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려 했다. 그래. 당신이 고작 그 정도라면. 더는 기대 안 할란다. 안 바랄란다. 온화 훌쩍대면서 울음 그쳤다. 손으로 눈물 닦아내며 숨 어느 정도 고르고. 벌떡 일어나선 먼저 일어난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움직였다. 옷장 열어 아무 옷이나 잡히는 대로 꺼내며 말했다.
여즉 물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사나웠다. 아마도 새로 지은 옷인 듯. 본 적 없을 엷은 보랏빛 웃옷과 긴 치마 한 벌 거침없이 꿰입더니 거울 보고 머리까지 매만지는게 당장이라도 제가 나갈 것 같다. 나가서 누구와 어울리려 그리 단장하나 싶을 만큼.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단 한 순간도 하 사감 보지 않았다. 그 말 할 때에도.
"대신 그건 알아두세요. 지금 당신 여기서 나가면. 나 다신 반려로 못 볼 줄 알아요. 내가 이 학당 나갈 때까지 당신 어떻게 대할지 보고싶거든 나가요."
말 마치고 온화 방 한 가운데에 섰다. 하 사감 등지고. 그가 뭘 하든 저와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팔짱 끼고 의연하게 서 있기만 하였다. ...그러나 의연한 척한 뒷모습과 달리 팔 맞잡은 손 희어질 정도로 세게 쥐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다시 터질 듯한 울음 참느라 입술 꾹 깨물고 있었다. 지금의 온화로서는 최선의 표현이었으니. 이제 부디 이 신수가 눈치 좀 챙겨주길 바라면 되지 않을까.
몇 분 남았지. 아마 이제 많아야 이 분 정도 지났을 터다. 13분만 더 숨으면 되는데, 일각 안에 모든 것을 해결을 봐야 하는데. 입구에 몸을 기댄 모습부터 불만이 뚝뚝 묻어나오는 듯하고 목소리까지 저러니, 아회는 진심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충동이 솟아오르자 억누르고자 무진 애쓰며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 도망치면 저 작자도 쫓아올 것이 뻔하다. 세상은 언제나 내 고통에 열과 성의를 아끼질 않는구나…….
"……면담을 할 때가 아닌 듯합니다."
마음이 조급했다. 하나도 벅차며 언제 쫓아올지 모른다. 애초에 형님은 제 방이 어딘질 알고 있었다. 제 생일에 선물 보내준 그 끔찍한 순간을 잊을 리가 없어 조급한 나머지 그리 말했고. 짧은 순간 생각해 보니 이유 없이 제가 사감에게 아니꼬움 표출한 듯하여 덧붙였다.
"저는 몸 멀쩡하고 심신 또한 멀쩡하니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사감님께서도 목소리 듣자 하니 지친 듯하신데, 무리하지 아니하고 형식적으로만 마무리하여 쉬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제발 그쪽이거라 해석하며 자리로 향하나, 여전히 심상 조급하여 앉지 않고 맴돌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성질 내거나 도망치지 않아 다행이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