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는 무엇이 그런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제가 여태 무슨 말 했더라. 차근차근 짚어보다 갈궈진다 했던 것인가 싶었다. 글쎄. 반려라 해도 좋을 듯 시비를 걸어오던 수업 생각난다. 저 하나도 못 믿겠다던 말도. 온화 시선 옆으로 굴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안 할 분들은 아니신 듯 보이던데."
여즉 학당 내에 있는 걸 보면 마주칠 때마다 영 좋지 않은 상황 나올 것이 눈 앞에 선하다. 과연 그가 하지 말라 한다고 하지 않을까. 형제 싸움까지 가지만 않는다면 두고 두고 치근거릴 것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괜찮느냐는 물음엔 더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괜찮느냐니. 무엇이? 불쑥 솟구치는 사나운 생각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금 제가 괜찮아 보이느냐. 울먹이고픈 마음과 아무래도 좋다. 매 순간 생각을 놓아버려는 몸이 서로 부딪힌다.
하 사감의 앞에 무릎으로 서서 그 오가는 생각과 감정이 담긴 눈으로 한참을 응시했다. 그러다 버티는 것 힘든지 무너지듯 스륵 주저앉는다. 휴. 한숨인지 날숨인지 길게 내쉬고 나즈막히 대답했다.
음험한 마음이라도 품은 것이 아니냐니, 하물며 그 주체가 제 형제라니! 적룡의 현자니 무어니 하는 자가 뱉기에는 실로 천박하기 그지없는 언행이었다. 이 말로 하여금 당신의 그 단단한 속내가 뒤집어지거나 흠집 하나 나지 않겠지만, 일단 뱉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씻어내는 방법…… 아니지, 얘기하기엔 아깝지. 그래서 그 쓸모있는 자가 어떻게 굴었는지도 얘기하기엔 아깝지, 응."
평생 궁금해 하라지. 네 아비가 쓸모 운운하며 내 혼인시키려 들었던 것도, 겪은 수모도, 내가 죄 씻어내기 위해 무슨 짓 벌이려는지도 모두 다물어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귀걸이로 시선이 닿는 것을 깨닫자 아회는 이죽이듯 한쪽 입꼬리만 올린다. 아마 당신은 모를 테지. 사실 그쪽 동생이 이리 치장하는 것에 환장한단 사실을. 사생아니 고결함이니 그런 시선에서 눈치만 보느라 모아둔 귀한 장신구들 감히 착용하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살았다는 것도. 내가 당신 모르는 것처럼 평생 몰랐으면.
"그래, 간섭하고 싶고 궁금하다면 어쩔 수 없지. 아쉽기도 해라, 만일 당신이 욕심 있었다고 말했더라면…."
나는 그 욕망에 어울려줄 생각 있었는데. 지근거리에서 입술 달싹이고는 눈 휘었다. 나를 애정하든, 욕망하든. 그리 했더라면 기꺼이 응했을 텐데. 그렇게 당신이 애정 쏟으면 나는 당신에게 의미가 더 깊어지고, 그 속에 뿌리를 내리겠지. 마침내 당신이 내게 쏟는 애정이 정점을 달할 때, 내 대업을 이룬다면, 당신이 품을 상실감은 얼마나 클까……. 그 순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실이 아쉬운 나머지 표정이 저도 모르게 애달파진다.
"……알고 싶습니까? 당연히 고해야겠지요."
뺨을 더듬더듬 쓸어보는 손길이 상냥하다. 신도 아니고, 라. 북부 사람이 신을 운운하니 변절자와 같단 생각이 스쳤으나 억누른다. 알지 못한다면 알려주겠다는 듯, 잿더미처럼 가라앉듯 느릿하게 미소 고치는 모습이 말 잘 듣는 상냥한 동생에 돌아간 것에 가까웠다. 바란다면 어울려주마.
"대신……. 듣기 위해서라면, 아주 잠시간…… 아, 일각一刻 동안 어떠한 살생도 없어야 합니다. 이 아우는 피를 보는 것이 두렵거니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으니까요. 혹시 모르지요, 그 일각이 지나면 형님께서 이 아우에게 바라던 소원을 하나 들어줄지도 모릅디다. 하지만 세우던 계획을 철회하라는 것은 싫어요. 이건 제게 소중한 걸요."
손을 떼며 머뭇거리는 듯하던 아회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감히 자신이 손댈 수 없다는 듯 가만히, 갑작스레 무언가 깨달은 듯 얌전해진 태도 고수하더니 제 귀걸이가 익숙하지 않다는 듯 귀 주변을 더듬었다.
상황? 무슨 상황. 그것도 제가 이해를 해줘야 하는 걸까. 이미 많은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중인데. 제 본가도 아닌 학당에 치고 들어온 침입자 막겠다고 몇 번을 나섰는데. 그를 포함한 사감들 폭주도 잠재워줬는데. 이 이상 이해를 해야 하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하 사감은. 그는 또다시 미안하다 말했다. 제가 인어를 앞두고 눈에 핏줄 터져가며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곧장 오지 못 한 것을. 그건. 그건 상관없다.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와도 아무 것도 못 했을 것 아닌가. X친 인어를 잡든 홀린 학생들을 막는 것이든 무엇도 못 했을 거잖아.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 방금. 그런데 뭐?
"아프냐고...?"
왜 그 말이 그렇게 꽂혀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가 사감의 일에만 충실하고 나가주었으면 혼자 잠이나 자고 회복하여 좀 더 나은 상태로 보러 갈 수 있었을 텐데. 나가란 말을 들어야 나갈 것인지. 피투성이로 앉아 제게 물었다. 아프냐고. 많이 아프냐고.
"하하."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제가 들어도 모래마냥 메마른 웃음이었다.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목에서 버석이는 모래가 돌아다니는 것 아닐까 싶은 건조한 웃음 연신 흘리며 몸 수그렸다. 어느새 제 몸 감싼 손에 힘 꽉 들어갔다. 아프냐고. 그걸 물어? 지금? 잘못 쥐었는지 검에 뚫렸던 옆구리에서 불안한 감각 느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쥐어뜯을 듯 잡았다가 손 확 걷었다. 동시에 단 하나 걸쳤던 두루마기 벗어옆으로 내던지며 고개 치켜들고 악을 쓰듯 소리쳤다.
"어디 한 번 직접 보고 판단해보시지요! 예! 내가 지금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미칠 것 같은지!"
고성과 함께 드러난 몸은 전장이라도 구른 듯 성한 곳이 없었다. 이미 다쳤던 곳 덧난 것은 물론이요 방금 쥐어뜯은 옆구리는 둘러놓은 붕대가 희미하게 붉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자잘하게 까지고 부딪힌 자국 또한 선명했다. 붕대와 약 바른 천 탓에 겨우 속옷만 걸쳤지만 지금의 온화는 부끄러워 하는 기색 따위 없었다. 다시금 차오른 분에 거친 숨 몰아쉬며 찡그린 눈으로 하 사감 볼 뿐이었다.
"많이 아프냐고. 그래 아파 죽겠습니다! 분하고 아픈데 내 무력하기까지 하니 그냥 저 밖에 몸 던져 뒤져버리고플 만큼 미칠 것 같다 이 말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뭐? 상담? 면담? 아프냐고? 많이? 지금 나 놀리십니까? 하 사감님! 미안하다 밖에 할 줄 모르면 오질 말던가! 못되먹은...! 이! 뭐 하나 해주는 것도 없는 반려야..."
온화 바락바락 소리지르더니 복잡한 감정 결국 설움으로 귀결된 듯 울음 터뜨렸다. 다 큰 처자가 맨살 다 내어놓고 처량맞게 우는 꼴이란. 그만한 꼴불견도 달리 없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가쁜 숨 끄윽끄윽 내쉬며 축 늘어뜨린 어깨 들썩이며 눈물 펑펑 쏟아내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