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무력감은 사람을 글러먹은 상태로 몰아가기에 매우 적합하다. 한 번 그 상태에 빠져본 적 있다면 두 번 세 번 빠지기 쉬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제 경우에는 그것 길어지면 일시적으로 정신이 퇴화하니. 경계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시라도 좋으니 다 내려놓고 무의식에 몸을 내맡기고 싶어.
그러나 언제나 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비틀려 왜곡되어버려. 봐. 지금도. 누가 이 평화를 깨뜨리러 왔잖아.
친절한 기척에 눈만 떴다. 명백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침대에 기댄 채로 멍하니 허공 보다가 한 손 들어올렸다. 검지와 중지 세워 가로로 그으니 문의 잠금 풀리고. 문고리 쥐어 돌리는 시늉 하니 철컥 문 열린다. 그리고 손 내리면 알아서 문 움직여 방문객이 침입하기 딱 좋은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일련의 소동이 마무리되고 며칠이 지났다. 학생 몇이 의식을 잃고 날뛰다 다쳤을 뿐 결과적으로 사건은 큰 사고 없이 무사히 해결되었다. 어차피 적당히 해결될 문제였다면 역시 가만히 숨어서 관망하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그놈의 눈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다. 여하간 유현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다친 곳 없이 말짱했고, 특별히 가고픈 장소도 없다. 안 하던 고생을 했더니 몸이 쑤셔서 움직여야겠단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가만히 시간만 보내려 했는데……. 지나가는 학생들이 언뜻 흘린 대화를 듣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영 사감은 현재 학생들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참, 그러고 보니 언젠가 영 사감에 관해 캐물어야겠다 생각했었지. 여전히 몸은 쑤시지만 동기가 생긴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는 느릿느릿 일어나 한창 바쁜 직장인 훼방 놓기로 했다.
어머니의 묘는 극비였다. 그동안 스산하기 짝이 없는 곳을 잘도 간다며 사용인들은 끔찍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려 들었고, 가문의 방계들마저 흉계를 꾸밀지도 모른다며 멸시하는 시선을 감내하면서까지 그 존재를 숨기려 들었다. 원내의 기숙사조차 믿을 수 없었던 아회에게 있어 어머니의 묘는 성역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 곳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곳에 시체가 있었노라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지켜오던 비밀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성역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입에도 담지 못할 추측을 앞세우며 어머니의 시체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하겠지. 아무리 가주의 권한을 등에 업었다 해도 어머니와 관련된 일에서 가주의 권한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개입할 명분도, 권한도 없으니 어머니의 시체를 불태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 가루를 얼어붙은 호수 위로 뿌려버리고 말 것이다.
그 일만큼은 절대 두고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모든 일이 끝나면 령도의 양지 바른 곳에 묻어드리려 하였는데, 그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의 모멸감을 견뎌왔는데.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고? 안 된다! 어머니의 주변을 호법하듯 지키던 아회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
아회는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점점 수축하는 반 푼어치도 하지 못하는 눈동자 하나였다. 차라리 사용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찢어 어머니에게 목을 바쳤을 것이다. 신수였다면 그들이 기고만장하며 앞세우는 빌어먹을 여의주이니 뭐니를 뽑으려 들었을 테고, 학생이라고 해도 살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시야에 담긴 풍경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요한 장소에서 웃음이 흘렀다.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품에 꽃이 있었다. 왜? 당신이 왜 꽃을 안고있지? 그것도 직접 꺾은 꽃을?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으나, 정작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신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꽃을 꺾었음을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이 죽였기 때문이다. 당신을 만났다는 죄로, 자신은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어머니께서는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이 추모를 한다고, 이 자리에 발을 들인다고? 이 자리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 사람이, 아니, 모르겠지. 어떤 의미인줄도 모르고, 이 자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엇을 바쳤는지, 무엇을 다짐했는지 당신은 모르겠지. 그러니 자리를 비켜주겠노라 하겠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흘렸겠지…….
어디선가 툭, 끊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아회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마치 가지 말라는 듯 붙잡는 것처럼 앞으로 다급히 다가가며 손을 쭉 뻗었으나 그 속도가 정상적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긴 소매가 나부끼고, 쭉 뻗은 양손이 목을 향했다. 그대로 아회는 멱살을 부여잡은 채 당신을 땅에 메다꽂으려 시도했다. 함께 넘어지든 말든, 꽃이 휘날리든, 눈발에 파묻히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대화를 하다 보면 한 번도 격양된 적이 없었던 목소리는 감정을 억누르려 무진 애를 써도 짙은 분노가 부르르 떨리며 틈새를 비집고 나왔고, 거친 숨결에 어깨가 위로 크게 올라가다 아래로 부르르 떨리며 내려가길 반복했다. 멱살을 틀어쥐려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희뿌연 입김이 입가에서 흩어진다. 목과 볼에는 핏대가 섰고, 한쪽만 홉뜬 눈은 정확히 당신을 응시하려 들었다.
문 밖의 기척이 문 안으로 들어온다. 일정 거리 이상 들어왔다 싶을 쯤. 늘어뜨린 손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열렸던 문 누가 민 것 마냥 스르르 닫혔다. 창문 닫은데다 차양막까지 내려 방 안 어둑해진다. 적막한 방이었지만 작은 숨소리 하나는 들렸을 것이다.
하 사감이 들어와 뭘 하건 무슨 말을 하건 온화 가만히 있었다. 얼핏 보면 그대로 잠든 듯 보인다. 그래도 진짜 잠든 건 아니니까 움직이긴 했다. 하 사감이 놓은 향로의 연기 흘러와 한 모금 들이마신 듯 했을 때. 긴 숨과 함께 무력하게 늘어진 몸 세워 하 사감 향해 돌아앉았다. 가문에서 보내준 붉은 두루마기를 입은 것도 아니고 달랑 걸치기만 한 몸이 삐딱하게 앉아 하 사감 올려다보았다.
"...미안하고. 자시고 할게 있으신가. 사감님들이 학생 번거롭게 하는 것 한 두번도 아니고. 괘념치 마시지요. 하 사감님."
삐딱한 자세와 달리 공손한 말투였지만 지금은 그렇기 때문에 더 껄끄럽지 않을까. 목이 머리 주체 못 하듯 옆으로 툭 꺾이자 부스스한 머리도 따라 흘러내렸다. 기울어진 머리 가누기 귀찮은지 그 상태로 느릿하게 하품하곤 다리 한 쪽 세워 슬쩍 기댔다. 붕대 반 맨살 반인 몸 더 가리려 하지 않고 그리 앉아 다시금 입 열었다.
척 보기에도 분주해 보인다. 그는 이것저것 조치를 취하는 사감의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구경했다. 흔히 아는 천공섬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과 양상으로 작동하는 물건들. 그라고 해도 흥미 가질 법한 광경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항이 무엇인지 잊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더 기이한 것이 영 사감의 상태이니, 유현은 사감이 제게 다가오자 한눈 팔기도 그만두었다.
"약간의 근육통, 그리고 트라우마 호소 정도의 증상도 봐 주나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간 쫓겨날지도 모르니 일단 아무런 소리나 대충 주워섬긴다. 그는 사감이 대답하기도 전 잽싸게 더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려 했을 테다.
"……트라우마는 농담이었어요. 그것보다는, 사감님의 사적인 인적사항에 관해 묻고 싶어서요. 잠시 시간 있으신가요? 없으셔도 내어준다면 기쁘겠네요."
본래도 알고 싶은 대상에는 돌진하는 기질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훼방 놓는 덴 다 이유가 있다. 어렴풋이 느끼기에도 이 사감은 다른 사감들에 비해 유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 까탈스러운 거래자에 비하자면, 영 사감은 솔직히……. 말 아끼겠다.
기억을 지우는 것도 관심은 가지만 당장 필요하지는 않으니 일단은 넘긴다. 영 사감은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순순히 응해줄 요량인가 보다. 하기야 백룡 학생은 저뿐인 것도 아니고. 지금껏 비슷한 일 몇 번 정도는 겪어보지 않았을까. 그는 사감이 내어준 자리에 가 앉았다. 내어준 다과는 제법 정갈했다. 하지만 차분히 입 축이며 말 고를 생각은 없다. 유현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그에게 화가 났느냐. 그 물음에 붉은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묻는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냔 듯. 물끄러미 응시하던 눈 곧 아래로 떨구어졌다. 고개도 함께 내려졌으니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든 걸 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기 싫은 것일 지도. 슬슬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과 바람 따라 흘러오는 푸른 연기 보며 느즈막히 입 열었다.
"그래요. 화 났습니다. 한들 사감님 하실 말씀 하나 뿐이겠지요. 미안하다. 아니면 어쩔 수 없다. 이래뵈도 뻔한 말 듣는 것엔 이골이 난 지라. 사실이야 어떻든 아니라고 하렵니다."
사실 화고 뭐고 아프고 나른해서 머릿속이 제대로 돌지 않아 무감각해졌음이 맞지만. 좋을 대로 해석하란 듯 무책임한 말 툭 던져놓았다. 상담 하러 왔다 했을 때도 똑같았다.
"상태가 어떠하느냐. 물으셨는데. 무슨 상태를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찔리고 쑤셔진 후유증이 어떠하느냐는 건지. 그 물비린내 풀풀 나는 놈 잡아 찢어죽이지 못 해 아쉽지 않느냐는 것인지. 다 지긋지긋하다 느끼지는 않는지. 하도 짚이는 것이 많은데 무엇을 물으시는지요? 하 사감님."
콜록. 하나 하나 읊던 목소리 조금 격앙되기 무섭게 기침 새어나왔다. 잔기침 한 번에 쇠 긁는 숨소리 흘린 온화 천천히 숨 고르고 덧붙였다.
"그리고. 가령 그 중 하나를 염려한다 하신대도. 무엇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까짓 인간 상태 살펴주신들 위협 여전하고 현실 그대로이니. 이 면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하 사감님."
이전에도 버릇없게 부르던 사감의 호칭이 지금은 꼬박꼬박 존칭과 함께 말 끝마다 따라붙었다. 선 긋듯이.
한낱 사생아가 고매한 도련님 멱살을 쥔다니, 예전 같았으면 혼이 나는 것으론 끝나지 않고 눈 뒤집어진 사용인들의 화풀이로 죽기 전까지 두들겨 맞았을 행동이나 지금은 아니다. 집을 나가버린 희대의 범죄자에게 어찌 자비가 필요하겠는가. 꽃을 가져온 이유를 거창히도 둘러대는 당신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 멱살을 쥔 손 중 하나를 풀었을 적 이어지는 말에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주먹만 쥐었다.
"영민한 대가리가 여기에선 안 굴러가나?"
예의도, 격식도 차리지 않는다. 형제의 우애는 내던진지 오래다. 이 장소에 발 들인 이상 외지인일 뿐이다. 멱살 쥔 손에 힘을 주며 옷깃을 더 거세게 그러쥘 적, 아회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 섬찟한 눈길로 당신의 눈을 마주하려 들었다.
"죄 도륙하고 떠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꽃을 가져오며 본가에 발을 들여……."
내가 죽어갈 때도 오지 않던 새끼가. 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꼴이 가증스럽다. 당장이라도 혀를 저미면 당신은 얌전히 입을 벌려줄까, 목을 베어 바치고자 하면 목 내어줄까. 아니겠지, 이것도 상황을 읽고 쓸모를 찾으며 가늠하겠지. 공포심마저 억누르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등골을 훑었다.
"아니면 재미 좀 보러 왔나? 제 동생놈이 북부에 봄이 올 거라 했으니 얼마나 같잖았겠어……. 여전히 삭막한 꼬라지 보니 내가 더 넓히기 요원하겠다 위안이라도 하러 왔냔 말이야, 응?"
고개를 기울일 적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한 번 터진 증오를 쉬이 갈무리할 수 없음을 본능이 깨달은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