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보기에도 분주해 보인다. 그는 이것저것 조치를 취하는 사감의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구경했다. 흔히 아는 천공섬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과 양상으로 작동하는 물건들. 그라고 해도 흥미 가질 법한 광경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항이 무엇인지 잊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더 기이한 것이 영 사감의 상태이니, 유현은 사감이 제게 다가오자 한눈 팔기도 그만두었다.
"약간의 근육통, 그리고 트라우마 호소 정도의 증상도 봐 주나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간 쫓겨날지도 모르니 일단 아무런 소리나 대충 주워섬긴다. 그는 사감이 대답하기도 전 잽싸게 더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려 했을 테다.
"……트라우마는 농담이었어요. 그것보다는, 사감님의 사적인 인적사항에 관해 묻고 싶어서요. 잠시 시간 있으신가요? 없으셔도 내어준다면 기쁘겠네요."
본래도 알고 싶은 대상에는 돌진하는 기질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훼방 놓는 덴 다 이유가 있다. 어렴풋이 느끼기에도 이 사감은 다른 사감들에 비해 유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 까탈스러운 거래자에 비하자면, 영 사감은 솔직히……. 말 아끼겠다.
기억을 지우는 것도 관심은 가지만 당장 필요하지는 않으니 일단은 넘긴다. 영 사감은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순순히 응해줄 요량인가 보다. 하기야 백룡 학생은 저뿐인 것도 아니고. 지금껏 비슷한 일 몇 번 정도는 겪어보지 않았을까. 그는 사감이 내어준 자리에 가 앉았다. 내어준 다과는 제법 정갈했다. 하지만 차분히 입 축이며 말 고를 생각은 없다. 유현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그에게 화가 났느냐. 그 물음에 붉은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묻는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냔 듯. 물끄러미 응시하던 눈 곧 아래로 떨구어졌다. 고개도 함께 내려졌으니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든 걸 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기 싫은 것일 지도. 슬슬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과 바람 따라 흘러오는 푸른 연기 보며 느즈막히 입 열었다.
"그래요. 화 났습니다. 한들 사감님 하실 말씀 하나 뿐이겠지요. 미안하다. 아니면 어쩔 수 없다. 이래뵈도 뻔한 말 듣는 것엔 이골이 난 지라. 사실이야 어떻든 아니라고 하렵니다."
사실 화고 뭐고 아프고 나른해서 머릿속이 제대로 돌지 않아 무감각해졌음이 맞지만. 좋을 대로 해석하란 듯 무책임한 말 툭 던져놓았다. 상담 하러 왔다 했을 때도 똑같았다.
"상태가 어떠하느냐. 물으셨는데. 무슨 상태를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찔리고 쑤셔진 후유증이 어떠하느냐는 건지. 그 물비린내 풀풀 나는 놈 잡아 찢어죽이지 못 해 아쉽지 않느냐는 것인지. 다 지긋지긋하다 느끼지는 않는지. 하도 짚이는 것이 많은데 무엇을 물으시는지요? 하 사감님."
콜록. 하나 하나 읊던 목소리 조금 격앙되기 무섭게 기침 새어나왔다. 잔기침 한 번에 쇠 긁는 숨소리 흘린 온화 천천히 숨 고르고 덧붙였다.
"그리고. 가령 그 중 하나를 염려한다 하신대도. 무엇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까짓 인간 상태 살펴주신들 위협 여전하고 현실 그대로이니. 이 면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하 사감님."
이전에도 버릇없게 부르던 사감의 호칭이 지금은 꼬박꼬박 존칭과 함께 말 끝마다 따라붙었다. 선 긋듯이.
한낱 사생아가 고매한 도련님 멱살을 쥔다니, 예전 같았으면 혼이 나는 것으론 끝나지 않고 눈 뒤집어진 사용인들의 화풀이로 죽기 전까지 두들겨 맞았을 행동이나 지금은 아니다. 집을 나가버린 희대의 범죄자에게 어찌 자비가 필요하겠는가. 꽃을 가져온 이유를 거창히도 둘러대는 당신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 멱살을 쥔 손 중 하나를 풀었을 적 이어지는 말에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주먹만 쥐었다.
"영민한 대가리가 여기에선 안 굴러가나?"
예의도, 격식도 차리지 않는다. 형제의 우애는 내던진지 오래다. 이 장소에 발 들인 이상 외지인일 뿐이다. 멱살 쥔 손에 힘을 주며 옷깃을 더 거세게 그러쥘 적, 아회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 섬찟한 눈길로 당신의 눈을 마주하려 들었다.
"죄 도륙하고 떠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꽃을 가져오며 본가에 발을 들여……."
내가 죽어갈 때도 오지 않던 새끼가. 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꼴이 가증스럽다. 당장이라도 혀를 저미면 당신은 얌전히 입을 벌려줄까, 목을 베어 바치고자 하면 목 내어줄까. 아니겠지, 이것도 상황을 읽고 쓸모를 찾으며 가늠하겠지. 공포심마저 억누르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등골을 훑었다.
"아니면 재미 좀 보러 왔나? 제 동생놈이 북부에 봄이 올 거라 했으니 얼마나 같잖았겠어……. 여전히 삭막한 꼬라지 보니 내가 더 넓히기 요원하겠다 위안이라도 하러 왔냔 말이야, 응?"
고개를 기울일 적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한 번 터진 증오를 쉬이 갈무리할 수 없음을 본능이 깨달은 탓이다.
듣자하니 학당 문 잠겼을 적에도 이런 시늉 하나 안 하던 사감들이 이제와 돌아다닌들 더 큰 불안만 생기지 않을까. 아. 이제는 사감들이 나서야 하는 일 생겼나보구나. 그런 불안 슬금슬금 퍼져 후일 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아니다. 제가 이런 걸 생각할 이유 무엇이 있으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솔직히 궁금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는 것은 고해둘까.
"그 비린내 나는 놈. 일전 수업 때 뒷산 호수에 있었지요. 요괴도 이미 그 때부터 모아두고 있던데. 거 뒷산에 쥐구멍 있나. 별별 놈들이 들락거려."
이미 늦은 말이지만은 그가 사감 노릇하겠다는데 저도 학생 노릇해야 하지 않겠나. 제 아는 것 그것 뿐이라 말하고 뻑뻑한 몸 움직여 다리 바꿔 세웠다. 향로의 연기 덕에 통증 줄었다지만 사실 몸보다 정신머리가 앓는 것이 크다. 그저 자세 바꾸는 것 만으로도 스스로 고통스럽다 느낄 정도로.
겨우 자세 바꾸고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제 앞에 무릎 꿇은 하 사감 보았다. 아무도 안 죽었다던가. 미안하다던가. 무슨 이유 때문에 더 빨리 찾을 수 없었다던가. 무언가 사정 있어 인간은 죽일 수 없다던가. 뭔가 말은 많이 하는데. 잘 안 들린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싶다. 말 다 듣고도 한참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뭔가 말은 해야 할 것 같아 굳어가는 머리 두드려 생각이란 걸 해본다. 하고. 하고. 또 하고. 생각 거듭한 끝에 내뱉은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하 사감님."
무릎에 비뚜름히 기댔던 고개 들었다. 목 빳빳이 세우고서 하 사감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가 저나 누구 죽을 뻔 하였다고 역정을 내었습니까? 더 빨리 도우러 오지 않았다고 타박하길 했습니까? 왜 그제야 왔는지. 왜 인간 못 죽이는지. 그런 것 따져들었습니까? 사감님. 하 사감님. 그것들은 당신께서 염려하시는 것이지 제게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물며 제가 그 때 그리 분노한 이유조차 아닌 것을."
흐리멍텅하던 붉은 눈에 다시 떠오른 분노 있었다. 그 순간. 인어 앞둔 순간 다시 떠올린 탓이다.
"모르시니 알려드리지요. 예. 친절히 두 번 읊어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빌어먹을 물짐승 새X 그 자리에서 죽이지 못 해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 미칠 것 같습니다. 거기에 하 사감님께서 나타났든 아니든 뭘 했든 아니든 다 제쳐두고. 제 손으로 끝장내지 못 하고 후일의 여지를 남긴 것이 내장 비틀릴 정도로 분이 찬단 말입니다..."
그 때 죽였어야 했는데. 뭐가 됐든 그 자리에서 목을 치고 혀를 베어 다신 노래하지 못 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결국 그리하지 못 한 것은 제 역량의 부족함이었다. 억눌린 채로 광기에 삼켜질 뻔 했음에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여즉 저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단전에서부터 불길 치솟아 속부터 뒤집어지는 듯 하나 아직 성치 않은 몸에 격한 감정은 무리였다. 말 마친 후엔 숨 낮게 고르곤 눈에서도 분노의 빛 지웠다. 다시 처연하게 흐려진 눈 두어 번 깜빡이고. 숨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감으로 오셨으면 사감의 일만 보시지요. 그래서. 왜 그 놈들이나 인간에게 손을 못 댑니까. 그것 말 할 수는 있으신가 봅니다?"
하 사감에게 말 할 수 없는 것 있음을 알고 있는 온화였으니. 그것 걸고 빈정거리는 투였다. 뭐는 말 못 하면서 그건 말 할 수 있냐. 그런 식으로 말이다.
당신이 나의 입장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마음 하나 헤아릴 줄 모르는 자의 이기적인 발언에 어떻게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아온다 믿을 수 있을 원동력 자체를 부정 당하며 처절하게 짓밟혔다. 그보다 더 이전에는 바라는 삶을 쳐다봤다는 대가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 모든 당사자가 뱉는 말을 쉬이 믿을 수 있냔 말이다.
"……그 고대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줄은 알고?"
보아라. 자신이 봄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모르지 않던가. 어쩌면 알고도 저렇게 구는 것일 수도 있다. 아, 그렇다면 배로 끔찍할 터다. 애초에 우애니 무어니 당신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인가. 이 사실을 왜 지금껏 부정했을까, 오로지 나만 이 상황에서 당신이 그런 감정을 가졌으리라 기대하고 속에 담았던 것이고, 당신은 그 끔찍한 망상 속에서 내 좋을 대로 휘둘린 존재일 뿐이다. 얼마나 같잖은가. 그때 카페에서 만나 내게 정을 운운하던 것도 결국 허울 좋은 겉포장에 불과했을 텐데 나는 또 좋을대로 생각하여 그 기준에 맞춰 판을 다짐했구나……. 긴 세월 동안 쌓은 끝없는 망상과 의심이 다시금 당신을 멋대로 생각하고 틀에 박아버리며, 제멋대로 단정짓기 시작했다.
"손 대지 마!"
당신의 손이 제 손에 닿았을 때는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더니, 꽃을 내려놓고자 관 근처로 손이 닿았을 때는 앙칼지게 반응했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살벌한 기백 발하다가도 당신의 말에 날카롭게 숨을 뱉었다. 실소에 가까운 비웃음은 한 번이면 족했다. "어련하시겠어." 비아냥대듯 단어를 뱉는 흐름에 조롱기가 묻어있었다. 당신이 죄다 도륙하고 떠나버린 뒤 나는 그들의 원망을 온전히 받아내야만 했는데. 당신을 그 모습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되도 않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낙인이 찍혀 처절하게 바닥을 기었는데. 그게 잘못이 아니라며 되려 자신의 정을 탓하다니. 지나가던 개여시가 웃을 상황이리라.
"……내가, 정을 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아회는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쭉 뻗어 올려 온전히 시선을 마주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귀에 매달린 검은 귀걸이가 살랑였다.
"내가 호위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같이 밤을 지새우고, 침대 위로 부르며 입술 위에 속삭이든 말든 모두 나의 자유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냔 말이야……. 아."
아회는 눈을 치켜떴다.
"설마…… 욕심인가? 어차피 정조관념 박살난 세상이겠다, 아우라 해도 피 반절밖에 섞이지 않았으니 음험한 마음이라도 품으셨나? 생각해 봐, 내게 가장 효율적인 일이니, 가치를 재니 하기 전에…… 스스로 돌아봐도 이상한 점이 정녕 없었나?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볼 필요는 없거늘. 욕망에 솔직해져 봐, 어차피 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정말 사적인 욕심이 없을 거라 생각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우스움 어렸다. 역하기 짝이 없어.
"솔직히 말해, 동생이란 이름을 앞세워서…… 손에 쥐고 짜둔 판 위에서 제멋대로 흔들고 싶잖아? 어떻게 해보고 싶은데 다른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정을 독차지 하니 속이 뒤틀려 그러는 건 아니냔 말이야……."
인어의 궤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아라, 저 형님 흉내를. 정을 운운하듯 나지막이 경고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다. 학당의 벗에게 정을 주든, 호위에게 정을 보이든 저가 무슨 상관이라고! 아회는 어떤 대답을 듣든 천천히 예를 갖췄을 것이다. 쥐었던 주먹을 펼쳐 당신의 뺨을 향하려 들었다. 뺨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려 하며 아회는 미소 지었다.
"형님, 아, 형님…… 그렇다면, 형님은 앞으로도 줄곧 제게 찾아오시겠군요."
아회는 혀 끝을 느릿하게 내밀듯이 하더니 자근, 하고 가볍게 깨물었다. 한때 자신이 꿈 속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혀를 깨물어 죽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따라하듯. 잇새의 혀가 한쪽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입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 미천한 아우는 성공하는 순간까지 시도할 터이니 말입니다……. 혹시라도 그 고매하신 계획에, 그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지독히도 무감한 웃음 뒤로 아회는 눈 천천히 감았다.
"……설마 천하의 무사빈이, 미천하고 아둔한 아우의 계획을 몰랐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