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부터 끌려가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너울 속을 달구던 뜨겁던 볕의 기운도 싸늘한 공기에 식어버리고, 남은 온기마저 뺏고자 하던 한기는 몸을 더듬는다. 아회는 익숙한 추위에 눈을 떴다. 포트키를 받은 이후 써본 적이 없었기에 어떤 방식으로 도달하는지 알지 못했건만, 이런 느낌이었구나. 새삼 신묘하다 속 좋게 생각하던 것도 어머니의 관 주변을 보자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발자국.
아회는 눈을 홉떴다. 자신의 것은 아니다. 호위의 것인가? 아니다. 자신에게 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주님의 것인가? 그 작자가 어머니를 신경 쓸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형님? 아니다. 그 인간이 여기 올 일은 없다. 올 이유도 없다. 인간을 흉내 내는 요괴였다면 진즉 무 씨 집안의 도술에 걸렸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신수? 미쳤다고 영험한 존재가 북부에 발을 들이겠나? 사용인? 아니, 여기에 발 들이면 목 떨어짐을 알 텐데 모험을 즐긴다고?
"……."
그렇다면, 이 불청객은 누구지? 아니, 누군들 상관은 없다. 어차피 행할 일은 하나다! 발자국을 보자마자 스친 추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회는 발걸음을 천천히 돌렸다. 차분한 존재, 그것을 넘어 잿더미에 가까운 아회라 할지언정 눈 돌아버리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 일이 있었으니 제 비밀에 다가가는 것일 터다. 하물며 어미의 묘에는 자신이 지금껏 보낸 서신이 있었다. 그걸 읽기라도 하였더라면.
고통에 눈을 떴다.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어느 정도로 아픈 지는 모르겠지만. 아파서 눈을 떴다. 눈을 뜨는 것조차 아팠지만.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
"......"
흐릿한 시야가 제대로 상을 잡기 시작하며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산발로 펼쳐진 제 머리카락이었다. 곱게 빗질 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산발이 된 채 흩뜨려져 있고. 그 아래는 침대였다. 익숙한 촉감의 침대보 위에 누워 있었다. 그 상태로 눈을 굴리자 반쯤 엉망이 된 방 안도 보였다. 망할 것들이 짓밟고 간 흔적이다. 찢어진 책이라거나. 부서진 소반이라거나. 발자국 투성이가 된 두루마기라거나.
아. 최악이다.
방이 엉망인 걸 보고 더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저는 달리 치워주는 사람도 없고. 도움 될 만한 사람을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어떡하랴. 너덜너덜 넝마 같은 몸 질질 끌고 다니며 청소부터 했다. 타인의 흔적이 남은 것들 모조리 끌어모아 문 옆 구석에 쌓아놓고. 손수 빗질과 물걸레질로 쓸고 닦고 하니 좀 깨끗해졌다. 더분어 환기도 시켜서 조금 개운해지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깨끗해진 방과 달리 제 몸이 역으로 더러워졌기에 씻어야 했다. 이 방에서 가장 귀찮은 '청소'가 남은 것은 정말 한숨 밖에 안 나오는 일이었다.
그 뒤로 반 시진에 걸쳐 어찌저찌 씻고 나와서 또 반 시진 동안 수건으로 머리 둘둘 감고 너덜한 몸에 약이니 붕대니 부적이니 둘둘 휘감고- 겨우 끝내고 나니 다음은 배가 고파졌다. 망할 몸뚱이. 앞서 밝혔듯 제 혀는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라 공복을 느껴도 입맛은 없었다. 뭘 먹어도 게워낼 것 같고. 그러니 그나마 성하게 남아있던 방석 끌어와 침대 옆에 두고 털석 주저앉아 침대에 기댔다. 머리 마저 말리고 빗질도 해야 했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수건만 풀어 대충 던져놓고 침대에 기대 눈 감았다. 오늘은 더이상 아무 생각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짙은 무력감은 사람을 글러먹은 상태로 몰아가기에 매우 적합하다. 한 번 그 상태에 빠져본 적 있다면 두 번 세 번 빠지기 쉬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제 경우에는 그것 길어지면 일시적으로 정신이 퇴화하니. 경계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시라도 좋으니 다 내려놓고 무의식에 몸을 내맡기고 싶어.
그러나 언제나 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비틀려 왜곡되어버려. 봐. 지금도. 누가 이 평화를 깨뜨리러 왔잖아.
친절한 기척에 눈만 떴다. 명백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침대에 기댄 채로 멍하니 허공 보다가 한 손 들어올렸다. 검지와 중지 세워 가로로 그으니 문의 잠금 풀리고. 문고리 쥐어 돌리는 시늉 하니 철컥 문 열린다. 그리고 손 내리면 알아서 문 움직여 방문객이 침입하기 딱 좋은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일련의 소동이 마무리되고 며칠이 지났다. 학생 몇이 의식을 잃고 날뛰다 다쳤을 뿐 결과적으로 사건은 큰 사고 없이 무사히 해결되었다. 어차피 적당히 해결될 문제였다면 역시 가만히 숨어서 관망하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그놈의 눈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다. 여하간 유현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다친 곳 없이 말짱했고, 특별히 가고픈 장소도 없다. 안 하던 고생을 했더니 몸이 쑤셔서 움직여야겠단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가만히 시간만 보내려 했는데……. 지나가는 학생들이 언뜻 흘린 대화를 듣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영 사감은 현재 학생들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참, 그러고 보니 언젠가 영 사감에 관해 캐물어야겠다 생각했었지. 여전히 몸은 쑤시지만 동기가 생긴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는 느릿느릿 일어나 한창 바쁜 직장인 훼방 놓기로 했다.
어머니의 묘는 극비였다. 그동안 스산하기 짝이 없는 곳을 잘도 간다며 사용인들은 끔찍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려 들었고, 가문의 방계들마저 흉계를 꾸밀지도 모른다며 멸시하는 시선을 감내하면서까지 그 존재를 숨기려 들었다. 원내의 기숙사조차 믿을 수 없었던 아회에게 있어 어머니의 묘는 성역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 곳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곳에 시체가 있었노라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지켜오던 비밀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성역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입에도 담지 못할 추측을 앞세우며 어머니의 시체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하겠지. 아무리 가주의 권한을 등에 업었다 해도 어머니와 관련된 일에서 가주의 권한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개입할 명분도, 권한도 없으니 어머니의 시체를 불태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 가루를 얼어붙은 호수 위로 뿌려버리고 말 것이다.
그 일만큼은 절대 두고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모든 일이 끝나면 령도의 양지 바른 곳에 묻어드리려 하였는데, 그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의 모멸감을 견뎌왔는데.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고? 안 된다! 어머니의 주변을 호법하듯 지키던 아회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
아회는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점점 수축하는 반 푼어치도 하지 못하는 눈동자 하나였다. 차라리 사용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찢어 어머니에게 목을 바쳤을 것이다. 신수였다면 그들이 기고만장하며 앞세우는 빌어먹을 여의주이니 뭐니를 뽑으려 들었을 테고, 학생이라고 해도 살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시야에 담긴 풍경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요한 장소에서 웃음이 흘렀다.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품에 꽃이 있었다. 왜? 당신이 왜 꽃을 안고있지? 그것도 직접 꺾은 꽃을?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으나, 정작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신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꽃을 꺾었음을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이 죽였기 때문이다. 당신을 만났다는 죄로, 자신은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어머니께서는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이 추모를 한다고, 이 자리에 발을 들인다고? 이 자리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 사람이, 아니, 모르겠지. 어떤 의미인줄도 모르고, 이 자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엇을 바쳤는지, 무엇을 다짐했는지 당신은 모르겠지. 그러니 자리를 비켜주겠노라 하겠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흘렸겠지…….
어디선가 툭, 끊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아회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마치 가지 말라는 듯 붙잡는 것처럼 앞으로 다급히 다가가며 손을 쭉 뻗었으나 그 속도가 정상적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긴 소매가 나부끼고, 쭉 뻗은 양손이 목을 향했다. 그대로 아회는 멱살을 부여잡은 채 당신을 땅에 메다꽂으려 시도했다. 함께 넘어지든 말든, 꽃이 휘날리든, 눈발에 파묻히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대화를 하다 보면 한 번도 격양된 적이 없었던 목소리는 감정을 억누르려 무진 애를 써도 짙은 분노가 부르르 떨리며 틈새를 비집고 나왔고, 거친 숨결에 어깨가 위로 크게 올라가다 아래로 부르르 떨리며 내려가길 반복했다. 멱살을 틀어쥐려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희뿌연 입김이 입가에서 흩어진다. 목과 볼에는 핏대가 섰고, 한쪽만 홉뜬 눈은 정확히 당신을 응시하려 들었다.
문 밖의 기척이 문 안으로 들어온다. 일정 거리 이상 들어왔다 싶을 쯤. 늘어뜨린 손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열렸던 문 누가 민 것 마냥 스르르 닫혔다. 창문 닫은데다 차양막까지 내려 방 안 어둑해진다. 적막한 방이었지만 작은 숨소리 하나는 들렸을 것이다.
하 사감이 들어와 뭘 하건 무슨 말을 하건 온화 가만히 있었다. 얼핏 보면 그대로 잠든 듯 보인다. 그래도 진짜 잠든 건 아니니까 움직이긴 했다. 하 사감이 놓은 향로의 연기 흘러와 한 모금 들이마신 듯 했을 때. 긴 숨과 함께 무력하게 늘어진 몸 세워 하 사감 향해 돌아앉았다. 가문에서 보내준 붉은 두루마기를 입은 것도 아니고 달랑 걸치기만 한 몸이 삐딱하게 앉아 하 사감 올려다보았다.
"...미안하고. 자시고 할게 있으신가. 사감님들이 학생 번거롭게 하는 것 한 두번도 아니고. 괘념치 마시지요. 하 사감님."
삐딱한 자세와 달리 공손한 말투였지만 지금은 그렇기 때문에 더 껄끄럽지 않을까. 목이 머리 주체 못 하듯 옆으로 툭 꺾이자 부스스한 머리도 따라 흘러내렸다. 기울어진 머리 가누기 귀찮은지 그 상태로 느릿하게 하품하곤 다리 한 쪽 세워 슬쩍 기댔다. 붕대 반 맨살 반인 몸 더 가리려 하지 않고 그리 앉아 다시금 입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