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품은 마음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를 쉽게 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고, 누군가의 감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며, 그 아픔을 같이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가능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회라는 존재는 삭막한 사람이며, 누군가의 감정에 공감하기엔 자신 몸 보존하기도 힘든 지경인데다, 아픔을 품어주기엔 아픔을 줄 수도 있으니. 말을 고르고 골라서 기껏 위로한다고 쳐도 기만이 되는 건 아닐까, 심장에 비수를 꽂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큰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괴로워하면 어쩌나……. 술잔이 채워지고 마실 때마다 거듭되던 고민은 점차 흐려지고 이치를 분간할 수 없게 되다, 당신에게 속삭이게 된다. 괴로움을 떠맡길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웃음이 서리니 이 즉슨 마주 웃어주는 행위이라. 보드라운 미소 면전에서 떠나지 못하고 취했냐는 물음에는 아예 작은 소리 내어 웃어버린다. 숨결 두어 번 뱉는 것에 가깝지만 웃음이라 확실하게 칭할 수 있으리라.
무릎을 베고 누우면 편하겠지, 필시 그럴 터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어도 반려 있는 사람 무릎에 어찌 머리를 베고 누우랴. 아무리 취했어도 이 정도는 분간이 가나 보다. 자그마한 담소를 보아 하니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다마는, 이걸로 정말 괜찮은 걸까 싶다. 그마저도 술기운이 괜찮노라 멋대로 단정 지으려 들기에 아회의 속내는 다시금 자아와 술기운의 싸움으로 혼잡해진다.
"……이해한단다. 네 일이지, 응…. 무얼 한다 한들 네 인생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는 것 알아주렴."
그리고 마음이 바뀌거나, 정하다가 괘씸한 존재가 생기면 꼭 얘기해 주고. 소곤소곤 얘기하다가도 볼을 콕 눌리자 눈썹이 위로 슥 올라간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듯 눈을 크게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사람 좋게 히, 하고 마주 웃어버린다. 웃음이 이리도 헤픈 자였는지 원.
"응, 알아줄게. 앞으로도 얘기하고 싶은게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하고……."
술잔을 다시금 비우려는 손짓이 느리고 몽롱하다. 아회 본인은 모르지만 취기 탓에 손가락에 술 찰랑여 두어 방울 튀었다. 그럼에도 쭉, 들이켰을 적 당신의 질문에 한 방울이 결국 입에 들어서지 못하고 주륵 흘렀다. 소매로 아무렇게나 입술에 흐른 술 닦아내며 아회는 탁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형님."
아직 소매를 입에서 치우지 못했지만 긴 속눈썹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깃털처럼 호선으로 나부끼고, 눈썹은 살짝 내려가는 것이 입매까지 미소로 온전히 이루어진 모양이다. 우리 형님은, 다시금 그렇게 운 떼더니 당신을 온전히 마주하며 사근사근 이야기했다.
"설산을 호령하는 영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귀한 피를 물려받은 직계, 세상에 한 번 날까말까한 천재, 출중한 인품으로 많은 사람이 따르고 닿고 싶어 하지만 한낱 인간이 모질고 험한 설산을 오를 수 없으니, 그저 그 위에서, 해 바로 아래에 우뚝 서 역으로 비치는 그림자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아회는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형님을 보았던 때를 어찌 잊을까. 아득히 닿지 못할 설산 위에서 고고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하던 그 고아함을, 흐르는 기품을, 가슴에 선명하게 내리박히던 동경을. 자신은 닿을 수 없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을. 후한 평가를 뒤로 아회의 눈이 점차 침잠한다. 비록 무언가를 담지 못하는 눈이다만 그 순간만큼은 선명하고 진득했다.
"그런 존재가 한낱 필부인 나를 위해 직접 내려왔단다……. 오로지 나를 사랑해주었고, 젖은 몸도 품어주시며, 그 밤을 같이, 단 둘이서 지새웠으니, 그 작태가 참으로 역하고 증오스러운 분이지 않니. 나는 당장이라도 마주하면 그 자리에 침을 뱉고 싶고, 다가오면 멱살을 틀어쥐어 고운 옷차림을 망치고 싶으며, 눈을 마주치면 그 눈을 후벼파고 싶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 그 행복한 원인을 걷어차고 끔찍한 노성만 지르길 바란단다. 죽기 전엔 내 이름을 부르며 저주하길 바라고, 죽는 순간엔 지켜보며 웃는 존재가 나였으면 해……. 필히 그 순간은 아름답겠지."
음험한 저 밑바닥 오만 감정이 그득히 깔린 눈빛. 내버려 두면 일을 칠 것 같은 심해 속의 눈. 깊다 못해 눈 전체에 들어찬 증오심과 환멸, 죄책감, 자기혐오, 그리고……. 소매로 가린 입은 여전했고, 아회는 시선을 내리깔며 천천히 눈을 피했다. 깊은 호선은 더 가늘어지다, 취기에 뺨이 발그레 달아오를 적 소매 너머로 가느다란 미소가 드러나자 무언가가 모습을 잠시 드러낸다.
"내가 기억하는 형님은 말이지, 오로지 나만을 사랑해주는 존재였거든. 예나 지금이나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거야. 평생. 만일 바뀐다 해도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소지를 잘라버리면 평생 내 원하는 만큼 약조할 수 있고, 목을 자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게 되겠지…. 그러니,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고, 죽여도 내가 죽여야 할 만큼 증오스러운 분이란다."
증오로 잘 포장했지만 애정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운 말이요, 사랑이라기엔 그 범위를 재고해야 했다. 가족의 애정이라고 보기엔 그를 넘어서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끔찍하기 그지없는 무언가를 감히 감정이라 표할 수 있을까. 술기운이 순간 드러난 끔찍한 감정을 숨기며 다시금 비단처럼 보드랍고 몽롱한 웃음을 얼굴에 그려준다. 입을 가린 소매를 내리며, 빈 잔을 까딱이는 손길이 느릿하다.
지문 없는 손이라니 신기하군. 아마도 매끈했을 손 빤히 바라보았다. 유현은 지난번 치미의 입 찢어지며 저를 씹어먹으려 했던 그때의 모습을 돌이켜 본다. 상황이 급박했고 또한 시야 불분명해 또렷하게 보진 못했지만, 형상 자체가 이질적으로 어그러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인간의 피부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라면…… 적어도 본모습이 인간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으리란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리고 태연하게 꺼내는 저런 소리도 정상 아니고. 이제 보니 제안이 아니라 강요였던 모양이다. 저 작자가 처음부터 어떻게든 뜻 밀어붙일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순순히 응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유현은 땅에 발 붙이고 살고 싶었다…….
"하면 요구의 빈도는 어떻죠? 지나치게 잦은 빈도, 가령 하루나 이틀 사이 몇 번씩이나 되는 빈도라면 어렵겠네요. 그리고 당신이 무언갈 보길 원하게 된다면 저 역시도 알게 되는 식인가요? '보지 않음'의 기준은요? 시간제한이 있는 건가요, 제가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경우의 의지를 기준으로 하는 건가요? 그리고, 계약의 파기가 가능한지도."
역시나 질릴 정도로 묻는 말 많다. 물론 이 정도도 인간식 협상이나 계약 조항에 비협조적인 치미에게 맞추어 간략하고 대책 없이 치르는 계약이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왜 저리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제안하나 했더니, 역시나 목적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학원 내부에 적당히 쓸 눈 하나 심어놓는단 뜻이잖은가.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문제라도 되나? 학원 보안은 진작에 엉망이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불의의 위험 닥쳐 온다 하더라도 그는 책임감이나 후회를 느끼진 않을 터였다. 유현은 모든 것을 흥미 위주로 바라보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것보다 뛰어난 눈 빌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탐구열과 의구심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부당한 계약이나 제 눈의 안위 같은 것쯤이야 아무래도 좋다. 유현은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였다. 무엇이든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마음 이끌리는 대로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태도, 그리고 눈빛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이 짐작은 아마 틀린 데 없으리라. 그는 쓰고 있던 안경 천천히 벗어 내리고는 허공 바라보며 짧게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역시 버린다면 이쪽이다.
"왼쪽이요. 혼동하실까봐 누차 말하자면, 회색 쪽을 말하는 거예요."
제 왼쪽 눈을 분명하게 가리키기까지 하니, 치미라는 양반 또 말 끝까지 안 듣고 저지를까 하는 걱정 여지껏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땅과 씨름해야 했다. 치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까닭은 상대가 대답할 의사 사라지게끔 하는 소리를 해서였지만, 무엇보다도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방법이 조금 도움이 되기는 했고 어떤 의도로 이 짓 하고 있는지도 알지만, 어째 느는 것이라곤 쥐꼬리만한 균형감각밖에 없는 듯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는 치미 덕에 체력 보충을 해야겠단 생각 이번에만 벌써 두 번째로 하는 중이다…….
하필 계약하는 상대가 본인 좋을대로 말하고 사는 용이라, 도움이 안되어서 계속 물어보게 만드는 유현이와 유현주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도캡이 뭘 말하는지는 아마ㅡ.. 다들 아시리라..... 예.. .개떡같이 말하는 거 같은데 그거 제가 졸려서 지그금 어휘력이 약간 많이 안좋아여....
>>111 치미의... 추종자...? 유현이가 들으면 눈 가늘게 뜨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들었다는 표정 짓는대요~😗거래는 했지만 치미형님 유현이한테 안 좋게 찍히셔서....(?)
앗 절대 들키지 말아아지 오늘부터 한쪽눈에 흑염룡 봉인됐다는 설정으로 안대 하고 다녀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온화 혼내도 오구둥둥은 같이 하나고요ㅋㅋㅋㅋ!!!! 역시 온화가 최고야... 못 때리고 있으면 더 뺀질거리니까 정수리에 핵꿀밤이라도 먹여주는 거예요!ヽ(•̀ω•́ )
>>112 안 좋게 찍혔어? 어... 갈굼의 낌새가 느껴졌?나? ㅋㅋㅋㅋㅋㅋ 요 눈치 빠른 뇨속! >:3 가리고 다니면 안 들출거 같으냐 보이자마자 당장 옆구리에 끼고 안대부터 아웃시켜버린다~~ 그리고 핵꿀밤 꿍! 한 다음에 무릎에 앉혀놓고 무슨 일 있었는지 낱낱이 불으라고 다 불때까지 안 놓아준다고 어- 어... 설득(?)해야지~
절반 농으로 제 허벅다리 내어줄까 했더니 머리카락이라도 닿았다간 목숨 보전하기 어렵겠다는 둥 한다. 얼근히 취해보이는데 저 정도 사리분별은 가능한가 보다. 고개 툭 꺾이면 그대로 폭 쓰러져버릴 것 같은데. 정 아니면 베개라도 주냐. 그리 말하고 아회 빤히 보았다. 그 외에는 뭐. 농 치는 것이나 연신 샐샐 웃는 것이나. 어딜 봐도 취해보인다. 취해서 홍홍한 아회를 학당 안에서 보게 되다니. 제 얘기 털어놓은 것보다 귀한 것 보는 날이거니 싶었다.
"괘씸한 존재라. 그래. 영 거슬리는 것 생기거든 얼른 쫓아가 일러드리지."
취기에 하는 말들이래도 듣기에 나쁜 것은 아니라. 외려 듣기 좋은 말들 뿐이라 괘씸한- 이라 했을 적 누군가 떠올랐음에도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뵈도 제 오라비고 그의 벗이다. 졸업까지 얼마 안 남은 지금. 굳이 사이 틀 이유는 없으니. 다만 곧 가닥 잡힐 제 결심 고하기 위해서라도 맡작업은 해두어야지. 다시금 넘기는 술 한 잔에 그런 생각들 같이 담겼다.
그런 푸근한 분위기가 제 물음 하나에 슬그머니 일변했다. 아회의 형님은 어떤 사람이느냐고. 궁기- 가 아니라 아회가 기억하고 아회가 알고 있는 형님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고. 취했어도 당황한 듯 입가에 술 한 방울 흘린 아회가 그것 닦듯 소매 올렸지만. 그 소매 내려가는 것은 한참 뒤였다. 모든 말이 다 흘러나온 후에.
아회가 차근히 풀어놓은 것은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는 듯한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 지금도 생생한 기억을 손 끝으로 훑으며 읊조리는 고저 없는 목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격렬한 흔들림 없이 우아하게 나락으로 떨어져내려 이윽고 그 바닥에 닿은 것 같은- 닿아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빛을 잃은 눈이 저렇게까지 선명히 감정을 담을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부드러이 형님이라 읊조릴 때부터 아회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저리도 진한 것이었나. 적룡의 기질 터뜨릴 적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 있었다. 차라리 잿더미 들쑤셔 화상 입는 것이 백번 천번 나을 만큼.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 할 깊고 스산한 감정 같은 무언가의 편린을 아주 잠깐 엿본 기분이 들었다. 혹은 그마저도 착각이거나.
현실과 현실 아닌 곳 사이 어딘가 헤매는 듯한 정신 되돌린 것은 아회가 술 청하는 소리 들렸을 때다. 그 순간 흠칫. 하며 제 몸 제 자리 실감한 온화 멍한 눈으로 아회 보았다. 그리고 끔뻑끔뻑 하다가 고개 끄덕이며 술병 집어왔다. 이도 저도 아닐 땐 그저 마시는게 답일 때도 있지. 암 그렇고말고.
"어. 어어. 그려. 마셔야지. 응."
말도 좀 어벙하게 했지만은 술 따르는 손만큼은 정확했다. 각 잔에 술 채워주곤 병 내려놓기 무섭게 바로 잔 비웠다. 한참 마셨음에도 갓 마신 듯 목구멍 찌르르한 느낌에 고개 돌려 작은 기침 내뱉곤 그제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었다.
"내 일 잘 풀릴 것 만큼. 오라비 일도 잘 풀렸으면 싶구만. 그리도- 그렇게도 무서운 것. 속에 품고 어찌 평생을 살까. 언젠가 헌 옷 벗듯 훌훌 놓는 날 오길 바라. 진심이여."
그 날의 형태는 아회가 정할 것이니 그저 그런 날 어서 오길 바란다 말하고 아회 보았다. 멀거니 뜬 눈 두어번 깜빡이다 휘릭 굴러 얼굴 옆으로 향한다 싶더니. 막을 새도 없이 온화 손 올라와 아회 귀를 건드리려 했다. 그 귀에 걸린 검은 귀걸이를 말이다.
"이잉. 내 이것 묻는다는 것 여태 깜빡했구먼! 몸에 걸치는 것 고작해야 비녀 한 벌이던 오라비가 왠 일이랴. 응? 것도 요로코롬 시꺼먼 것을 보란 듯이 달았네잉. 누가 주었는감? 아이구. 혹여 그 누가 손수 달아주기라도 했나? 요래 내 방 올 적에도 한 것 보면 말이네-"
여느 계집아이 떠들듯 조잘조잘 늘어놓으며 검은 귀걸이 유심히 살피려 했을 것이다. 직전까지 그런 얘기 해서 그런가. 새까만 귀걸이에 혹시-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연스레 무시하고 어서 얘기해보라며 아회 채근하기나 했다. 그 방정맞음으로 분위기 띄우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