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적이고, 이상적이며, 사랑을 찾는 이야기는 그렇게 좋은 조언도 위로도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잘 안다. 세상은 어릴 때 읽은 동화가 아니다. 그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따위의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을 위해서라면 발버둥 쳐야 한다. 그 발밑에 무엇이 깔려도 행복으로 외면해야 하는 세상이다. 신조차 정명하지 못하고 뒤집어졌는데 이상으로만 설파하는 온전한 행복이 존재할 리가 없다. 취기로만 한 꺼풀 벗겨진 속내를 드러내고, 아회는 눈을 감았다.
"술김에 뱉는다고 정정해 주련."
첫 술인 주제에, 술김에 뱉는다고 잘도 얘기한다. 웃음도 오래 가지 못하는 씁쓸한 세상 속에서 당신 또한 진실을 한 꺼풀 벗어낸다. 살아있음으로 해를 입는다는 말에도 여전하던 아회의 미소는 자신의 손을 쥐어 당신의 목에 댔을 적 옅어져 간다. 눈을 다시금 떠 검은 띠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예민한 감각으로도 무언가 새겨졌음은 알 수 있었다. 그 근원을 짚어볼 수 없을 터이니 손을 천천히 거두려 들었다.
"……."
실로 무례하나, 당신의 선조가 만든 저주는 욕심의 말로이자 업보란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쥐고자 피를 섞어내고, 광증을 품는 위험이 있어도 얻어내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한낱 범인인 자신은 그 의중을 알 수 없다. 수 대에 걸쳐 내려온 당신 또한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에 좋은 생각을 품을 수 없어 입을 다물게 된다. 혹시라도 가시를 쏟아내 원치 않는 상처를 입을까 싶어서. 날붙이 들고 들이닥쳐 수많은 살육이 벌어지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때 당신은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웠을까, 당신 또한 그렇게 누군가를 죽였다고 하였을 적, 광증이 꽃 피었으나 차후를 지켜보자며 살려두었다는 말을 직접 들은 당신의 기분은 어땠을까.
"내가 네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힘내, 다 괜찮을 거야, 희망은 있어… 그것이 모두 무슨 소용이니, 네 지금 느끼는 것이 그런 감정이라면, 그 감정이 승화되는 시간까지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지."
기실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끔찍했고, 지금처럼 내심 체념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음을 알겠지마는 거기까지다. 그 기분이 어째서 들었을까. 그 자체를 이해하기엔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을 해하려는 자를 죽였으면 칭찬을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자신 지키기 위해 날뛰어 광증을 얻었으면 영광의 증표라 귀히 여겨야 하지 않나. 눈 너머 감정이 침잠한다. 아회는 채워진 술잔을 다시금 한숨에 들이켰다. 독한 술도 연거푸 마시니 이치는 멀어지고 옳고 그름의 분간은 느슨해진다. 아회는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화야. 처지를 일깨운 것이라 믿고 그 길밖에 없노라 생각해도 좋지만, 지금 당장 속단하여 내려놓지는 말아, 방법은 많잖아."
상냥한 목소리다. 마지막을 논하기엔 너무 어리다며 다시금 이상론을 설파할 듯, 너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얘기할 것만 같은 담담한 목소리를 뒤로 아회는 미소를 지었다. 휘어 올라가는 입꼬리는 지극히 평온하여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끔 만드는 것만 같다.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미소였다마는. "네가 끔찍하게 여겨서 그럴 뿐이지." 날씨가 좋다는 듯 사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이 어렸다.
"선조의 저주에서 비롯된 부작용 하나로 운명이 정해졌노라 얘기하는 것도 억울한데, 주변에서는 그 운명을 일깨웠노라 꾸짖고, 그 끝을 멋대로 정해두며, 네 기본적인 권리를 휘두르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면, 그리고 자신은 수를 쓰고 싶지 않다고 굳게 다짐하면, 응, 어쩔 수 없지……. 하물며 나조차 이기심을 이유로 눈을 받지 않고 너를 돕지 않으니 체념하고 싶다면 말릴 명분이 없어……. 나의 업보가 있으니."
그 가면 산산이 부서진다. 낙천적이고 사랑스럽던, 그 모든 성미 또한 자신이라면.
"하지만 화야, 행복은…… 그리고 사랑은 쟁취해야 오는 거야. 실은 너도 알잖아. 얻은 것을 계속 쥐고 싶다면, 당연히 선택이 필요하지. 버릴 것은 버리고, 쥐어야겠다 생각하는 것은 쥐어야 한다는 걸……. 물론 찝찝하겠지. 어찌 생명에 경중을 재고, 광증 받아들이는 것이 쉽겠니?"
그 모든 성미를 불태우고 첨예하게 칼날로 만들어 벼려진 것도 자신이다. 온전히 술기운에 몸 맡기며 보드랍고 성긴 웃음 만면에 가득히 꽃 피워냈다.
"그러니까, 네 죄책감을 대신 짊어지면서 원망하며 회피하고 싶은 대상을 만들고 싶다면 얘기해 줘."
그는 상대의 위협적인 손짓에 눈 조금 깜빡거리기만 할 뿐이다. 부을 간덩이조차 없어서 겁나지 않은 탓이기도 하고, 원체 굼뜬 편이라……. 반응 시원찮으니 장난칠 보람 없는 인간이다. 혹시나 금 가거나 지문이라도 묻었을까 싶어 손 거두어지자 그는 안경을 벗고 천으로 렌즈를 닦았다. "안경에는 가급적이면 손 대지 말아주셨으면 하네요. ……아, 그러고 보니 당신도 지문이 있나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신수의 지문 여부까지 궁금해하는 건 아마 이 인간밖에 없으리라.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 제안, 저 외의 다른 인간들에게도 물어 보셨나요? 그랬다면 죄 거절당했겠군요."
아까도 영 불충분한 대답 주더니 이번에도 그렇다. 어느 정도 대가를 언제 치를지도 알려주지 않아서야 누가 혹하기는 할까? ……화유현이 그 혹하는 당사자이긴 하지만, 그는 생각이 그리로 기울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잃음이 확정된 눈이었고, 일이 잘못되어 원하는 만큼의 이득 얻지 못한다 해도 큰 유감이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달리 말해 웬만큼 상식 있는 인간이라면 무턱대고 좋다 답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제게는 꽤 나쁘지 않네요. 가져가시죠."
물론, 화유현은 상식에서 엇나간 인간이었기에 선뜻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미약하게 굳은 어조로 그가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인간은 땅에 발 붙이고 사는 편이 더 낫다 생각해요."
특별히 빠른 말투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조금 전보다 말하는 속도 미묘하게 빨랐다. 딴에는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다.
"척 지긴 모르겠고, 그저 소질 부족일 가능성은요?"
그게 이리도 신기한 일인가. 하기야 완전히 엉망인 게 아니라 몇몇 부문에서는 소질이 들쭉날쭉하니 특이해 보일 수는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에 관해 더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비틀비틀 다시 일어나니가 무섭게 또 바닥이 요동친다. 아무리 운동신경 없는 인간이라 해도 이 정도면 적응할 만도 한데, 종잇장 인간의 바닥엔 과연 더 아래의 밑바닥이 있을 것인가?
.dice 1 3. = 1
1~2.다갓님 이렇게라도 확률을 올려 보겠습니다(성공) 3.밑바닥에도 바닥이 있다는 걸 난 몰랐고
시야에 붉은 물 일렁인다. 출렁이며 올라오는 물 속에 잠겨 살았다. 성큼 불어나는 그것에 못 본 척 하였으나 고개 돌린다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한 것 아니라 한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 그 뿐이라. 날이 갈수록. 해가 거듭될수록. 저를 집어삼키기 위해 차오르는 광기의 핏물 앞에 그저 눈 감기만 하였다. 깊이 잠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망령의 손길 느껴져도 도망칠 생각조차 않았다. 가끔 눈을 떠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볼 뿐이었다. 늘 위가 아닌 아래를 보고 살았다.
위를 보면. 나가고 싶어지니까. 원하게 되니까. 제 처지를 잊고 위로 향햔 손이 잡은 것이 미약한 거미줄 임을 깨닫는다면 지독히도 슬플 테니까.
아회의 손 가져온 것은 저였으나 거둔 것은 아회였다. 그 손이 제 목의 띠 매만지고 물러나는 것 붙잡지 않았다. 손길 닿았다 멀어지는 것 느끼며 조곤하게 이야기 풀어놓았다. 류 가의 금술에 대한 것. 사실 밖으로 누설해서는 아니되는 이야기지만. 아회에겐 어쩐지 다 풀어놓고 싶었다. 보기 드물게 낙천적인 말을 해서 그럴까. 그런 아회에게 위로 받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체념한 듯 제 마지막은 반려에게 주어야지 읊조렸지만. 그저 온전히 그러하고픈지도. 혼란한 듯 알 수 없었다.
재차 술병 들었다. 본래 이리 들이키는 것 아닌데 오늘은 날이 제대로 잡혔달지. 내용물 움푹 줄은 것 보고도 또 잔에 금빛 술 채웠다. 아회의 잔에 반절. 제 잔에 가득. 헌데 이 오라비. 계속 주어도 될까. 착잡한 기분 사이에 그런 생각 불쑥 드는 것 보니 저도 참 어쩔 수 없나보다. 얌전히 술병 내려놓고 아회 보았다. 술김에 그렇다 생각해 달라더니. 술 들어갈 수록 본질에 가까워뵈는 것은 기분 탓일까.
녹슬어 굳게 잠긴 함 두들겨 열었더니 천상에서 내려온 듯 보드라운 천 드리워있어 참으로 곱다 생각했다. 그래. 누구나 이리 진귀한 것 품고 있지 싶었는데. 천 너머 예리한 칼날 서늘히 빛 발하였다. 그 날이 제 얼굴 비추며 속삭여온다. 내 너를 다 알 수는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나. 내 할 수 있는 것은 있으니. 네가 바란다면 그리 해주마.
어쩜 그리 아름답게 웃으며 말할 수 있나. 그저 술기운일까. 온화 고개 비뚜름히 기울여 아회 바라보았다. 곱게 웃으며 속삭이는 아회 물끄러미 응시하다 픽. 가는 웃음 흘렸다. 그제야 얼굴 조금 풀려 웃음 서렸다. 부드럽게 속삭여오는 말에 사뭇 진지한 표정 짓다가도 얼마 가지 못 하고 슥 풀렸다. 평소만치는 아니지만 느슨해즌 표정의 온화 그리 말했다.
"오라비야. 거 몇 잔 마셨다고 이리 취했나. 응? 깜빡 잠들겠는데. 엎어지기 전에 이 동생 무릎이라도 내어드릴까?"
그러면서 제 허벅지 찹찹 두드리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농은 아니고 정말 눕는다면 내어주겠지만 아회가 그럴까. 술기운 올라온 것 보면 그럴 것도 같은데. 어느새 시덥잖은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고마우면서도 낙심하게 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겉으로는 기분 제법 나아진 티 내었다. 묘하게도 정말 그랬으니.
"실은 나도 어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여. 방금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은. 눈 감고 뜨면 그건 아닌 것 같고. 돌아서면 또 아닌 것 같고. 하루 한 자리에서만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하니 어찌 내 몰골 챙길 여력이 나겠나. 허나 아무리 내 고민스럽다 한들 누군가에게 내 감정 대신 얹어주고 원망 받아내게 할 생각은 없네. 그리하기엔 마땅한 대상 없고. 고통스럽다 한들 결국 이것 내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무엇도 아니되리란 걸 알거든. 그래.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쥘지. 그리고 무엇을 끊어낼지. 내가 정해야만 하는 것이지."
그 모든 방식을 체념으로서 수용할 것인지. 광증으로서 베어낼 것인지. 결국 전부 제가 택할 일이었다. 그 말 제게 되새기듯 손 한 번 쥐고 펼쳤다. 빈 손 멍하니 보다가 들어올려 아회의 볼 콕 누르려 했다. 히- 하고 웃으며.
"오라비에게 얘기한 건 일전에 그 속 내가 들쑤신 전적도 있고. 이 꼴 하고서 대충 얼버무리면 안 하느니만 못 하잖나. 내 어찌 이 꼴 되었고 내 내력이 그러하다- 그것만 알아주면 됐네. 들어줘서 고마우이. 피 나눈 오라비들보다 아회 오라비가 제일이구만."
속없는 듯 실실거리며 말하고 무릎에 고개 툭 기댔다. 취기 없는 붉은 눈이 천천히 깜빡이고. 가늘게 벌어져있던 입술 문득 그런 물음 꺼냈다. 슬그머니 화두 돌리듯. 그냥 궁금한 듯.
치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손을 보던 그는 당신의 손을 보더니, 당신의 지문과 동일한 모습으로 지문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 있었지? 거절해서 나무에 올렸어. 근데, 걔가 살아 돌아왔다면 걔한테도 눈 빌려줄 거야. '
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치미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거의 다짐이었습니다.
' 나는 많은 걸 가져가지 않아. 네 한 쪽 눈 시력을 영구히 나에게 내놓으면 되니까. 가끔 내가 네 몸으로 뭘 볼 거란 것 정도? 그리고 내가 원할 때마다 원하는 장소로 가서 전체를 보기만 하면 돼. 안 보면, 뒹굴 정도로 굉장히 아파질건데ㅡ 뭐, 그건 내가 신경쓸 건 아니고. 대신에 가장 멀리, 가장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거잖아? '
이, 이 나쁜!!! 치미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 어느 쪽 눈을 내놓을래? '
당신의 대답에 따라, 가져갈 생각인 듯 합니다.
' 보통 인간도 하늘 날고 싶어하지 않아? ' ' 아우들도 나한테서 나는 법 배웠는데. '
신기한 인간이네, 치미는 덧붙이듯 말했습니다. 그는 무언갈 재어보듯 유현의 두 눈을 바라봤습니다. 어느 쪽으로 할 지 고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아무리 소질 없다고 해서 이 정도로 소질이 없을 리 있나? '
치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습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유현이 중심을 잡는 걸 보곤 으음. 하고 턱을 쓸었습니다.
' 잘 하네? 어떻게 버티는지는 안 것 같고. 그럼 동시다발적으로는? '
그가 한 쪽 발을 탁, 탁 두 어번 정도 땅에 두드렸습니다. 당신의 주변에 동시다발적으로 진동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