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녀자의 것을 어찌 함부로 사용하랴, 하물며 아회에게는 휴대용 베개가 있었다. 도술로 드러내는 꼬리를 베개라고 칭할 수 있겠냐마는, 아회의 꼬리는 여타 평범한 범의 것이라기엔 더 크고, 두꺼우며, 북슬북슬하니 털이 길어 범 닮아 줄무늬만 있는 영물이나 장모종 고양이의 것에 가까웠으니 충분히 사용할 수도 있을 법하다.
"으응. 그렇지이."
죽일 수 없다면 쥐어 패는 방법도 있겠거니. 보드라운 분위기에서 속삭이나, 과거에는 필히 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으리라. 그래, 본디 상냥함이란 그 안을 더 깊게 바라보아야 진정한 속내가 드러난다 하지 않던가. 풀어졌다면 당연히 나오고, 그 너머를 술을 통해 본다면……. 선인도 그 안의 심연 있기 마련인데 과연 필부가 없으랴. 더 했더라면 더 했지 덜하리는 없으리라. 아회는 결국 속내를 풀어놓고 만다. 그것도 끔찍한 일부를.
"……후흐."
그래, 일부를.
고해성사 끝나고 세상 모든 달콤한 것 끌어안고 세상 사랑스레 웃는 모습에서 괴리감 선명히 느껴진다. 과거에 있던 온통 달콤한 기억과, 어느 순간 깨져버리고 이지러진 증오가 함께 공존하더니 그 밑바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겠노라 꿈틀거린다. 아마 이 의지가 바닥난다 한들 감정은 억지로 삶의 끝을 보고자 뒤틀리며 육신을 움직이려 들겠지. 어쩌면 그 감정이 모든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르나, 그 깊이를 감히 필부가 알기엔 마치 신이 내린 한때의 저주처럼 너무나도 깊고 아득하였다. 모두 '형님'이라 불린 자의 작품이리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자의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거리가 있지 아니한가. 그리 믿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으응, 천천히 마셔야지. 그렇지?"
그러니까 술잔 채우는 것을 늦게 깨달았을 테야. 아회 상냥한 웃음 만면에 그려내고는 잔 받았다. 당장 마시지는 않지만 곧 마실 것처럼 술잔 가만히 들고 있으며 당신 응시했다. 다행스럽게 그 끔찍한 감정은 사라진 듯하다. 다시금 심연 속으로 기어가, 그 속에서 암약하고 있으리라. 금빛 술을 몇 번 찰랑이던 아회는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술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취기가 올라 당최 어떤 맛인지, 어떤 느낌인지도 너무 쉬이 잊어버렸지만.
"고마워, 너밖에 없구나…… 응, 네 일 잘 풀리듯, 나의 일도……."
무서운 일인지는 모른다. 그저……. 속내로 삼킨 생각을 뒤로 아회는 당신을 순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내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을 새도 없이 귀를 건드리려 했으니 당연하다. 잔을 내려놓는 순간을 일부러 노린 것은 아닐 테고, 궁금증 때문이겠지. 하지만 닿으면 안 된다는 본능이 먼저였기 때문일까, 품 속에 숨겨진 검붉은 부적이 소리 소문도 없이 불탔다.
"ㅇ, 아, 이건, 그게……. 그러니까."
귀가 있을 곳에 귀가 없고 대신 머리 위로 무언가 돋아나니, 검은 바탕에 흰 얼룩, 속은 선홍빛 어린 범의 귀요, 품 넓은 옷 사이로 두툼하게 툭 튀어나온 것 있으니 일전에 장모종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어림잡아 세 척에서 네 척 되는 기다란 꼬리였다. 아회는 자연스럽게 꼬리로 입가를 꾹꾹 누르며 뺨을 붉혔다. 귀걸이의 존재가 자신도 익숙하지 않고 영 수줍다는 듯.
"ㅇ, 영 사감님이 선물로 각인해주신 거란다. 학당으로 쉬이 돌아가라고……. 그래서, 함부로 만지면 그 장소로 이동이 되는 주술이 걸려있어서, 만지지 못하게 해서 미안. 네가 학당 문으로 날아갈까 싶어 그만."
더 얘기하면 괜히 부끄러워. 괜히 꼬리를 합 물어 입을 다문 아회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도톰한 꼬리 끝이 몽실몽실 살랑였다.
점심이 되면 잊을 것만 같지만 답레를 쓰는 육신은 동일하니까요... 나의 육신은 무의식을 알아서 잘 읽겠지요... 응, 이상한 말이다마는 그래요. 괜찮을 거야... 잠들고 잊겠지만 해야 할 일을 했다 믿을래요... 응... 그런 거야... M자 탈모 발레리노 둘도 인정했는4ㅓㄹ....
술 배울 적 가장 먼저 들은 말 있었다. 술은 마시되 술에 취하지 말라고. 마시면 필연적으로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술인데 어떻게 취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 말 떠오를 때마다 종종 궁금했는데. 오늘에서야 알 것 같다. 아마도 어렴풋이겠지만 말이다.
낭낭하게 술기운 오른 아회는 자잘하게 이 말 저 말 잘 하더니 슬쩍 던진 물음에 평소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을 부분까지 틈새 정도나마 내비쳤다. 정말 뜻 밖의 수확이었으나. 동시에 여태 마신 술이 핏속에서 싹 물러가지 않을까 싶을 만큼 깊고 어두운 심연이었다. 무서운 것. 온화 그것 그렇게 표현했다. 흉흉하다던가 음험하다던가 음습하다던가- 그런 말 많지만 다 집어치우고 딱 하나. 무서운 것이라 하였다. 제가 가진 깊이로는 재단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만큼 깊고 깊은 무언가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으니.
게다가 그런 것 품고서 저렇게 웃는 이를 어찌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아회 사랑스레 웃을 적 제 내장까지 소름 돋는 착각 들었다. 그 쭈뼛한 감각이 아마 오늘을 오래도록 잊지 못 하게 되는 계기 되리라. 모든 것이 잘 풀린 후라도.
"...그런 무서운 소리 해놓고 웃긴."
술 따르며 툭 하니 중얼거렸다. 나즈막히 뱉은 말이었으니 안 들렸을 수도 있겠다. 하물며 지금 같은 상태로는 들리는 것도 듣는 것도 가물가물 할 지도 모르지. 어물어물 하는 것 보라. 먼저 술잔 비우고 저를 보는 아회의 시선 잠시 마주했다. 술로 번뇌 씻은 듯 말간 눈동자가 색 잃은 구슬 같다. 그랬던 눈이 제 돌발행동에 동그랗게 커졌다. 놀랐구나- 하고 놀리려는 것도 잠시. 손 대려던 귀 없어지고 대신 생겨난 귀와 쑥 튀어나온 꼬리의 등장에 쭈뼛함이니 무서움이니 싹 날아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역시 술 제법 마셨으니 말이다. 단숨에 미소 활짝 피며 분위기 일변했겠지.
"뭐- 뭐야 이거?"
처음 반응은 그저 깜짝 놀란 듯 했다. 눈 커지고 입 딱 벌어지고. 평소 말투 잊고 그리 중얼거렸으니. 하지만 아회에게 불행히도 온화의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뭐야. 뭔데 뭐야 이거! 세상에 세상에나-"
귀걸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말 들리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온화 그저 눈 반짝반짝 빛내며 귀와 꼬리 번갈아보고 있었다. 보기만 했을까. 슥 옆으로 돌아앉으며 허공에 수상한 손놀림을 하는가 싶더니 대뜸 아회 끌어안으려 했다. 무슨 짐승 습격하듯이 와락 안고 한 손으론 귀를 한 손으론 꼬리를 쥐고 쓰다듬고 간질이고 조물거리고 등등등- 평소의 장난보다 짖궂은 손놀림으로 아회의 정신 쏙 빼놓았을 것이다.
"뭐야 이거 귀여워- 이거 이거 귀랑 꼬리만 나올 수도 있었던 거냐구- 귀여워- 와하 귀 복슬복슬해 꼬리 보들보들- 어떡해 너무 귀여워- 오라버니 이렇게 귀여웠단 말야? 이런 걸 여태 숨겼어? 안 되겠다 괘씸죄야- 히히- 아으아 귀여워-"
손놀림 뿐만 아니라 거의 폭격 수준으로 쏟아붓는 '귀여워' 공격도 한 몫 했겠지만은. 탓하기엔 온화 표정 정말 행복해 보였을 터다. 이대로 툭 쓰러져 성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