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어장은 상황극판의 규칙을 준수합니다. ※ 일상과 이벤트는 이 곳에서. ※ 수위 규정 내의 범죄 행위와 묘사를 허용합니다. 이전 재판장: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6912075 휴게실(잡담방):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6912077 시트 스레: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6909080
>>58 마사 했잖아. 어린애같다는 말 했잖아! (어째 계속 말려들기만 하는 것 같아 짜증을 잔뜩 내고 있다...) ... 흥.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피해자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와 너'였기 때문에 살인이 일어났다는 말인데... (고민하느라 잠깐의 틈이 생긴다.) 만약 피해자가 그런 불량 학생이 아니었어도 너는 걔를 죽였을 거냐?
제제라는 이름의 소녀는 웃었다.부드레히 웃었다. 무엇이든 해드리라. 행복하게 해드리라. 그 것이 바로 신이란 존재의 존재의의이니.
그러한 만들어진듯한 미소에 금이 갔다.
"...친구?"
분명 아는 단어일텐데, 생소한듯이 되묻게 되버린다. 친구?
"나랑?"
혼란했다. 머리속이 혼란했다. 분명 본인은 긍정되었다. 용도를 다한 그릇이 신이라는 명칭의 짐승으로 돌아갔다. 모두 스스로 행한 일이 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이끌어 줄 신을 기원한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자리를 되찾은 소녀는 다시 신이 되어 웃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래, 뭔가 이상했다...
음악이라던가운동이라던가경멸이라던가아이취급이라던가.
친해지는 것 같다 생각했다던가. 친구가 되고 싶다던가...
혼란스러웠다. 그거 말고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마음속에 엉킨 실타래같은 것이 팽팽하게 당겨오는 느낌이었다. 이 자그만한, 별거 아닌 말 하나 하나에 갑자기 분노가 솟구치기도 했고, 격하게 광소를 내뱉고 싶기도 했고, 아이같이 눈물을 흘리고 싶기도 한 그런 충동에 휩싸였다. 여기 이 장소의 수감원들이 남기고 간 찌거기 같은 흔적에. 화내고 싶었다. 주제도 모르는 어리석은 아해라고 비웃고 싶었다. 아는 것으로 대려오다가 또 모르는 역할을 강요하고 본인을 부정하는 듯하다가도 긍정해주는 모두의꼴이 너무 혼란스러웠고 원망스러웠다. 용서했는데 경멸한다. 용서했는데, 친해지고 싶었다 한다. 모순적이다. 모순은 끔직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 눈에 내어진 이어플러그가 들어왔다. 날뛰던 감정을 깨닫자 마자 수그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텅텅 비어 멍청하게 된 제제는 그 이어폰을 한 손으로 받아든다.
"...아니야. 본좌도... 원했네."
다시 웃는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기에. 그래도 신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이런 이상한 아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대가 할 수 없는 부탁이란 없네."
본좌는 신이고, 그대는 인간이니.
세이카가 가르킨 자리에 스스로를 앉힌다. 어설픈 손짓으로 이어폰을 매만지다 세이카가 끼는 것을 흘긋, 보고, 그 것을 따라해 귀에 꽂는다.
"... 괜찮아, 정말로. 나, 그정도 돈으로 뭘 할지도 모르겠는걸... 그, 렇게 되어 버렸, 고... 학교 가기에는, 응..."
몸을 살짝 떠는 세이카의 눈은 또 조금 생기를 잃고 말았다.
"... 여기서 용서받아도... 이미, 여기 있는 사람들 빼고는, 다... 나, 안 좋아하게 되었는걸..."
그 경멸의, 증오의, 혐오의 눈빛. 믿었다고 생각했던, 반 아이들, 선생님, 전부.
"...? 어째서...? 마사가 용서 못 받으면... 사실, 나도 용서 못 받는게 아닐까...?"
자신으로써는, 그런 미래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였다.
"그, 혼자서 돈을, 쓰기에는... 응... 그러니까... 같이 나가면... 해외, 같이 가는 거, 어때...? 나, 그, 처음에 말하는 거, 봤잖아... 모르는 사람 앞에서, 말, 잘 못하고... 그러니까... 그때 계속 도와줬으면, 좋겠어... 부탁...해도 될까...?"
>1596912075>997 박권태
"그, 선물이라면, 얼마든지...?" 당황하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너무 이상한 것만 아니라면... 그리고, 머리핀의 자리에 있는 털실로 만들어진 머리끈도 살짜금 보이니, 선물을 받는다면 자주 착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 생각... 못해 봤네요... 그, 제 집... 강아지나, 고양이, 못 키워봤고..."
죄송합니다, 라고 빠르게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숙이니, 덩달아 축 쳐지는 고양이 귀.
>>73 제제 르 귄
"...응, 친구... 제제씨랑, 친구가 되고 싶어요... 아직도."
조용히 이야기한다. 의견을 피력한다. 과거형으로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아플까 싶어서 과거에 그랬었다는 풍으로 이야기를 했다.
"... 같이, 노래를 듣고... 즐기고... 감상을 듣는다거나... 책을 보고... 재미있었던 것을 나누거나..."
"서로 알아가면서, 서로 이해하면서... 좋은 친구로,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때 도서관에서, 이야기한 그 말... 그게, 정말 제제씨가 저에 호의를 품고, 이 주제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아서... 정말, 정말로 기뻐서..."
조금 졸린듯 목소리가 늘어지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보다 더 진심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새벽 텐션이라는 것이였을까.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였다.
"...제 부탁으로, 싫은데 하는 것이라면... 정말, 괜찮으니깐요..."
조금은 아픈듯, 하지만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다.
그런 식으로 아픈것은, 익숙했기에.
그리고 이내, 둘의 귀에 울려퍼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합주.
https://www.youtube.com/watch?v=l0GN40EL1VU
"... 들킨다고, 조마조마하지 않은 채, 듣는 건, 처음..."
바이올린의 플러킹, 관악기의 부드러움. 환상적인 멜로디. 그리고 이내 오는 익숙한 피아노의 독주.
여름의 한 외딴 집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로 인해... 살짝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리라.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곳은 정말, 내게 생소한 경험만을 안겨주는 구나. 판결 결과 전의 생소한 것은 내게 기쁨만을 안겨줬는 데, 제자리를 찾은 지금에는 불쾌하기만 하다. 그래, 불쾌하기만 했다.
뭘 원하는 지 모르겠다. 하나도.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지도. 세이카의 말은, 마치 안개속에서 노이즈 가득 낀 스피커로 듣는 것 같다. 멍하니, 마치 꿈에서 듣는 것 같이 멍하게 듣게 된다. 정말로 몽상같은 이야기 이니까.
같이 노래를 듣고, 즐기고. 감상을 듣고. 책을 보고. 재미있던 것을 나누도.
'서로' 알아가고, '서로' 이해한다?
"...본좌는 신일세. 신과 친해져서 뭐하겠나, 그대가."
누군가에게 웃으며 말했던 것을 생각보다 멍청하게 흘려버린다. 그때 또 다른 그녀가 대답했었다. 자신은 신 같은 건 필요없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그대들은, 신이 필요한게 아니였나. 신이 더 이상 아니게 되어 갈팡질팡하는 한심한 작자가 아니라. 왜 그런 걸 기쁘다 하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대들의 무지에 짜증이 인다.
"신이란 본래..."
말하다 입을 다문다. 아니, 원래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니까. 그대들도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당연한 것을 왜 모르는가 말인가. 이 '상식'을 왜 괜히 깨부순다 말인가.
마침 곡이 귀로 흘려 들어온다. 이어폰이 익숙치 않아 흠칫, 잠시 쩔지만, 이내 다시 손을 무릎위로 단정히 돌려놓는다.
앞의 소녀가 자신을 바라본다. 손에 닿은 온기가 뜨거워 화상을 입을 것만같았다. 그녀의 조용한 음이 귓가에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거 같았다.
마음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별로 신 답지는 않았다.
제제는 그것을 끔직하고 불쾌한 감정이라 정의하였다. 머리 여럿 달린 괴수처럼 그것은 여러 감정으로 제제를 괴롭혔으며, 하나를 쳐 내면 또 하나에게 물어 뜯기는 느낌이었다.
끔직했다. 불쾌했다. 괴로웠다.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시간이 늦었군."
입에서 뭐라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기계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이카의 손도 자연스레 떨어졌다. 그랬던거 같다. 잘 모르겠다. 속에서 무언가가 자꾸 뒤틀리는 느낌이라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너무 했다. 아마 웃고 있었던거 같다.
"너무 오래 잡아둔거 같아 미안하네." 라고 말했던 거 같기도.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즐거웠네"라고 말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니, 둘 다인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으로 문을 더듬어 문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조금, 이 방에서 나가 나의 공간으로 돌아가면 숨이 트일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다고 확신했다.
그래도 나가기 전에는, 한 마디를 해야 했다. 조금 괴로운 듯이, 말이 이 사이로 스며 나온다.
〔 지난 24시간동안 입고를 요청받은 물품이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금괴 5개입니다.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저희 밀그램 시스템이 죄인 여러분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하고자 노력하는 건 맞습니다만 통장 사정까지는 봐드리지 않습니다. 장난치지 마십시오. 〕 〔 또한, 항우울제와 항갈망제를 의무실에 구비해달라는 요청 또한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들어는 드렸습니다만, 여느 물질이 그렇듯 오남용 시 건강에 무리가 갈 수 있는 약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의사와 상의 후에 복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짧은 수감 생활 중 치료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말이죠. 〕 〔 마지막으로, 도서실의 연체도서를 추적하던 중 일부 도서가 파괴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실꼬기, 머리끈 등 악세사리를 만드는 것과 관련된 책이었습니다만... 종이 하나하나를 뜯어내어 파괴에 공을 들인 듯 하더군요. 흐음, 어째서입니까? 죄인 제제 르 귄. 그토록 신경써서 머리끈을 만들어 선물하더니. 〕
〔 다음으로는 투표 현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접수된 투표는 총 9표입니다... 만, 자기 자신한테 투표되어 무효가 된 표가 1표 있습니다. 〕 〔 듣고 계십니까, 자신한테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투표한 미나미노하라 세이카? 다음부터는 이러한 착오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 〔 죄수 번호 001, 박권태. 용서한다: 2표, 용서하지 않는다: 2표. 〕 〔 죄수 번호 002, 시미즈 마사. 용서한다: 1표. 〕 〔 죄수 번호 004, 옥사나 하네즈카. 용서한다: 2표, 용서하지 않는다: 1표. 〕 〔 이전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용서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상황이군요. 〕
〔 오늘은 심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참고하시어 다음 심문을 위한 에너지를 비축해주시길 바랍니다. 〕
〔 밀그램 시스템은 공평한 재판 진행을 위하여 정보 공유에 늘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 ♬ 〕
현재, 제제의 일과는 이러하였다. 익숙지 않은 곳이 이번의 판결로 익숙한 곳이 되니, 생활 패턴 또한 비슷하게 돌아갔다.
일단, 5시 기상부터 시작하는 준비. 이것이 가장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익숙지 않으므로 이전보다 시간이 걸린다. 머리부터 옷매무새까지 완벽히 하고 나면 방을 나선다. 창문은 없지만, 해가 뜨기 시작할 때쯤이라 생각된다.
그로부터 간단한 식사, 그리고 도서관. 심리학이라던가, 관련 서적을 흩어보며 필요로한 지식을 견고히 한다. 읽는 책은 이미 읽어 본 익숙한 책뿐. 본 적 없고 필요 없는 서고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 외의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가. 답은 간단했다.
제제는 휴게실, 혹은 방 안에 단정히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상점가의 도자기 인형과도 같았지만, 그와 달리 바라볼수록 몹시도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제제는 인형이 아닌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간이 되면 방으로 돌아가 취침한다.
-- 익숙한 행동 방침을 따르다 보니, 신도들을 둘러보아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그들의 고민, 하소연, 고통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올바른 말을 설파하는 시간.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그 시간이 통째로 텅 비게 되었다. 제제는 그들의 곁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현재 다 '행복'해졌으니까.
처음 왔을 때는 하루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처음 읽어보는 책들을 보고. 처음 해보는 운동도 힘내보고.
하지만 다 어리석은 짓이라는 게 판결 났다. 지금의 제제는 며칠 전의 제제를 비웃는다. 신으로서 태어난 이상, 그 사명을 그리 쉽게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하하, 우스운 일이다. 하하.
하지만 신의 자리를 되찾은 후, 이 시간은 계속해서 비게 되었다. 원래는 자신의 자리를 되찾으며 일부러 비워놓은 시간이었다. '이전'과 달리, 다른 수감자들이 제제를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하여도 이전의 생활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들은 제제에게 고민도 고통도 불행도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말하는것은... 모순. 그래, 모순이었다. 끔찍한 모순.
마음속에 무언가가...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무언가가.
그들이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일까? 신은 신도를 위해 존재한다. 그들을 이끌고, 하소연을 들어주고,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신도 없는 신에게는 존재 이유가 없다.
판결은 신이 필요하다 말하였다. 제제의 행동을,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하였다! 하지만 그에 응해 웃는 얼굴로 다가가면, 기대하던 하소연은커녕...
제제의 존재 자체가 고통이 된다는 듯 행동한다.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다. '용서'하지 않았나? '긍정'하지 않았나?
그러면 속으로라도 제제와 동의하는 게 아니었나. 지금이라도 고민과 번민을 내려놓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었나? 모르겠다, 모르겠다!
가끔, 제제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긴 했다. 그 분노는 의식하자마자 사그라들었으나, 좋은 징조는 아니라 생각했다. 별로 '신'스럽지 않지 않는가.
그 분노는 어리석은 자를 보는 답답함과도 같았고,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았다. 기어오르는 자를 향한 거슬림과도 같았고 갈 곳 없는 원망과도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계속 억눌린 무언가가 터지고 솟구쳐 일대를 헤집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안전한 나의 울타리를 침입자가 마주 부수고 흩트려 놓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그만해! 감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만둬!
용서한 주제에!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자리를 흩트려 놓는 게 증오스러웠다.
“ ─ 죄를 저질렀다는 자각이 없는 사람한테 이를 알게 해주기 위해서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헛소리다. 우리는 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모두 속으로 용서를 원하는 주제에! 괴롭지 않길 원하는 주제에!
여기에는 새로운 것이 많았다. 한때 즐거움의 표본이었던 그것들이 모두 위협이자 불쾌한 것이 되어 다가왔다. 새로운 것은, 익숙지 않은 것은 모두 끔찍했다. 끔찍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다.
화가 났다. 새까만 불쾌함으로 가득 채워지다가, 결국 용서받았단 생각이 들면 새하얀 환희로 뒤덮였다. 불행한 이들에게 끝없는 애정과 연민을 느끼다가도 일렁이는 적의를 눌러 내려야 했다.
상념, 끝없는 상념. 누구 앞에서는 절대로 티 내지 않았다. 허나 혼자가 되는 순간, 제제의 머릿속에서 이러한 상념이 끝없이 몰아쳤다.
신답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어떻게 라도 평정을 되찾아야 했다. 감정을 해소하는 법은 하나도 몰랐기에, 제제는 길 잃은 미아처럼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정말로 짐승마냥, 본능을 따랐다. 아무도 없는 개인실이기에 가능했다.
부욱, 곱디고운 손가락이 페이지를 잡아 짓이겨 뜯었다. 무심해 텅 빈 잿빛 눈동자가 구겨진 종이를 응시했다. 기계처럼 그 동장을 반복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본인의 신체는 신의 그릇이기에 안된다. 타인의 신체? 웃기는 소리. 더더욱 될 리가 없다. 그래서 배출구는 마침 눈에 띄는 초라한 책 한 권이 되었다. 마침 필요가 없어진 물체였다. 필요가 없어진...
스스로의 손으로 행하는 파괴는 극히 달콤했다. 그리고 극도로 초라했다. 그냥 철없는 아이의 장난 같았다.
투둑, 하고 노트 위로 붉은 잉크가 떨어진다. 이상하다, 색이 있는 펜은 쓴적이 없는데 싶어 코 밑을 만지니 그대로 피가 묻어나온다. ...그럴만도 하겠네. 그날, 드러나게 되어버린 내 심상 때문이겠지. 그것때문에 마음이 편치않아 밤에도 잘 잠들지 못하다보니 이런건가. 전에는 아무래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수감생활이 길어지다보니 원치않게 올바른 생활을 하게 되어서 몸이 받아주지 못한 거겠지. 곧바로 대충 응급처치를 하고서는 다시 자리에 앉아 빈 노트 위를 툭툭 하고는 건드리다 다시 이내 제대로된 행동을 찾지 못해 이미 몇일이고 써대서 바닥이 말라 붙은 브랜디잔에 싸구려 위스키를 채워넣었다. 노트에 적어놓은 '죽기전에 하고 싶은 것'이라는 글자만으로 이미 머리가 차버려서 몇시간째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평소였다면 전혀 생각도 안했을텐데. 뇌수를 타고 적시는 옅은 오크향을 통로삼아 알콜과 담배가 강렬하게 전두엽을 두들긴다. 왜일까.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분명 살고싶지 않은데.
"후우"
깊게 내뱉은 한숨에는 곤란이 섞였다. 살아달라는 말은 독이다. 무엇도 알려주지 않고서는 그냥 자기가 원하니 살아달라니,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그러니까 아직 젊다고 하는건가? 나도 어디서 늙었다는 소리는 못들었는데. 모르겠다. 모르겠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죄책감을 느끼는 것 만으로 뇌의 리소스를 모조리 쓰는 듯한 기분이다. 그에 맞춰서 조만간 끝날 인생을 곱씹는건, 솔직히 편하다. 책임진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무언가 책임을 진 것 같은 안도감을 안겨다주니. 후유증은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무엇보다 훌륭한 마약일 것이다. 비굴하게 숨어서 모든 것을 회피하는 주제에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것 마냥 웃으면서 나는 이렇게나 불행하다고ㅡ 그래서 이것을 감당하는 것 만으로도 벅차다는 말만을 끊임없이 되새긴다. 두번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을 떠올리면서 나만을 가둔 지옥에서 편함을 느끼고 있을뿐.
그래서 아무것도 써내려가지 못한다. 조금씩 타들어가는 숯의 냄새와 마음것 섞어넣은 향료가 독한 구름이 되어 의무실 안을 채우고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죄악을 하늘 높이 던졌다가 다시 받지 않고 그대로 깨뜨린다. 안에서는 내가 버렸던 책임이 마치 피처럼 흐르고 있었다.
"..."
다시 정신을 잡고 펜을 잡았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대부분의 첫경험은 줄리아가 받아갔으니 아무래도 줄리아도 알지 못할법한 것들이 좋겠지. 조금씩 깨워지는 정신속에서 담배도 꺼뜨린채로 조금씩 새로운 삶의 궤도를 그려보고 있었다.
의외로 옥사나에게 힐난도, 무시도 날아오지 않자, 상당히 의외인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도 웃는 표정이라니? 두 눈이 동그래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굳이 말을 꺼낸다.
"...오늘은 화내지 않는군."
눈을 깜박이며 평하다,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인다. 심오하게, 역시 웃는 얼굴이 문제였나? 라고 중얼거리며.
"목표?"
무심코 되물으며 옥사나가 쓰고 있는 글자를 힐긋, 바라본다. 거꾸로 읽어야 하지만, '죽기전에 하고 싶은 것'이라 적혀있는 거 같다. 예고한 옥사나의 죽음이 그 그림자를 드리우자,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별로 어두워지는, 혹은 놀라는 느낌은 없다. 어쩌면 비슷한 처치라 그럴까.
오히려 옥사나가 빈 노트를 건네주자 놀라는 것같다. 노트를 가만히 보다, 묘한 표정과 함께 그대로 되돌려 옥사나에게 반환한다. 떨떠름한 제제의 얼굴과 대비되는 새하얀 공백의 페이지가 선명하다.
"생각은 고맙다만, 필요없다네. 본좌가 하고 싶은 것은, 모두 이 곳에서 끝낼 생각이라."
평소라면 자만과 당당함과 함께 전할 말도 그저 덤덤하게 말하는 것을 보아 나름 피곤한 듯하다.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쪽은 옥사나의 것이다.
"대신 그대를 도울 수는 없나? 생각 해본 적 없는 미래를 그리는 것은 힘들지 않는가."
>>97 마사
청소를 하는 마사를 소파등에 기대며 바라본다. 저번 심문에 오히려 뭔가 해방된 느낌인데. 사소한 흥미와 의문 사이의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가는 느낌이다.
>>98 제제 "생각해봤거든요. 당신은 내 원수도 아닌데 그렇게 죽도록 미워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고."
여전히 마음에 안드는건 같지만요. 라고 중얼거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다는 듯. 그녀는 마치 진언을 중얼거리는 것 처럼 겸허하게 말을 뱉고, 다시 작업에 몰두한다.
"그래요 목표. 원한처럼 애매하지 않은 것들 말이에요."
제제에게서 노트를 받아든 그녀는 아쉽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아쉬움외에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비어던 잔을 채우고 다시 비우고,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한다. 얼굴이 조금 불그스름하게 변하자 그제서야 조금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건지 웃으며 제제에게 대답한다.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이건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해야하는거라."
그리 말하는 그녀의 눈가는 조금 휘어져 있어서 그게 놀리고 있단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애초에 믿지 않았으니 그녀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몽롱해질수록 정신은 맑아진다. 미쳐간다는 것 조차 인지할 수 있을정도로.
"하고싶은 것... 생각해보니 궁금하네요. 제제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신이라던가 하는 입장이 아니라. 인격체인 제제 르 귄이 하고싶은 것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