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를 표현할 수 없는 울림이 혼란에 살을 붙일 무렵 또다른 굉음이 긴장을 놓치고 있던 고막을 짓눌러온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두 귀를 가로막은채로 눈을 질끈 감는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진동이 더욱 거세어 진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심연에 잠긴듯한 가면 속 그늘을 겨누어보았다.
"시원한 물이나 한 잔 마실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당장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두려움으로 가득찬 공간 속에서 사내는 허탈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린다. 공포감으로 젖어버린 이성조차도 매서운 갈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말을 마친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래 안에 숨은 존재들이 굉음에 자극을 받아 깨어난 것은 아닌지. 모자를 눌러쓰며 좀더 날카로워진 시선을 흘렸다.
머리가 혼자서 허공에 떠 있지는 않을 테니 어디서 연결되고 받쳐주는 목과 몸이 분명 존재할 테지만 , 당신은 보다 실존적인 증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 그래서 당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염려하고 확인하면 , 분명 모든 것이 제자리에 존재했다 . 하지만 완벽하다 말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했는데 , 머리에 빗장이라도 걸쳐놓은 듯 원하는 바가 떠오르지 않고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
이름이 무엇인지 . 여기가 어디인지 . 왜 여기에 있는지 .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사람이 갑자기 아무도 없던 자리에 자연 발생하지는 않을 터인데 , 현재의 당신을 완성하는 내력이 , 역사가 뭉텅이로 찢겨나간 듯 생각나지 않았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 아무래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
형태가 없는 음성은 불친절하게 머릿속을 맴돈다. 남자는 귀를 틀어막아보지만 괴인의 음성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온갖 살과 뼈에 스미었다. 다가온 구절을 이해할 틈도 없이 솟구치는 모래먼지에 사내는 고글과 옷깃으로 눈을 가린다.
찌푸린 미간을 마저 펴기도 전에 흐릿한 시선 사이로 붉은빛이 가까워진다. 한쌍, 두쌍.. 먼지가 희미해질수록 점차 수는 많아졌고 형태는 또렷해진다. 그들의 앙상한 갈비뼈를 볼 수 있다면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와 마주하게 된다. 달빛을 삼킨듯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듯 했다.
어느덧 괴인을 등진 형세가 되었고, 사내는 체념한듯 모자와 코트를 벗어던진다. 그러고는 주먹을 들어올려 눈앞으로 겨눈다. 모든 것이 뿌연 기억 속에서 한줄기 이성만이 그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둠과 괴물들, 그리고 지평선과 맞닿은듯 거대한 달빛아래 사내는 다가올 최후를 기다렸다.
"신이시여, 당신이 말했던 지옥은 상상보다 더욱 끔찍하군요."
사내는 자리를 지킨채로 나지막히 중얼였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앞으로 향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 나타난 날붙이가 거센 바람을 일으키자 살을 베는 소리가 고요함을 적셨고, 곧 혼란이 찾아왔다.
날붙이가 바람을 일때마다 날카로운 소음이 귓가를 자극한다. 마치.. 바람을 가르는 날개처럼. 괴물들로 얽힌 모래바닥은 젖은 흙탕물이 되고, 괴물을 베는 날붙이는 총검이 되어 누군가의 살을 꿰뚫는다. 사내는 그런 환영과 마주한 직후 눈을 위로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은듯 쓰러진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살이 찢기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 베고 베이는 소리 , 넘어지고 부숴지는 소리 . 당신의 세상이 암전으로 어두워지고 , 더는 아무것도 못 보게 되고나서야 소란은 사라졌다 .
그리고 다음 당신이 눈을 떴을 때 , 거짓말처럼 괴인은 사라져 있었다 . 난투극이 , 살육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밤의 사막은 고요를 되찾고 , 당신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 하지만 괴인은 , 그 짐승들은 , 당신이 안심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 때문에 열렬했던 싸움의 흔적을 , 사냥과 살육의 자취를 거기에 남겨두고 갔다 . 어지럽게 파헤쳐진 사막이 , 그들이 쏟은 회색이 , 이 모든 것이 환상은 아니라고 , 허상은 아니라고 당신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
눈을 다시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을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였다. 빛바랜 모래 사이로 흩뿌린 광경이 암전 직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발이 굳어버릴 풍경 속에서도 사내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지금 마주한 현실에 적응해버렸다는듯 벗어던진 옷가지를 챙긴채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아직 밤은 끝나지 않은걸까. 고요를 되찾은 사막을 밟으며 사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괴인이 남긴 마지막 음성을 되뇌이며. 어쩌면 끝나지 않는 어둠을 영원히 헤멜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과 두려움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방향조차 정해지지 않은 행선지를 밟을 뿐.
그녀는 스스로 일어났지만 그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누가 자고 있는데 눈앞에 대고 플래시를 킨 느낌이었다. 그것도 한 100개 정도의 플래시를. 눈이 부시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더 오래 누워있을 수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주변의 환경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귀가 먹먹하다. 입 안에서 뭔가 거칠은 것이 씹힌다. 반사적으로 뱉어내도 영 시원찮다. 아직 덜 깨어진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모래밖에 없다.
당신은 제법 걷는 편이었다 . 못 걷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 제법 먼 거리를 , 달을 지침 삼아 나아갈 수 있었다 . 때문에 덕분에 당신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데 , 무슨 이유에선지 달의 고도가 저기서 더 떨어지지도 높아지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 달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또는 못 박힌 것처럼 저 자리를 세내기라도 한 듯 떠나지 않았다 .
>>5 과거가 없다는 것은 때로 저주이며, 어쩌면 축복이다. 그것은 사람을 이루는 뿌리라 없다하면 그 자는 백지. 어쩌면 흐린 글자국 정도는 남아 있을 지도 모르나 겨우 그 정도인 이상 사람을 만들어내진 못한다. 하여 저주.
허나 적혀있던 글이 시답잖은 불행 포르노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으니. 어쩌면 축복이다. 그렇기에 이 자에게는 축복이다.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는 아닌 통증에 삐걱이는 상체를 일으켜 세운 검은 머리의 소년은, 몽롱한 낯으로 메마른 광경을 보았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사막 가운데에서 소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과거는 남지 않았고,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고 상황을 파악하자 순식간에 몰려온 것은 아득함이다.
허나 그는 움직이기로 하였다. 그저 선 채로 말라 죽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하아.."
마른 숨을 내뱉는 자의 눈빛은 가라앉았고, 흐린 빛이 머물렀다. 비유하자면 깊은 심해에서 올려다 본, 수면.
그가 걷고 사박거리는 소리가 난다.
//>>112 시간이 날 때 마다 시트스레를 확인할 정도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잘 부탁해요!
높은 모래와 낮은 모래와 평탄한 모래가 보인다 . 세계를 한 꺼풀 얇게 포장한 빛만으로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해 , 당신이 주위를 살펴도 이렇다 할 특색은 찾기가 어려웠다 . 아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 모르는 것은 그것을 제외한 전부 . 당신이 혼란한 머리를 정리하면 금방 그렇게 답이 나올 것이다 .
걷거나 기다리거나 . 두 선택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 정답과 오답으로 나뉘는 문제도 아니다 . 하지만 늦고 빠르고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여전히 몽롱했다 .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알지만 , 무엇을 아는지조차 여전히 모르는 상태 . 밤의 사막은 당신이 모르는 세계였고 , 요령이 부족한 당신은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
>>116 저기도 모래, 여기도 모래, 거기도 모래... 온통 모래 밖에 없다. 정말 모래 뿐인건가? 아니지, 난 일단... 살아있는게 맞는거겠지?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급한 손동작으로 쓰다듬었다. 거울이랄 것도 없으니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순 없겠지만 차림새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깨달은 것은, 자신은 이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히야... 돌아삐겠다... 희한한 곳에 와부렀네..."
가장 심각한 것은 자기자신에 대한 정보도 없다는 것이었다. 진짜 미친 소리같겠지만 내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머 이런 일이 다 있노... 나이는 물론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가장 큰 증거인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일단... 걸어볼까. 여기에 계속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테니까." 그녀는 발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