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것인지, 그저 허상인지 구분이 어렵다. 몽롱한 정신 억지로 붙들 의지조차 없던 남성은 목구멍의 텁텁함과 입가의 건조함만 뇌 깊이 읆조리던 중이였다.
불쾌한 기분만 가득차되, 남성은 모래뿐인 사막에서 그 어떠한 절망감도 느끼지 못했다. 자아도 모르는 채 뚝 떨궈진 외계인마냥 모래에 무릎을 파 묻고 앉아있는게 고작인데도, 이 상황에 어떠한 긴박함에도 휩쓸리지 않는다. 이유 없는 자신감이 들끓는다;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리 없다고!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신기해서, 모래알이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느껴본다. 다른 오감도 활성화 해버리고 싶다고, 원숭이 같은 호기심으로 그는 모래 한 줌을 입으로 가져가 털어 넣는다.
뭘 기대하고 모래를 처먹은 건진 몰라도,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 안에서도 이리 불협조적으로 들러붙고 끼이는 모래알인데, 소화기관 몇 개 더 넘긴다고 나아지는 건 없을 테다. 다행이도 남자의 충동은 거기까지였는지, 정적을 깨는 기침 소리와 없는 타액 모아 입 안의 것을 뱉어내는 소음이 난다.
>>5 아주 깊은 꿈을 헤메고 있었다. 햇빛조차 닿지 않는 깊은 물 속에 잠긴듯이 모든 것이 아득하게 눈앞을 가리웠다. 온몸을 짓누르는 진동과 눈이 따갑도록 휘몰아치는 바람이 지나치고, 이름 모를 피아노의 선율이 때로는 거센 기계의 심장박동 소리가 짓눌러왔다.
허나 영원할 것만 같던 순간은 단 한번의 숨소리와 함께 산산히 부수어진다. 모래로 자욱한 황야속에서 깨어난 남자는 힘에 겨운 잔기침을 쏟아내며 몸을 일으킨다. 반쯤 치켜세운 눈동자 너머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만이 남아 고요한 모래속을 가리킨다. 움켜쥔 모래알들은 손가락 사이로 미련없이 흘러내려 사라진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암전 속을 헤메던 소리와 시선, 계절과 요일. 그리고 멍청하게 들릴법한 소리겠지만 자신조차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시간이 멈춰버린듯한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언제부턴가 밀려오기 시작한 갈증에 마른 침을 삼킬수밖에.
남자는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하듯 뺨을 쓸어내리거나 고개를 아래로 숙인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발걸음을 앞으로 한발 옮긴다. 한발 한발 나아가는 걸음은 탄력을 붙어 순식간에 높은 모래 언덕을 정복한다.
어느 틈에 예까지 왔는지 , 야수는 벌써 눈 앞에 있었다 . 흉측하지만 매력적으로 매혹적으로 보이는 붉은 눈 위로 당신을 비추고 있었다 . 입에 한 입마개 사이로 증기와 같은 숨을 뱉어내며 기관차와 같이 거대한 거체로 당신을 굽어보는 야수 . 야수는 당신의 저의를 읽기 힘든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 우악스런 앞발로 당신의 몸을 낚아채려 했다 .
>>47 남자의 푸른 눈동자 속으로 노란빛이 가득 비집고 들어선다. 어둠이 사막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한 것은 저때문이었나. 언제부터 쓰고 있었는지도 모를 파일럿 모자를 벗어 내리고 세상을 집어삼킬듯 거대한 월광을 바라본다. 새하얀 백지가 된 머릿속에 조금이나마 상식의 끈이 남겨진 탓일까. 이 광경이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도망칠 곳도 기억할 수 있는 것조차 없었다. 그러나 몸을 짓누르는 감각만큼은 너무나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허황된 꿈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만약 이곳이 현실이라면 나는 지옥에 오게 된 것이겠지. 라고 남자는 마음 속으로 읊조렸다.
한동안 언덕 위에 앉아있던 사내는 팔을 딛고 일어나 경사 아래쪽으로 몸을 쓸어내리듯 빠르게 내려간다. 우두커니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봐야 얻을 것은 없다는 둥,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유 모를 일념에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언덕 반대편으로 완전히 내려왔을때는 온몸이 모래투성이가 되어 몇분씩이나 털어내야 했다.
>>50 너덜거리는 옷을 가다듬기도 잠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으로부터 날카로운 폭음이 두 귀를 덮쳐온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바닥으로 웅크린다. 좁아진 동공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겨누어지고,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남자는 모래 먼지를 삼키고 따가워진 목을 콜록이며 손에 쥐어진 모자를 바라보았다. 모래 알갱이에 긁힌 고글 렌즈가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하늘을 뒤덮은 달빛과 끝없는 사막. 그리고 정체 모를 폭발까지. 모든 것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히려 이질감이 덩어리가 되어 그 속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버렸다. 본능이 이끄는대로 향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방금전보다 조금 더 느려진 걸음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좇는다. 그곳에 무엇이 있든 끝이 없는 막연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줄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안고서 말이다.
대처는 완벽했다 . 소리는 멀었다 . 여파는 감지되지 않았다 . 단발성이었나 , 잠시 더 기다려봐도 같은 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려고 해도 벽처럼 서 있는 언덕이 방해다 . 확인하고자 한다면 또 한 번 더 언덕을 올라야 할 것이다 . 힘든 일은 아니었다 . 당신의 다리에는 충분한 힘이 남아 있었으니까 . 하지만 막막한 일이었다 . 길을 막는 장해물이 있었으니까 .
남자의 걸음이 멈춘다. 기억에 자물쇠를 걸어잠근듯한 답답함도 세상의 끝에 다다른듯 모든 것이 이질적인 이 장소조차도 쳇바퀴를 구르듯 무의미한 방황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한낱 인간이라면 단 한번도 조우하지 못한 미지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남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는 조명빛에 얼어붙은 짐승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그또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마치 바스라진 석고상을 연상시키듯한 괴이한 물체는 마치 남자의 앞을 가로막듯 우뚝 멈춰서 있었다. 낡디낡은 마네킹에 허름한 물건을 덧댄듯한 물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등이 서늘해질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깊게 바라볼수록 마치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해오고 있는듯 했다.
남자는 이제 나오지도 않는 침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다시금 읊조렸다. 만약 이곳이 지옥이라면 비로소 때가 온 것이라고. 비록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죄를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었노라고. 그래서 조금은 편한 마음이 되어 얼어붙은 자세를 풀고 괴인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사람처럼 팔이 달렸고 다리가 달렸지만 ,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 머리를 보호하려고 쓴 건지 , 보여서는 안 될 것을 가리기 위해 쓴 건지 , 비밀에 감춰진 이목구비는 상상력을 부추겨 그를 더욱 더 공포스럽게 보이게 했다 . 사람이라면 , 살아 있다면 , 저리 허깨비처럼 , 아무런 맥락도 없이 , 처음부터 저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당신 앞에 나타날 리 만무하다 .
저것이 , 괴인이 , 당신에게 악의를 지녔다면 ,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 . 괴인의 팔이 움직였다 . 앙상하게 말라 뼈가 도드라지는 검지가 철가면으로 향했다 .
>>60 인간의 형상을 닮은 무언가의 앙상한 팔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남자는 어깨를 흠칫 오므린다. 아무런 말도 행동조차 없는 그것을 바라보며 긴장감으로 한껏 졸린 몸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 애를 쓴다. 돌아올 기약 없는 기억의 조각들은 미지 앞의 공포심 아래 더욱 깊숙히 숨어버릴것만 같았다.
"당신은 누굽니까, 여기는 어디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정교하게 짜여진듯한 이질감 속에서 남자는 입을 떼었다. 한걸음조차 떼지 못할 공포에 사로잡혔음에도 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이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허황된 풍경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찾으러 온겁니까?"
대답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급히 이어 묻는다. 가면 사이로 드리워진 그늘로부터 내리깔린 시선은 낡은 부츠와 마주한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들중 가장 눈에 익는 것이라 긴장을 늦추는데 도움이 되었다.
생명력이 빠져나가며 굵게 , 깊숙히 패인 목주름만 보면 저것이 과연 말을 할 수 있기나 한지 의문스럽다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니 , 바스라지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 팔을 아래로 내릴 뿐이다 . 무슨 연유로 당신 앞에 나타났는지 . 왜 당신 앞을 지키는지 .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더 늘어났을 뿐이라 , 사태는 악화됐다고 볼 수도 있었다 .
이렇게 서로 대치만 하고 있을 건가 . 이렇게 어색한 ,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
다행히 얼마 안 있어 괴인이 무엇에 반응했는지 , 왜 당신을 멈춰세웠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됐다 .
고운 모래 사이로 유사처럼 꿈틀이는 소리에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는다. 아무것도 없는 빈 벨트 사이가 왠지 허전하게 느껴진다. 빠르게 전환되는 긴장감 탓에 이제는 분위기에 완전히 휘말리게 되었는지 두려움조차 멀어지게 되었다. 그저 눈앞의 형체가 자신을 해하려 하지 않는 것에 단순히 안도를 느끼며 모래바닥 아래를 기는 모습에 시선을 집중한다.
"저건.."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본능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모래더미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석상 같은 형체를 향해 눈동자를 돌린다. 사내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가지 사실만큼은 알아챌 수 있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터질것만 같던 심장이 차갑게 진정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저 겁쟁이만은 아니었구나 라고.
"만약 당신이 날 거두러 온 자라면 적어도 내가 향할 길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것 아닙니까?"
사내는 고개를 위로 들어올려 상대에게 묻는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유령이든 어떤 존재이든지 이제 더이상 궁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이 기묘한 장소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갈라진 목소리를 마치면서 비현실적인 상황속에 젖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조금은 씁쓸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가로젓는다.
형태를 표현할 수 없는 울림이 혼란에 살을 붙일 무렵 또다른 굉음이 긴장을 놓치고 있던 고막을 짓눌러온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두 귀를 가로막은채로 눈을 질끈 감는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진동이 더욱 거세어 진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심연에 잠긴듯한 가면 속 그늘을 겨누어보았다.
"시원한 물이나 한 잔 마실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당장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두려움으로 가득찬 공간 속에서 사내는 허탈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린다. 공포감으로 젖어버린 이성조차도 매서운 갈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말을 마친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래 안에 숨은 존재들이 굉음에 자극을 받아 깨어난 것은 아닌지. 모자를 눌러쓰며 좀더 날카로워진 시선을 흘렸다.
머리가 혼자서 허공에 떠 있지는 않을 테니 어디서 연결되고 받쳐주는 목과 몸이 분명 존재할 테지만 , 당신은 보다 실존적인 증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 그래서 당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염려하고 확인하면 , 분명 모든 것이 제자리에 존재했다 . 하지만 완벽하다 말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했는데 , 머리에 빗장이라도 걸쳐놓은 듯 원하는 바가 떠오르지 않고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
이름이 무엇인지 . 여기가 어디인지 . 왜 여기에 있는지 .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사람이 갑자기 아무도 없던 자리에 자연 발생하지는 않을 터인데 , 현재의 당신을 완성하는 내력이 , 역사가 뭉텅이로 찢겨나간 듯 생각나지 않았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 아무래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
형태가 없는 음성은 불친절하게 머릿속을 맴돈다. 남자는 귀를 틀어막아보지만 괴인의 음성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온갖 살과 뼈에 스미었다. 다가온 구절을 이해할 틈도 없이 솟구치는 모래먼지에 사내는 고글과 옷깃으로 눈을 가린다.
찌푸린 미간을 마저 펴기도 전에 흐릿한 시선 사이로 붉은빛이 가까워진다. 한쌍, 두쌍.. 먼지가 희미해질수록 점차 수는 많아졌고 형태는 또렷해진다. 그들의 앙상한 갈비뼈를 볼 수 있다면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와 마주하게 된다. 달빛을 삼킨듯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듯 했다.
어느덧 괴인을 등진 형세가 되었고, 사내는 체념한듯 모자와 코트를 벗어던진다. 그러고는 주먹을 들어올려 눈앞으로 겨눈다. 모든 것이 뿌연 기억 속에서 한줄기 이성만이 그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둠과 괴물들, 그리고 지평선과 맞닿은듯 거대한 달빛아래 사내는 다가올 최후를 기다렸다.
"신이시여, 당신이 말했던 지옥은 상상보다 더욱 끔찍하군요."
사내는 자리를 지킨채로 나지막히 중얼였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앞으로 향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 나타난 날붙이가 거센 바람을 일으키자 살을 베는 소리가 고요함을 적셨고, 곧 혼란이 찾아왔다.
날붙이가 바람을 일때마다 날카로운 소음이 귓가를 자극한다. 마치.. 바람을 가르는 날개처럼. 괴물들로 얽힌 모래바닥은 젖은 흙탕물이 되고, 괴물을 베는 날붙이는 총검이 되어 누군가의 살을 꿰뚫는다. 사내는 그런 환영과 마주한 직후 눈을 위로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은듯 쓰러진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살이 찢기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 베고 베이는 소리 , 넘어지고 부숴지는 소리 . 당신의 세상이 암전으로 어두워지고 , 더는 아무것도 못 보게 되고나서야 소란은 사라졌다 .
그리고 다음 당신이 눈을 떴을 때 , 거짓말처럼 괴인은 사라져 있었다 . 난투극이 , 살육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밤의 사막은 고요를 되찾고 , 당신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 하지만 괴인은 , 그 짐승들은 , 당신이 안심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 때문에 열렬했던 싸움의 흔적을 , 사냥과 살육의 자취를 거기에 남겨두고 갔다 . 어지럽게 파헤쳐진 사막이 , 그들이 쏟은 회색이 , 이 모든 것이 환상은 아니라고 , 허상은 아니라고 당신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
눈을 다시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을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였다. 빛바랜 모래 사이로 흩뿌린 광경이 암전 직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발이 굳어버릴 풍경 속에서도 사내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지금 마주한 현실에 적응해버렸다는듯 벗어던진 옷가지를 챙긴채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아직 밤은 끝나지 않은걸까. 고요를 되찾은 사막을 밟으며 사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괴인이 남긴 마지막 음성을 되뇌이며. 어쩌면 끝나지 않는 어둠을 영원히 헤멜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과 두려움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방향조차 정해지지 않은 행선지를 밟을 뿐.
그녀는 스스로 일어났지만 그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누가 자고 있는데 눈앞에 대고 플래시를 킨 느낌이었다. 그것도 한 100개 정도의 플래시를. 눈이 부시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더 오래 누워있을 수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주변의 환경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귀가 먹먹하다. 입 안에서 뭔가 거칠은 것이 씹힌다. 반사적으로 뱉어내도 영 시원찮다. 아직 덜 깨어진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모래밖에 없다.
당신은 제법 걷는 편이었다 . 못 걷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 제법 먼 거리를 , 달을 지침 삼아 나아갈 수 있었다 . 때문에 덕분에 당신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데 , 무슨 이유에선지 달의 고도가 저기서 더 떨어지지도 높아지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 달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또는 못 박힌 것처럼 저 자리를 세내기라도 한 듯 떠나지 않았다 .
>>5 과거가 없다는 것은 때로 저주이며, 어쩌면 축복이다. 그것은 사람을 이루는 뿌리라 없다하면 그 자는 백지. 어쩌면 흐린 글자국 정도는 남아 있을 지도 모르나 겨우 그 정도인 이상 사람을 만들어내진 못한다. 하여 저주.
허나 적혀있던 글이 시답잖은 불행 포르노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으니. 어쩌면 축복이다. 그렇기에 이 자에게는 축복이다.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는 아닌 통증에 삐걱이는 상체를 일으켜 세운 검은 머리의 소년은, 몽롱한 낯으로 메마른 광경을 보았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사막 가운데에서 소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과거는 남지 않았고,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고 상황을 파악하자 순식간에 몰려온 것은 아득함이다.
허나 그는 움직이기로 하였다. 그저 선 채로 말라 죽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하아.."
마른 숨을 내뱉는 자의 눈빛은 가라앉았고, 흐린 빛이 머물렀다. 비유하자면 깊은 심해에서 올려다 본, 수면.
그가 걷고 사박거리는 소리가 난다.
//>>112 시간이 날 때 마다 시트스레를 확인할 정도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잘 부탁해요!
높은 모래와 낮은 모래와 평탄한 모래가 보인다 . 세계를 한 꺼풀 얇게 포장한 빛만으로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해 , 당신이 주위를 살펴도 이렇다 할 특색은 찾기가 어려웠다 . 아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 모르는 것은 그것을 제외한 전부 . 당신이 혼란한 머리를 정리하면 금방 그렇게 답이 나올 것이다 .
걷거나 기다리거나 . 두 선택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 정답과 오답으로 나뉘는 문제도 아니다 . 하지만 늦고 빠르고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여전히 몽롱했다 .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알지만 , 무엇을 아는지조차 여전히 모르는 상태 . 밤의 사막은 당신이 모르는 세계였고 , 요령이 부족한 당신은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
>>116 저기도 모래, 여기도 모래, 거기도 모래... 온통 모래 밖에 없다. 정말 모래 뿐인건가? 아니지, 난 일단... 살아있는게 맞는거겠지?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급한 손동작으로 쓰다듬었다. 거울이랄 것도 없으니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순 없겠지만 차림새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깨달은 것은, 자신은 이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히야... 돌아삐겠다... 희한한 곳에 와부렀네..."
가장 심각한 것은 자기자신에 대한 정보도 없다는 것이었다. 진짜 미친 소리같겠지만 내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머 이런 일이 다 있노... 나이는 물론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가장 큰 증거인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일단... 걸어볼까. 여기에 계속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테니까." 그녀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각, 사각, 부츠 밑창이 뻣뻣한 소리를 내며 모래를 짓누른다. 한줄기 땀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흘렀고 창백한 뺨에는 모래먼지가 달라붙어 부랑자의 낯이 되었다. 사막에서 눈을 뜬지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척박한 환경이 사내를 짓눌러온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똑같은 풍경과 메마른 공기만이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는다.
마른 침을 삼키고 숨을 돌릴때 무심코 닿은 시선에 사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붙인다. 달빛에 반사된 투명한 수면에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급한 발걸음에 한번쯤 발을 헛디디기도 하며. 사내가 지나친 자리로 작은 먼지바람이 인다.
사내는 오아시스 앞에 멈춰서 허리를 숙인다. 작은 파동조차 없는 물길에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친다. 그는 모자를 벗어내리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자신의 눈과 코, 그리고 입술을 더듬는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듯이 뺨을 지나는 손길이 다급하다.
당장 눈앞의 물 웅덩이가 타들어가는 갈증을 더욱 자극한다. 사내는 장갑을 벗어던지고 양손으로 물을 한웅큼 떠올린다. 모래로 젖은 뺨을 닦아내고, 숨을 돌린다. 마른 목을 축이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쉽게 목을 축이지 못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주변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123 모래바닥에 얼굴을 쳐박은 자는 한동안 미동이 없었다. 움직임을 유영에 비유해서 그런가. 미동도 없이 쓰러진 게 바다 밖으로 나와서 숨을 멎은 생선토막 같았다. 물론 그는 당장에 죽은 것이 아니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모래침대에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아도 될 듯 하나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잠이 오지 않았고, 아직 오래 걷지도 않았다.
비틀비틀 바닥을 짚고 일어선 소년은 다시금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쳐박힌 게 도움이 되었는지 아까보다는 '걸음'에 가까웠다.
당신의 약함을 야수는 비웃는 듯 했다 . 숨으려는 두려움을 비난하듯 야수가 눈을 부라렸다 . 대신 싸울 생각은 없다고 , 야수는 말하는 듯 했다 . 소리를 빌리지 않아 추상적일 수 밖에 없는 분노가 당신의 머리에 울리었다 .
야수는 세 갈래로 갈라지는 괴물의 머리를 보더니 , 놈이 모래를 차고 뛰어오르는 모습에 몸을 움츠리고 , 팔을 무는 흉측한 흡반에 비명을 질렀다 . 도마뱀처럼 생겨서 무슨 끔찍한 짓인지 , 야수는 이를 갈며 놈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팔에 박힌 이빨이 , 팔을 꽁꽁 묶는 혀가 방해가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
그녀는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질릴때까지 걸었다. 사막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모래와 더 많은 모래와 더더 많은 모래들이 함께 했다. 사람의 존재는 기대 할 수 없었다. 결국 질릴대로 질린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다. 물론 상식을 기억한다면야. 그녀, 한나는 갑자기 모래만 가득한 곳에서 눈을 떴으며, 자기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질리도록 걸었음에도 사람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망망대해(바다가 모래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지만) 한복판에 떨어진 꼴이었다.
"내도 모르겠다... 여기는 어데고? 진짜 죽겠디..."
조금 쉬었다가 다시 고개를 든 한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주변에 모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보름달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달을 감상하던 한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당신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 너무 급했다 .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다니 , 현명한 행동은 아님에 분명했으니 . 일부러 이렇게 괴인까지 나타나서 당신에게 핀잔을 주는 것이리라 . 당신이 재차 수면에 입을 가져다대면 괴인은 수면에 비치는 당신의 모습을 훔쳐 , 자신의 철가면을 대신 비추는 것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실패로부터 배우는 거지 . 걸음도 인생도 . 너무 큰 실패만 아니라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 당신은 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으로 , 천천히 사막을 나아갔다 . 나아가면서 낯선 세계의 풍경을 눈에 새겼다 . 부담스럽게 거대한 보름달이나 , 멀리 사구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인영의 존재나 , 그런 것들을 말이다 .
물을 앞둔 흥분감은 창백한 쇳빛에 차갑게 식어버린다. 사라진줄만 알았던 그것이 또 다시 나타나자 사내는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얼굴을 씻어내린 덕분인지 아니면 불쑥 나타난 오싹한 기운 때문인지. 적어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뭡니까.. 또 이상한 훈계를 할 생각이라면 놔둬요. 좀 쉬고싶군요."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에서 처음 느낀 것은 공포였지만 이젠 지쳤다. 모래를 적신 회색빛과 으스스한 철가면을 바라보고 나서도 더이상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할만큼 피로가 몰려왔다.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는 덤이었고.
달에 정신이 팔려서 그랬나. 누군가 다가왔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어디서 누군가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좀... 기가 차다는 듯한,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그리고 다시 보니 진짜로 누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감상이었다. 어? 니는 눈교...?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어 거의 기어가다시피 땅을 박차고 일어서려고 했다. 저건 누굴까. 1차적인 의문은 그것이고, 너는 나에게 무슨 생각을 갖고 있지? 이것이 2차적인 의문이었다.
어렴풋한 생기가 떠도는 두 눈이 먼 곳을 보았다. 너무나 가까워서, 살짝 걸어 다다를 수 있을 듯한 보름달 덕인가. 먼 사구 위에서 어떤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보듯 서있었고 아마도 사람일 것이다. 저 자가 자신에게 호의적일 것이란 근거는 없었으나 어디나 똑같은 세계에서 목적지로 삼을만한 것이긴 하였다.
하여, 그는 방향을 잡았다. 몽롱한 방랑보다는 확고한 여행이 조금 더 안정적인 법이다. 비록 품이 남아 팔락거리는 옷자락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해파리의 흔들림 처럼 보이더라도.
당신이 충분히 물러서자 괴인이 수면을 가르고 일어났다 . 저렇게 거대한 몸이 어떻게 저 얕은 물 속에 들어가 있었는지 의문스럽지만 우선 가능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 철가면에서 쫓겨나와 쏟아지는 급류에 당신의 옷이 젖기도 했지만 , 이에 대해 항의를 할 용기는 없으리라 믿는다 . 괴인은 가면을 가득 채우던 물기를 모두 쏟아낸 다음에야 자신의 소리를 내었다 .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잔잔했던 수면이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오른다. 가려진 형체가 온전히 드러났고, 피할 재간 없이 물벼락을 맞은 사내는 온몸이 흠뻑 젖어 조금 허탈해진 표정으로 물이 들어간 코를 풀어낸다. 정신을 번쩍 깨우는 감각에 괴인의 울음에 반응할 틈조차 없었다.
"고맙군요. 안그래도 땀에 범벅이 된 참이었는데."
물을 먹은 코트는 쇠를 얹은듯 무거워졌고, 사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괴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찰흙을 얼기설기 붙여놓은듯 기괴함으로부터 풍기는 싸늘함은 처음 봤을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그는 당장 떠오르는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저곳에 함께 누워있었겠죠.."
이윽고 남자는 경의를 표하듯 팔과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비록 공포와 의문을 풍겼지만 조력을 주었으니. 지금으로썬 남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을 건넨 것이다.
달리면서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그녀는 이쯤 달렸으니 단념 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까무라쳐 쓰러질 뻔했다. 맞다, 저 녀석은 날 수 있는데 뭔 소리가 나겠는가. 다시 경악하며 달리기 시작한 한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며 운수 한 번 사납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건 순화된 거고, 실제로는 더한 말들을 속으로 뇌까리며 미친듯이 달렸다.
"잘못했습니더!!! 지가 뭔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진짜 잘못했심더!!! 한번만 봐주이소!!! 흐끼야아악!!!!"
사내는 흙탕물이 되어버린 웅덩이로부터 시선을 돌린채 괴인에게 말한다. 먹을것도 마실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과 그를 응시하듯 거대한 달빛. 그 아래엔 수도 모를 괴물들이 도사렸지만. 사내는 냉정하게 상황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끝을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안개로 자욱한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길 바랐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아주 커다란 죄를 지은 모양입니다. 나는 아마 몸이 바스라지도록 이 연옥 속을 헤메게 되겠죠. 당신의 말처럼."
자신을 덮쳐온 붉은 눈동자들을 상기시키며 말을 이어간다. 이성조차 남지 않은 괴물들과 인간이라 부르기엔 몹시 뒤틀린 이 자 또한 어쩌면 자신과 다르지 않은 시간을 거치지 않았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난다.
한나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이건 내 착각인가? 왠지 땅이 좀 울렁이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할 정신은 있던 모양이다. 끝없는 사막, 유난히 큰 보름달, 날 쫒아오는 이상한 녀석, 꿈틀거리는 지면. 심상찮게 돌아가는 상황에 한나의 불안과 공포는 더 커져갔다. 뒤를 돌아보니 추격자가 더 많아졌다. 저것들은 언제 따라붙은거야?! 결국 자리에 풀썩 쓰러진 한나는 이것이 꿈이길 바라며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닥에 넘어지자 까슬까슬한 촉감이 얼굴에 닿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래의 촉감이었다. 여기는 순 모래밖에 없으니까. 상황을 살펴보니 저 가면 쓴 무언가도 자신때문에 말 못할 고생을 한 듯 했다. 죄송합니더... 지가 다 잘못했심더 다 지 잘못이고 죄고 하여튼 지가 천하의 똘갱이라 그랬심더. 봐주이소... 그러다 창을 뽑은 가면인을 보고는 -이제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던 것인지 가만히- 양 손을 들어보이고 말했다.
당신의 숨 넘어가는 소리가 가면인의 마음에 닿은 걸까 . 가면인은 당신을 베는 대신에 땅을 베어 당신의 배후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괴기를 저지해냈다 . 치명상이 못 되는 상처의 깊이에 괴기가 발버둥치자 , 가면인은 당신을 발로 차 멀리 밀어냈다 . 낭패라는 듯이 아주 급박한 움직임이었다 .
- BeEEE,EEeEE
당신을 대신해 괴기의 턱에 씹혀 모래 밑으로 빠져드는 가면인 . 이 모든 일들이 한 순간에 일어난 것임을 감안하면 ,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럴 수가 없다 .
우와악!!! 순간 자신을 베려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팔로 감싸던 한나는 그것이 자신이 아닌 땅을 향한 공격임을 알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못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순간 몸이 굳어버렸으니까. 그러나 무어라 말도 하기 전에 발로 차여 밀려나자 그녀는 억소리 밖에 내지 못하고 그대로 밀려났다.
'뭐지? 설마 나를 구하려고...?'
이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자 가면을 쓴 무언가는 또 다른 무언가에 씹혀져 모래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나는 소리쳤다.
잘그락 잘그락, 쇠가 맞물리는 거친 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들어올려 길다란 형체를 쳐다본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늘 아래 응어리진 어둠과 만난 모래는 순식간에 시퍼런 날붙이가 되었다. 사내는 그 광경에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표정만은 달리하지 않는다.
"나약하게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낫습니다."
남자의 앞에는 꿈을 누비듯 아득한 것들이 도사렸고, 미지와의 조우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그의 앞에 한 괴인이 나타났고 그것은 말했다.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스스로를 떠올리는 것뿐. 그렇기에 사내는 자신이 마음이 기우는 곳으로 향하길 원했다. 다시 나타난 괴인을 마주하며 어쩌면 그가 이곳을 빠져나갈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고, 곱씹으면서.
오 , 도망치는 게 현명하지 , 백 번 천 번 현명하다 , 하지만 , 하지만 말이다 , 당신 대신 모래 목욕을 하게 된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 아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뒤에서 펑 ~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 분수가 치솟았다 . 아니 , 분수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겸양 떠는 거겠지 . 어디 다이너 마이트나 수류탄이라도 터뜨린 듯한 위용이었다 . 하늘로 솟구친 모래는 비가 되어 쏟아졌고 이는 당신의 머리 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 당신이 뒤를 돌아본다면 ,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면 , 엉망진창 땋은 머리가 풀리고 산발이 되어 , 가면도 삐뚤어진 채 숨을 몰아쉬는 예의 가면인이 보일 것이다 .
그녀가 등을 돌린지 얼마나 되었다고, 뒤에서 폭발 소리와 함께 모래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폭탄이 터진 듯했다. 그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듯한 모양새의 가면 쓴 무언가가 있었다. 한나는 모래비를 맞으며 니, 니 살아있었나?! 라고 소리쳤다.
"미안하다! 내는 니가 증말로 죽은 줄로만 알았대이...!"
뒤늦게서야 하는 사과이지만 한나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눈치였다. 이것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진 미지수지만 그와 한나가 협력 관계라면 이만큼 박살난 첫인상은 없을 것이다. 빠지는 게 정답이었나? 라고 3초 정도 생각도 해봤다.
간질거린다 . 머리가 간질거린다 . 두꺼운 뼈 밑에 , 물렁거리는 뇌보다도 깊은 곳에 , 간지러움이 존재하고 있다 . 공기 중에 팽배한 살의가 당신의 피부 위로 겹쳐지며 목이 바짝 마르고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다 . 일 초 뒤 , 이 초 뒤의 광경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며 검지가 익숙한 모양을 한다 .
환상통이 격렬하다 . 외부로 확장된 당신의 신경이 , 당신을 이루는 구성 요소가 사라졌다고 , 비명을 지르고 있다 .
당신의 총 ! 당신의 무기 ! 당신의 생명선 ! 당신을 안심케하는 총열의 무게가 사라졌다 !
당신이 잃어버린 파트너를 찾아 눈을 뜨면 , 둥글게 몸을 말은 , 이형의 양철이 보일 것이다 .
할 말이 무척 , 아주 많아보였다 .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가면인이 가장 잘 알았기 때문에 , 하고 싶은 말을 참고 , 숨을 삼켰다 . 가면인은 우선 당신이 서는 고도까지 내려와 ,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 추적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 가면인이 용케 힘겹게 하나를 쓰러뜨렸지만 , 여전히 몇이나 되는 추적자가 모래 밑에 모습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 그것들을 모두 뿌리치거나 , 쓰러뜨리지 않으면 , 당신도 가면인도 안심할 수 없었다 .
근데 모습이 보여야 쓰러뜨리지 . 이대로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 가면인이 초조하게 창을 떨었다 .
두 사람 사이에 선이 이어진다 .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 느껴진다 . 당신은 듀 락으로부터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일부를 돌려받았다 . 그것은 최후의 기억 , 당신의 숨이 끊어지면서 망막에 새겨진 최후의 풍경이었다 .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매의 기억이 당신의 심원에 떨어졌다 .
듀 락이 당신의 안에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 당신은 다소나마 자신 안의 구멍이 메워진 기분이 들었다 .
이제 우야믄 좋노...? 가장 큰 고민은 이것이었다. 내가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싸우는데 거치적거리지 않게 멀리 떨어지는 수 밖에 없나? 하필 말도 안 통하는 상대라 더 답답했다. 일단 상황을 살펴보자면... 나를 집어 삼키려는 무언가가 있고, 이게 그 모래 밑에 있으며, 삼켜지면 그 이후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음... 진짜 우야믄 좋지...?"
가면 쓴 존재가 초조한 듯 창을 떨자 그녀 역시 긴장된 듯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200 먼저 쏴야 한다. 총구 앞에서 어물거리는 건 일단 갈기고 보는 게 옳다. 저게 뭐지? 하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저것 재어서도 안된다. 가까운 거리에서 적과 마주칠 때 교전은 고작 5초에서 10초 안에 마무리된다. 짧은 시간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는 더 짧은 시간 안의 선제공격!
이제 눈 앞에 저것이 적인지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저걸 보았다는 사실이고, 저걸 공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뭐가 되었던 일단 공격하고 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앗하는 사이에 ,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다 . 휘두르고자 이미 마음 먹은 당신이 망설임 따위 보일 리 만무하니 , 팔은 즉각 아래로 머리를 노린다 . 웅크린 채 아무것도 모르고 별안간 머리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은 양철 인형은 , 찌그러진 머리에도 당황 않고 태연하게 당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
머리는 텅 비어 있었다 . 찌그러지면서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양철 인형의 속은 아무것도 아닌 공동이었다 .
소리를 넣으면 벽에 부딪히면서 메아리가 되겠지 . 당신이 오판을 저질렀다는 것을 눈치채면 , 양철 인형은 당신을 쥔 손을 휘둘러 암벽에 당신을 던져버렸다 .
>>203 초롱아귀와 비슷하다. 저것은 그림자로 이끌고 삼키는 생물인 것이다. 집게발, 가시침, 저것은 전갈인가? 발밑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는, 기억은 없으나 저런 생물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가라앉은 듯 아득한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잠시, 눈을 크게 떴을 뿐.
그리고 거리를 벌리려 몸을 던질 뿐. 날치는 수면 위를 난다. 사람은 그러지 못하나 흉내는 낼 수 있다.
괴물의 전모를 다 확인하는 것보다 먼저 당신이 뒤로 몸을 던졌다 . 결과적으로 좋은 판단이었던 것이 , 그대로 가만 있었다면 저 거대한 가시침에 꼬치처럼 몸이 꿰였을 것이다 . 불행 중 다행인 일만 생각하자 , 괴물이 가시 침을 회수해 당신을 뒤쫓기 시작하지만 , 덩치가 덩치라 속도가 붙으려면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
>>210 크다는 건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그 증거는 먹이를 놓친 괴물이다. 그는 곧장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모습이 퍽 익숙하였다. 망설임도 없었으니, 과거에도 분명 호전적이진 않았으리라. 사박거리는 모래를 짓밟으며 뛰어간다. 땀이 흐르고, 숨이 차는 게 금방이지만 멈추지 않는다. 죽음은 멀수록 좋다.
당신은 쉬지 않고 뛰었다 . 조금이라도 더 저 괴물에게서 멀어질 수 있도록 . 하지만 괴물의 집념도 만만치 않아 당신을 놓칠 세라 거칠게 사막을 부수며 달려드니 당신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차가 겨우 서너 걸음 밖에 되지 않을 때 , 괴물은 사냥의 성공을 확신하고 당신에게로 꼬리를 쏘았다 .
그런데 이상하지 , 괴물이 예상한 그림과 다르게 꼬리를 잘리고 회색 액체를 쏟는 것은 괴물이었다 .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니 그렇잖아. 적과 싸운다는 건 모퉁이를 사이에 두고 총격을 주거니 받거니. 아니면 핀 뽑힌 수류탄으로 폭탄돌리기하는거 아니었나? 아무리 직관과 본능을 모토로 삼아 싸운다 해도 말이지? 스스로 움직이는 양철 인형이 자기 머리를 똑 떼어내서 집어던지는 뭐 어떻게 하라는....아.
오른쪽 눈에서 불이 튀었다.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졌고 몇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아까 날아가서 암벽에 부딪혔을 때처럼. 또는 아무리 달려도 다리가 지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줄줄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에서만. 젖혀진 고개를 바로 하고 머리가 떨어진 깡통을 쳐다보았다.
아프거나 다치지 않았고 겁먹어서 나오는 눈물도 아닐텐데. 그냥 불수의적으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격앙된 표정 없이 혼자서 흐르는 눈물. 그리고 이상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안 다치고 안 아프면 문제없잖아. 도망쳐서 뭐 해? 싸우자! 갈 길을 가더라도 저놈은 꼭 두들겨 패야 후련한 걸음 뒤통수가 따갑지 않을 것이다.
"안 아프다고! 망할 깡통!!"
그래서 발치를 굴러다니는 깡통 대가리를 다시 들어서 전력투구로 되돌려주었다. 다음에는 가지고 있던 돌멩이도 원 플러스 원으로. 상황이 덤앤더머 슬랩스틱처럼 흘러가는 느낌이지만....신경쓰지 말자...
소년은 방금 아주 솔직히 죽는가 싶었다. 자신을 덮쳐오는 거체가 느리게 보였다. 분노가 스민 괴물의 집게발이 날을 세웠다. 과거가 없는 자는 주마등조차 찾아오지 않고 달갑지 않는 종막과 함께 떠나, 가지는 않았다. 달 하나 탐욕스레 빛나는 하늘에, 그래도 별이 떠있었으니.
촤악, 하고 회색이 쏟아진다. 달빛 아래 사막에 회색이 스며들고 괴물을 쪼갠 그것 역시 적신다. 아마 투명했을 신체는 회색에 젖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산과 같이 둥근 몸에 촉수가 돋아나있고, 개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방금 괴물의 머리를 쪼갰을 네 개의 긴 촉수. 느긋하게 둥실거리는 것.
저것을 안다.
하늘을 바다인 것처럼 유영하는, 흐느적거리는 별.
"스타덤."
모래로 가득한 불명의 장소에서. 심연에서 곧 올라온 듯한 자가 심해에서 곧 올라온 듯한 것을 본다.
명을 아주 잘라버리기에는 위력이 다소 부족했다 . 얼굴의 반이 무너졌어도 괴수는 살아남았다 . 화만 돋군 셈이다 . 괴수는 예기치 못한 피해에 남은 육신을 비틀며 괴로워했지만 , 분노를 잊지 않았다 . 이를 드러내며 상처로 어둠을 쏟아냈다 . 울부 짖는 소리가 귀신의 원망처럼 점도 높게 귀에 들러붙는데 계속 듣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이다 .
── ─ 양철 인형은 태연했지만 .
양철 인형은 괴수가 아무리 아프다 노래를 불러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 찢어진 손을 재건하기도 바빠 괴수가 뭐라 떠들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신체를 이루는 양철이 유동하며 절단면으로 모여드니 , 다시 손의 모양을 갖추는 것은 금방이었다 .
다시 한 번 ─ ── 손을 쏘아낼 준비를 마친 것이다 .
머리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데 , 양철 인형이 당신을 바라보는 듯 하다 .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생물인 건지 .
>>250 괴물의 끔찍한 비명이 밤하늘을 갈랐다. 고막 말고 정신을 찢어버리는 소리에 다리가 휘청였다.
귀가 없는 양철 인형은 없는 눈조차 깜짝하지 않고 차탄을 준비했다. 이제서야 확신이 든다. 정확힌 몰라도 양철 인형이 무기이고, 자기는 애먼 무기와 멍청한 주먹다짐을 벌였다는 걸.. 허둥지둥 달려가 떨어진 머리를 주워들었다. 머리가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느낌이 든다.
"다시 조준해요."
어깨 위에 머리통을 올려주었다. 아까 곽휴지 뽑는 것처럼 쉽게 머리를 떼냈으니 붙는것도 잘 알아서 붙을 거다. 머리도 달아줬으니 이번에는 끝장을 내버려라. 머리를 올려주고 양팔로 인형의 등을 받쳤다. 함께 반동을 받아내기 위하여
넝마처럼 엉망진창 망가졌지만 개의치 않는다 . 통각이 존재하지 않는 마냥 양철 인형은 태연했다 . 팔이 하나 ─ 머리가 송두리째 사라졌지만 , 양철 인형은 이것조차도 필요한 소비로 생각했다 . 자기가 과했다는 생각은 일절 못하는 눈치였다 . 양철 인형에게는 일격이 완성에 다다르지 못한 것만이 후회였다 . 이것만은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일이었다 .
당신의 말에 양철 인형은 머리가 없어도 , 귀가 없어도 , 입이 없어도 ─ 당신의 말을 이해했다 . 당신의 말에 응답했다 .
당신이 바란다면 , 당신이 원한다면 , 총이 되고 망치가 될 것이다 . 적을 막는 방책이 될 것이다 .
바벨 , 당신의 그림자로부터 태어난 탑 , 당신은 저 양철 인형의 이름을 벌써 알고 있었다 .
>>272 바벨에게 남은 한쪽 손목을 잡고 둘이서 사막을 정처없이 걸었다. 이렇게 꼭 잡아놓지 않으면 제멋대로 포를 쏘아댈 직감이 들었다.
지형을 바꿔놓는 위력의 공격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 위력만큼 제 살을 깎아먹어야 했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나누어 총처럼 쏘는 말 그대로 촌철살인의 방법도 있을텐데. 바벨은 적당히를 모른다.
"여기에 공방이 있을리가 없잖아. 이걸 어디서 고친대요."
공방이고 나발이고 다른 사람이나 문명의 흔적도 없다. 이 모지리같은 깡통이라도 자신의 무기다. 자기 자신도 머리가 좋은 편이라곤 못하지만, 무기에 대한 순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총은 연인처럼. 한번 연인은 영원한 연인. 그래, 운명이 점지한 짝. 그러니 차마 바벨을 일회성 무기로 소모하거나 내팽개칠 마음이 들 리가 없다.
"원랜 접적하면 바로 쏘는게 원칙이 맞아요. 그런데 넌 안돼. 적이 보이면 나한테 먼저 말해요. 알았어요? 바보같이 제 살 깎아먹기식으로 굴지 말라구요."
그렇게 잔소리를 하며 바벨과 걷고 또 걷는다. 이 세계에선 싸우거나 걷는 거 빼곤 할 게 없다.
단지 소리일 뿐인데 , 살을 얼얼하게 만든다 . 귀를 찢어질 듯 아프게 만든다 . 내리친 천둥에 뒤집을 때를 놓치고 까맣게 타버린 네 마리의 괴수 . 놈들은 한 데 엮여 섞여 있던 것이 패착이 되어 , 피할 수도 없이 한꺼번에 바싹 태워졌다 .
당신의 죽음에 가장 가까이 도달해 있던 한 마리도 , 엄청난 위력의 천둥에 살이 찢어져 , 극적인 순간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머리가 담장을 넘어가는 본루타를 만들고 말았다 . 당신은 정말이지 ,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아남았다 . 만약 조금만 더 늦었다면 당신은 저 괴수나 , 가면인이 부른 천둥에 제 명을 다 하지 못했을 것이다 .
이런 무인지대 ─ 사막의 한 복판에 어떻게 포장 도로가 존재할 수 있는지 ,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 붙이기를 보류하고 , 무작정 도로 위에 오르는 당신과 바벨 . 사람이 만들고 관리하는 길이라기에는 , 여기저기 패이고 망가져 진작에 수명을 다한 듯 보이지만 , 우선 당신 한 사람과 바벨이 걷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
>>267 사막이란 게, 바퀴가 구르기 썩 좋은 환경은 아닐 것 같은데. 글자도 숫자도 없이 붉은 녹으로만 치장된 문명의 흔적, 그 비슷한 것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여태껏 본 생명이란 이해빈 본인과 회색을 품고 있던 괴물 둘 뿐이던(스타덤은 분류가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굳이, 둘로 나누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그런.) 그는 참, 위화감이 들었다.
>>301 모습을 숨기고 다니는 것은 일견 철저해보이지만, 막상 행동을 보면 그는 참 생긴 것에 충실하다. 흐늘흐늘 허공에서 하늘거리는 것은 보기에 썩 예쁘고, 여유롭다. 비행이라기보다는 바람이 옮겨다준다는 인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지 않다. 어쩐지 조금 부럽기까지하니, 그저 그 모습대로 자유를 누렸으면 싶은 마음도 든다.
조금 부족한 것은 이해빈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신경쓰면 된다. 잘못된 해류를 타고 흘러가버리기 전에 자신이 이끌어주면, 별의 이름을 지닌 그는 아마도 자신을 따라와줄 것이다. 어쩌면 일생의 첫 친구. 망각 저편에서 부터 시작된 삶에 있어 처음으로 이해빈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 그. 그러니, 이해빈은 아낄 수 밖에 없다.
제아무리 바벨이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모처럼 지켜주겠다고 나섰더니 , 허둥지둥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체의 앞으로 다가가 뚫어놓은 바람 구멍에 열심히 두 손으로 모래성을 쌓다니 . 패닉에 빠져 똑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당신이 사선에 겹쳐 , 바벨은 저기서 더 공격을 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게 됐다 .
그런데 밑빠진 독에 물 붓기지 .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모래를 퍼담아봤자 살이 차오르면서 모래는 흩어진다 .
모래니까 , 어쩔 수 있나 .
황당한 시간이 지나고 , 결국 당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 괴물체는 회복을 마쳤다 .
형태만은 전처럼 가득 차게 됐다 . 그러나 그게 다였다 .
오래 지나지 않아 색은 옅어지고 형태는 무너지면서 , 괴물체가 자괴의 길을 걷는다 .
바벨은 그제서야 안심해 펼쳤던 팔을 내리고 , 당신을 지나쳐 찍어누르는 발로 괴물체의 잔해를 마저 산산이 부쉈다 .
당신이 생각하기를 관두면 , 바벨 또한 다시 바벨로 되돌아간다 . 녀석은 뜯겨져 나간 손을 고치기 위해 남은 몸을 전개했고 금방 모양을 갖췄다 . 헌데 점차 몸이 얇아지고 있어 , 처음 만났던 때에 비하면 한 뼘 정도 키가 작아졌다 . 머리나 오른손의 손상까지 수복한다면 , 한층 더 줄어들게 될 것이다 . 이러다 언젠가 당신보다도 키가 작아질 거다 . 공격의 위력도 시시해지는 게 아닐까 .
─ MaaaaaAaaaaa
하지만 걱정 마시라 , 바벨은 스스로 살아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보기 끔찍하지만 , 바벨은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살점을 손으로 쥐어들더니 , 그것을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자신의 안에 녹여냈다 .
그것으로 전부는 아니지만 , 오른손의 부상을 일부나마 고쳐낸 것이다 . 무슨 원리야 . 무슨 요술을 부린 거야 . 바벨에게 설명을 요구해도 바벨에게는 답할 입도 머리도 없었다 .
합리성에 사람이 너무 미치면 저렇게 되버리는 걸까 . 당신의 당당한 다짐에 바벨은 얼마 낫지 않은 자신의 오른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 싸운다 . 보다 강한 상대와 싸운다 . 약자도 강자도 공평하게 쓰러뜨린다 . 그것만이 바벨의 바램이라 , 당신의 생각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바벨은 토달지 않고 당신의 뜻에 따를 것이다 .
── ─ 아니 , 말썽은 부리겠지 당연히 .
당신에게 바벨이 무기라면 , 바벨에게 당신은 자신 대신 생각할 머리이자 방아쇠를 당기는 책임을 지는 협범자였다 . 바벨의 안에서 당신과 자신의 관계는 대등했다 . 때문에 바벨이 당신에게 지는 형태로 , 고분고분 말을 따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
생생한 기억은 이미 사라진 고통까지도 되살려냈다 . 화염에 불살라지는 아픔과 숨통을 틀어쥐는 연기의 먹먹함은 그럴 리 없건만 또 한 번 당신을 죽이려는 듯 했다 . 벌써 다 끝난 일인데도 , 당신을 쥐고 놓아주지 않아 . 생각에서 기억을 밀어내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 아이러니하다 . 다른 기억을 되찾기 위해 겨우 되찾은 기억을 밀어내야만 하는 상황이라니 .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 당신은 주저 앉은 그대로 단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
도로는 길게 , 또 길게 이어졌다 . 도로의 파손은 여전히 심각해 걷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바벨이 당신의 페이스를 신경 쓰지 않고 , 앞뒤 재지 않고 경계심 없이 성큼성큼 나아가니까 더욱 더 그랬다 . 당신에 대한 바벨의 무신경함은 한결같아 , 어디서 어떻게 고쳐야 할지 , 고칠 수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
하지만 실력만은 확실하니까 , 토를 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
가는 길에 마주치는 괴수와 괴물을 척척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 , 녀석은 분명 ─ 제대로 다뤄낼 수만 있다면 훌륭한 병기였다 . 아무튼 하여간 , 그렇게 쓰러뜨린 적들로부터 살과 뼈를 가져와 , 성공적으로 회복해낸 육체는 , 전에 비하면 다소 작았지만 어떻게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다 . 팔도 다리도 머리도 성하게 붙어 있으니까 , 끔찍하게 찢어졌던 전에 비하면 인형이라 부를 수 있었다 .
아..! 흩날리는 모랫가루 너머로 엿보이는 기억의 흔적에 작은 탄식이 새어나온다. 남자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간절한 손길에 닿은 것은 극히 일부일뿐. 그 흔적을 좇아 더듬는 것은 여전히 아득하다. 귓가를 울리는 엔진소리와 흩어지는 종잇장들. 사내는 먼지 낀 고글을 어루만지며 기억을 되새긴다.
불안정한 날개와 정신없이 요동치는 계기판. 그러나 꽉 쥔 두 손은 끝내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자신은 누구였고 또 어떤 간절함이 마지막 순간까지 닿아있던 것일까.
"듀 락!"
사내는 홀로 남은 사막 속에서 고함을 쳤다. 돌아오는 메아리 없이 고요한 공간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작은 울림이 멈추기까지 잠시동안 숨을 죽였다.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위기가 눈앞에 찾아올때. 그또한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어둠이 내린 사막에서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불안은 곧 안전에 대한 염려 .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 사막에서 안심은 곧 방심을 의미했다 . 하지만 당신이 사주 경계를 게을리 했을 리도 없고 , 별안간 등 뒤에서 갑자기 적이 튀어나온다니 , 지나치게 예민한 상상이겠지 . 아니나 다를까 당신이 지나온 길은 작별한 모습 그대로 , 거기에 남겨져 있었다 .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 당신은 자신의 걱정이 괜한 것이라 금방 깨닫는다 .
하지만 여전히 바벨은 일어나지 않아서 , 당신은 다른 가능성을 염두하게 됐다 .
이 자식이 마침내 고장났던지 , 아니면 , 뒤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
- Maaa,aaaa,Aaa
바벨이 엎드려 누운 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몸을 떨며 낮게 울부짖는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기계적인 감성을 느끼게 한다 . 무슨 일이야 바벨 . 물어봐도 양철 인형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
물어보지 않아도 ─ 관찰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녀석이 무엇을 경계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야수는 당신을 덮치려는 괴수를 간발의 차로 따라잡아 , 놈을 뒤에서부터 덮쳤다 . 예의 차리지 않고 쭉 찢어진 주둥이로부터 당신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자신의 팔을 재갈처럼 물려놓았다 .
야수의 하나 남은 팔은 , 척 보기에도 처참하게 , 무참하게 찢기고 있었다 .
만찬을 방해 받은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 괴수가 야수의 팔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
- GRrrrRRrRRRRR
야수가 감당하고 있는 고통은 ─ 분명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을 것이다 . 그렇지만 야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 다음 표적이 당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 도망쳐서는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야수는 아는 눈치였다 .
- NUuuuUUUuUUuUUU
야수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팔이 없으니 다리로 괴수의 얄팍한 허리를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 야수의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괴수의 허리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 더는 괴수도 여유를 부릴 수 없다 . 팔을 먼저 끊지 못하면 자신의 허리가 먼저 끊어지게 되자 , 놈도 비명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
부풀기가 상반신에서 오른팔로 이동한다 . 어떻게 찢기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 여느 때의 세 배 가까이 부푸는 어깨 . 한 자리에 모인 열기는 바벨의 육신을 붉게 과열시키고 파열시켰다 . 하지만 바벨은 멈추지 않고 열기를 손 끝으로 ─ 손톱으로 내려보내니 , 머잖아 일격필살의 위력이 완성됐다 .
남은 일은 슛 코스에 괴물 지렁이의 입을 갖다놓는 것 뿐이다 .
다행히 쫓기는 사람은 당신의 의도를 , 바벨의 의미를 이해하고 언덕의 아래로 괴물 지렁이를 유인해왔다 . 강철 갑옷도 더는 방해 밖에 되지 않아서 , 모습을 허물어뜨리고 자신만이 허겁지겁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
뭐야 . 혹시 바벨도 저렇게 필요할 때만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걸까 .
할 수만 있다면 녀석의 속 터지는 행동에 더는 속앓이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 으아 , 아아 ! 온다 , 나온다 !! >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가르키는 대로 언덕의 중턱까지 오른 먹이를 쫓아 로켓처럼 튀어나오는 괴물 지렁이 .
모래 깊이 잠복해 있던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자 당신의 시야는 모든 면이 녀석으로 채워졌다 . 빈틈없이 빽빽하게 당신의 시야를 채우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 과연 재해라 할 만했다 .
흉악하게 벌어진 입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니 , 가만히 서서 대처하지 않는다면 빨려들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리라 .
당신이 소용돌이에 뛰어드는 건지 , 소용돌이가 당신에게 달려드는 건지 , 모든 이해와 인식이 느슨해지는 결착의 순간 ─ 당신과 바벨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게 연결된다 .
발사를 명령하고, 뭔가 투 하는 느낌이 들더니 하늘을 날고 있었다. 감각기관의 수용량을 넘은 자극이 취소당한 느낌이다. 용케도 끌어안은 바벨을 놓치지 않고 날아가는데 똑같이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벌레 시체가 보였다.
'저거 바벨한테...먹여야...하는데...'
그런 생각이었다. 신나게 쏴버렸으니 바벨도 많이 망가졌을테고. 몸은 팽이처럼 뱅뱅 돌아서 방향도 잡을 수가 없는데 저 시체를 어떻게 찾나 하는. 지나치게 태평해보일지도 모르나 나름 생존에 중요한 것이다...
"....윽!"
어느새 땅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두 몸뚱이가 모래바닥에 쳐박혀 데구르르 굴렀다. 충격은 느껴졌지만 역시 아프거나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육체를 움직이는게 오롯이 육체가 아닌 법이니. 데스 그립이 와버려서 바벨을 놓지도 못하고, 검은 하늘만 멀거니 올려다보며 한동안 숨을 색색거리고 누워있었다.
평탄 평평했던 모래바닥을 크게 흐트러뜨리며 쓰러진 당신과 바벨 . 바벨에게서 느껴지는 일종의 성취감 , 고양감은 당신까지도 들뜨게 만들었다 . 어쨌거나 ─ 당신과 바벨이 해냈다 . 저 커다란 괴물을 일격에 쓰러뜨린 것이다 . 도망칠 수도 있었고 , 못 본 척 숨을 수도 있었는데도 , 당당히 맞서 정당하게 승리를 쟁취해냈다 .
바벨의 호전성을 크게 충족시키는 , 종이 한 장 차이로 얻어낸 승리 . 무심한 양철 인형조차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가로 팔 하나를 송두리째 잃어버렸지만 ,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값싼 대가였다 .
< 저기요 , 이봐요 !! >
그런데 ─ 낯선 목소리가 모처럼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던 바벨을 방해한다 . 바벨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드는 소리였다 . 당신에게 전해지는 바벨의 충동은 , 무척이나 파괴적인 색을 띄고 있었다 .
바벨의 목줄을 쥔 것은 당신이라 , 당신이 틀어막으면 바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녀석이 이대로 날뛰고 싶어도 당신의 허락 없이는 저들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 다행이지 , 당신의 생각대로 지금 이대로는 승산이 도무지 없어보이니까 .
지성이 부족한 괴물이 상대라면 또 몰라 , 강철 갑옷이 시의적절한 판단으로 괴물 지렁이를 상대하던 것을 생각하면 바벨의 유일한 자랑인 텔레폰 펀치도 통하지 않을 공산이 컸다 .
< ... 괜찮아요 ?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 >
우선 눈 앞의 인영이 사람이 맞는가부터 확인하자 , 걱정이 서린 상냥한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가까워졌다 . 당신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당신이 심연을 볼 때 심연도 당신을 본다고 , 상대방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 벌써부터 품평을 시작한 눈치다 .
목소리의 주인은 여성으로 보이는데 , 붉은 피부가 볕 아래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
갈색 머리카락을 이마가 드러나도록 묶어놨는데 , 덕분에 안 그래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 품이 넓은 작업복에 얼룩덜룩 물감으로 얼룩진 앞치마를 입은 모습이 저 화실에서 일합니다 ─ 열심히 자기 주장을 하는데 , 사막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라 위화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안다고 , 그녀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 그것은 저 괴물들에 대한 것도 , 우리들의 곁을 지키는 또다른 괴물들에 대한 것도 아니고 , 오로지 단 하나 , 우리들 자신에 관한 일이었다 . 경솔하게 입 밖에 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여자가 말을 망설이느라 , 당신을 안달나게 만들었다 . 하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 소리가 쏟아졌다 .
< 저희는 죽었어요 , 바벨 어머님 . 저희는 지금 사후 세계에 있다구요 >
텅 빈 직소 퍼즐판에 , 가장 커다랗게 비어 있던 중심가에 , 비처럼 퍼즐 조각들이 쏟아져 내린다 .
어째서 잊을 수 있었는지 , 어떻게 잊었는지 , 자신도 모를 기억이 되살아난다 .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최후가 , 잊어버린 기억이 당신의 서툰 손놀림으로 자신의 자리를 다시금 되찾아갔다 .
잠깐 정신이 빠져나가려다 돌아왔다. 몸이 화끈거리면서 축축했고 시야가 계속 깜빡거린다. 흙벽에 기대어 앉아있는데 주변에서 낯선 이국의 언어로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콩 볶는 총소리도.
"........"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계속 새어 한쪽 눈을 뜨기 어려웠다. 어렵사리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것보다 훨씬 심하게 피가 새는 구멍이 3개는 더 열려있었다. 양손으로 오른쪽 허벅지에 지혈대를 감다가 힘이 풀려 있었다. 지혈대는 꽉꽉 묶어서 고정해야 하지만, 그마저 여력이 없다.
그때부터는 살려고 하는 의지의 몸부림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무의식적 행동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다시 손을 움직여서 지혈대를 감으려 해도 손가락은 무력하게 꼬물거리는 게 전부였고, 지혈대 막대를 제대로 쥐기도 어렵다. 죔죔 놀이보다 못한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헛짓하던 사이 AK를 들고 복면을 쓴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눈이 마주쳤다. 피가 빠져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저게 사람임을 인식했을 때, 그의 군홧발이 날아와 머리통을 걷어차고 말았다.
"죽어? 사후세계?"
노란색 눈이 눈 뒤를 보면서 뒤편의 기억을 읽어낸다. 내가 죽었다고?
그 이후의 기억은 온당하지 않았다. 거나하게 술을 먹은 듯 필름이 뚝뚝 끊겨있다. 축 처진 자기 몸을 어딘가로 끌고 가거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파편적인 이미지가 남아있었다. 그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신체에 대한 인지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유령이 되어버린 기분도 들었다. 그때 분명 그들이 무언갈 하고 있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아, 기억나는 게 하나 더 있다. 동그란 것이다. 동그란 거.. 말하자면 사람 눈이나 카메라 렌즈같이 동그라면서 빛을 품은 것. 그리고 총구. 얼굴 앞에 동그란 총구가 반짝! 하더니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것은 천사가 아니라 정찰 드론이었다. 미사일이 적 숙영지에 내리꽂혔고, 보병들이 근처 구덩이에 처박힌 그녀를 바디백에 담아왔다. 시신은 관에 들어가 수송기를 타고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녀의 전우 중 한 명이 삼각형으로 개어진 국기를 받았다.
육군 중사 미카엘라 라미레즈는 긴 복무에 마침표를 찍고, 향년 32세에 국립묘지 6피트 아래에 묻혔다.
눈은 뜨고 있되 어디를 보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근처에 포탄이 떨어져 뇌진탕에 이명이 귀를 찔러도 이렇지는 않았다. 입술이 달싹이다 겨우 몇 마디 뱉었다.
흐리다 . 흐릿하다 . 부유감 . 회색으로 희뿌연 현실감 . 보는 것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 관을 부수고 무덤을 파헤치고 모래 바다 위로 이제 막 기어나왔을 뿐인 당신은 무엇도 확신하지 못한다 . 당신의 삶은 ─ 너무나 순식간에 망연해졌다 . 머릿속에 몇 번이고 리와인드되는 이 기억이 ─ 정말로 당신의 것일까 . 당신은 정말로 저렇게 저리 죽어버린 걸까 .
갑자기 되살아난 ─ 당신의 주머니에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쑤셔넣어진 기억 따위 어디에도 사실이라는 보증은 존재하지 않는데 , 단지 당신의 안에 뻥 뚫린 구멍에 딱 맞는 조각이라는 이유로 , 당신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 인식하고 만다 .
< ... 저기 , 저기요 ? 괜찮아요 ? 정신 , 정신 차려보세요 ! >
이런 당신을 여자는 불안하게 바라봤다 . 걱정스럽게 , 자신이 손을 써야 할 단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소리쳤다 .
그렇잖아도 어지러운데 시끄럽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 숨을 크게 쉬었다. 죽었다고 엉엉 울기엔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자기도 많은 사람을 죽었다. 언젠가 자신도 죽여왔던 사람들과 똑같이 죽으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은 부지불식간에 준비할 시간 없이 생각보다 먼저 찾아왔다.
죽으면 죽어서 운명이 다한거지 사후세계가 진짜 있을줄 몰랐다. 있다 해도 이런 모습인지 몰랐다. 유황불도 갈대밭도 아니라 괴물이 있는 밤 사막. 이건 대체 어느 동네 신화야?
"아... 빌어먹을...모르겠다."
일단 벌레시체를 보고 싶다. 승리의 전리품, 승리의 고양감. 벌레이빨이 닥쳐오는 긴장감을 떠올리면 쓸모없는 생각을 몰아낼 것 같아서.
< 어지럽거나 , 우울하거나 , 자신의 존재에 회의감이 든다거나 , 그렇지는 않으세요 ? >
성가시다는 말로 쉽게 설명되는 행동이다 . 당신이 벌처럼 톡 쏘는 말을 뱉어도 아랑곳 않고 끈덕지게 당신의 안부를 물어오는데 , 듣다보면 짜증이 날 수도 있겠다 . 하지만 저렇게 남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마냥 매몰차게 대해도 될까 . 심란한 당신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 뭘 걱정하는 거야 .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데 . 만약에 당신이 여자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껴 진득하게 그녀를 관찰한다면 ,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빛이 염려보다는 공포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분명해졌다 .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빛 , 여자는 당신을 경계하고 있다 . 당신과 자신의 차이가 무섭다는 눈치였다 . 그렇게나 대단한 문제인가 ? 자신을 잊고 죽음을 잊고 그저 방랑하던 신세라는 것이 ? 그렇게나 두려워 할 일인가 ?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모든 무덤에는 사연이 있기 마련이니까 .
하지만 당신이 신경쓰지 않는다면 , 못 본 척 지나치기로 했다면 여기서 덮자 . 생각이 불필요한 살덩어리라면 , 의심으로 군살을 더 가져봤자 당신만 괴로울 것이다 . 걸음만 느려질 것이다 . 바벨을 보라 . 현재만을 향유하는 저 폭력배를 보라 .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반토막난 벌레에게 사로잡혀 도움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 .
< 엥 ? >
보다 직관적으로 상황을 설명드리자면 , 상처의 단면부로부터 쏟아져 나온 내부 기생충들이 밧줄처럼 바벨을 묶어 바벨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었다 . 저것들에 붙들려서 ─ 당겨져서 살 더미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바벨 .
보통 장력이 아니라 구하러 간 당신까지 딸려 들어갈 판 . 머리 하나 다리 하나 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바벨로써는 이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 한 술 더 떠 당신까지 기생충에 팔이 휘감기니 , 당신이 있는 힘껏 도와도 저 시점에서 결말은 벌써 정해진 것 . 당신과 바벨은 괴물 지렁이의 유해에 파묻히게 됐다 .
오 ─ 젠장 .
이렇게 또 죽는 걸까 . 미지근한 살점에 짓눌리다 , 소화되어 , 당신은 또 죽게 되는 걸까 . 바벨의 멍청함이 마침내 당신을 끝장낸 걸까 . 선택을 잘못 한 걸지도 모른다 . 바벨만 빨려 들어가게 두고 , 여자의 도움을 받아 밖에서 녀석을 구조해도 됐을 지도 . 아니 ─ 아니지 . 저 여자를 뭘 믿고 도움을 바라겠어 . 당신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 . 판단을 했다 . 만약에 저 여자가 당신의 도움이 될 생각이 있었다면 저렇게 멀리서 구경하지 않고 함께 달려와 바벨에 붙어 당기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 애초부터 저 여자에게 당신을 도울 마음이 없었다는 거겠지 .
- maaaaaaaaaa
바벨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아는 걸까 . 시무룩하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 녀석이 자책을 할 리 없건만 , 상황이 상황이라 녀석의 울음소리가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인다 .
>>452 끈적끈적한 늪처럼 바벨을 구하려다 같이 묶여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축축하고 이상한 감촉.. 제기라알... 급박한 위기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아도, 살덩어리 속에 파묻혀 있는 감각은 불쾌하기 그지없다. 기생충이면 기생충답게 굴 것이지. 이건 기생충이 아니라 매복한 사냥꾼이 할 짓 아니냐는 말이다.
모래벌레를 쪼개어 놓고 한낱 기생충 때문에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렸음을 생각하면 뭔가 내세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 같다. 지금이라면 화방 여자랑 말이 통할까...? 입도 코도 다 막혀서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후세계가 아니었으면 진즉 질식해서 죽었으리라.
'바벨.. 손가락 하나씩이라도 쏴 봐요. 기생충은 그 정도로도 끊어질지 모르니까.'
바벨의 몸이 성하지 않아도 몸이 남아는 있다. 최고 화력은 불가능하여도 권총 정도의 위력은 나올지도 모른다.
당신의 명령에 바벨이 움찔움찔 손가락을 움직인다 . 하지만 모두 불발 . 몇 번의 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도저히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이었다 . 바벨의 < 총 > 은 그렇게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
바벨이 당신에게 알리지 않으니까 , 당신도 알 리 없는 사실이겠으나 하필이면 하필 지금 깨달을 기회가 생기다니 . 바벨을 상대로 방심은 용납되지 않는 걸까 . 만약 다음이 있다면 당신은 ,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바벨에게서 바벨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알아놔야만 할 것이다 . 그래 . 다음이 있다면 ! 이런 상황이 또 생겨서는 안 되니까 !
바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단 하나의 비관적인 사실만이 명료해진 상황 . 바벨은 아주 체념하기라도 했는지 살점의 벽이 자신을 더욱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기는 데도 아랑곳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다 . 당신도 바벨도 이대로 있다가는 괴물 지렁이의 소화액에 첨벙 던져질지도 모르는데 , 당신의 무기라는 녀석이 저렇게 무책임하다니 .
아니나 다를까 바벨이 커다란 구멍으로 빨아 당겨지면서 당신보다 한 발 먼저 자취를 감췄다 .
당신도 제법 바벨을 쓰는데 익숙해졌다 . 녀석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 보는 것 . 당신이 자신의 안에 새겨진 감각을 되새기자 그것만으로도 당신과 바벨 사이에 선이 이어진다 . 바벨 . 바벨은 ─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
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뭐야 이 경치는 . 녀석은 아까까지 살과 살점에 파묻혀 있던 것이 믿기지 않게 , 모든 것이 새하얀 세계로 끌려나와 있었다 . 신체를 옭아매던 기생충도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린 상태 . 녀석은 깽깽이 발로 , 하나 뿐인 팔로 , 낯선 소년을 겨누고 있었다 . 흰색의 세계에 혼자 웅크리고 앉은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
< ... ... >
살아 있는 사람이 맞기는 한가 . 검은 더벅머리 . 옷을 입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난 가죽만 붙은 앙상한 몸 . 창백한 피부는 혈색이 안 좋다고 말할 수준을 오래 전에 떠났다 . 아사 직전의 사람이라도 저것보다는 살이 붙어 있을 텐데 , 대체 저 소년은 어떻게 된 노릇일까 . 그것보다도 상태가 나빠보였다 . 심상치 않다 . 당신은 원한다면 바벨을 시켜 소년을 공격할 수 있었다 .
저대로 숨통을 끊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었을 거다 . 상대가 허튼 수작 부리기 전에 손을 쓰는 과감함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고 , 마침내 소년이 입을 열었다 . 바짝 마른 입술과 비틀린 모양의 혀로 문장을 만들어냈다 . 너무나 뜻 밖의 말을 높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 늙은이와 아이가 함께 느껴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 살고 , 싶어
- 아직 더 , 살고 , 싶어
- 죽고 싶지 , 않아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 죽어가는 시체의 모습으로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한다 . 소년의 바램은 곧 당신에 향한 구걸로 바뀌었다 . 살려달라고 , 당신에게 애원하며 부러질 것 같은 손으로 바벨의 하나 남은 팔을 붙들었다 .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며 , 제발 살려달라고 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 의지 > 가 기어오른다 .
이미 떠나간 운명을 다시 손에 쥐려는 강한 집념 . 한기마저 불러일으키는 소름끼치는 집착에 바벨이 경기를 일으켰다 . 그리고 그런 예감이 허튼 것은 아니던지 , 소년의 눈자리로부터 피접이 상골한 팔이 불쑥 튀어나와 바벨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목을 쥐는 힘에 비해 팔을 붙드는 힘은 대단치 않다 . 바벨이 마저 몸을 바닥에 붙이려고 하자 끔찍하게도 소년의 팔이 당기는 힘에 못 이겨 뜯겨지고 떨어졌다 . 똑바로 신경이 살아 있는 걸까 . 아니면 , 자신의 팔을 망가뜨린 바벨이 미워서 그러는 걸까 .
소년의 벌어진 입으로부터 뛰쳐나오는 의미 모를 비명 .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흰색의 세계를 뒤흔드는데 , 도무지 이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바벨은 당신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주먹을 쥐어 소년의 머리를 때렸다 .
소년의 머리가 , 아주 찌그러져 , 형체를 상실토록 , 주먹을 휘둘렀다 .
자신의 목을 붙잡는 손이 떨어질 때까지 , 주먹을 내리쳤다 .
소년의 머리는 모래 장난으로 만든 인형처럼 손쉽게 망그러져서 , 바벨은 생각보다 금방 움켜쥐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하지만 끔찍한 감촉이 진하게 배어든 목은 손이 떨어졌어도 여전히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 바벨은 자신의 희박한 감정 속에서 처음으로 공포를 발견해내고 , 충격에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 실 , 어 … 조금 , 더 …… 살고 십 , 어
덜 망가진 입과 목이 엉성하게 조잡하게 , 사람의 말을 흉내냈다 .
아직 붙어 있는 다리로 몸을 뒤집어보려고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 한 때 소년이었던 유해는 발버둥에 발버둥을 거듭했지만 , 끝끝내 실패했고 , 머잖아 모든 생명 징후가 사라졌다 . 또 무슨 일인지 , 유해의 움직임이 멎자 흰색의 세계가 덧칠되며 다시 배경이 사막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 정신 차리면 당신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사막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
길을 걷던 여자처럼 겉만 무서워 보이고 직접 때리면 별 것 아닌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렇지! 부숴버려! 하고 바벨을 응원하던 차, 필름이 끊기고 다른 필름이 이어지듯 자신은 사막을 뒹굴고 있었다.
벌레시체! 기생충! 바벨은? 잠자다 밟힌 뱀처럼 파다닥 일어났다. 기절했다가 기상하는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여긴 누구 나는 어디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던 첫 번째하곤 확연히 다르다. 이번에는 기억이 있고, 바벨이 있고, 표적이 있었다. 셋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 바로 경험이리라.
경험치가 있으니 제일 먼저 할 일도 분명해진다 . 바벨은 부르는 즉시 당신의 곁에 나타났다 .
여전히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부족하지만 , 다른 부상이나 이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 정체불명의 적에게 목을 졸렸지만 티나는 변화는 없었다 . 이렇게 상황을 살피는 당신도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생충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 녀석들에게 단단히 묶였던 흔적이 살 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꿈은 아닌데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마지막으로 당신이 괴물 지렁이의 토막난 유해로 시선을 던지면 ,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 커다란 것이 별안간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
이런 당신을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 예의 괴물 지렁이에게 쫓기던 여자였다 .
< 무슨 , 일이 일어난 거예요 ? >
당신을 보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 그녀의 시선은 당신을 지나 , 바벨에게 향해 있었다 . 무슨 일이야 . 당신의 눈이 여자의 눈길을 쫓아 따라 가면 , 그곳에는 바벨의 머리가 있었다 .
당신은 정말 잠시 한눈 판 것 뿐인데 , 눈을 뗀 사이 바벨의 머리에 커다랗게 균열이 생겼다 .
주변에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쩍쩍 갈라지는 머리는 ,
당신이나 여자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날카롭게 파편을 만들며 깨졌다 .
이걸로 벌써 두 번째 . 파멸적으로 파괴된 바벨의 머리 . 그런데 전과는 뭔가가 다르다 . 텅빈 강정에 지나지 않던 바벨의 머리 속에 , 이번에는 내용물이 존재했다 . 낯선 인상의 ─ 당신의 기억에 없는 낯선 사람의 얼굴이 바벨의 머리 안에 담겨져 있었다 .
알맞은 비유를 찾았다! 바벨의 새 몸은 총구멍처럼 검었고, 거기서 튀는 불꽃처럼 희었다. 얼굴은 잘생겼나. 양 손을 뻗어서 뺨을 덥석 잡아보았. 바벨의 검은 눈 속에서, 이어진 채널을 통해서, 그의 안이 느껴졌다.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이런 것까지 총구멍일 필요는 없어 바벨.
"그런 기억 따위 있어봤자 기쁘지 않다는 게 한데...."
정확한 기억만 없지 뻔하게 예상할 수 있다. 전쟁에서 산 채로 잡힌 군인에게 기다리는 최후야 묘사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진부하다. 것도 싸우던 적들이 국제법 따위 무시하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녀의 쪽도 뒤에서 할 거 다 하는 나쁜 놈들이었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 움푹 들어간 눈 . 특별한 돌출없이 얌전한 광대 . 턱은 모나지 않고 둥글지만 만질수록 그 형태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 바벨의 얼굴은 어쩐지 손 닿는 순간마다 모양을 달리하는 듯했다 . 어둠이 그러하듯 점토처럼 당신이 주무를 때마다 모양이 변하는 것이다 . 그것에 정해진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 여전히 바벨은 불안정하고 여전히 불완전했다 .
단지 흰 머리카락만이 ─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만이 선명하다 .
어깨를 덮는 머리카락은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무기질적이라 , 생물의 느낌이 희박하여 , 차라리 악기의 현에 더 가까웠다 .
당신이 바벨의 구멍을 복잡한 심경으로 살피면 ,
바벨은 당신이 바라면 여기에 두고 가도 된다고 , 소리로 빌리지 않는 말로 속삭였다 .
분명 바벨이 맡아두고 있는 당신의 기억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리라 . 당신이 과거를 뒤쫓지 않는다면 모두 바벨의 안에 깊숙히 잠겨 떠오르는 일 없이 조용히 , 영원히 잊혀지겠지 . 그것은 정말로 안락한 망각이었다 .
하지만 ─ 아무리 뻔한 기억이라도 ─ 자신의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하며 , 당신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면 ,
당신이 흔쾌히 수락하자 뛸 듯이 기쁜 표정으로 화답하는 여자 . 그녀는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서야 , 아직까지 당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
< 그리델 안첼리아예요 , 그리고 여기 , 저를 도와주는 녀석은 칼리번이라 하구요 >
그녀가 손으로 가르키자 , 빈 공간으로부터 커다란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 판금갑이라 불리우는 그 갑옷은 , 어찌나 열심히 광을 내놨는지 밤중에도 눈부시게 빛이 났다 . 볼링공처럼 홈이 세 개 파인 투구는 페이스 오프가 불가능한 일체형으로 , 정면에 만들어놓은 세 개의 구멍을 제외하면 물샐틈없이 기사의 머리를 포장하고 있었다 . 바벨과 비교하면 두께부터 , 존재감부터가 다른 존재였다 . 당신에게 적의를 향하지 않아도 , 단순히 거기에 서 있기만 해도 압력이 발생해 주위를 짓누른다 . 뿐만 아니라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주인의 등 뒤를 지키며 서니 , 싫어도 바벨과 비교하게 되리라 . 바벨과는 모든 면에서 반대를 이루니까 .
< 그리 ─ 고 , 사실 직업 화가는 아니에요 . 그림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구요 . 이런 차림새라 오해하셨죠 ? 죄송해요 >
좋은 사람 ─ 나쁜 사람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상황이다 . 상황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 극한의 상황 앞에서 드러나는 본성이야말로 , 그 사람의 모든 것 , 진실된 면일 테니 . 이 악수로부터 , 이 만남으로부터 당신이 어떤 인상을 받더라도 ,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 운명이 곧 서로의 진심을 드러낼 무대를 준비할 테니까 .
겨우 한꺼풀 벗은 정도로는 전부 억누를 수 없었던 바벨의 본성 ─ 난폭함 . 바벨은 여전히 호전적이어서 , 강철 갑옷이 눈에 띌 때마다 툭하면 시비를 걸어댔다 .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더 약한지 , 부딪혀보기를 바랬다 . 칼리번이 어른스럽게 , 한 발 먼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주었기에 망정이지 , 행여라도 그것이 걸어오는 시비를 받아주기라도 했다면 유혈 사태로 번졌을 지도 모르는 문제 . 당신도 그리델도 곤란할 따름이었다 . 이래서야 도로가 다하는 데까지 , 함께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
그리델의 말에 따르면 , 이 도로는 사람이 준비한 것은 아니나 , 저것을 이정표 삼아 사막의 방랑자들이 한 곳으로 모이는 중이라 했다 . 모두 모여서 이 사막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다는데 , 사실이라면 당신도 그리델도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
사막의 위협이 제아무리 흉악하다고 해도 , 그 흉악함은 예측과 대비가 불허하다는 점에 있다 . 머릿수가 갖춰지면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 , 이런 위협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 터 .
그런데 이놈의 바벨이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구니까 , 그리델의 낯빛은 어두워져만 갔다 .
하나 뿐인 길이라 함께하기로 한 이상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인데 . 이 자식은 , 이 녀석은 , 이 고물 깡통 인형은 !!
말로 하지 않아도 그리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
반면 바벨은 천연덕스럽게 , 뻔뻔하게 , 칼리번과는 반대로 모습을 감추지도 숨기지도 않고 , 당신과 나란히 도로를 따라 걸으니 ,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가 문제라는 생각은 눈곱 만큼도 못하는 것 같다 .
"사막을 벗어난다? 여기서는 무릎도 허리도 안 아프고, 배고프거나 졸릴 일도 없어요. 몇 번 맞아봤는데 아프지도 않아요. 여기서 왜 벗어난대요? 그보다 벗어나면 어디로 가려구?"
죽고 한 번 더 죽을 생각인가? 사막이 부여하는 신체적 자유는 현실보다 달콤하고 뛰어나다. 괴물들은 생긴 것만 이상하지.. 총 맞으면 똑같이 죽었다. 여기서 벗어날 절실한 동기는 아직 없다.
"모여서 하는게 패싸움 말고 또 있을...."
무정부 상태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서열을 정하기 위한 폭력사태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하고 싶었다. 바벨이 깐족거리는게 또 눈에 밟히지 않았으면 그대로 말했을거다. 칼리번이라는 갑옷의 등에 잽을 툭툭 던지는게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을 흘릴 뻔 했다. 깡통 안쪽에 사람이 생겨도 깡통은 여전히 난폭한 깡통이다.
그리고 난폭한 깡통이 잊어버린게 하나 있다. 난폭한 깡통의 주인은 두 배로 난폭하다. 직전까지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고 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다.
"바벨! 그건 나쁜 행동이에요!"
말은 아이를 훈육하는 유치원 교사 같았지만, 손은 바벨의 머리 위로 올라가서 머리채를 틀어잡고 있었다. 새로운 모습을 하니까 이게 좋구나! 바벨의 첫눈처럼 흰 머리채를 잡아서 뒤로 질질 끌려고 했다.
>>484 바벨 머리채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바벨을 없애버리자는 말로 잘못 듣고 말았다. 고개를 홱 돌려서 그리델을 보았지만 오해는 빠르게 정정된다. 그녀는 모래벌레에게 쫒길 때 선보였던, 칼리번을 넣고 꺼내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리델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듯 칼리번이 모래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호출을 받으면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런 게 되는지 몰랐어요. 한 번 해볼까요."
괴물이 다가올 때 바벨의 직감을 이용할 수 없는 건 단점이지만.. 바벨이 사고를 치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어디 집어넣고 다니는 게 더 좋겠다. 입을 열어서 말해보았다. 조정간을 안전에 두는 느낌으로.
맞는 바벨과 때리는 당신 . 일련의 광경을 바라보는 그리델의 표정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 설득을 완성시키는 조미료로 과감하게 주먹을 선택한 당신의 모습에 , 도통 적응을 하지 못하는 눈치 . 자신이 알던 상식이 모래성처럼 부수어지는 끔찍한 광경에 차마 눈을 바로 뜨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만다 .
그런데 ─ 아무리 기다려도 머리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잦아들지 않아 . 그리델이 하는 수 없이 소리를 냈다 .
< 저 , 저기 , 라미레즈 씨 , 안 되면 억지로 하지 않으셔도 돼요 ... 그도 그럴 게 .. 헉 >
당신의 사심없고 자비없는 사랑의 매에 , 한층 달라진 바벨의 모습을 보고 그리델이 헛숨을 삼켰다 .
놀랄만도 하지 . 저렇게 머리가 움푹 파였는 걸 . 당신의 주먹에 호되게 찜질당한 바벨의 머리는 ,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티나게 함몰되어 있었다 . 세상에 맙소사 . 예나 지금이나 무르기 짝이 없는 머리다 . 양철 인형의 머리를 벗고 , 기껏 새롭게 다시 태어났으면서 , 밖에 보이는 모습만 달라진 건지 .
기를 쓰고 버티기 바빠 머리가 망가졌어도 관심 한 번 주지 않는 바벨이었다 . 녀석의 의지는 속에 철심을 박은 듯 꺾이지 않아 , 당신은 처음으로 바벨과의 소통에서 실패를 맛봤다 . 이제까지는 싫은 내색하더라도 당신의 뜻에 따라왔던 바벨인데 , 이렇게까지 저항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
들어가라니까 엉뚱한게 들어갔다. 나중에 복구하는 김에 바벨이 알아서 잘 펴겠지. 어차피 뇌가 없는 머리통이니까 좀 찌그러져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바벨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버틴다. 계속하다간 뜨지 않는 해가 뜰 때까지 꿀밤을 먹여야 할 판이다. 지금까지는 싫은 티를 내면서도 시키는건 다 하더니 갑자기 왜 이런담? 칼리번을 좋아하나? 좋아하니까 괴롭히고 그러는 거야? 사랑의 힘을 이기는 건 없다는 거야 지금?!
울며 겨자먹기로 협상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그냥 때려패서 다 되면 좋은데 협상을 해야 한다니. 어쩔 수 없이 바벨과 눈을 맞추고 안테나를 세웠다. 애니멀 커뮤니케이팅을 하는 기분이다.
손짓이라던지 , 걸음걸이라던지 .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난폭한 성격도 직업병일까 , 그리델은 생각했다 .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은 질문은 입에 담지 못한 채 , 수긍한 척을 했다 .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라고 그녀는 판단했고 , 때문에 대화의 주제는 담장을 넘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 그녀가 새롭게 꺼낸 이야기는 , 당신보다 먼저 만났던 사막의 방랑자에 관한 것이었다 .
< 여기서는 시간을 종잡을 수 없으니까 , 보통은 걸음수로 말하는데요 , 그 분과는 팔 만 걸음 정도 전에 만났어요 , 저도 라미레즈 씨처럼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 뭐가 뭔지 도통 모르는 상황이었죠 .
그 분께서 복잡한 생각을 교통정리해주시지 않으셨다면 , 어쩌면 저는 벌써 모래 밑에 파묻혔을 지도 몰라요 >
─ 이 사막에는 대체 몇 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 걸까 . 그리델의 말만 들으면 사람 만나기가 참 쉬운 것 같은데 , 정작 당신이 만난 사람은 눈 앞의 여자 단 한 사람 뿐이다 . 무슨 운인지 .
< 그렇네요 , 그 분이 알려주시지 않으셨다면 , 아마 이 길에 대한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 그러고보면 저는 , 라미레즈 씨에게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도움만 받고 있네요 >
당신의 말에 그리델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 옅은 미소 ─ 곤란함을 대충 모래로 덮어 가린 가짜 웃음이었다 .
< 한 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에요 >
당신과 눈을 맞추지 않고 던지는 말 . 더 캐낼 것이 있어 보인다 . 하지만 쉽게 말할까 . 당신과 그리델의 관계성은 서로 아직 동료라 부르기에는 어설픈 것이었다 . 동료는커녕 동행에 지나지 않다 . 운명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한 만남 . 언젠가 파탄 나더라도 지금과 같은 거리감이라면 , 서로 아무런 미련 없이 손을 털고 헤어질 수 있을 것이다 .
거기다 벌써 한 번 ─ 그녀는 당신과 바벨의 위기를 못 본 척했다 . 다음에도 또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도 될는지 . 뭐어 ── ─ 정하는 것은 당신이다 .
- maaa aa aaAaaaa
시체처럼 , 군장처럼 당신의 어깨에 들쳐 매여 조용하게 죽어 있던 바벨이 별안간 소리를 냈다 . 녀석이 이럴 때는 항상 안 좋은 일이 일어나던데 ─ 아니나 다를까 , 칼리번을 뽑아 든 그리델이 멀리 도로의 저편에 생겨난 점들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
>>508 영혼 없이 웃었다. 아하하. 숨기는게 있나보지? 뒤통수를 치는 일만 아니길 바란다. 자신을 배 갈라서 제물로 바치고 혼자 도망가는 대참사 말이다. 예를 들면 저기 보이는 점점이들한테.....어....? 바벨의 울음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Contact unknown on my 12. long distance! "엄폐 엄폐! 사구 뒤에 엎드려!"
저쪽이 우리에게 보이면, 우리도 저쪽에 보인다. 즉시 길을 벗어나서 엄폐물에 숨었다. 걷는 여자를 보았을 때와 같다. 그리델 칼리번도 어서! 망설일 시간이 없어!
>>518 애벌레 시절엔 나뭇잎을 갉아먹고 나비가 되면 꽃꿀을 먹는다. 바벨도 비슷했다. 저번에는 살점을 직접 흡수하더니, 얼굴이 생기고는 색깔을...마셨다. 만화적으로 생각하면 정기 비슷한 걸 마신걸까. 바벨은 무채색 다진고기 위에서 탭댄스를 춘다. 바벨은 회복되었다.
"사람처럼 생긴 것들은 전부 이상하게 약하단 말이에요."
칼리번은 그냥 가죽 없는 사람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냥이란 단어를 붙인 이유는 겁먹은 농노의 머리를 기사가 치는 것보다 싱거웠기 때문이다. 가죽 없는 사람은 괴물보다도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리델 말대로 시체와 같다.
모래가 되는 사람, 가죽이 없는 사람, 모래벌레 안의 사람. 전부 생긴거에 비해서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위험했던 모래벌레 안의 사람도 반신불수 바벨에게 맞아죽었다.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남은 찌꺼기인가? 피와 살이 아니라 영혼을 빨렸을지도요."
그 사람 비슷한 것들에 대해선 자신도 할 말이 적었다. 애초에 사막 경력도 그리델보다 짧고.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닌 걸까 . 그리델은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 애초에 이들은 어디서 온 거지 . 누구에게 습격을 당한 거지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그리델을 망설이게 했다 . 이대로 , 이대로 계속 도로를 이정표 삼아도 되는 걸까 . 이제라도 물러서서 , 다시 사막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
< ... ... 라미레즈 씨 , 저 사람들 , 저렇게 되기 전에는 뭘했다고 생각해요 ? >
네 명이다 . 어떻게 네 명이 모두 당할 수 있지 . 서로 간에 죽이고 죽였다면 이렇게 될 수 없다 . 그리델은 칼리번을 지우고 , 도로와 사막을 번갈아 바라봤다 . 만약 < 사교적인 모임 > 이 벌써 파탄났다면 , 이 길을 계속 따라갈 이유도 사라진다 . 앞으로도 계속 사막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 헤매겠지만 , 꼭 필요하지도 않은 위험을 수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 일에 이정도면 훌륭한 플래그가 아닌가 싶지만 , 우선 넘어가는 분위기다 . 그리델은 더이상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피해 도로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 하지만 바벨은 이런 선택을 반기지 않았는데 , 당신들은 모르는 이유로 도로를 계속 나아가려고 했다 .
당신이 위험을 강조하며 아무리 꿀밤을 때려도 듣지 않을 기세 . 녀석이 부쩍 당신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 바벨의 뜻을 존중해 멋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리델과는 여기서 작별해야할 것이다 .
바벨이 당신의 생각에 과연 동조할지 여부는 차치해두고 , 결정했다면 한 시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 도로를 따라 또 무슨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이 내려올지 모르니까 . 사구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천 몇 걸음 될까 .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 사구를 넘으면 또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겠지 . 그리고 또 사막에서 사막으로 , 도로를 피해 걸어가야만 한다 .
한 때는 저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렇게 궁금했는데 , 그리델은 그런 것은 더이상 신경 쓰이지 않는 눈치였다 . 이대로 모르고 싶다 , 알고 싶지도 않다 , 그냥 이대로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
넓다 . 너무 넓어서 텅 비어 보이는 사막이었다 . 역설적이지 . 이렇게 모래와 모래로 가득 차 있는데 , 거기서는 아무런 존재감도 느낄 수 없고 사막은 하나의 공동처럼 다가온다 . 하늘은 분명 열려 있는데 닫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 달 . 움직이지 않고 살아 있지 않은 , 죽은 시체와 같은 달만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하늘은 닫힌 것과 다를 게 없었다 .
당신들은 넓기만 넓고 어항 같은 이 사막을 금붕어처럼 정처 없이 , 그냥 그렇게 계속 걷기만 하고 있다 .
그리델의 우려와 다르게 아직까지는 ─ 어떤 적도 당신들을 습격하지 않았다 . 괜한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사막은 끊임없이 쉬지도 않고 당신들을 위해 길을 준비했다 . 도로에서 멀어지자 , 바벨도 도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발로 걷기 시작해서 , 사막에는 당신들 두 사람과 바벨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 때때로 당신이 과거의 경험을 되새겨 발자취를 지우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 길이 너무 길다 보니 그런 노력도 꾸준히 하기가 어렵다 .
너무 지루한 나머지 , 저 그리델조차도 자극을 바랄 지경이었으니 . 상황이 알 만할 것이다 .
< ... 잠시 쉬어갈까요 ? >
이걸로 벌써 다섯 번째 휴식 . 얼추 오만 보마다 당신들은 멈춰서 쉬고 있었다 . 그것은 육체의 피로보다는 정신의 피로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 주로 당신보다는 그리델의 피로 말이다 .
그리델은 당신이 신발을 벗는 것을 보고 곧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끊어지기 직전까지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고 겨우 숨을 내쉬었다 . 그런 그리델을 지키는 것처럼 모래를 헤치고 일어나는 강철 갑옷 . 칼리번은 그리델과 교대하여 사막의 모든 것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 반면에 바벨은 아무 생각 않는 것처럼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 저래도 빠짐없이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다 . 이상이나 이변이 생기면 금방 행동으로 나타낼 터였다 .
< .. ... 아 , 원래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이었죠 . 브루클린에서 제일 큰 공장이었는데 ... >
공장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 그리델은 떠오르지 않는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내려다 , 포기하고 멋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
< 아 ~ 안 되겠어요 , 더는 생각이 안 나네요 . 어쩐지 자꾸 기억이 흐려지는 거 같아요 >
그리델은 당신이 당황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하지만 말도 안 된다 . 당신의 얼마 안 되는 기억 안에서도 브루클린은 번화한 모습으로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 그리델은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 더욱 기가 차는 것은 그녀가 당신을 이상한 사람 보듯 한다는 것이다 .
저런 반응을 보면 그녀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착각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
< ... 모델 T 를 말씀하시는 거죠 ? 나머지는 ... 잘 모르겠네요 ,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신 거예요 ? >
어쩌면 , 당신이 이 세계에 와서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들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먹느라 그리델은 진땀을 흘렸다 . 그도 그럴 만하지 . 백 년 뒤의 미래라니 . 막연하기까지 한 시간의 거리감 아닌가 . 당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웃으니까 , 그리델은 차라리 이 모든 게 농담이기를 바랬다 . 그리델은 자신의 시간 감각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 여기서 깨어나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 그 사이에 백 년이 지났어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 그녀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싶었다 .
< 생각이 , 제대로 정리가 안 돼요 . 이게 무슨 ... >
쉽게 생각하면 쉽다 . 당신은 백 년 뒤의 사람 . 그리델은 백 년 전의 사람 . 단지 그뿐이다 . 당신이 지금 깨어났다고 해서 , 정말로 방금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건가 . 당신들이 이 사막에 어떠한 경위로 오게 됐는지 모르는데 , 그것은 지나친 낙관이겠지 . 당신들이 망자라는 사실이 더욱 명료해진다 . 당신들은 자신들의 < 현재 > 에 묶여 있다 . 그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
그리델에게서 여기가 사후 세계라는 말을 듣고도 , 당신은 어째서 의심하지 않은 걸까 .
문득 ─ 당신과 바벨의 눈이 마주친다 . 새카매서 , 아무것도 비치지 않아야 하는 눈에 당신이 비친다 .
또 한 번 바벨의 안에 구멍이 커다랗게 드러나고 , 당신은 기억을 되찾는다 . 당신이 살아온 땅 . 고향 . 잃어버린 친지와 식구에 대한 것 , 당신을 이루고 완성하는 역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 당신과 당신이 하나로 다시 합쳐지기까지 , 아마도 한 걸음 남았다 .
타자화된 기억은 어떤 감흥도 없다. 남의 일이나 TV를 보는 감각이다. 되돌아보면 모든 생전 기억이 그랬다. 동생이랑 집에 왔더니 모르는 남자가 퍼질러 있던 기억. 동급생과 싸우던 기억. 훈련소에 들어가 솔방울처럼 구르던 기억. 처음으로 낙하산을 진 채 뛰어내리고, 처음으로 사람을 쏴죽인 기억.
자기 자신이 객관적으로 느껴진다. 승려의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열반에 들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여행을 다녔나요?"
한번도 못 가본 곳. 여러 곳을 다녔지만 텍사스는 가보지 못했다는 문맥이 약하게 잡혔다. 그리델의 묻힌 과거에 마중물을 부어본다. 미카엘라는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리델의 과거가 그리델을 스스로 위로하는 수 밖엔..
그리델이 무엇을 기대하다가 무엇에 체념하는지 미카엘라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찾아온게 변명의 여지 없는 죽음이 아니라, 임사의 세계에 빠진 것이라고 믿은 걸까? 그리델의 육체는 병원에 누워 숨만 쉬고 있으니 사막을 벗어나면 눈을 뜨고 일어날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카엘라의 증언이 그리델의 몸뚱이를 백골로 만들고 관과 무덤 안에 쳐박아버린 것이리라. 재에서 재로, 먼지에서 먼지로.
"지금 하는 것도 여행이잖아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아."
뭔 개떡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중 경보 신호가 울렸다. 땅 위에 없고 하늘에도 없다. 그럼 땅 속이다! 망설이지 않고 바벨을 끌어와 칼리번의 등 뒤에 섰다. 서로의 배후를 지킨다.
"소원 같은 건 나중에 하고! 그 바스라지는 모래인간들처럼 되기 싫으면 정신차려요!"
사막이 지옥이라면 불지옥처럼 화끈한 지옥은 아니다. 늪처럼 스멀스멀 기어와 사람의 속을 헤집어놓는 지옥일수도 있다. 그리델처럼. 하지만 미카엘리는 여기가 지옥임을 거부했다.
'나는 무죄야. 애초에 죄라는 건 없으니까. 죄수를 가둘 지옥도 없는 거야!'
모두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착각이다. 사람을 쏴죽이네 마네 해도, 전부 예정된 일이 죽는 자와 죽이는 자를 통해 이뤄졌을 뿐. 꼭 책임을 묻겠다면 그렇게 정한 운명에 물어야지. 왜 찌른 사람을 두고 피 묻은 칼에 손가락질을 하냐는 말이야! 엿이나 먹어라!
당신이 그렇게 믿는 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 당신 스스로 그렇게 납득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 바벨은 싫어하면서도 칼리번의 뒤에 숨는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 칼리번의 넓은 등은 당신과 바벨 모두를 가리고도 다소 여유가 남았다 . 그것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참호와 같아서 , 당신에게 그리운 안정감을 선사했다 .
< ... ... 칼리번 >
반면에 그리델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그리델이 저래서야 칼리번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다 . 당신은 이런 사실을 막연하게 느꼈다 . 방패가 되고 요새가 되어 전위에 서는 칼리번이 ─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무너진다면 , 당신과 바벨은 과연 어떻게 될까 . 사냥감의 입장에 익숙하지 않은 숱하게 많은 병사들이 , 방심과 자만으로 전장에서 어떤 처참한 최후를 맞는지 ─ 지금의 당신이라면 기억할 터 . 매가 토끼를 낚아채는 것처럼 죽음은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 오늘까지 이겨왔다고 내일도 무사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
이대로 칼리번을 방패 삼는 것이 정말로 정답인지 ─ 당신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칼리델은 성벽처럼 굳건해 보인다. 그러나 성주 그리델은 실의에 빠졌다. 성은 적에게 포위되고 중심을 잃은 가신들은 혼란에 빠진다. 성첩의 병사들은 탈영에 대해 논한다. 성벽의 의미는 사라진다.
하지만 그곳에도 베테랑 선임병은 있다.
"그리델...! 이 얼빠진 인간! 여기는 심리 상담소가 아니에요!"
속삭이듯 윽박질렀다. 총알에는 눈이 없다는데 미카엘라의 경험상 총알에도 눈이 있다. 총알은 약하고 무력한 사람을 보고 골라서 죽인다. 늙고 약한 자는 죽기 마련이다. 미카엘라는 그리델을 끌어내렸다. 칼리번을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왜 기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 가르쳐줄까?
"따라해. 따라해!"
"Count to four, inhale." "Count to four, exhale."
전투 중 공황에 빠진 신병들을 한두번 본게 아니다. 손아귀로 그리델의 얼굴을 억지로 쥐어 입을 벌리고, 잡아먹을 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숨을 못 쉬겠으면 눈 뜬 채로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을 해주겠다.
"Count to four, inhale!!!" "Count to four, exhale!!!"
들이쉬고 , 내쉬고 , 입으로 ─ 목구멍으로 ─ 폐로 ─ 억지로라도 숨을 삼켜서 살아 있다는 실감을 갖게 한다 . 죽은 당신들이라도 이 세계에서 주어진 몸은 충실하게 생전의 기능과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서 , 숨을 삼키는 시늉을 하면 정말로 호흡이 이루어졌다 . 살아 있다고 , 스스로를 착각하게 만든다 . 그리델은 거기서 희망을 가졌던 건지도 모른다 .
< 윽 .. >
과격하게 , 우악스럽게 , 불과 수 밀리미터 거리 안으로 다가온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 시선을 피하고 싶어 하는 그리델 . 하지만 도망을 허락하지 않는 당신의 손에 , 그녀의 숲처럼 푸른 초록색 눈이 당신의 샛노란 시선에 꿰인다 . 당신의 의지나 생각 , 감정과는 상관없이 불수의근의 영역에서 멋대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목격하고 만다 .
당신이 왜 갑자기 난데없이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는 그리델은 , 눈을 닫지도 못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봤다 . 얼빠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 생전부터 그녀는 얼빠진 사람이었으니까 . 그렇게 얼빠진 사람이었으니까 여태껏 헛된 노력을 했지 . 오래전에 죽은 내가 ─ 지금 살아갈 노력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 시체가 ─ 망자가 ─ 저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관뚜껑을 열고 걸어 나와 산사람 흉내를 내며 다음으로 다음으로 발을 뻗고 있다 . 발은 땅에 닿지도 않는데 걷는 시늉을 하며 점도 높은 물속으로 깊이 ─ 또 깊이 빠져들고 있다 . 그리델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은 ,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
엉망진창 팔리지 않을 이야기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였다 . 그것에 마침표를 찍고 책까지 덮었는데 ─ 누군가 자물쇠를 멋대로 부수고 남은 여백에 억지로 함부로 그녀가 바란 적 없는 다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일필휘지로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 죽음으로도 완성되지 못하는 삶이라니 .
더는 이야기의 저자가 자신이 아니라 ─ 다른 인물의 붓질에 운명을 좌지우지당하는 일개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단 것을 깨닫자 ,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무서워졌다 . 허무해졌다 . 그래서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려고 했던 건데 . 애초부터 내게 돌아갈 곳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고 .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악취미적인 농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언제까지 , 얼마나 더 싸울 거예요 ? 감정이 결여된 기계 같아 . 살아남으려고 하지 마요 , 벌써 죽은 이야기잖아 . 억지로 이렇게 숨을 이어 붙여봤자 , 빌어먹을 가필 밖에 더 되겠어요 ? >
뿅! 바벨의 머리통을 함몰시킨 꿀밤이 그리델에게도 떨어졌다. 미카엘라는 이곳이 심리 상담소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사막에 천막을 쳐 놓고 심리 상담을 하는 의사 출신의 망자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기가 심리 상담소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안 된다. 발 밑에 괴물을 두고 하는 심리상담은 너무나 짜릿하니까..
"단순하게 생각해요? 살아있으면 살아가는거고 죽어있으면 그대로 죽어있으면 돼요. 죽은 이야기니 가필이니 쓸모없는 사족 다는 거, 나는 엄청 싫어해요."
소리는 귀여운데 아픔은 현실적이다 . 그리델은 고통을 느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역시 말보다 주먹이 빠르게 통할 때가 있다 . 즉효성 높은 처방은 그리델로 하여금 잊고 있던 육체의 감각을 다시 기억해 내게 만들었다 .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살아났다 . 이 무슨 잔학한 짓인지 . 더는 싸우기 싫다고 말하고 있잖아 . 그리델이 입 대신 눈으로 말했다 .
하지만 당신의 우기는 말 ─ 밀어붙이는 급한 말에 순간 꺼낼 말을 찾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 살아 있지 . 죽어서도 살아 있지 . 당신 말대로 단순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 하지만 너무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거 아니야 ? 이다음 뭐가 기다릴지 당신도 나도 아무것도 모르잖아 ! 이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차라리 지금 전부 포기하는 게 나은 선택일 수도 있잖아 ! 하지만 이렇게 입 밖에 내놓으려고 보니 너무나 추하고 , 비관적인 말이라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
당신은 그리델과의 말싸움에서 승리한 듯 보였다 .
< ... 제길 >
마침내 그리델이 입을 열자 그녀의 말에서 속이 타는 냄새가 났다 . 어지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지 . 하지만 지금은 저걸로 됐다 . 멋대로 무너지고 쓰러지고 죽어버리지만 않는다면 , 칼리번은 당신과 바벨의 발목을 잡을 만한 요소가 아니다 . 비로소 싸울 준비가 됐다 . 당신이 그리델을 뒤로하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주변을 살핀다면 , 바벨이 드물게 당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띌 것이다 . 녀석은 당신과 그리델의 대화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미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어쩌면, 진짜로 포기한 쪽은 미카엘라일지도 몰랐다. 운명을 지배하고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려는 의지를, 지금보다 다음이 더 나을라는 믿음을, 왜 우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쳐야 하냐는 고뇌를. 그리고 자기가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뒷일을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단 하나다. 생각하면 피곤해지는 거. 생각과 관계없이 닥칠 일은 닥친다. 예고가 있든 없든. 즐겁든 괴롭든.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요."
그리델의 얼굴을 이제서야 놓아주었다. 쓸모없는 말싸움을 하다가 기습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깡통(총)괴 깡통(칼)의 적색등이 켜진 이후로 이상하리만치 사건이 없어보이긴 하다만. 사건이...
"바벨?"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좀...그렇다? 평소에는 안 그러더니. 미카엘라는 표정관리와 예의의 차원이 아닌 곳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에 저러던 애가 아니었다. 두 국자째 들이부은 모래가 바벨의 내면을 변화시킨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경보가 울리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게 이상하다.
앞을 보라는 당신의 명령에도 바벨은 능청스럽다 .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당신의 시선을 피하는 바벨 . 겉으로 보면 당신의 말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 그도 그럴 게 녀석이 당신에게 문을 열지 않는 걸 . 바벨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당신을 문전박대했다 . 자신이 보는 세계를 당신에게 감췄다 . 촉박한 상황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 당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한 마디 따지고 싶을 것이다 . 장난은 관두라고 . 무슨 생각이냐고 . 어쩌면 말 대신 주먹으로 녀석을 쥐어박을 수도 있겠지 .
그런데 그것보다 먼저 ─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
모래의 바다를 가르고 , 거대한 범선 한 척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지진처럼 거대한 진동이 있고 , 당신들의 발밑이 갈라졌다 . 모래가 폭포와 같이 갈라진 틈 아래로 쏟아졌으며 , 선수의 바우스프릿에 칼리번의 가슴이 관통됐다 . 실력 있는 기사라도 상식 밖의 특공에는 뾰족한 수가 없던지 , 강철로 된 몸이 창을 닮은 뾰족함에 찔려 한낱 쇠꼬치가 되었다 . 당신의 다그침에 정신을 차린 그리델은 가까스로 균열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 끔찍하게 당한 칼리번의 모습에 열심히 비명이나 지르고 있으니 , 한동안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
결국 바벨과 당신만 남았다 . 바벨은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롭게 균열을 피하고 있었다 .
이놈의 자식, 뭐에 씌이진 않았구나. 바벨은 평소대로 싹바가지 없는 바벨이다. 저 요상한 표정도 바벨의 심상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임이 분명하다. 저 머리를 한 번 더 후려 말아 고민하던 차, 위협은 모습을 드러낸다.
"사막....잠수....범선......???"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까먹는 단어조합이라 따져도 진짜 그런 걸 어쩌란 말야. 미카엘라는 어이가 없어서 막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칼리번은 꼬챙이가 되고 겨우 정신줄을 잡아놓은 그리델은 비명만 지르는데, 여기서 자신이 웃으면 정말 미친놈처럼 보일테니까. 물론 바벨이 저렇게 됐으면 웃었을 것이다. 자기 머리통을 뜯어서 던지는 녀석이 배에 구멍 좀 뚫렸다고 위험해지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저게 뭔, 뭐..! 어어..!! 그 뭐지!"
불행하게도 해군 분야에는 미카엘라가 무지하다. 범선의 구조나 해전의 역사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미카엘라는 빈약한 기초지식을 가지고 대충 판단을 내렸다.
"그렇지! 나포! 나포해야 해요! 쏘지 말아봐! 올라타!!"
왜 격침이 아니고 나포냐면, 저걸 타고 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범선도 일종의 괴물이겠으나, 일단은 배..이기도 하고. 기약없는 사막 방랑에 자가용 하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미카엘라는 범선의 배가 다시 모래 위로 떨어지는 때 범선 현측을 째릿 쳐다보았다. 그물 사다리나 아무튼 잡고 오를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땅에서 솟아난 범선이 칼리번을 꿴 채 날아오른다 . 바벨은 당신의 목소리에 공격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것을 멀뚱히 바라만 봤다 .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 한 차례 훑어본 결과 당신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접점은 보이지 않았다 . 배에 오르기 위해서는 바벨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 아니면 누군가 길고 아름다운 금발을 내려주기를 바라야겠지 . 고래처럼 뛰어오른 범선은 당신들로부터 한참 떨어진 장소에 배바닥을 부딪혔다 . 착륙보다는 추락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 겉보기에 무척이나 낡아 보이는 배는 다 닳아 해진 돛을 몇 개 씩이나 주렁주렁 , 낙엽처럼 달고 있었는데 방금의 충격으로 그마저도 올바르게 달려 있지 않았다 .
저대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 그렇지 않는가 . 노리지 않고서야 칼리번의 가슴 정중앙에 정확하게 바람 구멍을 낼 수 있을 리 없다 .
비명 소리 ─ 비명 소리를 따라 그리델을 찾으니 그리델은 어느새 모래 바닥에 고꾸라져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 놀람이나 충격 때문이 아니라 몸을 찢는 아픔 때문에 지르는 비명성 . 그리델의 작업복이 붉게 ─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 얼룩이 진 자리가 눈에 익다 싶어 어디서 봤는지 떠올린다면 , 금방 칼리번이 찔린 자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
< 큭 .. 으아 , 아아악 ! 아아악 !! >
도움 안 되기는 ! 그러거나 말거나 바벨은 표적판에 집중했다 . 당신의 바벨이라면 이 정도 거리는 시행착오나 영점 조절 없이도 가볍게 명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당신도 허락했겠다 , 바벨이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MaaaaAAAAAAAaAaaAAAAAA !?
그런데 , 총성이 먼저 울렸다 .
바벨은 아직 쏘지도 않았는데 , 부풀기 시작한 그의 왼팔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무언가가 꿰뚫고 지나갔다 . 이러한 경험이 이제까지 없었던 지라 , 바벨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오른팔로 왼팔이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
엎드려!! 모래의 요철이 있는 곳으로 바벨을 밀어버리며, 자기 자신도 바닥에 엎드렸다. 저쪽에 총이 없을거라고 방심하고 있었다. 사막에서 총을 쏘는 적이 여태껏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숨을 몰아쉬면서 웃고 있었다. 어디 한 번 해보자 이거지? 총격전이야말로 이 쪽의 전문 분야란 말이야! 바벨 팔 하나 날아간 건 대수롭지도 않다. 곧 저 적이 바벨의 팔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막에 울린 총성은 바벨도 바벨이지만 미카엘라의 안테나가 고슴도치처럼 바짝 서게 하였다. 생전의 치열한 교전들을 떠오르게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신음하는 그리델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여긴 의무병도, 군의관도, 후송될 야전 병원도 없다. 그리고 셋 다 있으면 뭐하나 칼리번 따라서 가슴에 구멍이 난 모양인데. 즉사하지 않은 게 용하다.
그리델은 곧 죽는다. 미카엘라가 더 해 줄 것이 없다. 그저, 바벨이 다쳐도 미카엘라는 멀쩡한데 왜 그리델은 저런지 의문이 들 뿐.
"바벨은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즉시 산개하며 V자형으로 범선에 접근한다. 속력이 느려지더라도 놈의 시선과 사선에 보이지 않게 엎드려서 신중하게.
상대가 고지대에 있어 편한 싸움은 못 될 것이다 . 당신에게 밀려 넘어진 바벨이 모래 범벅이 돼서 일어나더니 , 그제야 자신이 적에게 당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 녀석은 이제까지 당신이 보지 못한 표정으로 분노를 표현했다 . 투명한 도화지 같은 피부를 잔뜩 찌푸리며 주름을 잡는 게 정말 < 바벨 >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 바벨은 잠자코 당신의 말을 듣더니 , 시키는 대로 머리의 고도를 낮춰 당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녀석과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작전 행동에 임한다니 , 불안 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 그리델에게 아무런 기대도 못할 상황 . 머릿수가 부족한 만큼 임무의 부담도 커질 수밖에 .
낮은 포복으로 범선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자 , 어느새 배의 후미에 보이던 그림자도 사라져 있었다 .
불리한 상황도 아닌데 어째서 자리를 비운 거지 . 구린내가 풍긴다 .
< 칼리 , 번 !!!! >
그때 , 배후에서 그리델의 외침이 들렸다 . 찢어지는 노성이었다 . 전장에 떨어진 벼락과도 같은 포효였다 . 듣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털이 쭈뼛 서는 무시무시한 부름 . 거기에 응해 칼리번이 사막을 태울 기세로 무지개빛의 불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범선의 주인에게도 이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겠지 . 칼리번이 가슴을 찌른 장대를 태우고 범선에 올랐다 .
채널. 바벨과의 채널은 단순한 협동 이상을 가능하게 한다. 생전에는 적이 어디 있으니 쏘라고 일일히 무전으로 말해야 하는 것. 채널을 열면 미카엘라가 보는 순간, 미리 팔을 데운 바벨이 보지도 않고 팔만 꺼내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다. 오른쪽에서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깔짝대는 미카엘라와 눈이 마주쳐 조준했더니 바벨의 공격이 왼쪽 옆구리를 때린다는 말이다.
.....바벨이 바벨이라 채널을 거부하고 몸부림 칠까 많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바벨, 복수하고 싶다면 내 말에 따라야 해.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런데.
< 칼리 , 번 !!!! >
미카엘라는 깜짝 놀라 머리를 감싸고 모래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포격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사람의 몸에서 저런 노호성이 나올 수 있는가. 그것도 가슴에 구멍이 뚫려 죽어가던 얼빠진 여자였음에도. 그리고 칼리번이..무지개빛 총공격을... 저게 뭐야?? 일단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겠지?
'잠깐, 정지하고 사격 준비.'
예상보다 조금 이르지만 머리통 깔짝대기를 지금 해야겠다. 미카엘라는 모래더미 위로 머리를 빠르게 올렸다, 그리고 내렸다 하면서 범선 위를 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칼리번이 거대 지렁이를 상대로 저항하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 칼리번은 검만이 아니라 때때로 화염을 다뤄 그 거대한 괴물을 저지했었는데 , 그것의 연장이 저것인 모양이었다 .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배는 한 줌 재 밖에 남지 않을 텐데 , 그래서야 당신의 각본과는 아주 다른 결말이다 . 막으려면 저 불길 속으로 당신 또한 뛰어들어야겠지 .
한 마리 부나방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 당신에게 여전히 문을 닫고 있지만 , 화염을 보기는 바벨도 마찬가지였던지 , 녀석은 성질 급하게 벌써부터 엄폐를 풀고 상황을 직관하고 있었다 . 당신이 제지하지 않는다면 , 저대로 뛰어들지 않을까 .
당신이 먼저 달리기 시작하자 바벨이 바짝 뒤를 쫓아와 당신을 들쳐 매고 달리기 시작했다 . 바벨을 타고 달리자 범선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여져 갔고 , 이윽고 바벨이 도약하니 범선을 오르는데 가장 큰 장해가 됐던 높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바벨로부터 내려와 배 위의 상황을 살피면 , 다 무너져가는 유령선 같은 게 불까지 붙어 더욱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
그리고 ─ 가장 중요한 선상에 칼리번이 있었다 . 적으로 추정되는 모습도 보였다 . 그리델 이상으로 시대를 착각한 차림새의 사람이었다 . 삼베옷에 상투를 틀고 갓까지 쓴 모습이 당신의 나라에는 일찍이 없던 복식이다 . 뿐만 아니라 얼굴을 덮어가리는 해괴한 생김새의 가면까지 쓰고 있어 저것만 보면 누가 괴물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 칼리번의 칼로부터 그를 지키는 여성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 영락없이 저 사람이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
한 팔에 굵은 구렁이 한 마리를 칭칭 감은 여성이었다 . 백발 백안 ─ 창백하게 색이 희박한 피부는 혈관에 피가 흐르지 않는 시체처럼 보였다 . 불 속에 맞는 복장이라 하기 도저히 어려운 얇은 원피스 한 벌 입은 꼬락서니가 대번에 그것이 가면 쓴 사람의 괴물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 아니라면 어떻게 칼리번의 맹공으로부터 저렇게 살아남을 수 있겠어 .
아무튼 기회였다 . 칼리번에게 시선을 팔려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
사람 하나에 괴물 하나. 미카엘라와 바벨, 그리델과 칼리번, 가면과 구렁이. 그럼 범선은? 누군가의 괴물이 아니라 그저 기물인가? 배를 빼앗으려는 미카엘라의 계획에 한줄기 빛이 드리운다. 그러나 미카엘라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쉬이..'
틀림없이 바벨의 팔을 날린 건 총이다. 괴물이 뭔가 쏘는 걸 총이라고 비유하는게 아니라, 화약으로 납탄을 쏘는 그 총소리가 났었다.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댄다. 칼리번은 알아서 잘 할거고 바벨 너! 안 들켰으니 잠시 기다려. 누가 총을 쐈지? 그게 중요하다. 미카엘라와 바벨이 적의 뒤를 잡은 것처럼 또 다른 적이 뒤의 뒤를 노릴 수도 있다. 솔직히 가면과 구렁이는 행색이 총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 같아서.
아니면 혹시... 거기 가면 쓰신 분. 생전에 쓰던 머스킷이라도 들고 오셨나? 죽을 때 빈손으로 가는게 법칙인데 반칙 쓰는 건 아니겠지?
선실에 숨었다면 내려가서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모를 것이다 . 바벨은 또다시 자신을 말리는 당신이 미운지 표정을 일그리고 있었다 . 칼리번과 여자의 승부는 팽팽하지만 , 점차 칼리번을 향해 승부의 판세가 기울고 있었다 . 베기와 찌르기를 번갈아 취할 뿐인데 단지 그것만으로도 적은 수세에 몰리고 숨 쉴 틈을 잃어갔다 . 기회를 찾아 여자가 팔에 감은 구렁이를 뻗어보기도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할 뿐이었다 . 바벨이 저 자리에 대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 . 저 거리는 칼리번의 독무대였다 .
< ... ... ... >
이런 접전을 잠자코 지켜보는 가면의 심기는 결코 편해 보이지 않았다 . 눈이 있다면 싸움이 불리해졌다는 것을 모를 리 없겠지 . 아마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느라 바쁘지 않을까 .
가능성을 점치면서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당신은 배후에서 접근하는 인기척을 눈치챌 수 있었다 . 그것은 끔찍한 생김새의 괴물이었다 . 파리머리에 네 발 짐승의 몸이 붙은 괴물이었다 . 그것들은 세 마리가 하나처럼 숨죽여 돛에 붙어 있었다 . 불길을 피하느라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있지만 , 저들이 선상의 모든 사람과 괴물들에게 적의를 가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오른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더니 한 데 뭉쳐서 불길을 피하는 파리머리의 괴물 세 마리를 겨냥하는 바벨 . 바벨이 한 팔에 모은 열은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고작 괴물 세 마리를 상대로 쓰기에는 과분한 양이었다 . 명중한다면 괴물은 물론 돛대까지도 부러뜨릴 것이다 . 당신이 가능한 한 배를 손상 없이 손에 넣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 걸까 .
그런데 괴물들의 겹눈은 당신보다 뒤에 서 있는 바벨까지도 빈틈없이 포착하고 , 바벨이 자신들에게 어떤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눈치채냈다 . 그것들은 가능한 소리 죽여 ─ 당신과 마찬가지로 어부지리를 노리던 모양인데 , 또 다른 불청객이 나타나자 더는 불길만 피하며 존재를 감추고 있지 않았다 .
말인즉슨 ─ 당신의 계획과는 다르게 상황이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 피부에 납작 달라붙은 날개를 펴고 넓게 뛰어오르는 세 마리 . 바벨이 발사 직전에 조준을 고쳐 한 녀석을 맞췄지만 , 네 개의 다리 가운데 하나가 겨우 떨어졌을 뿐 치명상은 아니었다 .
< ... ! !? !! >
바벨이 만드는 소음이 어마무시하다는 것은 , 당신도 이미 익히 아는 사실 . 눈 앞의 싸움에 집중하느라 배후에 무방비하던 가면인도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
바벨이 열을 모으는 것을 보았다. 미카엘라는 눈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바벨을 제제하지 않았다. 멍청한 지휘관들이 시시콜콜 간섭하다 작전이 어그러지는 꼴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바벨은 청개구리지만 전투에서는 믿을 수 있는 기량이 있으니, 녀석에게 온전히 맡기고 미카엘라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이 배가 돛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닐테니 돛 좀 망가지면 어때.
"..."
슬금슬금. 가면의 뒤로 다가가다가 바벨의 포성이 울리자 땅을 박찼다. 이 미카엘라라는 망자는 일반적인 망자와 구별되는 다른 특성이 있다. 폭력과 싸움에 대한 심리적 제한선이 없는 미카엘라. 다른 망자가 괴물 뒤에서 싸움을 지켜볼 때 그녀는 그녀대로 가드를 올리고 스텝에 시동을 거는 정신을 가졌다. 자기 손에 소총이 없어도 없는대로 싸운다. 이를테면....
"깡총!"
미카엘라에게 깡이 있고 바벨에게 총이 있으니, 이 듀오는 깡총의 강한 덕목을 갖춘 것이다. 로우킥이 가면의 오금으로 날아든다.
의태어로 귀엽게 포장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 당신의 발차기에 흉측하게 무너지는 가면인의 무릎 . 필시 상상하기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 그런데도 얄팍한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다니 . 적이라도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 가면인은 당황하거나 아픔을 호소하며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대신에 , 구렁이를 감은 여자를 곁으로 불러왔다 .
그것이 자충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 당신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었을 것이다 .
- LaAAAAAA !!!
칼리번은 여성의 모습을 한 괴물이 , 빈틈을 드러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한 검격으로 검의 간격을 빠져나가는 여성의 팔을 베어냈다 . 회색을 허공에 흩뿌리며 썩둑 잘려 떨어지는 괴물의 팔 . 하지만 그 정도 손해는 일찌감치 예상한 것처럼 다음으로 이어지는 행동이 재빠르다 . 아직까지 무사한 구렁이를 감은 팔을 뻗어 , 당신을 노리는 것이다 .
구렁이 괴물에게도...무언가 있겠지. 스트레이트를 날리면 그 팔이 날아가서 서로 닮은 꼴이 된다. 저 괴물을 잡는 건 칼리번의 역할. 미카엘라는 틈을 만들어주면 충분하다. 고기방패를 세우는 것이다. 그녀의 양 팔이 오금을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가면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stand up! a**hole!"
한 손은 멱살을. 그리고 다른 한 손은 갈비뼈 아래로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밀어넣어서 말이다. 부디 아픔을 느끼길 바란다. 저항하지 못하도록, 이성을 잃도록.
아무래도 당신이 더 가까웠으니까 , 뱀이 당신을 무는 것보다 먼저 , 가면인이 당신의 인질이 된다 . 가면인에게 있어 그것은 비극이었고 , 구렁이는 비참하게도 당신을 목전에 두고도 벌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구렁이는 열심히 뻗은 몸을 , 다시 처량하게 되물렸다 . 이것 보라지 . 제아무리 날고 기는 괴물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주인을 인질로 잡히면 아무 소용이 없다 . 육탄전에 자신이 있는 당신에게 이것은 희소식이었다 . 같은 사람 대 사람의 싸움이라면 , 괴물들이 대치하는 틈을 타 상대편 사람을 제압하기만 해도 승부에서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
구렁이의 여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 더는 칼리번에 대해서도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다 . 자신에게 전의가 없음을 나타내고자 , 모든 방어 행위를 포기하고 말았다 . 아무래도 당신의 승리인 것 같다 . 축하의 팡파르 대신에 가면인의 비명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 어떻게 된 게 저 양반은 당신이 가죽 밑으로 뼈를 붙잡고 쥐는데도 침음만 조금 흘리고 말았다 .
어디 그것뿐인가 . 저 구렁이 여자가 칼리번에게 베인 영향으로 가면인의 팔 또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인데 ,
저렇게 기 센 사람이 아무리 아프다고 , 목숨이 아깝다고 , 싸움을 포기하고 관둘까 . 어차피 싸우고 죽이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는 이 세계에서 , 패배는 죽음의 다른 표기에 지나지 않았다 . 그것은 ─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
이번 건은 실수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 정말 아무것도 아닌 곁눈질이었다 . 바벨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한 찰나의 빈틈 . 당신은 방심한 것도 , 낙관한 것도 , 오만한 것도 아니었다 . 단지 ─ 상대방의 각오가 비정상적이었을 뿐이다 .
구렁이가 입을 연다 . 저대로 다시 달린다고 해서 당신에게 닿을 거리도 아닌데 . 여자는 남은 팔을 당신에게 뻗어 , 구렁이의 목이 일자로 펴지게 했다 . 구렁이의 벌어진 입 속에 보이는 작은 반짝임 . 구렁이의 목이 풍선처럼 부풀더니 , 바늘을 찌른 것처럼 한 순간에 폭발해 입 안에 감춘 흉기를 당신에게 ─ 가면인에게 뱉어냈다 .
만약 안이하게 생각해 방패만을 믿고 얌전히 서 있었다면 , 당신의 배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을 참이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선을 피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당신은 옆구리의 살을 조금 내어주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 화살이 가면인의 배에 거창하게 터널을 만드는 와중에도 말이다 .
가면인과 당신을 지난 것만으로는 위력을 다 죽이지 못해 , 화살은 더 나아가 범선의 선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 바벨의 공격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능력으로 보이는데 , 피해를 미치는 범위가 조금만 더 넓었다면 당신까지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
- LAAAAAAAAAAA !! !
자신의 주인을 스스로의 손으로 장사 지낸 구렁이의 여자는 , 당신만 살고 주인은 죽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
칼리번이 마저 여자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지만 , 여기저기 불을 뿜어낸 영향인지 제자리에서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 더 늦기 전에 저 구렁이 여자를 해치워야 후환이 남지 않을 텐데 , 이럴 때도 바벨은 자신의 일을 하느라 바빴다 .
세 마리의 파리머리를 상대로 녀석은 여지껏 하지 않던 근접전을 하느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 세 마리가 한 몸처럼 움직이니 행동이 굼뜬 바벨은 녀석들에게 일방적으로 농락을 당하고 있었다 .
이름도 모르는 가면인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모두를 엿 먹이는 선택을 했다 .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머리 굽히지 않겠다는 반골 정신 . 만약 다르게 만났다면 , 당신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 친구가 됐을지도 모르지 . 최소한 저 놈의 뱀이 쏘는 화살에 생명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 구렁이는 또 한 발 , 화살을 속에서 게워내 자신의 입에 물렸다 . 설마 두 번씩이나 표적을 빗맞추는 실수를 할 리는 없으니 , 당신은 보다 즉각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 하지만 누가 그럴 수 있을까 .
바벨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엉망진창 박살 난 선실로 자신을 던졌다 . 통로가 하나뿐이니 파리머리 녀석들도 섣불리 따라 들어갈 수는 없으리라 . 칼리번의 불길은 점차 잦아들어 , 잔불만 겨우 남은 상태가 됐다 . 저렇게 시들해져서는 , 더는 선상의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 칼리번은 남은 여력을 모두 사용한 것처럼 보였다 .
자신을 모두 태우고 재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
바벨을 추격하기가 곤란해지자 , 파리머리들은 다음 목표를 찾았다 .
선상에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당신과 저 구렁이 여자뿐이니까 . 목표는 금방 정해졌다 .
당신은 ─ 옆구리에 구멍이 났지만 출혈도 보이지 않고 움직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 하지만 무작정 다가가기도 곤란한 것이 , 저 구렁이는 칼리번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은 전적이 있었다 . 당신이 아무리 육탄전에 자신이 있더라도 , 칼리번보다 잘하기는 어려울 테니 함부로 덤벼봤자 활에 맞아 죽는 대신 뱀에 물려 죽게 될 뿐 . 살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
칼리번과 그리델. 멋지게 부활하는가 하였더니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들이 쓰러지고, 잔불이 사그라들고. 마음이 없는 것들이 선상에 남았다. 바벨의 안전이 확보되자 미카엘라의 머릿속 톱니바퀴가 하나씩 맞물린다. 그림이 그려진다는 말이다.
'제발, 바벨 채널 열어! 빨리 채널! 채널 채널 채널 채널 바벨바벨바벨바벨바벨빨리대포한방빨리!!!!'
일일히 말로 하기도 부족할 정도로 상황이 빠르게 돌아간다. 다급하고 절박하게 연결 요청을 보냈다. 모습이 바뀐 바벨이 계속 채널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분당 명령수가 몇을 넘어갔는가는 차마 세지 못했다. 뱀 아가리에 화살이 물렸다. 장전되었다. 미카엘라는 가면의 시체를 놓지 못했다. 몸을 가릴 물체는 일말의 안정감을 주었다.
총을 손에서 떼고 몸에다 달아둔 채로 돌아다니다, 역시 총을 쥐지 않은 적과 마주칠 때의 감각과 같았다. 눈이 마주치고 누가 먼저 뽑아서 쏘냐 하는 데스게임 단판. 미카엘라는 딱 한번 빼고 전부 이겼다. 여기서 2패가 적립될지도 모른다. 아직도 두뇌의 호르몬 체계가 작동하는지, 아드레날린이 해일처럼 쏟아져 시간까지 느리게 보일 지경이다.
아작난 선실. 꼭 선실이 아니라도 건축물 안과 그 사이에서 벌이는 싸움이면 미카엘라가 구렁이를 압도할 수 있다. 바벨을 조종한다면 반드시 구렁이를 압도할 수 있다. 벽과 벽, 문과 문, 창과 창, 거리와 거리에 널린 수많은 파편과 폐허를 넘나든게 몇 년이냐. 숨고, 구르고, 위치를 바꾸고, 틈새로 쏘고, 몰이사냥하고, 기습하며 때론 기습당하던 경험이 몇 번이냐는 말이다.
바벨이 한 방 쏴서 선상 괴물들의 대열을 흐트려놓으면 미카엘라가 뒤따라서 선실로 몸을 던진다. 라운드가 숨바꼭질 놀이로 바뀌면 그때부턴 완전히 원 사이드 게임이다. 그러니까 구렁이의 다음 화살에 맞아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총잡이 간의 결투를 떠올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 . 정말로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 바벨이 무슨 생각 ,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당신과 동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고 바벨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다 ! 저 여자나 칼리번처럼 ! 바벨로서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을 텐데 , 그래서 이제까지 열심히 당신을 지켜온 것 아니겠는가 . 이제 와서 고작 ─ 이런 스쳐 지나는 싸움에서 녀석이 당신을 배신할 이유를 찾았다고 ,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
저 파리머리들은 누구를 노리고 있을까 . 노려지는 목표가 당신이라면 선실로의 도망은 기회가 생겨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 구멍 난 그물도 아니고 , 바벨이 거기로 도망치는 것을 두 눈 뜨고 빤히 지켜봤는데 당신까지 달아나게 두진 않겠지 .
화살 ─ 구렁이 ─ 파리머리 ─ 바벨 ─ 선실 ─ 범선
회전판이 회전력을 잃어가고 , 마침내 당신의 사인이 정해진다 .
섬뜩한 살煞이 구렁이의 째진 입을 지나 , 당신에게로 날아든다 .
눈으로 보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니고 , 피하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가속도 붙기 시작한 운명은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 당신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
하지만 ─
하지만 탑은 ─ 운명에 저항하는 의지의 집합이다 . 운명이 높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해서 , 그것을 가지러 갈 수 없다고 포기하기보다 ,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더라도 , 닿으려는 노력을 마지막까지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다 .
바벨은 당신에게 문을 여는 대신에 , 당신이 서 있는 바닥을 무너뜨려 당신을 선창으로 떨어뜨렸다 .
2패 적립이구나. 이번에는 화살이 보였다. 피할 수는 없었지만 뱀 아가리에서 쏘아져 나오는 화살촉이 정확히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글렀네. 이번에는 진짜 죽나? 또 다른 곳에서 눈을 뜰 수 있을까? 살아있으면 살아가지만, 죽음이 왔으니 죽어야 할 때. 미카엘라는 이미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기를 원하는 맹목적 의지가 있다. 이번에는 그 의지가 미카엘라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오늘은 죽을 날이 아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다. 오늘은!
쾅! 밑바닥이 훅 꺼지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선창 바닥에 넘어진 눈에 구멍난 갑판과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동물적인 감각은 포기도 납득도 빠르다. 그녀는 또다시, 죽음을 속였다. 매에게 잡혀가다 떨어진 들쥐처럼 미카엘라는 필사적으로 선창 안을 향해 들어간다. 가면의 시체를 질질 끌면서.
"바벨! 내게 와요! 수복해!"
이제와서 사람시체 괴물시체 가릴 이유도 없다. 선상의 괴물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자기들끼리 싸우려 할 것이다. 여유가 생길 때 일보 후퇴, 합류와 재정비 후 다시 싸워보자. 구렁이고 파리고 전부 죽었다!
//바벨에서 바벨탑이 떠오르긴 했지만 이런 의미가 있을줄은 몰랐습니다. 바벨 멋지다.. 바니바니 바니바니..
불에 댄 것처럼 황급하게 , 어둠 속으로 피신하는 당신을 바라보는 바벨 . 바벨은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하게 , 기계적으로 ─ 손목 밖에 남지 않은 팔을 뻗었다 . 가면인의 유해를 자신의 안에 담기 시작했다 . 그것은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고 ─ 모든 것이 희미한 회색으로 , 회색으로 변해가는 도중이었다 . 땅바닥에 뚝뚝 떨어진 얼룩조차도 회색으로 변하며 바스러지니 , 가면인이 이 세계에 존재했던 흔적은 곧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리라 . 선상의 저 여자마저도 사라진다면 더는 누구도 그를 추모하지 않겠지 . 바벨은 그렇게 모든 것을 삼켰다 . 부족한 살을 채웠다 .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다 .
이제 인간이 자원이 될 수 있음을 안 미카엘라에게, 인간은 괴물과 같이 잠재적 자원이 되었으려나. 일단 단물을 다 빨아먹은 가면인이 더 이상 안중에 없다는 건 알겠다. 이제 최고의 상태는 아니어도, 최적의 상태가 되었다. 싸움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건 패배의 지름길이다. 바벨이 합류하였으니 채널을 재촉하는 건 그만두자.
"미리 쏠 준비해요. 팔 한짝 머리 하나 전부 날리진 말구!"
촌철살인이라고 하였으니 딱 그만큼. 손가락 하나쯤 해서 총알 사이즈로 쏠 수는 없는 거니? 무조건 폭풍처럼 쓸어버릴 필요 없다. 표적을 뚫고 지나갈 힘이면 차고 넘친다. 화력은 다다익선 거거익선이라도 그들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그러려면 선실까지 올라가야만 하는데 , 바벨 이 녀석 , 어떻게 내려왔는지 계단이 밟을 수도 없게 망가져 있다 . 저기서 신나게 구르기라도 한 걸까 . 저래서야 당신은 계단을 사용할 수 없다 . 바벨의 도약력을 빌리지 않으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 같지가 않다 . 그런데 그러자니 ─ 문이 너무 협소하다 .
이 녀석이 자칫 실수하기라도 하면 요란하게 부딪히고 다칠 건데 , 바벨을 믿을 수 있겠나 . 차라리 떨어진 구멍으로 다시 올라가느니만 못할 것이다 . 그럴 경우 ─ 선상의 싸움이 덜 정리됐다는 가정 하에 새우 등이 터질 수도 있겠다만 .
계단을 어떻게 밟았길래 저 꼴이 나. 이걸 확 그냥! 길이 막혔으니 새 길을 만들거나 돌아가거나 해야 한다. 당장 보이는 길은 아까 미카엘라가 떨어진 그 구멍인데, 문제는 선상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두더지처럼 함부로 튀어나왔다가 망치로 머리를 맞는 상황은 사절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 방법이 있지.
"바벨, 받쳐줘요!"
훌쩍 뛰어서 구멍 가장자리를 손아귀로 꽉 잡고, 눈만 살짝 올려서 선상의 상황을 보는 것이다. 턱걸이를 하듯 몸을 올리면 자세가 나오리라. 안전한 상황이면 그대로 등반. 양쪽에게 들켜서 새우등이 터지려 하면 손을 놓아버리면 된다. 바벨이야 미카엘라를 따라서 올라가거나 떨어지는 그녀를 잡아주면...
"둘, 셋!"
....바벨은 과연 손을 놓고 떨어지는 미카엘라를 공주님 안기로 받아줄 것인가? 이 생각을 조금 더 빨리 했었어야 할지도.
바라본 선상의 상황은 참담했다 . 여기저기 난간은 망가졌지 , 포어 마스트는 아예 부러져 있었다 . 덤벼드는 파리머리 떼를 사냥하기 위해 아끼지 않고 화살을 쏴댔던 모양이다 . 그리고 현재까지도 ─ 여자는 살아남아 있었다 . 파리머리 가운데 바벨에게 다리를 잃은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 남은 두 놈이 여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 전장의 상황은 여자에게 불리해 보인다 .
배의 다음 주인을 예정하고 있는 당신에게 , 더 이상 배가 손상되는 일은 달갑지 않다 . 한 시라도 빨리 이 미친 싸움을 끝내지 않으면 , 제아무리 모래를 헤엄치는 배라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
바벨에게 그렇게 섬세한 요구를 하다니 .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지만 , 시키는 대로 얌전히 조용히 따를 녀석이 아니란 것은 당신도 알지 않는가 . 대롱대롱 매달려서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피라고 , 바벨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 이렇게 몸도 다 회복됐겠다 모조리 다 박살 내는 게 더 빠르지 않겠나 . 바벨의 전투뇌가 또다시 나쁜 주기를 맞았다 .
바벨이 시원찮은 모양새로 간당간당하게 매달린 당신을 향해 뛰어오르더니 , 당신을 붙잡고 얇은 나무판자를 다 때려 부수며 선상으로 복귀했다 . 바벨과 당신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화들짝 놀란 파리머리들은 잘못된 반응을 보이고 말았고 , 그 틈을 구렁이의 여자는 놓치지 않았다 .
살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싶어 살펴보면 구렁이의 쭉 찢어진 입이 파리머리를 문자 그대로 으깨고 있었다 . 동료를 모두 잃고 외톨이가 된 마지막 남은 한 마리는 , 그 즉시 전장을 이탈하려고 했지만 바벨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바벨은 저 여자에게 과시하는 것처럼 정확한 사격으로 선상 이탈을 시도하는 파리머리를 명중시켰다 .
일격필살 , 파리머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고 ─ 바벨이 당신을 짊어지고 선상에 내려 앉았다 .
아아니! 구렁이를 먼저 노려야지! 죽이지 않으면 죽는 판에 결투라도 하게?? 안타깝게도 바벨이 칼리번에게 하던 짓을 생각하면 바벨은 정말로 결투하기를 좋아하는 놈이었다. 썩을. 이러면 엄폐물 사이를 넘나드는 미카엘라의 특기도 죽이 되었다. 머리채를 잡고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으니.
"아..그...모르겠다 나도.."
그리델이 칼리번과 함께 쓰러지듯 구렁이도 빨리 주인따라 가면 좋겠으나, 그럴 기미는 없어 보인다. 괴물 둘이 결투를 하는데 힘없고 가엾은 인간은 뭘 할 수 있죠? 사방팔방에 굴러다니는 난간 쪼가리라도 몽둥이처럼 들까.
"어디 해 봐요."
발목이나 안 잡으면 한 사람분 이상이다. 미카엘라는 여느 때와 같이, 바벨의 뒤에 서서 한 손으로 어깨를 잡았다. 바벨이 가는 대로 미카엘라가 따라간다.
겨우 검지 손가락 하나 소비했을 뿐인 바벨에 반해 저 여자는 만신창이 , 서 있는 게 기적처럼 보였다 . 유일한 무기였던 구렁이도 파리머리들을 상대하면서 상할 대로 상해서 , 처음 마주했을 때의 위압감은 더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 바벨이 아무 생각 없이 방아쇠를 당기면 , 그대로 맥없이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
도망칠 수 없다. 놈들은 일행을 공격하고 스스로 적이 되기를 자처했다. 살아서 도망가게 하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다. 배를 몰아 돌격할 때부터 자기가 당할 가능성도 반대로 생각했겠지?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지? 당연히 자기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철면피스러운 일이었다.
"바닥."
바벨이 미카엘라에게 했던 것처럼. 그러나 대상이 달라졌으니 이건 구원이 아니라 나락으로 밀어버리는 짓이다.
바닥을 무너뜨려라 . 직접 사격을 할 생각으로 들떠 있던 바벨에게 당신의 명령은 다소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 .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지 , 아니면 무슨 괴이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 당신의 조심성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다 . 서로의 생명을 판돈 삼아 벌이는 사투에서 지나친 게 어딨겠나 .
- La !
이제 성한 부분이 오히려 더 적은 선상에 시원하게 구멍을 만드는 바벨 . 손가락 하나를 통째로 갖다 쓴 공격은 겨우 바닥을 부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앞을 가로막는 장해물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
저대로 저 여자를 나락 밑바닥으로 보내겠다고 , 그런 결의가 느껴지는 위력이었다 . 이미 만신창이였던 여자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어 형편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 애처롭게 하나 남은 팔을 뻗어보지만 허공을 가로지를 뿐 , 그녀의 모습은 선창의 어둠 속으로 떨어져 사라졌다 .
시작부터 아수라장인 싸움이었다. 그리델은 주저앉고 칼리번은 가슴에 구멍이 나며 바벨의 팔이 날아갔다. 그 판국에 파리머리가 끼어들고 가면에게 엿을 먹어서..
이 죄다 꼬여버린 상황을 바벨의 손으로 끊을 것이다. 자기를 풀어보라며 사람을 놀리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에게 할 대답은 칼질뿐이야! 미카엘라는 바벨과 함께 구멍 앞으로 전진하려 한다. 마지막 확인사살이 기다린다. 구렁이가 칼리번처럼 마지막 수를 꺼내지 않기를 바랄 뿐. 그랬다간 이 배가 두쪽이 나고 말 테니까.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 어째서 가면쟁이가 당신들을 습격했는지 , 아직 이유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 아닌가 . 도마뱀붙이처럼 배에 붙어 있던 세 마리의 파리머리들은 , 대체 무슨 사연으로 거기에 있던 걸까 . 당신이 이유를 붙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 그것들은 계속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 당신이라면 ─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겠지만 .
그리고 칼리번 , 그리델의 상태에 문득 관심을 가진다면 , 여자가 서 있던 너머에 힘없이 무릎을 꿇은 강철 갑옷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 칼리번은 모든 불을 쏟아내고 ,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체력까지 모두 소모한 것처럼 더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늘어졌다고 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 언제나 꼿꼿하게 서있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혼자서는 일어설 수조차 없어 보였다 . 칼리번이 저렇게 됐는데 , 그리델이라고 무사할까 .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
- maaaaaaa
바벨에게 있어 칼리번이 저렇게 돼버린 것은 유감이겠지 . 바벨은 칼리번이 이렇게 허무하게 , 남의 손을 빌려 멸망하자 작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 부족한 감정을 드러내며 , 녀석은 아쉬워하고 있었다 . 이렇게 된 이상 원흉에게라도 화풀이를 해야겠지 . 바벨은 그럴 생각처럼 새롭게 생겨난 구멍 앞에 섰다 . 달빛만으로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선창은 , 바로 방금 전 당신들이 빠져나온 곳임에도 낯설기가 그지없었다 . 빠지면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할 것처럼 , 깊고 깊게 보이는 암흑 . 그러나 바벨은 , 그곳이 아무리 어둡고 , 위험하더라도 당신의 명령 한 마디면 과감히 뛰어들 것이다 . 못다 한 싸움을 마무리 짓기 위해 .
칼리번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델도 시신이 되어 있으리. 생전이었으면 훈장을 추서받을 수도 있는 무훈이다. 하지만 사막에는 나라도 군대도 없다. 나라와 군대가 없는데 싸움은 있다. 나라와 군대가 사라지면 평화가 찾아온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 생각이 짧은 사람임을 사막이 증명했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아요."
"하지만 복수를 할 수는 있죠. 산 자를 위해서."
Death from above. 미카엘라는 이미 준비되었다. 죽어서 살아가던 자를 위해. 강하를 명령한다.
깊게 친해진 사이는 아니었다 .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상대였다 . 하지만 한 때라도 서로의 등을 맡겼던 사이가 아닌가 . 원통함을 달래기 위해 보복과 복수의 시간을 가질 가치는 있었다 . 바벨은 작게나마 당신에게 자신의 시야를 허락했다 .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보는 것을 당신도 함께 보도록 했다 .
─ 그런데 꽤나 이상하다 . 녀석이 보는 세계가 전과 같지가 않다 . 녀석의 눈은 보통은 보이지 않을 것들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 적외선 고글을 장착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것의 내부까지도 투영되어 보이고 있었다 . 이런 눈이 있다면 누가 , 어떻게 감히 바벨의 앞에서 숨을 수 있겠는가 . 녀석이 당신의 발판을 부술 때는 , 그 자신만의 확신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
- Maaaaaaaaa
쓰러져 더는 원만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적을 향해 , 바벨이 뛰어내렸다 . 같은 구멍을 사용해 추락하니 같은 곳에 떨어지겠지 . 피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짓밟혀 숨통이 끊어질 것을 , 구렁이 여자는 발버둥 치며 바벨의 낙하를 피했다 .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 구렁이의 머리를 바벨에게 향했다 .
한 쪽 눈으로 바벨의 시야가 보인다. 깡통 시절 보았던 시야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고양이처럼 어둠을 꿰뚫어보는것도 놀랄 일인데 눈에서 엑스레이라도 쏘는 것마냥 사물의 뒤까지 볼 수 있었다. 미카엘라가 이런 눈을 가졌으면 그 날 죽지 않았을테고, 특수부대에 지원서를 냈을지도 모른다. 문 뒤에 숨은 테러리스트가 몇명인지. 미카엘라는 전부 알고 있다네.
"밟고 끝내버려요! 칼리번의 복수! 그리델의 복수!"
세세히 지시하진 않았다. 대신 콜로세움의 관중처럼 팔을 흔든다. 폭력은 약처럼 중독되어 실존적 철학적 고뇌를 마비시킨다. 복잡할 것 없이 내키는대로 부숴놓고 '운명이었다' 한 마디면 만사가 간단해지는 거다. 미카엘라의 운명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뜻한다. 정해진 것은 과거에 속하는 일이니까.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고 이끌어 나갈 수 없다. 이미 종료되고 확정된 것을 뭐 어쩌자는 것인가.
입으로 복수를 외치는데 머리는 그게 아니다. 그리델이 죽어도 그런가보다 칼리번이 죽어도 그런가보다. 일단 때리고 죽이고 보자. 스스로를 마비 상태에 빠뜨리면 둘의 죽음에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하는지 고뇌하지 않아도 되니까.
"Kill! Kill! Kill!"
생각할 필요 없고, 생각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 없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스스로를 녹여버리는 것이다. 바벨이 가진 의지의 폭력과 정 반대인 도피적 폭력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극과 극은 통한다. 둘의 마음은 통한다. 구렁이를 죽이자!
결투란 , 고전적이지만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 바벨은 상대가 < 쏘는 > 놈이라는 것을 안다 . 굴욕스럽게도 먼젓번에는 한 발 늦었으나 , 지금도 과연 그럴까 . 바벨은 승기를 타고 있었다 . 맞바람에 꺾이려는 저 여자와는 다르다 . 바벨은 언제라도 쏠 수 있었고 , 낭떠러지에 적의 등을 밀기만 하면 됐다 .
- maaaaaaaaaaaa - laaaAAaaaAaaaa
안 나오는 소리를 목을 찢어내는 여자에게 , 재빨리 손가락을 겨누는 바벨 . 거의 동시에 구렁이가 입에서 화살을 뱉어냈지만 , 바벨은 그것조차도 예상한 것처럼 구렁이의 입을 스트라이크 존 삼아 속구를 때려박았다 . 바벨의 공격이 화살촉에 닿고 살을 부수고 구렁이를 찢어놓았다 . 여자는 하나 남은 팔까지 잃고 , 공격의 여파에 반신이 휘말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
라스트맨 스탠딩의 주인공은 바벨이었다 . 그리고 당신이었다 . 바벨은 쏘느라 소비한 손가락을 다시 만들어내고 , 쓰러진 여자를 향해 겨누었다 .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 아무리 강한 괴물이라도 , 한계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상 . 바벨은 마지막 한 발을 쏘는 순간까지도 철저히 방심하지 않고 준비하고 대비했다 . 상처 입은 맹수야말로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일까 .
- 쾅 !
열기로 가득 찼지만 텅 빈 것처럼 무미건조한 소리였다 . 구태여 말로 설명할 필요 없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죽음 . 바벨은 자신의 손으로 결말 지은 이야기를 음미하는 것처럼 바라봤다 . 어떤 역사와 사연을 갖고서 이 세계를 방황하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 최후는 당신의 손으로 지었다 . 이야기의 시작에 관여하지 못했어도 마무리를 장식했다면 , 당신 역시 저것의 일부로 기억되겠지 .
바벨은 그것이 모래로 화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 선상으로 돌아왔다 . 한 사람 땅에 묻은 것치고는 별달리 부상도 없고 , 이 정도면 완승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
문제는 이 배와 칼리번이었다 . 바벨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칼리번을 바라봤다 .
끝은 담백하고 무미건조했다.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영화처럼 장엄한 죽음을 맞는다. 대부분의 죽음은 고통스럽고 추잡하거나, 심지어 시시한 것이었다. 가면과 구렁이가 어떤 삶과 고민을 가지고 살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어서 모래바람처럼 흩어졌다. 미카엘라와 바벨의 동행자들도 그러하다.
"걔 죽었어요. 젠장.. 그리델도 죽었겠지? 시체라도 확인해야 하나."
다음에 만나는 사람이 그리델 같은 사람이란 보장이 없다. 환경상의 확률로 따져보면 가면 같은 미친놈들만 줄줄히 튀어나오는게 더 합리적이다. 칼리번의 전투력까지 감안하면 이 둘의 손실은 꽤... 불쾌한 일이다.
말은 뭐 비극적인 현실을 슬퍼하는 바벨에게 상기시키는 것처럼 했지만 바벨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애도의 시간을 가지던, 시체를 쪼아먹는 독수리처럼 바벨장을 지내던. 칼리번에게 감정이 있던 건 바벨이니까 바벨 마음대로 할 일이다.
칼리번을 보던 바벨을 보던 미카엘라는 선상 아래로 매달려서 푹 뛰어내렸다. 모래벌레를 잡다가 멀리 나가떨어졌을 때를 고려하면 다치진 않을 것이다. 푹신한 모래 위에 푹 넘어지긴 하겠지만. 그녀는 그리델을 확인하러 걸음을 옮긴다.
바벨의 생각은 단순했다 . 저대로 바스라지게 내버려두는 것은 아깝다 . 저게 나름대로 강력한 < 소재 > 라는 것을 , 바벨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 적자생존 , 먹는 자가 살아남는다 . 당신도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을 사실이다 . 당신의 안에 윤리적 망설임 ,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방금도 확인하지 않았던가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은 당신에게 동의를 구했다 . 바벨은 결국 당신의 분신에 지나지 않는다 . 자신의 안에 < 다른 것 > 을 들일 때는 , 반드시 당신의 허락이 필요했다 .
모래 위를 걸으며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를 더듬고 있었다. 저번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것이 담배를 찾는 습관임을 알고 있다. 갖가지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데 갑자기 주머니에 라이터랑 담배가 뿅 생기는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나... 헛생각을 했다. 시선이 느껴져 뒤를 보면 빤히 쳐다보는 바벨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괴물을 죽이고 잡아먹자. 애기 입에 든 것도 빼앗아 먹자. 다른 사람도 아닌 미카엘라의 생각이다.
"먹어도 돼요. 살아남은게 이긴 거니까, 바벨이 이긴걸로 치죠."
둘의 경쟁은 단순하고 허망하게 일단락되었다. 왜 범선이 칼리번을 노렸는지 알 수 없으나, 어쩌면 크고 위압적인 외모가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미카엘라의 가설이 맞다면 이번 상황에서는 바벨이 더 적합하고 더 적합했기에 살아남은 셈이다. 살아남았다면 더 강한 것이 될 테고. 더 강한 자는 뜻대로 할 권리가 주어진다.
칼리번이 몸성히 움직일 수 있었다면 , 다가오는 바벨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 바벨 또한 그 사실을 안다 . 우리가 다른 곳 , 다른 장소에서 만나 싸울 수 있었다면 , 이렇게 허무한 끝맺음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
아니 ── 아니지 . 그것은 망상이다 . 바벨이 그런 감상을 가질 리가 . 먹는 것에 감정을 느낄 리가 . 바벨은 기계다 . 단지 싸우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 본래의 목적에 맞게 , 소명에 맞게 , 닥치는 대로 시비를 걸고 부딪히고 깨부수는 것이다 . 거기에 감정은 1mg도 섞이지 않는다 . 그의 투쟁에 불순물이 섞일 리 없는 것이다 .
하지만 이 세계에 , 절대라는 말이 통할까 . 성립이나 할까 . 바벨은 변할 것이다 . 이제까지도 변해왔고 .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자신의 모든 선택들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
외모:태양에 그을린 듯 피부가 붉다 . 비단처럼 보드라운 갈색깔 머리카락을 이마가 드러나도록 가르마를 타놨다 . 깎아 만든 듯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코 - 차분함을 잃는 법 없는 얇은 입술이 귀족적인 이목구비를 이룬다 . 왜소한 체구지만 바위 마냥 강단 있는 사람이라 보았을 때 유약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경주마와 같이 올곧게 앞길만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자신에 찬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 굳은살 빼곡히 박인 작은 손이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슬쩍 귀띔을 해준다 . 얼룩덜룩 물감 투성이의 앞치마를 색이 시커먼 남성용 작업복 위에 입고 있다 . 밑창이 두꺼운 헤시안 부츠를 신는다
성격:중증의 워크 홀릭 . 수전노이기도 하다 .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낸 반동으로 돈을 버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 냉정 침착한 성질은 매사에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일념으로부터 탄생한 것 . 작은 씀씀이로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이드:칼리번
강철 갑옷의 모습을 한 이드 . 속 빈 갑옷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 두꺼운 아밍 소드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검의 달인 . 전설 속 원탁의 기사에 비견되는 실력으로 주인의 적을 철저히 분쇄한다 . 갑옷의 이음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오색찬란한 불길이 특징 . 광택이 옅은 갑옷은 여기저기 녹이 슬어 있다
능력치:
└ 공격력:7 └ 방어력:5 └ 지구력:5 └ 기동성:3 └ 특이성:3
1 _ 미국의 여류 화가로 자신의 생일 되는 날에 괴한의 습격을 받아 사망에 이르렀다
2 _ 가난한 배관공의 자녀로 태어나 만족을 모르고 자랐다 .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
바벨이 칼리번을 먹었다. 느껴졌다. 그리델의 낮선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델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걸음이 잠시 멈추고 말았다.
"아. 그리델."
솔직히 말해서 마음 속이 뜨끔거렸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어도 죽은 사람의 기억이 흘러오는 건 처음이라고, 미카엘라는 속으로 변명했다. 회색 매연이 쏟아지는 공장 아래에서 살다가 죽고. 모래벌레부터의 기억에서는 미카엘라와 바벨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유가 아니라 정말 관찰자 시점으로 보였다.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들이지만 낮설게 보였다.
"그리델..."
미카엘라는 그리델의 마지막 기억. 정말 마지막 기억을 펼쳐보면서 그녀의 시신을 향해 걸었다. 칼리번이 찔리고, 미카엘라가 그리델을 포기한 시점부터. 최후의 불꽃이 타오르고 암전될때까지의 기억을.
밉다 . 미워 . 정말 모든 것들이 밉다 . 바라지도 않았는데 태어나고 , 바라고 바래도 죽을 수 없는 내 삶이 밉다 .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없는 내가 밉다 . 세상은 미운 것 투성이 . 사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 나는 단지 살기 위해 사는 기계가 되었다 . 이런 나를 누가 알아줄까 . 누가 찾아줄까 . 그것이 억울하다 . 원통하다 . 그래서 내 마음을 , 캔버스 위에 그리기 시작했다 . 목소리로는 다할 수 없었던 나의 존재 증명 . 이런 나라도 분명히 이 세계에 살아 있었다고 , 누군가 한 명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라며 붓을 들었다 . 물감으로 회색의 세계를 적시기 시작했다 . 나는 여기에 있어 . 나를 알아줘 .
그렇게 소리 없이 소리쳤다 .
. . .
그런데 이게 뭐야 . 이게 뭐냐고 . 죽고 싶었어 ─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어 ! 살고 싶었어 . 정말로 살고 싶었어 ! 못 본 것을 보고 못 먹어본 것을 먹고 , 듣고 , 즐기고 , 나를 찾고 싶었어 .
그런데 제길 , 제기랄 , 어째서 !! 어째서 나만 이렇게 끝나야 해 ! 어째서 나만 !
. . .
알고 있다 .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 누구도 잘못 따윈 하지 않았다 .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 우리를 낳은 세계에게 있어 . 나는 여기에 수감될 만큼 ,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 . 살아날 거야 . 돌아갈 거야 . 그리고 제대로 ,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찾을 거야 .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는 ── - 나 ── 는 , , , , , , , , ,
어디에도 그리델은 보이지 않았다 . 그녀가 쓰러진 자리를 찾아봤지만 , 모두 헛고생이었다 . 그리델은 , 애초부터 거짓과 상상으로 이루어진 환상처럼 , 망상과 공상 속 등장인물처럼 , 당신의 앞에서 사라졌다 . 당신의 머릿속에서만 , 그녀는 존재했다 .
그것은 무척이나 기이한 감각이리라 . 신기루처럼 눈에 보여도 잡히지 않는 것이 기억이라는 놈이라 . 당신은 더는 그리델이 여기 살아 있었다고 < 확신 > 할 수 없었다 .
그것은 어쩌면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 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 그녀의 존재는 두리뭉실해지고 , 언젠가 정말로 그녀를 잊을지도 모른다 .
모르는 , 데 ── 기억의 한 부분이 , 유달리 툭 튀어나온 한 부분이 ─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
그리델이 이 세계에서 만난 < 누군가 > ── 생면부지 타인임에 분명한 < 누군가 > 가 , 너무나 낯이 익다 .
당신이 생전에 만난 사람인가 ?
아니 ─- 그렇지 않았다 . 당신의 기억 어디에도 , 저 사람의 모습은 새겨져 있지 않다 .
그리델은 이미 먼지가 되어 흩어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미카엘라에게 했던, 기계같다는 말의 어원을 엿볼 수 있었다. 죽고 나서 엉망진창의 사막에 떨어져도 운명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미카엘라를. 진짜 그렇게 생각하던 미카엘라에게 그리델은 자신의 혐오스러운 면을 보았을 것이다. 살기 위해 사는 기계.
사라진 그리델을 보고 자기도 저렇게 되려나 옷을 들추어 구멍난 옆구리를 확인하는 생존기계 미카엘라를, 그리델은 푸른 눈으로 제대로 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리델의 기억 중 한 기억이 이상하리만치 튀어오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헨리 포드를 그리델이 직접 만났다- 하는 건 아니다. 사막에서의 기억이었으니 말이다. 그 사람은 생전에 만난 기억이 없는데도 어딘가에서 만났다는 기이한 확신이 있었다.
정말로 만났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 속의 인물? 아니면 망자들을 사막으로 끌어오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사람 행세를 하나. 머리채가 잡혀 끌려오는 중에 얼굴을 슬쩍 보았나? 기상천외한 사막은 망자의 상상력 증진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타인의 기억 속 < 누군가 > 는 남자였다 . 또는 여자였다 . 젊은 사람이었나 . 아니면 노인이었나 .
안개가 낀 것처럼 . 필름이 다 타버린 것처럼 .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이 흐릿하다 . 몇 마디 말로써 겨우 조금 ,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인상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
《 그 ─ 래 , 여기는 너희들 말로 , 사후 세계라고 하는 곳이야 , 모든 사람의 종점 , 모든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는 곳 , 하지만 드물게도 너희들처럼 ,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이렇게 이 세계에서조차 안식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 방랑하게 되지 》
《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거냐구 ?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 우리 < 사장님 > 도 같은 생각일 테니 , 혹시 너도 관심이 있을까 ? 안 그래도 마침 같이 일을 할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거든 . 무슨 일이냐니 , 뭐 대단한 건 아니고 ,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을 모아 사막 위에 터전을 꾸리는 중이야 . 이런 괴물들이 들끓는 세계라도 ,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 , 이 세계의 주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
《 괜찮아 괜찮아 ,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 그러고보니 너처럼 , 이 세계를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던 녀석이 있었어 . 동료도 제법 있었고 , 나더러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라던데 , 네 생각이 그렇다면 한 번 거기로 가보는 게 어떨까 ? 이정표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 그도 그럴 게 그렇게 큰 길은 이 세계에 달리 존재하지 않거든 》
. . .
그리델로부터 물려받은 기억은 이게 다였다 . 생전의 기억에 반해 , 사막에서 눈을 뜨고 새롭게 새긴 기억들은 모두 휘발성이 강해 이마저도 겨우 건진 것이다 . 정체불명 ─ 신원불명의 목소리를 어디서 만났다고 당신은 , 낯익게 느낀 걸까 . 그러나 분명했다 . 사막 어딘가에서 , 마침내 만나게 된다면 , 당신은 분명 저 사람을 알아볼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 어떤 열쇠가 되리라 .
정말이지 신기한 감각이 아닐 수 없다 . 오컬트 신봉자들이 말하는 육감이니 하는 것들이 , 어쩌면 이런 것일까 . 타인의 기억을 수집하는 것도 ,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다시 되돌아온 범선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을 보면 , 전보다도 더욱 유령선처럼 보이는데 평범한 신경을 지닌 사람이라면 도무지 이것을 타고 사막을 항해하자는 생각은 못할 것이다 .
그리델이 품은 희망에 대한 기억이다. 십중팔구가 날아간 메모리에서 살아남은 기억들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델은 그 사람의 말에 희망을 품고 미카엘라를 만나 길 위에 올랐다. 그녀가 두 번 죽은 이유는 희망에 의심을 품고 딴 길로 빠져서일지도 모른다. 옛날 이야기에서 의심이 파멸을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계속 길을 따라가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남는 게 시간이니 다시 돌아가볼까. 그리고 사장님이라는 사람은 또 누구인지.
".....으엑."
사장님. 나쁜 직감이 들었다. 아포칼립스 영화에서 나오는 기분나쁜 교주 캐릭터 말이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규합하지만, 뒤에서는 자기의 음침한 욕망을 채우는 사람. 아니면 사막의 괴물왕같은 존재가 망자들의 머리에 기생충을 심어 자신의 입 안으로 기어들어오게 하는 걸까? 연가시가 곤충을 물에 뛰어들게 하듯. 미카엘라는 신기하고 기묘한 감각에 몸을 조금 떨었다. 그렇게 걸으면 어느새 을씨년스러운 범선 앞에 서 있었다.
유령선의 선장이 되려면 항해술부터 알아야겠는데, 문외한 미카엘라에게는 까마득하다. 타륜 같은 걸 돌리나..?
"바벨! 나 왔어요!"
우선 배 위에 올라야 할 일이다. 미카엘라는 바벨을 불렀다. 그 흰색 머리카락을 내려다오!
대답이 없다 . 반응이 없다 . 유령선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이상한데 . 당신은 분명 바벨을 배에 내버려 두고 왔다 . 바벨이 아무리 정신 사납게 논다지만 당신을 버려두고 훌쩍 떠나버릴 녀석은 아니지 않나 . 사연이 있을 터다 . 이유가 있을 거다 . 혹시 녀석이 배탈이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닐까 . 그래서 당신을 마중 나오지 않는 건 아닐까 . 당신은 그리델과는 다르게 바벨의 신변에 이변이 생겨도 어떤 피드백도 받을 수 없었다 . 덕분에 여지껏 무사할 수 있었지만 , 바벨이 멋대로 어디서 객사해버려도 당신은 깨달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 실제로 전에도 , 바벨이 괴물 지렁이를 잡고 남은 부산물 , 찌꺼기들에게 습격 당할 때도 현장에 가서야 뒤늦게 사태를 알아채지 않았던가 .
지금 칼리번 먹고 신나서 미카엘라 목소리가 안 들리나?? 야! 다시 불러봐도 바벨은 대답이 없다. 싸울때만 믿음직한 깡통같으니.. 망할 깡통.. 깡통 바벨..
미카엘라는 꼼짝없이 짝꿍 괴물 없이도 혼자서 잘해요 프로그램을 찍어야 할 판이다. 배를 처음 보았을 때는 도무지 바벨의 도움 없이 오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지금은 어디 부서진 틈새나 끊어져서 늘어진 밧줄이 새로 생겼을 법 한데. 어디 적당한 게 없나? 미카엘라는 배 주위를 총총 뛰며 돌았다.
새삼스럽지만 , 정말 심각하게도 파괴되고 파손되었다 . 이게 모래가 아니라 다른 배들처럼 물 위에 띄우는 배였다면 진작에 침수되고 가라앉았을 중상이다 . 바벨 녀석이 신이 나서 날뛴 여파로 의심되는 구멍이 당장 살펴본 것만 해도 서너 개는 됐으니 , 저기 저 비교적 지면에 가까운 구멍을 통해 들어가면 또 새로운 길이 나타나지 않을까 .
배를 차지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 선내를 탐색하는 것도 어느정도 정해진 일이었을 터 . 그렇게 살펴보는 동안에 배를 움직일 실마리를 찾게 될 수도 있었다 .
주말의 끝에 tmi를 조금 끼적여보자면. 미카 눈에 대한 설정은 이 캐릭터에게서 따왔어요!
만화 원본(레비아탄)을 직접 찾아보니 눈으로 하는 마약에 중독되서 저런다네요. 평온한 표정으로 눈물만 줄줄 쏟는게 기괴하면서도 강렬해보여서. 기억해 두었다가 미카를 만들 때 쓴 소재에요. 세부사항은 섬광탄에 다친 눈이랑 눈물 문신으로 바꿔주고 이미지만 살려서 가져오는 방식으로 말이죠
우선 ─ 이 배는 2층으로 된 전열함이었다 . 배의 밑바닥은 모래 밑에 깊숙이 파묻혀 밖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고 , 구멍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내부는 당신과 바벨이 신세졌던 선창보다 한 층 더 위에 있는 포갑판으로 국한됐다 .
일찍이 당신과 바벨이 처음 배에 침투할 때는 포문이 모두 닫혀 있어 내부 사정을 알 길이 없었으나 , 이렇게 생겨난 통로로 들어와 보니 보란 듯이 밧줄에 묶인 포가 당신을 반겨준다 . 사용을 관둔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모든 포가 빠짐없이 녹이 슬고 낡았는데 , 어디로 갔는지 싣고 쏠 포탄도 보이지 않는다 .
떨어졌던 선창에도 비슷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으니 , 애초부터 탄을 싣지 않았던 걸까 . 당신에게는 아쉬운 소식이리라 . 그렇게 볼 것이라고는 장식으로 쓰기에도 모자란 버려진 포만이 전부인 갑판 . 쓸쓸하게 넓기만 한 공간은 퉁명스럽게 더 볼 것 따윈 없으니 위로 오르던 아래로 떨어지던 알아서 하라며 당신에게 길을 제시하고 있다 .
이렇게 되면 바벨의 이미지가 시작된 지점도 말씀드려야 할 거 같은 기분 ! 정말 좋아하는 작품의 크리쳐로 등장하는 이 녀석으로부터 바벨의 기본 골자를 가져왔습니다 . 애초에 이드들부터가 IBM 이나 스탠드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들인데 , 그 중에서도 바벨은 특히나 스트레이트한 편이네요 !
녹슨 화포들. 화약도 포탄도 없이 다 썩어버린 포만 휑뎅그레 남아있는 전경은 이 배와 어울렸다. 그저 뒤틀린 고풍스러움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소품 정도의 물건들. 바벨이 포문들 사이를 오가면서 사격할 정도는 되겠다. 배 밖에서는 안을 보기 어렵고 위치를 바꾸며 쏘면 적들의 정신을 빼놓을 수 있을 거다.
"뭔가 싣기엔 좋아보이네요."
생존에 필요한 자원이 없는 사막에서, 대체 뭘 부랴부랴 싸들고 다녀야 하는지는 차차하고 말이다.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태우고 다녀도 좋겠다. 황량한 사막에서 천장과 벽은 찾기 어려운 것이니까 태워준다면 좋다고 할 사람들이 많겠지.
하나뿐인 통로를 기어오르자 자연스럽게 노천갑판으로 이어진다 . 이것 말고도 쓸 수 있는 통로는 하나 더 있었지만 , 거기로는 바벨이 먼저 다녀간 뒤라 멀쩡하게 밟을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적었다 .
멍청한 바벨 . 화살만 피하면 됐지 왜 , 뭐하러 다 부수고 다니는 걸까 . 정말이지 섬세한 일과는 담을 쌓은 괴물이었다 . 하지만 어쩌랴 , 녀석이 당신의 파트너인 걸 , 그런 파괴적인 충동에 몇 번이고 목숨을 구했다 . 다소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정도는 , 참아줘야만 할 것이다 . 아무튼 , 뭐가 됐던 선상에 오를 수 있었다 .
위치를 보아하니 현단을 다 내려오면 보이는 네모난 출입구 같은데 , 바로 근처에 바벨이 뚫어놓은 구멍이 보인다 . 조금만 더 거리가 가까웠다면 , 이 통로도 못 쓸 것이 됐으리라 . 이렇게 난장판을 쳐놓은 장본인은 어디로 갔나 하면 , 웬일 , 녀석은 칼리번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멍청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 …
바벨은 당신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르고 , 그렇게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 마치 혼자서 골똘히 생각할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간의 활약이 무색하게 주변에 무방비해진 것이다 .
누워서 뭐 하나. 눈 뜬 채로 죽었나? 설마 저러고 있는다고 미카엘라의 부름에도 답하지 못한 건가. 저렇게 대자로 퍼질러서 하늘이나 올려다보다니.. 진짜 뭐 하는거야? 평소의 바벨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칼리번을 흡수한 여파일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장면에 미카엘라의 턱이 떡 벌어졌다.
"바벨?"
뒷짐을 지고 바벨의 머리 뒤로 걸어갔다. 군화가 나뭇바닥에 부딪히면서 무거운 소리가 났다. 저걸 걷어찰까 말까 찰까 말까. 한 걸음에 수백번씩 고민을 했다.
흑단처럼 검은 눈을 , 검은 눈꺼풀이 덮는다 . 바벨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 눈을 감고 누워서 버텼다 . 이건 또 처음 보는 반응이다 . 전보다 사람 냄새가 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을지도 . 하지만 여전히 속내를 알 수가 없다 . 녀석에게 이입하여 행동의 의미를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 다소 모습이 사람처럼 바뀌었다고 해서 , 그 내용물까지 당신과 같아진 것은 아니라 , 녀석은 여전히 사람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다양한 감정이 부족했다 .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 녀석이 정말로 마음을 갖고 있는지도 불명확했다 . 녀석은 기본적으로 블랙박스 ,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었다 . 당신은 잠시 녀석의 안에 발을 담글 수 있었지만 , 그것만으로는 녀석을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 바닥이라 생각했던 것이 정말로 바닥이었는지 , 당신은 확신할 수 있을까 .
이번 전투만 하더라도 그렇다 . 녀석이 당신을 얼마나 곤란하게 만들었는지 .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 상대가 보다 나은 상황 , 나은 조건을 갖고서 전투에 임했더라면 , 쓰러지고 잡아먹힌 것은 당신이었을 것이다 .
당신도 바벨에게서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을 터다 . 바벨은 말을 못한다 . 이것이 이제까지의 대명제였으니 . 그것이 뒤집힐 리 없다고 , 당신은 무심코 생각했을 거다 . 이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고 , 당신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 틈만 나면 당신을 죽이려고 드니까 .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유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 스스로 그렇게 믿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런 기대를 뒤집어엎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 당신은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 당신의 귀를 처음 지나는 목소리였다 .
미카엘라의 인생을 걸고, 애꿎은 그리델의 인생까지 덤으로 걸어서. 발치에 수류탄이 굴러왔을 때보다 더 놀랐다. 미카엘라는 낚시에 걸려 갑판 위로 딸려온 생선처럼 팔딱였다. 때리는 것도 지친다는 다짐도 까먹고 일어나서 마운트를 잡을 뻔 했네. 바벨을 처음 보았을 때 일단 치고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말투가 왜 이래요! 칼리번이 안에 살아서 말하는 거죠! 어!"
게다가 말하는게 점잖다. 아주 공손한 습니다체를 사용한다는 말이다. 칼리번을 먹고 말문이 트인 건 알겠지만. 이건 숫제 칼리번이 바벨의 탈을 쓰고 말하는 모양이다. 바벨의 도발에도 점잖던 그 칼리번 말이다. 바벨은 뭐랄지, 좀 더 말이 걸어야 하지 않아? 세 단어에 한번 꼴로 욕설을 쓸 것처럼 굴더니.
딱밤을 때리니 전처럼 움푹 , 이마가 꺼진다 . 말문이 트여도 몸까지 튼튼해진 건 아닌 모양이다 . 하지만 바벨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 녀석에게 머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 소리를 내보내는 관에 지나지 않았다 . 초롱아귀의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 극단적으로 머리가 목을 떠나더라도 , 당장의 생사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
대뜸 미친 소리를 하는 바벨이었다 .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 판단하기 어려웠다 . 기계음에 가까운 목소리는 굴곡없이 모든 부분이 평탄하여 감정이 실리지 않는다 .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게 되는 발성의 특색이 없어 완벽하면서도 결함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 녀석은 그런 인공적인 소리로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개소리로 들릴 말들을 쉬지 않았다 .
어떻게 하고 싶냐고 . 정말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다 . 지금까지 당신과 바벨은 막연하게 흘러가는 대로 여정을 계속해왔을 뿐이라 , 스스로 능동적으로 < 어떻게 > 를 생각하고 움직인 적이 없었다 . 별 수 없었다지만 , 사막을 있는 대로 , 정처 없이 한결같이 계속 걷기만 해왔지 . 전에도 말했던 거 같지만 , 목적성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 그런데 이제 와서 < 어떻게 > 라니 .
당신으로부터 비롯되고 당신의 그림자로부터 태어난 바벨이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 아무리 생각 없이 계속해왔다지만 목줄은 당신이 쥐고 있었다 . 타륜은 당신의 손에 있었다 . 한 때는 그리델의 제안에 따르기도 했지만 , 결국 그 모든 결정은 전부 당신의 생각을 거쳐 내려져왔다 . 그것이 자연스럽다 .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 검이자 방패이며 당신의 분신에 지나지 않는 바벨이 어째서 당신처럼 행동하며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
이게 정말로 < 자연스러운가 ? >
그리델과 칼리번의 관계는 이러지 않았다 .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상하관계 . 도구와 도구를 쓰는 사람으로 깔끔하게 나뉘었지 . 지금 바벨의 모습은 칼리번의 그것과 정말로 같은가 ?
- ──- 미카엘라 라미레즈 , 당신이야말로 어쩌고 싶나요 ? 계속 , 이 사막에서 살아갈 생각입니까 ?
머리카락은 아직 희다 . 피부도 아직 검다 . 슬그머니 뜬 눈은 검은 물이 들어찬 그대로 , 이목구비에 이렇다 할 변화는 아직 눈에 띄지 않았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는 다른 인상이다 . 빈 그릇처럼 공허하던 녀석이 ,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생기가 느껴진다 .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지 , 당신은 알 수 없다 .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 바벨 녀석에게 < 생각 > 이 있다는 것 . 녀석의 < 말 > 은 앵무새나 축음기가 그러는 것처럼 의미도 모르고 지껄이는 것과는 차이가 느껴졌다 .
- 반항기라서 그렇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미카엘라 라미레즈 , 다루기 편한 도구로써 당신과 함께하던 저는 , 이제 없습니다 .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저는 당신과 대등합니다 . 앞으로 그렇게 < 생각 > 하고 대우해 주시기 바랍니다 .
녀석이 당신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한다 .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제 일한 보수까지 달라고 할지 모른다 . 이 녀석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 턱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당신인데 되려 자기가 멱살을 잡은 것처럼 거만한 태도를 보인다 .
- ── 그건 그렇고 , 그렇습니까 , 미카엘라 라미레즈 . 역시나 살아갈 의지로 가득 찬 건강 우량아였습니다 . 당신은 .
멀어지는 당신을 바벨은 쫓지 않는다 . 가면 가고 오면 오고 , 녀석은 당신이 멀찌감치 떨어지자 다시 자기 편한 자세로 배에 등을 붙였다 . 그리고 일어나지 않는다 . 거기에 못 박힌 마냥 붙어서 한 번 움찔거리지도 않는 것이다 .
선상에 처음 올라와서 봤던 모습이 저거였다 . 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걸까 . 대체 왜 저러는 걸까 . 물으면 대답이나 해줄까 . 실의로 할 말을 잊은 당신에게 거기까지 확인할 정신은 없으리라 . 타륜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움직이면 아니나 다를까 바벨이 작살을 내놓은 현단에 시선이 간다 . 녀석이 파리머리 셋을 상대하느라 함교는 빈말로도 좋은 꼴이 아니었는데 타륜도 거기에 포함됐다 . 힘에 꺾이고 부러져서 본래의 구실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 타륜의 상태 . 고치려고 해도 당신은 목수가 아니고 , 재료가 있고 기술이 있어야 고칠 텐데 , 현실이 당신의 이상을 따라주지 않는다 . 바벨 녀석 , 정말 본격적으로 당신을 미치게 한다 .
- 끼이익
그러나 그렇다고 실망하기는 조금 이른 것이 , 어디서 낡은 나무가 용을 쓰는 소리가 난다 . 믿기지 않게도 , 지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