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델은 이미 먼지가 되어 흩어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미카엘라에게 했던, 기계같다는 말의 어원을 엿볼 수 있었다. 죽고 나서 엉망진창의 사막에 떨어져도 운명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미카엘라를. 진짜 그렇게 생각하던 미카엘라에게 그리델은 자신의 혐오스러운 면을 보았을 것이다. 살기 위해 사는 기계.
사라진 그리델을 보고 자기도 저렇게 되려나 옷을 들추어 구멍난 옆구리를 확인하는 생존기계 미카엘라를, 그리델은 푸른 눈으로 제대로 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리델의 기억 중 한 기억이 이상하리만치 튀어오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헨리 포드를 그리델이 직접 만났다- 하는 건 아니다. 사막에서의 기억이었으니 말이다. 그 사람은 생전에 만난 기억이 없는데도 어딘가에서 만났다는 기이한 확신이 있었다.
정말로 만났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 속의 인물? 아니면 망자들을 사막으로 끌어오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사람 행세를 하나. 머리채가 잡혀 끌려오는 중에 얼굴을 슬쩍 보았나? 기상천외한 사막은 망자의 상상력 증진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타인의 기억 속 < 누군가 > 는 남자였다 . 또는 여자였다 . 젊은 사람이었나 . 아니면 노인이었나 .
안개가 낀 것처럼 . 필름이 다 타버린 것처럼 .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이 흐릿하다 . 몇 마디 말로써 겨우 조금 ,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인상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
《 그 ─ 래 , 여기는 너희들 말로 , 사후 세계라고 하는 곳이야 , 모든 사람의 종점 , 모든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는 곳 , 하지만 드물게도 너희들처럼 ,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이렇게 이 세계에서조차 안식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 방랑하게 되지 》
《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거냐구 ?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 우리 < 사장님 > 도 같은 생각일 테니 , 혹시 너도 관심이 있을까 ? 안 그래도 마침 같이 일을 할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거든 . 무슨 일이냐니 , 뭐 대단한 건 아니고 ,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을 모아 사막 위에 터전을 꾸리는 중이야 . 이런 괴물들이 들끓는 세계라도 ,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 , 이 세계의 주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
《 괜찮아 괜찮아 ,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 그러고보니 너처럼 , 이 세계를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던 녀석이 있었어 . 동료도 제법 있었고 , 나더러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라던데 , 네 생각이 그렇다면 한 번 거기로 가보는 게 어떨까 ? 이정표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 그도 그럴 게 그렇게 큰 길은 이 세계에 달리 존재하지 않거든 》
. . .
그리델로부터 물려받은 기억은 이게 다였다 . 생전의 기억에 반해 , 사막에서 눈을 뜨고 새롭게 새긴 기억들은 모두 휘발성이 강해 이마저도 겨우 건진 것이다 . 정체불명 ─ 신원불명의 목소리를 어디서 만났다고 당신은 , 낯익게 느낀 걸까 . 그러나 분명했다 . 사막 어딘가에서 , 마침내 만나게 된다면 , 당신은 분명 저 사람을 알아볼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 어떤 열쇠가 되리라 .
정말이지 신기한 감각이 아닐 수 없다 . 오컬트 신봉자들이 말하는 육감이니 하는 것들이 , 어쩌면 이런 것일까 . 타인의 기억을 수집하는 것도 ,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다시 되돌아온 범선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을 보면 , 전보다도 더욱 유령선처럼 보이는데 평범한 신경을 지닌 사람이라면 도무지 이것을 타고 사막을 항해하자는 생각은 못할 것이다 .
그리델이 품은 희망에 대한 기억이다. 십중팔구가 날아간 메모리에서 살아남은 기억들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델은 그 사람의 말에 희망을 품고 미카엘라를 만나 길 위에 올랐다. 그녀가 두 번 죽은 이유는 희망에 의심을 품고 딴 길로 빠져서일지도 모른다. 옛날 이야기에서 의심이 파멸을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계속 길을 따라가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남는 게 시간이니 다시 돌아가볼까. 그리고 사장님이라는 사람은 또 누구인지.
".....으엑."
사장님. 나쁜 직감이 들었다. 아포칼립스 영화에서 나오는 기분나쁜 교주 캐릭터 말이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규합하지만, 뒤에서는 자기의 음침한 욕망을 채우는 사람. 아니면 사막의 괴물왕같은 존재가 망자들의 머리에 기생충을 심어 자신의 입 안으로 기어들어오게 하는 걸까? 연가시가 곤충을 물에 뛰어들게 하듯. 미카엘라는 신기하고 기묘한 감각에 몸을 조금 떨었다. 그렇게 걸으면 어느새 을씨년스러운 범선 앞에 서 있었다.
유령선의 선장이 되려면 항해술부터 알아야겠는데, 문외한 미카엘라에게는 까마득하다. 타륜 같은 걸 돌리나..?
"바벨! 나 왔어요!"
우선 배 위에 올라야 할 일이다. 미카엘라는 바벨을 불렀다. 그 흰색 머리카락을 내려다오!
대답이 없다 . 반응이 없다 . 유령선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이상한데 . 당신은 분명 바벨을 배에 내버려 두고 왔다 . 바벨이 아무리 정신 사납게 논다지만 당신을 버려두고 훌쩍 떠나버릴 녀석은 아니지 않나 . 사연이 있을 터다 . 이유가 있을 거다 . 혹시 녀석이 배탈이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닐까 . 그래서 당신을 마중 나오지 않는 건 아닐까 . 당신은 그리델과는 다르게 바벨의 신변에 이변이 생겨도 어떤 피드백도 받을 수 없었다 . 덕분에 여지껏 무사할 수 있었지만 , 바벨이 멋대로 어디서 객사해버려도 당신은 깨달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 실제로 전에도 , 바벨이 괴물 지렁이를 잡고 남은 부산물 , 찌꺼기들에게 습격 당할 때도 현장에 가서야 뒤늦게 사태를 알아채지 않았던가 .
지금 칼리번 먹고 신나서 미카엘라 목소리가 안 들리나?? 야! 다시 불러봐도 바벨은 대답이 없다. 싸울때만 믿음직한 깡통같으니.. 망할 깡통.. 깡통 바벨..
미카엘라는 꼼짝없이 짝꿍 괴물 없이도 혼자서 잘해요 프로그램을 찍어야 할 판이다. 배를 처음 보았을 때는 도무지 바벨의 도움 없이 오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지금은 어디 부서진 틈새나 끊어져서 늘어진 밧줄이 새로 생겼을 법 한데. 어디 적당한 게 없나? 미카엘라는 배 주위를 총총 뛰며 돌았다.
새삼스럽지만 , 정말 심각하게도 파괴되고 파손되었다 . 이게 모래가 아니라 다른 배들처럼 물 위에 띄우는 배였다면 진작에 침수되고 가라앉았을 중상이다 . 바벨 녀석이 신이 나서 날뛴 여파로 의심되는 구멍이 당장 살펴본 것만 해도 서너 개는 됐으니 , 저기 저 비교적 지면에 가까운 구멍을 통해 들어가면 또 새로운 길이 나타나지 않을까 .
배를 차지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 선내를 탐색하는 것도 어느정도 정해진 일이었을 터 . 그렇게 살펴보는 동안에 배를 움직일 실마리를 찾게 될 수도 있었다 .
주말의 끝에 tmi를 조금 끼적여보자면. 미카 눈에 대한 설정은 이 캐릭터에게서 따왔어요!
만화 원본(레비아탄)을 직접 찾아보니 눈으로 하는 마약에 중독되서 저런다네요. 평온한 표정으로 눈물만 줄줄 쏟는게 기괴하면서도 강렬해보여서. 기억해 두었다가 미카를 만들 때 쓴 소재에요. 세부사항은 섬광탄에 다친 눈이랑 눈물 문신으로 바꿔주고 이미지만 살려서 가져오는 방식으로 말이죠
우선 ─ 이 배는 2층으로 된 전열함이었다 . 배의 밑바닥은 모래 밑에 깊숙이 파묻혀 밖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고 , 구멍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내부는 당신과 바벨이 신세졌던 선창보다 한 층 더 위에 있는 포갑판으로 국한됐다 .
일찍이 당신과 바벨이 처음 배에 침투할 때는 포문이 모두 닫혀 있어 내부 사정을 알 길이 없었으나 , 이렇게 생겨난 통로로 들어와 보니 보란 듯이 밧줄에 묶인 포가 당신을 반겨준다 . 사용을 관둔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모든 포가 빠짐없이 녹이 슬고 낡았는데 , 어디로 갔는지 싣고 쏠 포탄도 보이지 않는다 .
떨어졌던 선창에도 비슷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으니 , 애초부터 탄을 싣지 않았던 걸까 . 당신에게는 아쉬운 소식이리라 . 그렇게 볼 것이라고는 장식으로 쓰기에도 모자란 버려진 포만이 전부인 갑판 . 쓸쓸하게 넓기만 한 공간은 퉁명스럽게 더 볼 것 따윈 없으니 위로 오르던 아래로 떨어지던 알아서 하라며 당신에게 길을 제시하고 있다 .
이렇게 되면 바벨의 이미지가 시작된 지점도 말씀드려야 할 거 같은 기분 ! 정말 좋아하는 작품의 크리쳐로 등장하는 이 녀석으로부터 바벨의 기본 골자를 가져왔습니다 . 애초에 이드들부터가 IBM 이나 스탠드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들인데 , 그 중에서도 바벨은 특히나 스트레이트한 편이네요 !
녹슨 화포들. 화약도 포탄도 없이 다 썩어버린 포만 휑뎅그레 남아있는 전경은 이 배와 어울렸다. 그저 뒤틀린 고풍스러움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소품 정도의 물건들. 바벨이 포문들 사이를 오가면서 사격할 정도는 되겠다. 배 밖에서는 안을 보기 어렵고 위치를 바꾸며 쏘면 적들의 정신을 빼놓을 수 있을 거다.
"뭔가 싣기엔 좋아보이네요."
생존에 필요한 자원이 없는 사막에서, 대체 뭘 부랴부랴 싸들고 다녀야 하는지는 차차하고 말이다.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태우고 다녀도 좋겠다. 황량한 사막에서 천장과 벽은 찾기 어려운 것이니까 태워준다면 좋다고 할 사람들이 많겠지.
하나뿐인 통로를 기어오르자 자연스럽게 노천갑판으로 이어진다 . 이것 말고도 쓸 수 있는 통로는 하나 더 있었지만 , 거기로는 바벨이 먼저 다녀간 뒤라 멀쩡하게 밟을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적었다 .
멍청한 바벨 . 화살만 피하면 됐지 왜 , 뭐하러 다 부수고 다니는 걸까 . 정말이지 섬세한 일과는 담을 쌓은 괴물이었다 . 하지만 어쩌랴 , 녀석이 당신의 파트너인 걸 , 그런 파괴적인 충동에 몇 번이고 목숨을 구했다 . 다소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정도는 , 참아줘야만 할 것이다 . 아무튼 , 뭐가 됐던 선상에 오를 수 있었다 .
위치를 보아하니 현단을 다 내려오면 보이는 네모난 출입구 같은데 , 바로 근처에 바벨이 뚫어놓은 구멍이 보인다 . 조금만 더 거리가 가까웠다면 , 이 통로도 못 쓸 것이 됐으리라 . 이렇게 난장판을 쳐놓은 장본인은 어디로 갔나 하면 , 웬일 , 녀석은 칼리번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멍청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 …
바벨은 당신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르고 , 그렇게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 마치 혼자서 골똘히 생각할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간의 활약이 무색하게 주변에 무방비해진 것이다 .
누워서 뭐 하나. 눈 뜬 채로 죽었나? 설마 저러고 있는다고 미카엘라의 부름에도 답하지 못한 건가. 저렇게 대자로 퍼질러서 하늘이나 올려다보다니.. 진짜 뭐 하는거야? 평소의 바벨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칼리번을 흡수한 여파일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장면에 미카엘라의 턱이 떡 벌어졌다.
"바벨?"
뒷짐을 지고 바벨의 머리 뒤로 걸어갔다. 군화가 나뭇바닥에 부딪히면서 무거운 소리가 났다. 저걸 걷어찰까 말까 찰까 말까. 한 걸음에 수백번씩 고민을 했다.
흑단처럼 검은 눈을 , 검은 눈꺼풀이 덮는다 . 바벨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 눈을 감고 누워서 버텼다 . 이건 또 처음 보는 반응이다 . 전보다 사람 냄새가 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을지도 . 하지만 여전히 속내를 알 수가 없다 . 녀석에게 이입하여 행동의 의미를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 다소 모습이 사람처럼 바뀌었다고 해서 , 그 내용물까지 당신과 같아진 것은 아니라 , 녀석은 여전히 사람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다양한 감정이 부족했다 .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 녀석이 정말로 마음을 갖고 있는지도 불명확했다 . 녀석은 기본적으로 블랙박스 ,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었다 . 당신은 잠시 녀석의 안에 발을 담글 수 있었지만 , 그것만으로는 녀석을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 바닥이라 생각했던 것이 정말로 바닥이었는지 , 당신은 확신할 수 있을까 .
이번 전투만 하더라도 그렇다 . 녀석이 당신을 얼마나 곤란하게 만들었는지 .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 상대가 보다 나은 상황 , 나은 조건을 갖고서 전투에 임했더라면 , 쓰러지고 잡아먹힌 것은 당신이었을 것이다 .
당신도 바벨에게서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을 터다 . 바벨은 말을 못한다 . 이것이 이제까지의 대명제였으니 . 그것이 뒤집힐 리 없다고 , 당신은 무심코 생각했을 거다 . 이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고 , 당신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 틈만 나면 당신을 죽이려고 드니까 .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유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 스스로 그렇게 믿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런 기대를 뒤집어엎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 당신은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 당신의 귀를 처음 지나는 목소리였다 .
미카엘라의 인생을 걸고, 애꿎은 그리델의 인생까지 덤으로 걸어서. 발치에 수류탄이 굴러왔을 때보다 더 놀랐다. 미카엘라는 낚시에 걸려 갑판 위로 딸려온 생선처럼 팔딱였다. 때리는 것도 지친다는 다짐도 까먹고 일어나서 마운트를 잡을 뻔 했네. 바벨을 처음 보았을 때 일단 치고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말투가 왜 이래요! 칼리번이 안에 살아서 말하는 거죠! 어!"
게다가 말하는게 점잖다. 아주 공손한 습니다체를 사용한다는 말이다. 칼리번을 먹고 말문이 트인 건 알겠지만. 이건 숫제 칼리번이 바벨의 탈을 쓰고 말하는 모양이다. 바벨의 도발에도 점잖던 그 칼리번 말이다. 바벨은 뭐랄지, 좀 더 말이 걸어야 하지 않아? 세 단어에 한번 꼴로 욕설을 쓸 것처럼 굴더니.
딱밤을 때리니 전처럼 움푹 , 이마가 꺼진다 . 말문이 트여도 몸까지 튼튼해진 건 아닌 모양이다 . 하지만 바벨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 녀석에게 머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 소리를 내보내는 관에 지나지 않았다 . 초롱아귀의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 극단적으로 머리가 목을 떠나더라도 , 당장의 생사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
대뜸 미친 소리를 하는 바벨이었다 .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 판단하기 어려웠다 . 기계음에 가까운 목소리는 굴곡없이 모든 부분이 평탄하여 감정이 실리지 않는다 .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게 되는 발성의 특색이 없어 완벽하면서도 결함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 녀석은 그런 인공적인 소리로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개소리로 들릴 말들을 쉬지 않았다 .
어떻게 하고 싶냐고 . 정말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다 . 지금까지 당신과 바벨은 막연하게 흘러가는 대로 여정을 계속해왔을 뿐이라 , 스스로 능동적으로 < 어떻게 > 를 생각하고 움직인 적이 없었다 . 별 수 없었다지만 , 사막을 있는 대로 , 정처 없이 한결같이 계속 걷기만 해왔지 . 전에도 말했던 거 같지만 , 목적성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 그런데 이제 와서 < 어떻게 > 라니 .
당신으로부터 비롯되고 당신의 그림자로부터 태어난 바벨이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 아무리 생각 없이 계속해왔다지만 목줄은 당신이 쥐고 있었다 . 타륜은 당신의 손에 있었다 . 한 때는 그리델의 제안에 따르기도 했지만 , 결국 그 모든 결정은 전부 당신의 생각을 거쳐 내려져왔다 . 그것이 자연스럽다 .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 검이자 방패이며 당신의 분신에 지나지 않는 바벨이 어째서 당신처럼 행동하며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
이게 정말로 < 자연스러운가 ? >
그리델과 칼리번의 관계는 이러지 않았다 .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상하관계 . 도구와 도구를 쓰는 사람으로 깔끔하게 나뉘었지 . 지금 바벨의 모습은 칼리번의 그것과 정말로 같은가 ?
- ──- 미카엘라 라미레즈 , 당신이야말로 어쩌고 싶나요 ? 계속 , 이 사막에서 살아갈 생각입니까 ?
머리카락은 아직 희다 . 피부도 아직 검다 . 슬그머니 뜬 눈은 검은 물이 들어찬 그대로 , 이목구비에 이렇다 할 변화는 아직 눈에 띄지 않았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는 다른 인상이다 . 빈 그릇처럼 공허하던 녀석이 ,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생기가 느껴진다 .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지 , 당신은 알 수 없다 .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 바벨 녀석에게 < 생각 > 이 있다는 것 . 녀석의 < 말 > 은 앵무새나 축음기가 그러는 것처럼 의미도 모르고 지껄이는 것과는 차이가 느껴졌다 .
- 반항기라서 그렇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미카엘라 라미레즈 , 다루기 편한 도구로써 당신과 함께하던 저는 , 이제 없습니다 .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저는 당신과 대등합니다 . 앞으로 그렇게 < 생각 > 하고 대우해 주시기 바랍니다 .
녀석이 당신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한다 .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제 일한 보수까지 달라고 할지 모른다 . 이 녀석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 턱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당신인데 되려 자기가 멱살을 잡은 것처럼 거만한 태도를 보인다 .
- ── 그건 그렇고 , 그렇습니까 , 미카엘라 라미레즈 . 역시나 살아갈 의지로 가득 찬 건강 우량아였습니다 . 당신은 .
멀어지는 당신을 바벨은 쫓지 않는다 . 가면 가고 오면 오고 , 녀석은 당신이 멀찌감치 떨어지자 다시 자기 편한 자세로 배에 등을 붙였다 . 그리고 일어나지 않는다 . 거기에 못 박힌 마냥 붙어서 한 번 움찔거리지도 않는 것이다 .
선상에 처음 올라와서 봤던 모습이 저거였다 . 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걸까 . 대체 왜 저러는 걸까 . 물으면 대답이나 해줄까 . 실의로 할 말을 잊은 당신에게 거기까지 확인할 정신은 없으리라 . 타륜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움직이면 아니나 다를까 바벨이 작살을 내놓은 현단에 시선이 간다 . 녀석이 파리머리 셋을 상대하느라 함교는 빈말로도 좋은 꼴이 아니었는데 타륜도 거기에 포함됐다 . 힘에 꺾이고 부러져서 본래의 구실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 타륜의 상태 . 고치려고 해도 당신은 목수가 아니고 , 재료가 있고 기술이 있어야 고칠 텐데 , 현실이 당신의 이상을 따라주지 않는다 . 바벨 녀석 , 정말 본격적으로 당신을 미치게 한다 .
- 끼이익
그러나 그렇다고 실망하기는 조금 이른 것이 , 어디서 낡은 나무가 용을 쓰는 소리가 난다 . 믿기지 않게도 , 지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