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기대하고 모래를 처먹은 건진 몰라도,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 안에서도 이리 불협조적으로 들러붙고 끼이는 모래알인데, 소화기관 몇 개 더 넘긴다고 나아지는 건 없을 테다. 다행이도 남자의 충동은 거기까지였는지, 정적을 깨는 기침 소리와 없는 타액 모아 입 안의 것을 뱉어내는 소음이 난다.
>>5 아주 깊은 꿈을 헤메고 있었다. 햇빛조차 닿지 않는 깊은 물 속에 잠긴듯이 모든 것이 아득하게 눈앞을 가리웠다. 온몸을 짓누르는 진동과 눈이 따갑도록 휘몰아치는 바람이 지나치고, 이름 모를 피아노의 선율이 때로는 거센 기계의 심장박동 소리가 짓눌러왔다.
허나 영원할 것만 같던 순간은 단 한번의 숨소리와 함께 산산히 부수어진다. 모래로 자욱한 황야속에서 깨어난 남자는 힘에 겨운 잔기침을 쏟아내며 몸을 일으킨다. 반쯤 치켜세운 눈동자 너머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만이 남아 고요한 모래속을 가리킨다. 움켜쥔 모래알들은 손가락 사이로 미련없이 흘러내려 사라진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암전 속을 헤메던 소리와 시선, 계절과 요일. 그리고 멍청하게 들릴법한 소리겠지만 자신조차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시간이 멈춰버린듯한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언제부턴가 밀려오기 시작한 갈증에 마른 침을 삼킬수밖에.
남자는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하듯 뺨을 쓸어내리거나 고개를 아래로 숙인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발걸음을 앞으로 한발 옮긴다. 한발 한발 나아가는 걸음은 탄력을 붙어 순식간에 높은 모래 언덕을 정복한다.
어느 틈에 예까지 왔는지 , 야수는 벌써 눈 앞에 있었다 . 흉측하지만 매력적으로 매혹적으로 보이는 붉은 눈 위로 당신을 비추고 있었다 . 입에 한 입마개 사이로 증기와 같은 숨을 뱉어내며 기관차와 같이 거대한 거체로 당신을 굽어보는 야수 . 야수는 당신의 저의를 읽기 힘든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 우악스런 앞발로 당신의 몸을 낚아채려 했다 .
>>47 남자의 푸른 눈동자 속으로 노란빛이 가득 비집고 들어선다. 어둠이 사막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한 것은 저때문이었나. 언제부터 쓰고 있었는지도 모를 파일럿 모자를 벗어 내리고 세상을 집어삼킬듯 거대한 월광을 바라본다. 새하얀 백지가 된 머릿속에 조금이나마 상식의 끈이 남겨진 탓일까. 이 광경이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도망칠 곳도 기억할 수 있는 것조차 없었다. 그러나 몸을 짓누르는 감각만큼은 너무나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허황된 꿈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만약 이곳이 현실이라면 나는 지옥에 오게 된 것이겠지. 라고 남자는 마음 속으로 읊조렸다.
한동안 언덕 위에 앉아있던 사내는 팔을 딛고 일어나 경사 아래쪽으로 몸을 쓸어내리듯 빠르게 내려간다. 우두커니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봐야 얻을 것은 없다는 둥,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유 모를 일념에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언덕 반대편으로 완전히 내려왔을때는 온몸이 모래투성이가 되어 몇분씩이나 털어내야 했다.
>>50 너덜거리는 옷을 가다듬기도 잠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으로부터 날카로운 폭음이 두 귀를 덮쳐온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바닥으로 웅크린다. 좁아진 동공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겨누어지고,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남자는 모래 먼지를 삼키고 따가워진 목을 콜록이며 손에 쥐어진 모자를 바라보았다. 모래 알갱이에 긁힌 고글 렌즈가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하늘을 뒤덮은 달빛과 끝없는 사막. 그리고 정체 모를 폭발까지. 모든 것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히려 이질감이 덩어리가 되어 그 속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버렸다. 본능이 이끄는대로 향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방금전보다 조금 더 느려진 걸음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좇는다. 그곳에 무엇이 있든 끝이 없는 막연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줄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안고서 말이다.
대처는 완벽했다 . 소리는 멀었다 . 여파는 감지되지 않았다 . 단발성이었나 , 잠시 더 기다려봐도 같은 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려고 해도 벽처럼 서 있는 언덕이 방해다 . 확인하고자 한다면 또 한 번 더 언덕을 올라야 할 것이다 . 힘든 일은 아니었다 . 당신의 다리에는 충분한 힘이 남아 있었으니까 . 하지만 막막한 일이었다 . 길을 막는 장해물이 있었으니까 .
남자의 걸음이 멈춘다. 기억에 자물쇠를 걸어잠근듯한 답답함도 세상의 끝에 다다른듯 모든 것이 이질적인 이 장소조차도 쳇바퀴를 구르듯 무의미한 방황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한낱 인간이라면 단 한번도 조우하지 못한 미지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남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는 조명빛에 얼어붙은 짐승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그또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마치 바스라진 석고상을 연상시키듯한 괴이한 물체는 마치 남자의 앞을 가로막듯 우뚝 멈춰서 있었다. 낡디낡은 마네킹에 허름한 물건을 덧댄듯한 물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등이 서늘해질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깊게 바라볼수록 마치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해오고 있는듯 했다.
남자는 이제 나오지도 않는 침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다시금 읊조렸다. 만약 이곳이 지옥이라면 비로소 때가 온 것이라고. 비록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죄를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었노라고. 그래서 조금은 편한 마음이 되어 얼어붙은 자세를 풀고 괴인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사람처럼 팔이 달렸고 다리가 달렸지만 ,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 머리를 보호하려고 쓴 건지 , 보여서는 안 될 것을 가리기 위해 쓴 건지 , 비밀에 감춰진 이목구비는 상상력을 부추겨 그를 더욱 더 공포스럽게 보이게 했다 . 사람이라면 , 살아 있다면 , 저리 허깨비처럼 , 아무런 맥락도 없이 , 처음부터 저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당신 앞에 나타날 리 만무하다 .
저것이 , 괴인이 , 당신에게 악의를 지녔다면 ,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 . 괴인의 팔이 움직였다 . 앙상하게 말라 뼈가 도드라지는 검지가 철가면으로 향했다 .
>>60 인간의 형상을 닮은 무언가의 앙상한 팔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남자는 어깨를 흠칫 오므린다. 아무런 말도 행동조차 없는 그것을 바라보며 긴장감으로 한껏 졸린 몸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 애를 쓴다. 돌아올 기약 없는 기억의 조각들은 미지 앞의 공포심 아래 더욱 깊숙히 숨어버릴것만 같았다.
"당신은 누굽니까, 여기는 어디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정교하게 짜여진듯한 이질감 속에서 남자는 입을 떼었다. 한걸음조차 떼지 못할 공포에 사로잡혔음에도 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이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허황된 풍경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찾으러 온겁니까?"
대답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급히 이어 묻는다. 가면 사이로 드리워진 그늘로부터 내리깔린 시선은 낡은 부츠와 마주한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들중 가장 눈에 익는 것이라 긴장을 늦추는데 도움이 되었다.
생명력이 빠져나가며 굵게 , 깊숙히 패인 목주름만 보면 저것이 과연 말을 할 수 있기나 한지 의문스럽다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니 , 바스라지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 팔을 아래로 내릴 뿐이다 . 무슨 연유로 당신 앞에 나타났는지 . 왜 당신 앞을 지키는지 .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더 늘어났을 뿐이라 , 사태는 악화됐다고 볼 수도 있었다 .
이렇게 서로 대치만 하고 있을 건가 . 이렇게 어색한 ,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
다행히 얼마 안 있어 괴인이 무엇에 반응했는지 , 왜 당신을 멈춰세웠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됐다 .
고운 모래 사이로 유사처럼 꿈틀이는 소리에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는다. 아무것도 없는 빈 벨트 사이가 왠지 허전하게 느껴진다. 빠르게 전환되는 긴장감 탓에 이제는 분위기에 완전히 휘말리게 되었는지 두려움조차 멀어지게 되었다. 그저 눈앞의 형체가 자신을 해하려 하지 않는 것에 단순히 안도를 느끼며 모래바닥 아래를 기는 모습에 시선을 집중한다.
"저건.."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본능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모래더미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석상 같은 형체를 향해 눈동자를 돌린다. 사내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가지 사실만큼은 알아챌 수 있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터질것만 같던 심장이 차갑게 진정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저 겁쟁이만은 아니었구나 라고.
"만약 당신이 날 거두러 온 자라면 적어도 내가 향할 길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것 아닙니까?"
사내는 고개를 위로 들어올려 상대에게 묻는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유령이든 어떤 존재이든지 이제 더이상 궁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이 기묘한 장소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갈라진 목소리를 마치면서 비현실적인 상황속에 젖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조금은 씁쓸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가로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