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 사각, 부츠 밑창이 뻣뻣한 소리를 내며 모래를 짓누른다. 한줄기 땀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흘렀고 창백한 뺨에는 모래먼지가 달라붙어 부랑자의 낯이 되었다. 사막에서 눈을 뜬지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척박한 환경이 사내를 짓눌러온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똑같은 풍경과 메마른 공기만이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는다.
마른 침을 삼키고 숨을 돌릴때 무심코 닿은 시선에 사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붙인다. 달빛에 반사된 투명한 수면에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급한 발걸음에 한번쯤 발을 헛디디기도 하며. 사내가 지나친 자리로 작은 먼지바람이 인다.
사내는 오아시스 앞에 멈춰서 허리를 숙인다. 작은 파동조차 없는 물길에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친다. 그는 모자를 벗어내리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자신의 눈과 코, 그리고 입술을 더듬는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듯이 뺨을 지나는 손길이 다급하다.
당장 눈앞의 물 웅덩이가 타들어가는 갈증을 더욱 자극한다. 사내는 장갑을 벗어던지고 양손으로 물을 한웅큼 떠올린다. 모래로 젖은 뺨을 닦아내고, 숨을 돌린다. 마른 목을 축이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쉽게 목을 축이지 못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주변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123 모래바닥에 얼굴을 쳐박은 자는 한동안 미동이 없었다. 움직임을 유영에 비유해서 그런가. 미동도 없이 쓰러진 게 바다 밖으로 나와서 숨을 멎은 생선토막 같았다. 물론 그는 당장에 죽은 것이 아니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모래침대에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아도 될 듯 하나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잠이 오지 않았고, 아직 오래 걷지도 않았다.
비틀비틀 바닥을 짚고 일어선 소년은 다시금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쳐박힌 게 도움이 되었는지 아까보다는 '걸음'에 가까웠다.
당신의 약함을 야수는 비웃는 듯 했다 . 숨으려는 두려움을 비난하듯 야수가 눈을 부라렸다 . 대신 싸울 생각은 없다고 , 야수는 말하는 듯 했다 . 소리를 빌리지 않아 추상적일 수 밖에 없는 분노가 당신의 머리에 울리었다 .
야수는 세 갈래로 갈라지는 괴물의 머리를 보더니 , 놈이 모래를 차고 뛰어오르는 모습에 몸을 움츠리고 , 팔을 무는 흉측한 흡반에 비명을 질렀다 . 도마뱀처럼 생겨서 무슨 끔찍한 짓인지 , 야수는 이를 갈며 놈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팔에 박힌 이빨이 , 팔을 꽁꽁 묶는 혀가 방해가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
그녀는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질릴때까지 걸었다. 사막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모래와 더 많은 모래와 더더 많은 모래들이 함께 했다. 사람의 존재는 기대 할 수 없었다. 결국 질릴대로 질린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다. 물론 상식을 기억한다면야. 그녀, 한나는 갑자기 모래만 가득한 곳에서 눈을 떴으며, 자기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질리도록 걸었음에도 사람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망망대해(바다가 모래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지만) 한복판에 떨어진 꼴이었다.
"내도 모르겠다... 여기는 어데고? 진짜 죽겠디..."
조금 쉬었다가 다시 고개를 든 한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주변에 모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보름달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달을 감상하던 한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당신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 너무 급했다 .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다니 , 현명한 행동은 아님에 분명했으니 . 일부러 이렇게 괴인까지 나타나서 당신에게 핀잔을 주는 것이리라 . 당신이 재차 수면에 입을 가져다대면 괴인은 수면에 비치는 당신의 모습을 훔쳐 , 자신의 철가면을 대신 비추는 것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실패로부터 배우는 거지 . 걸음도 인생도 . 너무 큰 실패만 아니라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 당신은 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으로 , 천천히 사막을 나아갔다 . 나아가면서 낯선 세계의 풍경을 눈에 새겼다 . 부담스럽게 거대한 보름달이나 , 멀리 사구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인영의 존재나 , 그런 것들을 말이다 .
물을 앞둔 흥분감은 창백한 쇳빛에 차갑게 식어버린다. 사라진줄만 알았던 그것이 또 다시 나타나자 사내는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얼굴을 씻어내린 덕분인지 아니면 불쑥 나타난 오싹한 기운 때문인지. 적어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뭡니까.. 또 이상한 훈계를 할 생각이라면 놔둬요. 좀 쉬고싶군요."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에서 처음 느낀 것은 공포였지만 이젠 지쳤다. 모래를 적신 회색빛과 으스스한 철가면을 바라보고 나서도 더이상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할만큼 피로가 몰려왔다.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는 덤이었고.
달에 정신이 팔려서 그랬나. 누군가 다가왔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어디서 누군가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좀... 기가 차다는 듯한,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그리고 다시 보니 진짜로 누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감상이었다. 어? 니는 눈교...?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어 거의 기어가다시피 땅을 박차고 일어서려고 했다. 저건 누굴까. 1차적인 의문은 그것이고, 너는 나에게 무슨 생각을 갖고 있지? 이것이 2차적인 의문이었다.
어렴풋한 생기가 떠도는 두 눈이 먼 곳을 보았다. 너무나 가까워서, 살짝 걸어 다다를 수 있을 듯한 보름달 덕인가. 먼 사구 위에서 어떤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보듯 서있었고 아마도 사람일 것이다. 저 자가 자신에게 호의적일 것이란 근거는 없었으나 어디나 똑같은 세계에서 목적지로 삼을만한 것이긴 하였다.
하여, 그는 방향을 잡았다. 몽롱한 방랑보다는 확고한 여행이 조금 더 안정적인 법이다. 비록 품이 남아 팔락거리는 옷자락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해파리의 흔들림 처럼 보이더라도.
당신이 충분히 물러서자 괴인이 수면을 가르고 일어났다 . 저렇게 거대한 몸이 어떻게 저 얕은 물 속에 들어가 있었는지 의문스럽지만 우선 가능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 철가면에서 쫓겨나와 쏟아지는 급류에 당신의 옷이 젖기도 했지만 , 이에 대해 항의를 할 용기는 없으리라 믿는다 . 괴인은 가면을 가득 채우던 물기를 모두 쏟아낸 다음에야 자신의 소리를 내었다 .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잔잔했던 수면이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오른다. 가려진 형체가 온전히 드러났고, 피할 재간 없이 물벼락을 맞은 사내는 온몸이 흠뻑 젖어 조금 허탈해진 표정으로 물이 들어간 코를 풀어낸다. 정신을 번쩍 깨우는 감각에 괴인의 울음에 반응할 틈조차 없었다.
"고맙군요. 안그래도 땀에 범벅이 된 참이었는데."
물을 먹은 코트는 쇠를 얹은듯 무거워졌고, 사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괴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찰흙을 얼기설기 붙여놓은듯 기괴함으로부터 풍기는 싸늘함은 처음 봤을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그는 당장 떠오르는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저곳에 함께 누워있었겠죠.."
이윽고 남자는 경의를 표하듯 팔과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비록 공포와 의문을 풍겼지만 조력을 주었으니. 지금으로썬 남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을 건넨 것이다.
달리면서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그녀는 이쯤 달렸으니 단념 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까무라쳐 쓰러질 뻔했다. 맞다, 저 녀석은 날 수 있는데 뭔 소리가 나겠는가. 다시 경악하며 달리기 시작한 한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며 운수 한 번 사납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건 순화된 거고, 실제로는 더한 말들을 속으로 뇌까리며 미친듯이 달렸다.
"잘못했습니더!!! 지가 뭔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진짜 잘못했심더!!! 한번만 봐주이소!!! 흐끼야아악!!!!"
사내는 흙탕물이 되어버린 웅덩이로부터 시선을 돌린채 괴인에게 말한다. 먹을것도 마실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과 그를 응시하듯 거대한 달빛. 그 아래엔 수도 모를 괴물들이 도사렸지만. 사내는 냉정하게 상황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끝을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안개로 자욱한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길 바랐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아주 커다란 죄를 지은 모양입니다. 나는 아마 몸이 바스라지도록 이 연옥 속을 헤메게 되겠죠. 당신의 말처럼."
자신을 덮쳐온 붉은 눈동자들을 상기시키며 말을 이어간다. 이성조차 남지 않은 괴물들과 인간이라 부르기엔 몹시 뒤틀린 이 자 또한 어쩌면 자신과 다르지 않은 시간을 거치지 않았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난다.
한나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이건 내 착각인가? 왠지 땅이 좀 울렁이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할 정신은 있던 모양이다. 끝없는 사막, 유난히 큰 보름달, 날 쫒아오는 이상한 녀석, 꿈틀거리는 지면. 심상찮게 돌아가는 상황에 한나의 불안과 공포는 더 커져갔다. 뒤를 돌아보니 추격자가 더 많아졌다. 저것들은 언제 따라붙은거야?! 결국 자리에 풀썩 쓰러진 한나는 이것이 꿈이길 바라며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닥에 넘어지자 까슬까슬한 촉감이 얼굴에 닿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래의 촉감이었다. 여기는 순 모래밖에 없으니까. 상황을 살펴보니 저 가면 쓴 무언가도 자신때문에 말 못할 고생을 한 듯 했다. 죄송합니더... 지가 다 잘못했심더 다 지 잘못이고 죄고 하여튼 지가 천하의 똘갱이라 그랬심더. 봐주이소... 그러다 창을 뽑은 가면인을 보고는 -이제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던 것인지 가만히- 양 손을 들어보이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