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애벌레 시절엔 나뭇잎을 갉아먹고 나비가 되면 꽃꿀을 먹는다. 바벨도 비슷했다. 저번에는 살점을 직접 흡수하더니, 얼굴이 생기고는 색깔을...마셨다. 만화적으로 생각하면 정기 비슷한 걸 마신걸까. 바벨은 무채색 다진고기 위에서 탭댄스를 춘다. 바벨은 회복되었다.
"사람처럼 생긴 것들은 전부 이상하게 약하단 말이에요."
칼리번은 그냥 가죽 없는 사람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냥이란 단어를 붙인 이유는 겁먹은 농노의 머리를 기사가 치는 것보다 싱거웠기 때문이다. 가죽 없는 사람은 괴물보다도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리델 말대로 시체와 같다.
모래가 되는 사람, 가죽이 없는 사람, 모래벌레 안의 사람. 전부 생긴거에 비해서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위험했던 모래벌레 안의 사람도 반신불수 바벨에게 맞아죽었다.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남은 찌꺼기인가? 피와 살이 아니라 영혼을 빨렸을지도요."
그 사람 비슷한 것들에 대해선 자신도 할 말이 적었다. 애초에 사막 경력도 그리델보다 짧고.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닌 걸까 . 그리델은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 애초에 이들은 어디서 온 거지 . 누구에게 습격을 당한 거지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그리델을 망설이게 했다 . 이대로 , 이대로 계속 도로를 이정표 삼아도 되는 걸까 . 이제라도 물러서서 , 다시 사막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
< ... ... 라미레즈 씨 , 저 사람들 , 저렇게 되기 전에는 뭘했다고 생각해요 ? >
네 명이다 . 어떻게 네 명이 모두 당할 수 있지 . 서로 간에 죽이고 죽였다면 이렇게 될 수 없다 . 그리델은 칼리번을 지우고 , 도로와 사막을 번갈아 바라봤다 . 만약 < 사교적인 모임 > 이 벌써 파탄났다면 , 이 길을 계속 따라갈 이유도 사라진다 . 앞으로도 계속 사막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 헤매겠지만 , 꼭 필요하지도 않은 위험을 수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 일에 이정도면 훌륭한 플래그가 아닌가 싶지만 , 우선 넘어가는 분위기다 . 그리델은 더이상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피해 도로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 하지만 바벨은 이런 선택을 반기지 않았는데 , 당신들은 모르는 이유로 도로를 계속 나아가려고 했다 .
당신이 위험을 강조하며 아무리 꿀밤을 때려도 듣지 않을 기세 . 녀석이 부쩍 당신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 바벨의 뜻을 존중해 멋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리델과는 여기서 작별해야할 것이다 .
바벨이 당신의 생각에 과연 동조할지 여부는 차치해두고 , 결정했다면 한 시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 도로를 따라 또 무슨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이 내려올지 모르니까 . 사구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천 몇 걸음 될까 .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 사구를 넘으면 또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겠지 . 그리고 또 사막에서 사막으로 , 도로를 피해 걸어가야만 한다 .
한 때는 저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렇게 궁금했는데 , 그리델은 그런 것은 더이상 신경 쓰이지 않는 눈치였다 . 이대로 모르고 싶다 , 알고 싶지도 않다 , 그냥 이대로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
넓다 . 너무 넓어서 텅 비어 보이는 사막이었다 . 역설적이지 . 이렇게 모래와 모래로 가득 차 있는데 , 거기서는 아무런 존재감도 느낄 수 없고 사막은 하나의 공동처럼 다가온다 . 하늘은 분명 열려 있는데 닫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 달 . 움직이지 않고 살아 있지 않은 , 죽은 시체와 같은 달만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하늘은 닫힌 것과 다를 게 없었다 .
당신들은 넓기만 넓고 어항 같은 이 사막을 금붕어처럼 정처 없이 , 그냥 그렇게 계속 걷기만 하고 있다 .
그리델의 우려와 다르게 아직까지는 ─ 어떤 적도 당신들을 습격하지 않았다 . 괜한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사막은 끊임없이 쉬지도 않고 당신들을 위해 길을 준비했다 . 도로에서 멀어지자 , 바벨도 도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발로 걷기 시작해서 , 사막에는 당신들 두 사람과 바벨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 때때로 당신이 과거의 경험을 되새겨 발자취를 지우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 길이 너무 길다 보니 그런 노력도 꾸준히 하기가 어렵다 .
너무 지루한 나머지 , 저 그리델조차도 자극을 바랄 지경이었으니 . 상황이 알 만할 것이다 .
< ... 잠시 쉬어갈까요 ? >
이걸로 벌써 다섯 번째 휴식 . 얼추 오만 보마다 당신들은 멈춰서 쉬고 있었다 . 그것은 육체의 피로보다는 정신의 피로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 주로 당신보다는 그리델의 피로 말이다 .
그리델은 당신이 신발을 벗는 것을 보고 곧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끊어지기 직전까지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고 겨우 숨을 내쉬었다 . 그런 그리델을 지키는 것처럼 모래를 헤치고 일어나는 강철 갑옷 . 칼리번은 그리델과 교대하여 사막의 모든 것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 반면에 바벨은 아무 생각 않는 것처럼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 저래도 빠짐없이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다 . 이상이나 이변이 생기면 금방 행동으로 나타낼 터였다 .
< .. ... 아 , 원래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이었죠 . 브루클린에서 제일 큰 공장이었는데 ... >
공장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 그리델은 떠오르지 않는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내려다 , 포기하고 멋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
< 아 ~ 안 되겠어요 , 더는 생각이 안 나네요 . 어쩐지 자꾸 기억이 흐려지는 거 같아요 >
그리델은 당신이 당황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하지만 말도 안 된다 . 당신의 얼마 안 되는 기억 안에서도 브루클린은 번화한 모습으로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 그리델은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 더욱 기가 차는 것은 그녀가 당신을 이상한 사람 보듯 한다는 것이다 .
저런 반응을 보면 그녀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착각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
< ... 모델 T 를 말씀하시는 거죠 ? 나머지는 ... 잘 모르겠네요 ,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신 거예요 ? >
어쩌면 , 당신이 이 세계에 와서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들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먹느라 그리델은 진땀을 흘렸다 . 그도 그럴 만하지 . 백 년 뒤의 미래라니 . 막연하기까지 한 시간의 거리감 아닌가 . 당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웃으니까 , 그리델은 차라리 이 모든 게 농담이기를 바랬다 . 그리델은 자신의 시간 감각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 여기서 깨어나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 그 사이에 백 년이 지났어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 그녀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싶었다 .
< 생각이 , 제대로 정리가 안 돼요 . 이게 무슨 ... >
쉽게 생각하면 쉽다 . 당신은 백 년 뒤의 사람 . 그리델은 백 년 전의 사람 . 단지 그뿐이다 . 당신이 지금 깨어났다고 해서 , 정말로 방금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건가 . 당신들이 이 사막에 어떠한 경위로 오게 됐는지 모르는데 , 그것은 지나친 낙관이겠지 . 당신들이 망자라는 사실이 더욱 명료해진다 . 당신들은 자신들의 < 현재 > 에 묶여 있다 . 그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
그리델에게서 여기가 사후 세계라는 말을 듣고도 , 당신은 어째서 의심하지 않은 걸까 .
문득 ─ 당신과 바벨의 눈이 마주친다 . 새카매서 , 아무것도 비치지 않아야 하는 눈에 당신이 비친다 .
또 한 번 바벨의 안에 구멍이 커다랗게 드러나고 , 당신은 기억을 되찾는다 . 당신이 살아온 땅 . 고향 . 잃어버린 친지와 식구에 대한 것 , 당신을 이루고 완성하는 역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 당신과 당신이 하나로 다시 합쳐지기까지 , 아마도 한 걸음 남았다 .
타자화된 기억은 어떤 감흥도 없다. 남의 일이나 TV를 보는 감각이다. 되돌아보면 모든 생전 기억이 그랬다. 동생이랑 집에 왔더니 모르는 남자가 퍼질러 있던 기억. 동급생과 싸우던 기억. 훈련소에 들어가 솔방울처럼 구르던 기억. 처음으로 낙하산을 진 채 뛰어내리고, 처음으로 사람을 쏴죽인 기억.
자기 자신이 객관적으로 느껴진다. 승려의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열반에 들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여행을 다녔나요?"
한번도 못 가본 곳. 여러 곳을 다녔지만 텍사스는 가보지 못했다는 문맥이 약하게 잡혔다. 그리델의 묻힌 과거에 마중물을 부어본다. 미카엘라는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리델의 과거가 그리델을 스스로 위로하는 수 밖엔..
그리델이 무엇을 기대하다가 무엇에 체념하는지 미카엘라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찾아온게 변명의 여지 없는 죽음이 아니라, 임사의 세계에 빠진 것이라고 믿은 걸까? 그리델의 육체는 병원에 누워 숨만 쉬고 있으니 사막을 벗어나면 눈을 뜨고 일어날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카엘라의 증언이 그리델의 몸뚱이를 백골로 만들고 관과 무덤 안에 쳐박아버린 것이리라. 재에서 재로, 먼지에서 먼지로.
"지금 하는 것도 여행이잖아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아."
뭔 개떡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중 경보 신호가 울렸다. 땅 위에 없고 하늘에도 없다. 그럼 땅 속이다! 망설이지 않고 바벨을 끌어와 칼리번의 등 뒤에 섰다. 서로의 배후를 지킨다.
"소원 같은 건 나중에 하고! 그 바스라지는 모래인간들처럼 되기 싫으면 정신차려요!"
사막이 지옥이라면 불지옥처럼 화끈한 지옥은 아니다. 늪처럼 스멀스멀 기어와 사람의 속을 헤집어놓는 지옥일수도 있다. 그리델처럼. 하지만 미카엘리는 여기가 지옥임을 거부했다.
'나는 무죄야. 애초에 죄라는 건 없으니까. 죄수를 가둘 지옥도 없는 거야!'
모두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착각이다. 사람을 쏴죽이네 마네 해도, 전부 예정된 일이 죽는 자와 죽이는 자를 통해 이뤄졌을 뿐. 꼭 책임을 묻겠다면 그렇게 정한 운명에 물어야지. 왜 찌른 사람을 두고 피 묻은 칼에 손가락질을 하냐는 말이야! 엿이나 먹어라!
당신이 그렇게 믿는 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 당신 스스로 그렇게 납득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 바벨은 싫어하면서도 칼리번의 뒤에 숨는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 칼리번의 넓은 등은 당신과 바벨 모두를 가리고도 다소 여유가 남았다 . 그것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참호와 같아서 , 당신에게 그리운 안정감을 선사했다 .
< ... ... 칼리번 >
반면에 그리델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그리델이 저래서야 칼리번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다 . 당신은 이런 사실을 막연하게 느꼈다 . 방패가 되고 요새가 되어 전위에 서는 칼리번이 ─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무너진다면 , 당신과 바벨은 과연 어떻게 될까 . 사냥감의 입장에 익숙하지 않은 숱하게 많은 병사들이 , 방심과 자만으로 전장에서 어떤 처참한 최후를 맞는지 ─ 지금의 당신이라면 기억할 터 . 매가 토끼를 낚아채는 것처럼 죽음은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 오늘까지 이겨왔다고 내일도 무사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
이대로 칼리번을 방패 삼는 것이 정말로 정답인지 ─ 당신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칼리델은 성벽처럼 굳건해 보인다. 그러나 성주 그리델은 실의에 빠졌다. 성은 적에게 포위되고 중심을 잃은 가신들은 혼란에 빠진다. 성첩의 병사들은 탈영에 대해 논한다. 성벽의 의미는 사라진다.
하지만 그곳에도 베테랑 선임병은 있다.
"그리델...! 이 얼빠진 인간! 여기는 심리 상담소가 아니에요!"
속삭이듯 윽박질렀다. 총알에는 눈이 없다는데 미카엘라의 경험상 총알에도 눈이 있다. 총알은 약하고 무력한 사람을 보고 골라서 죽인다. 늙고 약한 자는 죽기 마련이다. 미카엘라는 그리델을 끌어내렸다. 칼리번을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왜 기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 가르쳐줄까?
"따라해. 따라해!"
"Count to four, inhale." "Count to four, exhale."
전투 중 공황에 빠진 신병들을 한두번 본게 아니다. 손아귀로 그리델의 얼굴을 억지로 쥐어 입을 벌리고, 잡아먹을 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숨을 못 쉬겠으면 눈 뜬 채로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을 해주겠다.
"Count to four, inhale!!!" "Count to four, exhale!!!"
들이쉬고 , 내쉬고 , 입으로 ─ 목구멍으로 ─ 폐로 ─ 억지로라도 숨을 삼켜서 살아 있다는 실감을 갖게 한다 . 죽은 당신들이라도 이 세계에서 주어진 몸은 충실하게 생전의 기능과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서 , 숨을 삼키는 시늉을 하면 정말로 호흡이 이루어졌다 . 살아 있다고 , 스스로를 착각하게 만든다 . 그리델은 거기서 희망을 가졌던 건지도 모른다 .
< 윽 .. >
과격하게 , 우악스럽게 , 불과 수 밀리미터 거리 안으로 다가온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 시선을 피하고 싶어 하는 그리델 . 하지만 도망을 허락하지 않는 당신의 손에 , 그녀의 숲처럼 푸른 초록색 눈이 당신의 샛노란 시선에 꿰인다 . 당신의 의지나 생각 , 감정과는 상관없이 불수의근의 영역에서 멋대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목격하고 만다 .
당신이 왜 갑자기 난데없이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는 그리델은 , 눈을 닫지도 못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봤다 . 얼빠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 생전부터 그녀는 얼빠진 사람이었으니까 . 그렇게 얼빠진 사람이었으니까 여태껏 헛된 노력을 했지 . 오래전에 죽은 내가 ─ 지금 살아갈 노력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 시체가 ─ 망자가 ─ 저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관뚜껑을 열고 걸어 나와 산사람 흉내를 내며 다음으로 다음으로 발을 뻗고 있다 . 발은 땅에 닿지도 않는데 걷는 시늉을 하며 점도 높은 물속으로 깊이 ─ 또 깊이 빠져들고 있다 . 그리델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은 ,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
엉망진창 팔리지 않을 이야기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였다 . 그것에 마침표를 찍고 책까지 덮었는데 ─ 누군가 자물쇠를 멋대로 부수고 남은 여백에 억지로 함부로 그녀가 바란 적 없는 다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일필휘지로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 죽음으로도 완성되지 못하는 삶이라니 .
더는 이야기의 저자가 자신이 아니라 ─ 다른 인물의 붓질에 운명을 좌지우지당하는 일개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단 것을 깨닫자 ,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무서워졌다 . 허무해졌다 . 그래서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려고 했던 건데 . 애초부터 내게 돌아갈 곳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고 .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악취미적인 농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언제까지 , 얼마나 더 싸울 거예요 ? 감정이 결여된 기계 같아 . 살아남으려고 하지 마요 , 벌써 죽은 이야기잖아 . 억지로 이렇게 숨을 이어 붙여봤자 , 빌어먹을 가필 밖에 더 되겠어요 ? >
뿅! 바벨의 머리통을 함몰시킨 꿀밤이 그리델에게도 떨어졌다. 미카엘라는 이곳이 심리 상담소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사막에 천막을 쳐 놓고 심리 상담을 하는 의사 출신의 망자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기가 심리 상담소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안 된다. 발 밑에 괴물을 두고 하는 심리상담은 너무나 짜릿하니까..
"단순하게 생각해요? 살아있으면 살아가는거고 죽어있으면 그대로 죽어있으면 돼요. 죽은 이야기니 가필이니 쓸모없는 사족 다는 거, 나는 엄청 싫어해요."
소리는 귀여운데 아픔은 현실적이다 . 그리델은 고통을 느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역시 말보다 주먹이 빠르게 통할 때가 있다 . 즉효성 높은 처방은 그리델로 하여금 잊고 있던 육체의 감각을 다시 기억해 내게 만들었다 .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살아났다 . 이 무슨 잔학한 짓인지 . 더는 싸우기 싫다고 말하고 있잖아 . 그리델이 입 대신 눈으로 말했다 .
하지만 당신의 우기는 말 ─ 밀어붙이는 급한 말에 순간 꺼낼 말을 찾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 살아 있지 . 죽어서도 살아 있지 . 당신 말대로 단순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 하지만 너무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거 아니야 ? 이다음 뭐가 기다릴지 당신도 나도 아무것도 모르잖아 ! 이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차라리 지금 전부 포기하는 게 나은 선택일 수도 있잖아 ! 하지만 이렇게 입 밖에 내놓으려고 보니 너무나 추하고 , 비관적인 말이라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
당신은 그리델과의 말싸움에서 승리한 듯 보였다 .
< ... 제길 >
마침내 그리델이 입을 열자 그녀의 말에서 속이 타는 냄새가 났다 . 어지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지 . 하지만 지금은 저걸로 됐다 . 멋대로 무너지고 쓰러지고 죽어버리지만 않는다면 , 칼리번은 당신과 바벨의 발목을 잡을 만한 요소가 아니다 . 비로소 싸울 준비가 됐다 . 당신이 그리델을 뒤로하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주변을 살핀다면 , 바벨이 드물게 당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띌 것이다 . 녀석은 당신과 그리델의 대화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미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어쩌면, 진짜로 포기한 쪽은 미카엘라일지도 몰랐다. 운명을 지배하고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려는 의지를, 지금보다 다음이 더 나을라는 믿음을, 왜 우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쳐야 하냐는 고뇌를. 그리고 자기가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뒷일을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단 하나다. 생각하면 피곤해지는 거. 생각과 관계없이 닥칠 일은 닥친다. 예고가 있든 없든. 즐겁든 괴롭든.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요."
그리델의 얼굴을 이제서야 놓아주었다. 쓸모없는 말싸움을 하다가 기습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깡통(총)괴 깡통(칼)의 적색등이 켜진 이후로 이상하리만치 사건이 없어보이긴 하다만. 사건이...
"바벨?"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좀...그렇다? 평소에는 안 그러더니. 미카엘라는 표정관리와 예의의 차원이 아닌 곳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에 저러던 애가 아니었다. 두 국자째 들이부은 모래가 바벨의 내면을 변화시킨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경보가 울리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게 이상하다.
앞을 보라는 당신의 명령에도 바벨은 능청스럽다 .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당신의 시선을 피하는 바벨 . 겉으로 보면 당신의 말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 그도 그럴 게 녀석이 당신에게 문을 열지 않는 걸 . 바벨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당신을 문전박대했다 . 자신이 보는 세계를 당신에게 감췄다 . 촉박한 상황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 당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한 마디 따지고 싶을 것이다 . 장난은 관두라고 . 무슨 생각이냐고 . 어쩌면 말 대신 주먹으로 녀석을 쥐어박을 수도 있겠지 .
그런데 그것보다 먼저 ─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
모래의 바다를 가르고 , 거대한 범선 한 척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지진처럼 거대한 진동이 있고 , 당신들의 발밑이 갈라졌다 . 모래가 폭포와 같이 갈라진 틈 아래로 쏟아졌으며 , 선수의 바우스프릿에 칼리번의 가슴이 관통됐다 . 실력 있는 기사라도 상식 밖의 특공에는 뾰족한 수가 없던지 , 강철로 된 몸이 창을 닮은 뾰족함에 찔려 한낱 쇠꼬치가 되었다 . 당신의 다그침에 정신을 차린 그리델은 가까스로 균열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 끔찍하게 당한 칼리번의 모습에 열심히 비명이나 지르고 있으니 , 한동안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
결국 바벨과 당신만 남았다 . 바벨은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롭게 균열을 피하고 있었다 .
이놈의 자식, 뭐에 씌이진 않았구나. 바벨은 평소대로 싹바가지 없는 바벨이다. 저 요상한 표정도 바벨의 심상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임이 분명하다. 저 머리를 한 번 더 후려 말아 고민하던 차, 위협은 모습을 드러낸다.
"사막....잠수....범선......???"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까먹는 단어조합이라 따져도 진짜 그런 걸 어쩌란 말야. 미카엘라는 어이가 없어서 막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칼리번은 꼬챙이가 되고 겨우 정신줄을 잡아놓은 그리델은 비명만 지르는데, 여기서 자신이 웃으면 정말 미친놈처럼 보일테니까. 물론 바벨이 저렇게 됐으면 웃었을 것이다. 자기 머리통을 뜯어서 던지는 녀석이 배에 구멍 좀 뚫렸다고 위험해지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저게 뭔, 뭐..! 어어..!! 그 뭐지!"
불행하게도 해군 분야에는 미카엘라가 무지하다. 범선의 구조나 해전의 역사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미카엘라는 빈약한 기초지식을 가지고 대충 판단을 내렸다.
"그렇지! 나포! 나포해야 해요! 쏘지 말아봐! 올라타!!"
왜 격침이 아니고 나포냐면, 저걸 타고 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범선도 일종의 괴물이겠으나, 일단은 배..이기도 하고. 기약없는 사막 방랑에 자가용 하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미카엘라는 범선의 배가 다시 모래 위로 떨어지는 때 범선 현측을 째릿 쳐다보았다. 그물 사다리나 아무튼 잡고 오를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땅에서 솟아난 범선이 칼리번을 꿴 채 날아오른다 . 바벨은 당신의 목소리에 공격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것을 멀뚱히 바라만 봤다 .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 한 차례 훑어본 결과 당신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접점은 보이지 않았다 . 배에 오르기 위해서는 바벨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 아니면 누군가 길고 아름다운 금발을 내려주기를 바라야겠지 . 고래처럼 뛰어오른 범선은 당신들로부터 한참 떨어진 장소에 배바닥을 부딪혔다 . 착륙보다는 추락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 겉보기에 무척이나 낡아 보이는 배는 다 닳아 해진 돛을 몇 개 씩이나 주렁주렁 , 낙엽처럼 달고 있었는데 방금의 충격으로 그마저도 올바르게 달려 있지 않았다 .
저대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 그렇지 않는가 . 노리지 않고서야 칼리번의 가슴 정중앙에 정확하게 바람 구멍을 낼 수 있을 리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