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대로 숨통을 끊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었을 거다 . 상대가 허튼 수작 부리기 전에 손을 쓰는 과감함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고 , 마침내 소년이 입을 열었다 . 바짝 마른 입술과 비틀린 모양의 혀로 문장을 만들어냈다 . 너무나 뜻 밖의 말을 높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 늙은이와 아이가 함께 느껴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 살고 , 싶어
- 아직 더 , 살고 , 싶어
- 죽고 싶지 , 않아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 죽어가는 시체의 모습으로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한다 . 소년의 바램은 곧 당신에 향한 구걸로 바뀌었다 . 살려달라고 , 당신에게 애원하며 부러질 것 같은 손으로 바벨의 하나 남은 팔을 붙들었다 .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며 , 제발 살려달라고 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 의지 > 가 기어오른다 .
이미 떠나간 운명을 다시 손에 쥐려는 강한 집념 . 한기마저 불러일으키는 소름끼치는 집착에 바벨이 경기를 일으켰다 . 그리고 그런 예감이 허튼 것은 아니던지 , 소년의 눈자리로부터 피접이 상골한 팔이 불쑥 튀어나와 바벨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목을 쥐는 힘에 비해 팔을 붙드는 힘은 대단치 않다 . 바벨이 마저 몸을 바닥에 붙이려고 하자 끔찍하게도 소년의 팔이 당기는 힘에 못 이겨 뜯겨지고 떨어졌다 . 똑바로 신경이 살아 있는 걸까 . 아니면 , 자신의 팔을 망가뜨린 바벨이 미워서 그러는 걸까 .
소년의 벌어진 입으로부터 뛰쳐나오는 의미 모를 비명 .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흰색의 세계를 뒤흔드는데 , 도무지 이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바벨은 당신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주먹을 쥐어 소년의 머리를 때렸다 .
소년의 머리가 , 아주 찌그러져 , 형체를 상실토록 , 주먹을 휘둘렀다 .
자신의 목을 붙잡는 손이 떨어질 때까지 , 주먹을 내리쳤다 .
소년의 머리는 모래 장난으로 만든 인형처럼 손쉽게 망그러져서 , 바벨은 생각보다 금방 움켜쥐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하지만 끔찍한 감촉이 진하게 배어든 목은 손이 떨어졌어도 여전히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 바벨은 자신의 희박한 감정 속에서 처음으로 공포를 발견해내고 , 충격에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 실 , 어 … 조금 , 더 …… 살고 십 , 어
덜 망가진 입과 목이 엉성하게 조잡하게 , 사람의 말을 흉내냈다 .
아직 붙어 있는 다리로 몸을 뒤집어보려고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 한 때 소년이었던 유해는 발버둥에 발버둥을 거듭했지만 , 끝끝내 실패했고 , 머잖아 모든 생명 징후가 사라졌다 . 또 무슨 일인지 , 유해의 움직임이 멎자 흰색의 세계가 덧칠되며 다시 배경이 사막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 정신 차리면 당신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사막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
길을 걷던 여자처럼 겉만 무서워 보이고 직접 때리면 별 것 아닌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렇지! 부숴버려! 하고 바벨을 응원하던 차, 필름이 끊기고 다른 필름이 이어지듯 자신은 사막을 뒹굴고 있었다.
벌레시체! 기생충! 바벨은? 잠자다 밟힌 뱀처럼 파다닥 일어났다. 기절했다가 기상하는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여긴 누구 나는 어디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던 첫 번째하곤 확연히 다르다. 이번에는 기억이 있고, 바벨이 있고, 표적이 있었다. 셋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 바로 경험이리라.
경험치가 있으니 제일 먼저 할 일도 분명해진다 . 바벨은 부르는 즉시 당신의 곁에 나타났다 .
여전히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부족하지만 , 다른 부상이나 이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 정체불명의 적에게 목을 졸렸지만 티나는 변화는 없었다 . 이렇게 상황을 살피는 당신도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생충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 녀석들에게 단단히 묶였던 흔적이 살 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꿈은 아닌데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마지막으로 당신이 괴물 지렁이의 토막난 유해로 시선을 던지면 ,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 커다란 것이 별안간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
이런 당신을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 예의 괴물 지렁이에게 쫓기던 여자였다 .
< 무슨 , 일이 일어난 거예요 ? >
당신을 보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 그녀의 시선은 당신을 지나 , 바벨에게 향해 있었다 . 무슨 일이야 . 당신의 눈이 여자의 눈길을 쫓아 따라 가면 , 그곳에는 바벨의 머리가 있었다 .
당신은 정말 잠시 한눈 판 것 뿐인데 , 눈을 뗀 사이 바벨의 머리에 커다랗게 균열이 생겼다 .
주변에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쩍쩍 갈라지는 머리는 ,
당신이나 여자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날카롭게 파편을 만들며 깨졌다 .
이걸로 벌써 두 번째 . 파멸적으로 파괴된 바벨의 머리 . 그런데 전과는 뭔가가 다르다 . 텅빈 강정에 지나지 않던 바벨의 머리 속에 , 이번에는 내용물이 존재했다 . 낯선 인상의 ─ 당신의 기억에 없는 낯선 사람의 얼굴이 바벨의 머리 안에 담겨져 있었다 .
알맞은 비유를 찾았다! 바벨의 새 몸은 총구멍처럼 검었고, 거기서 튀는 불꽃처럼 희었다. 얼굴은 잘생겼나. 양 손을 뻗어서 뺨을 덥석 잡아보았. 바벨의 검은 눈 속에서, 이어진 채널을 통해서, 그의 안이 느껴졌다.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이런 것까지 총구멍일 필요는 없어 바벨.
"그런 기억 따위 있어봤자 기쁘지 않다는 게 한데...."
정확한 기억만 없지 뻔하게 예상할 수 있다. 전쟁에서 산 채로 잡힌 군인에게 기다리는 최후야 묘사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진부하다. 것도 싸우던 적들이 국제법 따위 무시하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녀의 쪽도 뒤에서 할 거 다 하는 나쁜 놈들이었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 움푹 들어간 눈 . 특별한 돌출없이 얌전한 광대 . 턱은 모나지 않고 둥글지만 만질수록 그 형태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 바벨의 얼굴은 어쩐지 손 닿는 순간마다 모양을 달리하는 듯했다 . 어둠이 그러하듯 점토처럼 당신이 주무를 때마다 모양이 변하는 것이다 . 그것에 정해진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 여전히 바벨은 불안정하고 여전히 불완전했다 .
단지 흰 머리카락만이 ─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만이 선명하다 .
어깨를 덮는 머리카락은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무기질적이라 , 생물의 느낌이 희박하여 , 차라리 악기의 현에 더 가까웠다 .
당신이 바벨의 구멍을 복잡한 심경으로 살피면 ,
바벨은 당신이 바라면 여기에 두고 가도 된다고 , 소리로 빌리지 않는 말로 속삭였다 .
분명 바벨이 맡아두고 있는 당신의 기억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리라 . 당신이 과거를 뒤쫓지 않는다면 모두 바벨의 안에 깊숙히 잠겨 떠오르는 일 없이 조용히 , 영원히 잊혀지겠지 . 그것은 정말로 안락한 망각이었다 .
하지만 ─ 아무리 뻔한 기억이라도 ─ 자신의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하며 , 당신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면 ,
당신이 흔쾌히 수락하자 뛸 듯이 기쁜 표정으로 화답하는 여자 . 그녀는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서야 , 아직까지 당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
< 그리델 안첼리아예요 , 그리고 여기 , 저를 도와주는 녀석은 칼리번이라 하구요 >
그녀가 손으로 가르키자 , 빈 공간으로부터 커다란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 판금갑이라 불리우는 그 갑옷은 , 어찌나 열심히 광을 내놨는지 밤중에도 눈부시게 빛이 났다 . 볼링공처럼 홈이 세 개 파인 투구는 페이스 오프가 불가능한 일체형으로 , 정면에 만들어놓은 세 개의 구멍을 제외하면 물샐틈없이 기사의 머리를 포장하고 있었다 . 바벨과 비교하면 두께부터 , 존재감부터가 다른 존재였다 . 당신에게 적의를 향하지 않아도 , 단순히 거기에 서 있기만 해도 압력이 발생해 주위를 짓누른다 . 뿐만 아니라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주인의 등 뒤를 지키며 서니 , 싫어도 바벨과 비교하게 되리라 . 바벨과는 모든 면에서 반대를 이루니까 .
< 그리 ─ 고 , 사실 직업 화가는 아니에요 . 그림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구요 . 이런 차림새라 오해하셨죠 ? 죄송해요 >
좋은 사람 ─ 나쁜 사람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상황이다 . 상황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 극한의 상황 앞에서 드러나는 본성이야말로 , 그 사람의 모든 것 , 진실된 면일 테니 . 이 악수로부터 , 이 만남으로부터 당신이 어떤 인상을 받더라도 ,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 운명이 곧 서로의 진심을 드러낼 무대를 준비할 테니까 .
겨우 한꺼풀 벗은 정도로는 전부 억누를 수 없었던 바벨의 본성 ─ 난폭함 . 바벨은 여전히 호전적이어서 , 강철 갑옷이 눈에 띌 때마다 툭하면 시비를 걸어댔다 .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더 약한지 , 부딪혀보기를 바랬다 . 칼리번이 어른스럽게 , 한 발 먼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주었기에 망정이지 , 행여라도 그것이 걸어오는 시비를 받아주기라도 했다면 유혈 사태로 번졌을 지도 모르는 문제 . 당신도 그리델도 곤란할 따름이었다 . 이래서야 도로가 다하는 데까지 , 함께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
그리델의 말에 따르면 , 이 도로는 사람이 준비한 것은 아니나 , 저것을 이정표 삼아 사막의 방랑자들이 한 곳으로 모이는 중이라 했다 . 모두 모여서 이 사막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다는데 , 사실이라면 당신도 그리델도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
사막의 위협이 제아무리 흉악하다고 해도 , 그 흉악함은 예측과 대비가 불허하다는 점에 있다 . 머릿수가 갖춰지면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 , 이런 위협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 터 .
그런데 이놈의 바벨이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구니까 , 그리델의 낯빛은 어두워져만 갔다 .
하나 뿐인 길이라 함께하기로 한 이상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인데 . 이 자식은 , 이 녀석은 , 이 고물 깡통 인형은 !!
말로 하지 않아도 그리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
반면 바벨은 천연덕스럽게 , 뻔뻔하게 , 칼리번과는 반대로 모습을 감추지도 숨기지도 않고 , 당신과 나란히 도로를 따라 걸으니 ,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가 문제라는 생각은 눈곱 만큼도 못하는 것 같다 .
"사막을 벗어난다? 여기서는 무릎도 허리도 안 아프고, 배고프거나 졸릴 일도 없어요. 몇 번 맞아봤는데 아프지도 않아요. 여기서 왜 벗어난대요? 그보다 벗어나면 어디로 가려구?"
죽고 한 번 더 죽을 생각인가? 사막이 부여하는 신체적 자유는 현실보다 달콤하고 뛰어나다. 괴물들은 생긴 것만 이상하지.. 총 맞으면 똑같이 죽었다. 여기서 벗어날 절실한 동기는 아직 없다.
"모여서 하는게 패싸움 말고 또 있을...."
무정부 상태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서열을 정하기 위한 폭력사태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하고 싶었다. 바벨이 깐족거리는게 또 눈에 밟히지 않았으면 그대로 말했을거다. 칼리번이라는 갑옷의 등에 잽을 툭툭 던지는게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을 흘릴 뻔 했다. 깡통 안쪽에 사람이 생겨도 깡통은 여전히 난폭한 깡통이다.
그리고 난폭한 깡통이 잊어버린게 하나 있다. 난폭한 깡통의 주인은 두 배로 난폭하다. 직전까지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고 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다.
"바벨! 그건 나쁜 행동이에요!"
말은 아이를 훈육하는 유치원 교사 같았지만, 손은 바벨의 머리 위로 올라가서 머리채를 틀어잡고 있었다. 새로운 모습을 하니까 이게 좋구나! 바벨의 첫눈처럼 흰 머리채를 잡아서 뒤로 질질 끌려고 했다.
>>484 바벨 머리채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바벨을 없애버리자는 말로 잘못 듣고 말았다. 고개를 홱 돌려서 그리델을 보았지만 오해는 빠르게 정정된다. 그녀는 모래벌레에게 쫒길 때 선보였던, 칼리번을 넣고 꺼내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리델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듯 칼리번이 모래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호출을 받으면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런 게 되는지 몰랐어요. 한 번 해볼까요."
괴물이 다가올 때 바벨의 직감을 이용할 수 없는 건 단점이지만.. 바벨이 사고를 치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어디 집어넣고 다니는 게 더 좋겠다. 입을 열어서 말해보았다. 조정간을 안전에 두는 느낌으로.
맞는 바벨과 때리는 당신 . 일련의 광경을 바라보는 그리델의 표정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 설득을 완성시키는 조미료로 과감하게 주먹을 선택한 당신의 모습에 , 도통 적응을 하지 못하는 눈치 . 자신이 알던 상식이 모래성처럼 부수어지는 끔찍한 광경에 차마 눈을 바로 뜨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만다 .
그런데 ─ 아무리 기다려도 머리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잦아들지 않아 . 그리델이 하는 수 없이 소리를 냈다 .
< 저 , 저기 , 라미레즈 씨 , 안 되면 억지로 하지 않으셔도 돼요 ... 그도 그럴 게 .. 헉 >
당신의 사심없고 자비없는 사랑의 매에 , 한층 달라진 바벨의 모습을 보고 그리델이 헛숨을 삼켰다 .
놀랄만도 하지 . 저렇게 머리가 움푹 파였는 걸 . 당신의 주먹에 호되게 찜질당한 바벨의 머리는 ,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티나게 함몰되어 있었다 . 세상에 맙소사 . 예나 지금이나 무르기 짝이 없는 머리다 . 양철 인형의 머리를 벗고 , 기껏 새롭게 다시 태어났으면서 , 밖에 보이는 모습만 달라진 건지 .
기를 쓰고 버티기 바빠 머리가 망가졌어도 관심 한 번 주지 않는 바벨이었다 . 녀석의 의지는 속에 철심을 박은 듯 꺾이지 않아 , 당신은 처음으로 바벨과의 소통에서 실패를 맛봤다 . 이제까지는 싫은 내색하더라도 당신의 뜻에 따라왔던 바벨인데 , 이렇게까지 저항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
들어가라니까 엉뚱한게 들어갔다. 나중에 복구하는 김에 바벨이 알아서 잘 펴겠지. 어차피 뇌가 없는 머리통이니까 좀 찌그러져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바벨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버틴다. 계속하다간 뜨지 않는 해가 뜰 때까지 꿀밤을 먹여야 할 판이다. 지금까지는 싫은 티를 내면서도 시키는건 다 하더니 갑자기 왜 이런담? 칼리번을 좋아하나? 좋아하니까 괴롭히고 그러는 거야? 사랑의 힘을 이기는 건 없다는 거야 지금?!
울며 겨자먹기로 협상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그냥 때려패서 다 되면 좋은데 협상을 해야 한다니. 어쩔 수 없이 바벨과 눈을 맞추고 안테나를 세웠다. 애니멀 커뮤니케이팅을 하는 기분이다.
손짓이라던지 , 걸음걸이라던지 .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난폭한 성격도 직업병일까 , 그리델은 생각했다 .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은 질문은 입에 담지 못한 채 , 수긍한 척을 했다 .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라고 그녀는 판단했고 , 때문에 대화의 주제는 담장을 넘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 그녀가 새롭게 꺼낸 이야기는 , 당신보다 먼저 만났던 사막의 방랑자에 관한 것이었다 .
< 여기서는 시간을 종잡을 수 없으니까 , 보통은 걸음수로 말하는데요 , 그 분과는 팔 만 걸음 정도 전에 만났어요 , 저도 라미레즈 씨처럼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 뭐가 뭔지 도통 모르는 상황이었죠 .
그 분께서 복잡한 생각을 교통정리해주시지 않으셨다면 , 어쩌면 저는 벌써 모래 밑에 파묻혔을 지도 몰라요 >
─ 이 사막에는 대체 몇 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 걸까 . 그리델의 말만 들으면 사람 만나기가 참 쉬운 것 같은데 , 정작 당신이 만난 사람은 눈 앞의 여자 단 한 사람 뿐이다 . 무슨 운인지 .
< 그렇네요 , 그 분이 알려주시지 않으셨다면 , 아마 이 길에 대한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 그러고보면 저는 , 라미레즈 씨에게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도움만 받고 있네요 >
당신의 말에 그리델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 옅은 미소 ─ 곤란함을 대충 모래로 덮어 가린 가짜 웃음이었다 .
< 한 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에요 >
당신과 눈을 맞추지 않고 던지는 말 . 더 캐낼 것이 있어 보인다 . 하지만 쉽게 말할까 . 당신과 그리델의 관계성은 서로 아직 동료라 부르기에는 어설픈 것이었다 . 동료는커녕 동행에 지나지 않다 . 운명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한 만남 . 언젠가 파탄 나더라도 지금과 같은 거리감이라면 , 서로 아무런 미련 없이 손을 털고 헤어질 수 있을 것이다 .
거기다 벌써 한 번 ─ 그녀는 당신과 바벨의 위기를 못 본 척했다 . 다음에도 또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도 될는지 . 뭐어 ── ─ 정하는 것은 당신이다 .
- maaa aa aaAaaaa
시체처럼 , 군장처럼 당신의 어깨에 들쳐 매여 조용하게 죽어 있던 바벨이 별안간 소리를 냈다 . 녀석이 이럴 때는 항상 안 좋은 일이 일어나던데 ─ 아니나 다를까 , 칼리번을 뽑아 든 그리델이 멀리 도로의 저편에 생겨난 점들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
>>508 영혼 없이 웃었다. 아하하. 숨기는게 있나보지? 뒤통수를 치는 일만 아니길 바란다. 자신을 배 갈라서 제물로 바치고 혼자 도망가는 대참사 말이다. 예를 들면 저기 보이는 점점이들한테.....어....? 바벨의 울음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Contact unknown on my 12. long distance! "엄폐 엄폐! 사구 뒤에 엎드려!"
저쪽이 우리에게 보이면, 우리도 저쪽에 보인다. 즉시 길을 벗어나서 엄폐물에 숨었다. 걷는 여자를 보았을 때와 같다. 그리델 칼리번도 어서! 망설일 시간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