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풀기가 상반신에서 오른팔로 이동한다 . 어떻게 찢기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 여느 때의 세 배 가까이 부푸는 어깨 . 한 자리에 모인 열기는 바벨의 육신을 붉게 과열시키고 파열시켰다 . 하지만 바벨은 멈추지 않고 열기를 손 끝으로 ─ 손톱으로 내려보내니 , 머잖아 일격필살의 위력이 완성됐다 .
남은 일은 슛 코스에 괴물 지렁이의 입을 갖다놓는 것 뿐이다 .
다행히 쫓기는 사람은 당신의 의도를 , 바벨의 의미를 이해하고 언덕의 아래로 괴물 지렁이를 유인해왔다 . 강철 갑옷도 더는 방해 밖에 되지 않아서 , 모습을 허물어뜨리고 자신만이 허겁지겁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
뭐야 . 혹시 바벨도 저렇게 필요할 때만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걸까 .
할 수만 있다면 녀석의 속 터지는 행동에 더는 속앓이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 으아 , 아아 ! 온다 , 나온다 !! >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가르키는 대로 언덕의 중턱까지 오른 먹이를 쫓아 로켓처럼 튀어나오는 괴물 지렁이 .
모래 깊이 잠복해 있던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자 당신의 시야는 모든 면이 녀석으로 채워졌다 . 빈틈없이 빽빽하게 당신의 시야를 채우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 과연 재해라 할 만했다 .
흉악하게 벌어진 입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니 , 가만히 서서 대처하지 않는다면 빨려들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리라 .
당신이 소용돌이에 뛰어드는 건지 , 소용돌이가 당신에게 달려드는 건지 , 모든 이해와 인식이 느슨해지는 결착의 순간 ─ 당신과 바벨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게 연결된다 .
발사를 명령하고, 뭔가 투 하는 느낌이 들더니 하늘을 날고 있었다. 감각기관의 수용량을 넘은 자극이 취소당한 느낌이다. 용케도 끌어안은 바벨을 놓치지 않고 날아가는데 똑같이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벌레 시체가 보였다.
'저거 바벨한테...먹여야...하는데...'
그런 생각이었다. 신나게 쏴버렸으니 바벨도 많이 망가졌을테고. 몸은 팽이처럼 뱅뱅 돌아서 방향도 잡을 수가 없는데 저 시체를 어떻게 찾나 하는. 지나치게 태평해보일지도 모르나 나름 생존에 중요한 것이다...
"....윽!"
어느새 땅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두 몸뚱이가 모래바닥에 쳐박혀 데구르르 굴렀다. 충격은 느껴졌지만 역시 아프거나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육체를 움직이는게 오롯이 육체가 아닌 법이니. 데스 그립이 와버려서 바벨을 놓지도 못하고, 검은 하늘만 멀거니 올려다보며 한동안 숨을 색색거리고 누워있었다.
평탄 평평했던 모래바닥을 크게 흐트러뜨리며 쓰러진 당신과 바벨 . 바벨에게서 느껴지는 일종의 성취감 , 고양감은 당신까지도 들뜨게 만들었다 . 어쨌거나 ─ 당신과 바벨이 해냈다 . 저 커다란 괴물을 일격에 쓰러뜨린 것이다 . 도망칠 수도 있었고 , 못 본 척 숨을 수도 있었는데도 , 당당히 맞서 정당하게 승리를 쟁취해냈다 .
바벨의 호전성을 크게 충족시키는 , 종이 한 장 차이로 얻어낸 승리 . 무심한 양철 인형조차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가로 팔 하나를 송두리째 잃어버렸지만 ,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값싼 대가였다 .
< 저기요 , 이봐요 !! >
그런데 ─ 낯선 목소리가 모처럼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던 바벨을 방해한다 . 바벨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드는 소리였다 . 당신에게 전해지는 바벨의 충동은 , 무척이나 파괴적인 색을 띄고 있었다 .
바벨의 목줄을 쥔 것은 당신이라 , 당신이 틀어막으면 바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녀석이 이대로 날뛰고 싶어도 당신의 허락 없이는 저들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 다행이지 , 당신의 생각대로 지금 이대로는 승산이 도무지 없어보이니까 .
지성이 부족한 괴물이 상대라면 또 몰라 , 강철 갑옷이 시의적절한 판단으로 괴물 지렁이를 상대하던 것을 생각하면 바벨의 유일한 자랑인 텔레폰 펀치도 통하지 않을 공산이 컸다 .
< ... 괜찮아요 ?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 >
우선 눈 앞의 인영이 사람이 맞는가부터 확인하자 , 걱정이 서린 상냥한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가까워졌다 . 당신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당신이 심연을 볼 때 심연도 당신을 본다고 , 상대방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 벌써부터 품평을 시작한 눈치다 .
목소리의 주인은 여성으로 보이는데 , 붉은 피부가 볕 아래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
갈색 머리카락을 이마가 드러나도록 묶어놨는데 , 덕분에 안 그래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 품이 넓은 작업복에 얼룩덜룩 물감으로 얼룩진 앞치마를 입은 모습이 저 화실에서 일합니다 ─ 열심히 자기 주장을 하는데 , 사막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라 위화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안다고 , 그녀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 그것은 저 괴물들에 대한 것도 , 우리들의 곁을 지키는 또다른 괴물들에 대한 것도 아니고 , 오로지 단 하나 , 우리들 자신에 관한 일이었다 . 경솔하게 입 밖에 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여자가 말을 망설이느라 , 당신을 안달나게 만들었다 . 하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 소리가 쏟아졌다 .
< 저희는 죽었어요 , 바벨 어머님 . 저희는 지금 사후 세계에 있다구요 >
텅 빈 직소 퍼즐판에 , 가장 커다랗게 비어 있던 중심가에 , 비처럼 퍼즐 조각들이 쏟아져 내린다 .
어째서 잊을 수 있었는지 , 어떻게 잊었는지 , 자신도 모를 기억이 되살아난다 .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최후가 , 잊어버린 기억이 당신의 서툰 손놀림으로 자신의 자리를 다시금 되찾아갔다 .
잠깐 정신이 빠져나가려다 돌아왔다. 몸이 화끈거리면서 축축했고 시야가 계속 깜빡거린다. 흙벽에 기대어 앉아있는데 주변에서 낯선 이국의 언어로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콩 볶는 총소리도.
"........"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계속 새어 한쪽 눈을 뜨기 어려웠다. 어렵사리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것보다 훨씬 심하게 피가 새는 구멍이 3개는 더 열려있었다. 양손으로 오른쪽 허벅지에 지혈대를 감다가 힘이 풀려 있었다. 지혈대는 꽉꽉 묶어서 고정해야 하지만, 그마저 여력이 없다.
그때부터는 살려고 하는 의지의 몸부림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무의식적 행동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다시 손을 움직여서 지혈대를 감으려 해도 손가락은 무력하게 꼬물거리는 게 전부였고, 지혈대 막대를 제대로 쥐기도 어렵다. 죔죔 놀이보다 못한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헛짓하던 사이 AK를 들고 복면을 쓴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눈이 마주쳤다. 피가 빠져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저게 사람임을 인식했을 때, 그의 군홧발이 날아와 머리통을 걷어차고 말았다.
"죽어? 사후세계?"
노란색 눈이 눈 뒤를 보면서 뒤편의 기억을 읽어낸다. 내가 죽었다고?
그 이후의 기억은 온당하지 않았다. 거나하게 술을 먹은 듯 필름이 뚝뚝 끊겨있다. 축 처진 자기 몸을 어딘가로 끌고 가거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파편적인 이미지가 남아있었다. 그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신체에 대한 인지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유령이 되어버린 기분도 들었다. 그때 분명 그들이 무언갈 하고 있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아, 기억나는 게 하나 더 있다. 동그란 것이다. 동그란 거.. 말하자면 사람 눈이나 카메라 렌즈같이 동그라면서 빛을 품은 것. 그리고 총구. 얼굴 앞에 동그란 총구가 반짝! 하더니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것은 천사가 아니라 정찰 드론이었다. 미사일이 적 숙영지에 내리꽂혔고, 보병들이 근처 구덩이에 처박힌 그녀를 바디백에 담아왔다. 시신은 관에 들어가 수송기를 타고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녀의 전우 중 한 명이 삼각형으로 개어진 국기를 받았다.
육군 중사 미카엘라 라미레즈는 긴 복무에 마침표를 찍고, 향년 32세에 국립묘지 6피트 아래에 묻혔다.
눈은 뜨고 있되 어디를 보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근처에 포탄이 떨어져 뇌진탕에 이명이 귀를 찔러도 이렇지는 않았다. 입술이 달싹이다 겨우 몇 마디 뱉었다.
흐리다 . 흐릿하다 . 부유감 . 회색으로 희뿌연 현실감 . 보는 것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 관을 부수고 무덤을 파헤치고 모래 바다 위로 이제 막 기어나왔을 뿐인 당신은 무엇도 확신하지 못한다 . 당신의 삶은 ─ 너무나 순식간에 망연해졌다 . 머릿속에 몇 번이고 리와인드되는 이 기억이 ─ 정말로 당신의 것일까 . 당신은 정말로 저렇게 저리 죽어버린 걸까 .
갑자기 되살아난 ─ 당신의 주머니에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쑤셔넣어진 기억 따위 어디에도 사실이라는 보증은 존재하지 않는데 , 단지 당신의 안에 뻥 뚫린 구멍에 딱 맞는 조각이라는 이유로 , 당신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 인식하고 만다 .
< ... 저기 , 저기요 ? 괜찮아요 ? 정신 , 정신 차려보세요 ! >
이런 당신을 여자는 불안하게 바라봤다 . 걱정스럽게 , 자신이 손을 써야 할 단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소리쳤다 .
그렇잖아도 어지러운데 시끄럽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 숨을 크게 쉬었다. 죽었다고 엉엉 울기엔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자기도 많은 사람을 죽었다. 언젠가 자신도 죽여왔던 사람들과 똑같이 죽으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은 부지불식간에 준비할 시간 없이 생각보다 먼저 찾아왔다.
죽으면 죽어서 운명이 다한거지 사후세계가 진짜 있을줄 몰랐다. 있다 해도 이런 모습인지 몰랐다. 유황불도 갈대밭도 아니라 괴물이 있는 밤 사막. 이건 대체 어느 동네 신화야?
"아... 빌어먹을...모르겠다."
일단 벌레시체를 보고 싶다. 승리의 전리품, 승리의 고양감. 벌레이빨이 닥쳐오는 긴장감을 떠올리면 쓸모없는 생각을 몰아낼 것 같아서.
< 어지럽거나 , 우울하거나 , 자신의 존재에 회의감이 든다거나 , 그렇지는 않으세요 ? >
성가시다는 말로 쉽게 설명되는 행동이다 . 당신이 벌처럼 톡 쏘는 말을 뱉어도 아랑곳 않고 끈덕지게 당신의 안부를 물어오는데 , 듣다보면 짜증이 날 수도 있겠다 . 하지만 저렇게 남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마냥 매몰차게 대해도 될까 . 심란한 당신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 뭘 걱정하는 거야 .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데 . 만약에 당신이 여자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껴 진득하게 그녀를 관찰한다면 ,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빛이 염려보다는 공포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분명해졌다 .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빛 , 여자는 당신을 경계하고 있다 . 당신과 자신의 차이가 무섭다는 눈치였다 . 그렇게나 대단한 문제인가 ? 자신을 잊고 죽음을 잊고 그저 방랑하던 신세라는 것이 ? 그렇게나 두려워 할 일인가 ?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모든 무덤에는 사연이 있기 마련이니까 .
하지만 당신이 신경쓰지 않는다면 , 못 본 척 지나치기로 했다면 여기서 덮자 . 생각이 불필요한 살덩어리라면 , 의심으로 군살을 더 가져봤자 당신만 괴로울 것이다 . 걸음만 느려질 것이다 . 바벨을 보라 . 현재만을 향유하는 저 폭력배를 보라 .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반토막난 벌레에게 사로잡혀 도움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 .
< 엥 ? >
보다 직관적으로 상황을 설명드리자면 , 상처의 단면부로부터 쏟아져 나온 내부 기생충들이 밧줄처럼 바벨을 묶어 바벨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었다 . 저것들에 붙들려서 ─ 당겨져서 살 더미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바벨 .
보통 장력이 아니라 구하러 간 당신까지 딸려 들어갈 판 . 머리 하나 다리 하나 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바벨로써는 이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 한 술 더 떠 당신까지 기생충에 팔이 휘감기니 , 당신이 있는 힘껏 도와도 저 시점에서 결말은 벌써 정해진 것 . 당신과 바벨은 괴물 지렁이의 유해에 파묻히게 됐다 .
오 ─ 젠장 .
이렇게 또 죽는 걸까 . 미지근한 살점에 짓눌리다 , 소화되어 , 당신은 또 죽게 되는 걸까 . 바벨의 멍청함이 마침내 당신을 끝장낸 걸까 . 선택을 잘못 한 걸지도 모른다 . 바벨만 빨려 들어가게 두고 , 여자의 도움을 받아 밖에서 녀석을 구조해도 됐을 지도 . 아니 ─ 아니지 . 저 여자를 뭘 믿고 도움을 바라겠어 . 당신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 . 판단을 했다 . 만약에 저 여자가 당신의 도움이 될 생각이 있었다면 저렇게 멀리서 구경하지 않고 함께 달려와 바벨에 붙어 당기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 애초부터 저 여자에게 당신을 도울 마음이 없었다는 거겠지 .
- maaaaaaaaaa
바벨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아는 걸까 . 시무룩하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 녀석이 자책을 할 리 없건만 , 상황이 상황이라 녀석의 울음소리가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인다 .
>>452 끈적끈적한 늪처럼 바벨을 구하려다 같이 묶여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축축하고 이상한 감촉.. 제기라알... 급박한 위기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아도, 살덩어리 속에 파묻혀 있는 감각은 불쾌하기 그지없다. 기생충이면 기생충답게 굴 것이지. 이건 기생충이 아니라 매복한 사냥꾼이 할 짓 아니냐는 말이다.
모래벌레를 쪼개어 놓고 한낱 기생충 때문에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렸음을 생각하면 뭔가 내세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 같다. 지금이라면 화방 여자랑 말이 통할까...? 입도 코도 다 막혀서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후세계가 아니었으면 진즉 질식해서 죽었으리라.
'바벨.. 손가락 하나씩이라도 쏴 봐요. 기생충은 그 정도로도 끊어질지 모르니까.'
바벨의 몸이 성하지 않아도 몸이 남아는 있다. 최고 화력은 불가능하여도 권총 정도의 위력은 나올지도 모른다.
당신의 명령에 바벨이 움찔움찔 손가락을 움직인다 . 하지만 모두 불발 . 몇 번의 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도저히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이었다 . 바벨의 < 총 > 은 그렇게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
바벨이 당신에게 알리지 않으니까 , 당신도 알 리 없는 사실이겠으나 하필이면 하필 지금 깨달을 기회가 생기다니 . 바벨을 상대로 방심은 용납되지 않는 걸까 . 만약 다음이 있다면 당신은 ,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바벨에게서 바벨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알아놔야만 할 것이다 . 그래 . 다음이 있다면 ! 이런 상황이 또 생겨서는 안 되니까 !
바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단 하나의 비관적인 사실만이 명료해진 상황 . 바벨은 아주 체념하기라도 했는지 살점의 벽이 자신을 더욱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기는 데도 아랑곳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다 . 당신도 바벨도 이대로 있다가는 괴물 지렁이의 소화액에 첨벙 던져질지도 모르는데 , 당신의 무기라는 녀석이 저렇게 무책임하다니 .
아니나 다를까 바벨이 커다란 구멍으로 빨아 당겨지면서 당신보다 한 발 먼저 자취를 감췄다 .
당신도 제법 바벨을 쓰는데 익숙해졌다 . 녀석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 보는 것 . 당신이 자신의 안에 새겨진 감각을 되새기자 그것만으로도 당신과 바벨 사이에 선이 이어진다 . 바벨 . 바벨은 ─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
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뭐야 이 경치는 . 녀석은 아까까지 살과 살점에 파묻혀 있던 것이 믿기지 않게 , 모든 것이 새하얀 세계로 끌려나와 있었다 . 신체를 옭아매던 기생충도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린 상태 . 녀석은 깽깽이 발로 , 하나 뿐인 팔로 , 낯선 소년을 겨누고 있었다 . 흰색의 세계에 혼자 웅크리고 앉은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
< ... ... >
살아 있는 사람이 맞기는 한가 . 검은 더벅머리 . 옷을 입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난 가죽만 붙은 앙상한 몸 . 창백한 피부는 혈색이 안 좋다고 말할 수준을 오래 전에 떠났다 . 아사 직전의 사람이라도 저것보다는 살이 붙어 있을 텐데 , 대체 저 소년은 어떻게 된 노릇일까 . 그것보다도 상태가 나빠보였다 . 심상치 않다 . 당신은 원한다면 바벨을 시켜 소년을 공격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