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만은 분명히 안다고 , 그녀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 그것은 저 괴물들에 대한 것도 , 우리들의 곁을 지키는 또다른 괴물들에 대한 것도 아니고 , 오로지 단 하나 , 우리들 자신에 관한 일이었다 . 경솔하게 입 밖에 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여자가 말을 망설이느라 , 당신을 안달나게 만들었다 . 하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 소리가 쏟아졌다 .
< 저희는 죽었어요 , 바벨 어머님 . 저희는 지금 사후 세계에 있다구요 >
텅 빈 직소 퍼즐판에 , 가장 커다랗게 비어 있던 중심가에 , 비처럼 퍼즐 조각들이 쏟아져 내린다 .
어째서 잊을 수 있었는지 , 어떻게 잊었는지 , 자신도 모를 기억이 되살아난다 .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최후가 , 잊어버린 기억이 당신의 서툰 손놀림으로 자신의 자리를 다시금 되찾아갔다 .
잠깐 정신이 빠져나가려다 돌아왔다. 몸이 화끈거리면서 축축했고 시야가 계속 깜빡거린다. 흙벽에 기대어 앉아있는데 주변에서 낯선 이국의 언어로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콩 볶는 총소리도.
"........"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계속 새어 한쪽 눈을 뜨기 어려웠다. 어렵사리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것보다 훨씬 심하게 피가 새는 구멍이 3개는 더 열려있었다. 양손으로 오른쪽 허벅지에 지혈대를 감다가 힘이 풀려 있었다. 지혈대는 꽉꽉 묶어서 고정해야 하지만, 그마저 여력이 없다.
그때부터는 살려고 하는 의지의 몸부림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무의식적 행동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다시 손을 움직여서 지혈대를 감으려 해도 손가락은 무력하게 꼬물거리는 게 전부였고, 지혈대 막대를 제대로 쥐기도 어렵다. 죔죔 놀이보다 못한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헛짓하던 사이 AK를 들고 복면을 쓴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눈이 마주쳤다. 피가 빠져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저게 사람임을 인식했을 때, 그의 군홧발이 날아와 머리통을 걷어차고 말았다.
"죽어? 사후세계?"
노란색 눈이 눈 뒤를 보면서 뒤편의 기억을 읽어낸다. 내가 죽었다고?
그 이후의 기억은 온당하지 않았다. 거나하게 술을 먹은 듯 필름이 뚝뚝 끊겨있다. 축 처진 자기 몸을 어딘가로 끌고 가거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파편적인 이미지가 남아있었다. 그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신체에 대한 인지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유령이 되어버린 기분도 들었다. 그때 분명 그들이 무언갈 하고 있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아, 기억나는 게 하나 더 있다. 동그란 것이다. 동그란 거.. 말하자면 사람 눈이나 카메라 렌즈같이 동그라면서 빛을 품은 것. 그리고 총구. 얼굴 앞에 동그란 총구가 반짝! 하더니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것은 천사가 아니라 정찰 드론이었다. 미사일이 적 숙영지에 내리꽂혔고, 보병들이 근처 구덩이에 처박힌 그녀를 바디백에 담아왔다. 시신은 관에 들어가 수송기를 타고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녀의 전우 중 한 명이 삼각형으로 개어진 국기를 받았다.
육군 중사 미카엘라 라미레즈는 긴 복무에 마침표를 찍고, 향년 32세에 국립묘지 6피트 아래에 묻혔다.
눈은 뜨고 있되 어디를 보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근처에 포탄이 떨어져 뇌진탕에 이명이 귀를 찔러도 이렇지는 않았다. 입술이 달싹이다 겨우 몇 마디 뱉었다.
흐리다 . 흐릿하다 . 부유감 . 회색으로 희뿌연 현실감 . 보는 것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 관을 부수고 무덤을 파헤치고 모래 바다 위로 이제 막 기어나왔을 뿐인 당신은 무엇도 확신하지 못한다 . 당신의 삶은 ─ 너무나 순식간에 망연해졌다 . 머릿속에 몇 번이고 리와인드되는 이 기억이 ─ 정말로 당신의 것일까 . 당신은 정말로 저렇게 저리 죽어버린 걸까 .
갑자기 되살아난 ─ 당신의 주머니에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쑤셔넣어진 기억 따위 어디에도 사실이라는 보증은 존재하지 않는데 , 단지 당신의 안에 뻥 뚫린 구멍에 딱 맞는 조각이라는 이유로 , 당신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 인식하고 만다 .
< ... 저기 , 저기요 ? 괜찮아요 ? 정신 , 정신 차려보세요 ! >
이런 당신을 여자는 불안하게 바라봤다 . 걱정스럽게 , 자신이 손을 써야 할 단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소리쳤다 .
그렇잖아도 어지러운데 시끄럽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 숨을 크게 쉬었다. 죽었다고 엉엉 울기엔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자기도 많은 사람을 죽었다. 언젠가 자신도 죽여왔던 사람들과 똑같이 죽으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은 부지불식간에 준비할 시간 없이 생각보다 먼저 찾아왔다.
죽으면 죽어서 운명이 다한거지 사후세계가 진짜 있을줄 몰랐다. 있다 해도 이런 모습인지 몰랐다. 유황불도 갈대밭도 아니라 괴물이 있는 밤 사막. 이건 대체 어느 동네 신화야?
"아... 빌어먹을...모르겠다."
일단 벌레시체를 보고 싶다. 승리의 전리품, 승리의 고양감. 벌레이빨이 닥쳐오는 긴장감을 떠올리면 쓸모없는 생각을 몰아낼 것 같아서.
< 어지럽거나 , 우울하거나 , 자신의 존재에 회의감이 든다거나 , 그렇지는 않으세요 ? >
성가시다는 말로 쉽게 설명되는 행동이다 . 당신이 벌처럼 톡 쏘는 말을 뱉어도 아랑곳 않고 끈덕지게 당신의 안부를 물어오는데 , 듣다보면 짜증이 날 수도 있겠다 . 하지만 저렇게 남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마냥 매몰차게 대해도 될까 . 심란한 당신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 뭘 걱정하는 거야 .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데 . 만약에 당신이 여자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껴 진득하게 그녀를 관찰한다면 ,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빛이 염려보다는 공포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분명해졌다 .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빛 , 여자는 당신을 경계하고 있다 . 당신과 자신의 차이가 무섭다는 눈치였다 . 그렇게나 대단한 문제인가 ? 자신을 잊고 죽음을 잊고 그저 방랑하던 신세라는 것이 ? 그렇게나 두려워 할 일인가 ?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모든 무덤에는 사연이 있기 마련이니까 .
하지만 당신이 신경쓰지 않는다면 , 못 본 척 지나치기로 했다면 여기서 덮자 . 생각이 불필요한 살덩어리라면 , 의심으로 군살을 더 가져봤자 당신만 괴로울 것이다 . 걸음만 느려질 것이다 . 바벨을 보라 . 현재만을 향유하는 저 폭력배를 보라 .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반토막난 벌레에게 사로잡혀 도움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 .
< 엥 ? >
보다 직관적으로 상황을 설명드리자면 , 상처의 단면부로부터 쏟아져 나온 내부 기생충들이 밧줄처럼 바벨을 묶어 바벨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었다 . 저것들에 붙들려서 ─ 당겨져서 살 더미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바벨 .
보통 장력이 아니라 구하러 간 당신까지 딸려 들어갈 판 . 머리 하나 다리 하나 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바벨로써는 이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 한 술 더 떠 당신까지 기생충에 팔이 휘감기니 , 당신이 있는 힘껏 도와도 저 시점에서 결말은 벌써 정해진 것 . 당신과 바벨은 괴물 지렁이의 유해에 파묻히게 됐다 .
오 ─ 젠장 .
이렇게 또 죽는 걸까 . 미지근한 살점에 짓눌리다 , 소화되어 , 당신은 또 죽게 되는 걸까 . 바벨의 멍청함이 마침내 당신을 끝장낸 걸까 . 선택을 잘못 한 걸지도 모른다 . 바벨만 빨려 들어가게 두고 , 여자의 도움을 받아 밖에서 녀석을 구조해도 됐을 지도 . 아니 ─ 아니지 . 저 여자를 뭘 믿고 도움을 바라겠어 . 당신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 . 판단을 했다 . 만약에 저 여자가 당신의 도움이 될 생각이 있었다면 저렇게 멀리서 구경하지 않고 함께 달려와 바벨에 붙어 당기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 애초부터 저 여자에게 당신을 도울 마음이 없었다는 거겠지 .
- maaaaaaaaaa
바벨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아는 걸까 . 시무룩하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 녀석이 자책을 할 리 없건만 , 상황이 상황이라 녀석의 울음소리가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인다 .
>>452 끈적끈적한 늪처럼 바벨을 구하려다 같이 묶여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축축하고 이상한 감촉.. 제기라알... 급박한 위기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아도, 살덩어리 속에 파묻혀 있는 감각은 불쾌하기 그지없다. 기생충이면 기생충답게 굴 것이지. 이건 기생충이 아니라 매복한 사냥꾼이 할 짓 아니냐는 말이다.
모래벌레를 쪼개어 놓고 한낱 기생충 때문에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렸음을 생각하면 뭔가 내세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 같다. 지금이라면 화방 여자랑 말이 통할까...? 입도 코도 다 막혀서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후세계가 아니었으면 진즉 질식해서 죽었으리라.
'바벨.. 손가락 하나씩이라도 쏴 봐요. 기생충은 그 정도로도 끊어질지 모르니까.'
바벨의 몸이 성하지 않아도 몸이 남아는 있다. 최고 화력은 불가능하여도 권총 정도의 위력은 나올지도 모른다.
당신의 명령에 바벨이 움찔움찔 손가락을 움직인다 . 하지만 모두 불발 . 몇 번의 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도저히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이었다 . 바벨의 < 총 > 은 그렇게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
바벨이 당신에게 알리지 않으니까 , 당신도 알 리 없는 사실이겠으나 하필이면 하필 지금 깨달을 기회가 생기다니 . 바벨을 상대로 방심은 용납되지 않는 걸까 . 만약 다음이 있다면 당신은 ,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바벨에게서 바벨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알아놔야만 할 것이다 . 그래 . 다음이 있다면 ! 이런 상황이 또 생겨서는 안 되니까 !
바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단 하나의 비관적인 사실만이 명료해진 상황 . 바벨은 아주 체념하기라도 했는지 살점의 벽이 자신을 더욱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기는 데도 아랑곳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다 . 당신도 바벨도 이대로 있다가는 괴물 지렁이의 소화액에 첨벙 던져질지도 모르는데 , 당신의 무기라는 녀석이 저렇게 무책임하다니 .
아니나 다를까 바벨이 커다란 구멍으로 빨아 당겨지면서 당신보다 한 발 먼저 자취를 감췄다 .
당신도 제법 바벨을 쓰는데 익숙해졌다 . 녀석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 보는 것 . 당신이 자신의 안에 새겨진 감각을 되새기자 그것만으로도 당신과 바벨 사이에 선이 이어진다 . 바벨 . 바벨은 ─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
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뭐야 이 경치는 . 녀석은 아까까지 살과 살점에 파묻혀 있던 것이 믿기지 않게 , 모든 것이 새하얀 세계로 끌려나와 있었다 . 신체를 옭아매던 기생충도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린 상태 . 녀석은 깽깽이 발로 , 하나 뿐인 팔로 , 낯선 소년을 겨누고 있었다 . 흰색의 세계에 혼자 웅크리고 앉은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
< ... ... >
살아 있는 사람이 맞기는 한가 . 검은 더벅머리 . 옷을 입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난 가죽만 붙은 앙상한 몸 . 창백한 피부는 혈색이 안 좋다고 말할 수준을 오래 전에 떠났다 . 아사 직전의 사람이라도 저것보다는 살이 붙어 있을 텐데 , 대체 저 소년은 어떻게 된 노릇일까 . 그것보다도 상태가 나빠보였다 . 심상치 않다 . 당신은 원한다면 바벨을 시켜 소년을 공격할 수 있었다 .
저대로 숨통을 끊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었을 거다 . 상대가 허튼 수작 부리기 전에 손을 쓰는 과감함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고 , 마침내 소년이 입을 열었다 . 바짝 마른 입술과 비틀린 모양의 혀로 문장을 만들어냈다 . 너무나 뜻 밖의 말을 높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 늙은이와 아이가 함께 느껴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 살고 , 싶어
- 아직 더 , 살고 , 싶어
- 죽고 싶지 , 않아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 죽어가는 시체의 모습으로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한다 . 소년의 바램은 곧 당신에 향한 구걸로 바뀌었다 . 살려달라고 , 당신에게 애원하며 부러질 것 같은 손으로 바벨의 하나 남은 팔을 붙들었다 .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며 , 제발 살려달라고 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 의지 > 가 기어오른다 .
이미 떠나간 운명을 다시 손에 쥐려는 강한 집념 . 한기마저 불러일으키는 소름끼치는 집착에 바벨이 경기를 일으켰다 . 그리고 그런 예감이 허튼 것은 아니던지 , 소년의 눈자리로부터 피접이 상골한 팔이 불쑥 튀어나와 바벨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목을 쥐는 힘에 비해 팔을 붙드는 힘은 대단치 않다 . 바벨이 마저 몸을 바닥에 붙이려고 하자 끔찍하게도 소년의 팔이 당기는 힘에 못 이겨 뜯겨지고 떨어졌다 . 똑바로 신경이 살아 있는 걸까 . 아니면 , 자신의 팔을 망가뜨린 바벨이 미워서 그러는 걸까 .
소년의 벌어진 입으로부터 뛰쳐나오는 의미 모를 비명 .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흰색의 세계를 뒤흔드는데 , 도무지 이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바벨은 당신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주먹을 쥐어 소년의 머리를 때렸다 .
소년의 머리가 , 아주 찌그러져 , 형체를 상실토록 , 주먹을 휘둘렀다 .
자신의 목을 붙잡는 손이 떨어질 때까지 , 주먹을 내리쳤다 .
소년의 머리는 모래 장난으로 만든 인형처럼 손쉽게 망그러져서 , 바벨은 생각보다 금방 움켜쥐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하지만 끔찍한 감촉이 진하게 배어든 목은 손이 떨어졌어도 여전히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 바벨은 자신의 희박한 감정 속에서 처음으로 공포를 발견해내고 , 충격에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 실 , 어 … 조금 , 더 …… 살고 십 , 어
덜 망가진 입과 목이 엉성하게 조잡하게 , 사람의 말을 흉내냈다 .
아직 붙어 있는 다리로 몸을 뒤집어보려고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 한 때 소년이었던 유해는 발버둥에 발버둥을 거듭했지만 , 끝끝내 실패했고 , 머잖아 모든 생명 징후가 사라졌다 . 또 무슨 일인지 , 유해의 움직임이 멎자 흰색의 세계가 덧칠되며 다시 배경이 사막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 정신 차리면 당신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사막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
길을 걷던 여자처럼 겉만 무서워 보이고 직접 때리면 별 것 아닌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렇지! 부숴버려! 하고 바벨을 응원하던 차, 필름이 끊기고 다른 필름이 이어지듯 자신은 사막을 뒹굴고 있었다.
벌레시체! 기생충! 바벨은? 잠자다 밟힌 뱀처럼 파다닥 일어났다. 기절했다가 기상하는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여긴 누구 나는 어디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던 첫 번째하곤 확연히 다르다. 이번에는 기억이 있고, 바벨이 있고, 표적이 있었다. 셋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 바로 경험이리라.
경험치가 있으니 제일 먼저 할 일도 분명해진다 . 바벨은 부르는 즉시 당신의 곁에 나타났다 .
여전히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부족하지만 , 다른 부상이나 이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 정체불명의 적에게 목을 졸렸지만 티나는 변화는 없었다 . 이렇게 상황을 살피는 당신도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생충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 녀석들에게 단단히 묶였던 흔적이 살 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꿈은 아닌데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마지막으로 당신이 괴물 지렁이의 토막난 유해로 시선을 던지면 ,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 커다란 것이 별안간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
이런 당신을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 예의 괴물 지렁이에게 쫓기던 여자였다 .
< 무슨 , 일이 일어난 거예요 ? >
당신을 보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 그녀의 시선은 당신을 지나 , 바벨에게 향해 있었다 . 무슨 일이야 . 당신의 눈이 여자의 눈길을 쫓아 따라 가면 , 그곳에는 바벨의 머리가 있었다 .
당신은 정말 잠시 한눈 판 것 뿐인데 , 눈을 뗀 사이 바벨의 머리에 커다랗게 균열이 생겼다 .
주변에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쩍쩍 갈라지는 머리는 ,
당신이나 여자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날카롭게 파편을 만들며 깨졌다 .
이걸로 벌써 두 번째 . 파멸적으로 파괴된 바벨의 머리 . 그런데 전과는 뭔가가 다르다 . 텅빈 강정에 지나지 않던 바벨의 머리 속에 , 이번에는 내용물이 존재했다 . 낯선 인상의 ─ 당신의 기억에 없는 낯선 사람의 얼굴이 바벨의 머리 안에 담겨져 있었다 .
알맞은 비유를 찾았다! 바벨의 새 몸은 총구멍처럼 검었고, 거기서 튀는 불꽃처럼 희었다. 얼굴은 잘생겼나. 양 손을 뻗어서 뺨을 덥석 잡아보았. 바벨의 검은 눈 속에서, 이어진 채널을 통해서, 그의 안이 느껴졌다.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이런 것까지 총구멍일 필요는 없어 바벨.
"그런 기억 따위 있어봤자 기쁘지 않다는 게 한데...."
정확한 기억만 없지 뻔하게 예상할 수 있다. 전쟁에서 산 채로 잡힌 군인에게 기다리는 최후야 묘사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진부하다. 것도 싸우던 적들이 국제법 따위 무시하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녀의 쪽도 뒤에서 할 거 다 하는 나쁜 놈들이었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 움푹 들어간 눈 . 특별한 돌출없이 얌전한 광대 . 턱은 모나지 않고 둥글지만 만질수록 그 형태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 바벨의 얼굴은 어쩐지 손 닿는 순간마다 모양을 달리하는 듯했다 . 어둠이 그러하듯 점토처럼 당신이 주무를 때마다 모양이 변하는 것이다 . 그것에 정해진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 여전히 바벨은 불안정하고 여전히 불완전했다 .
단지 흰 머리카락만이 ─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만이 선명하다 .
어깨를 덮는 머리카락은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무기질적이라 , 생물의 느낌이 희박하여 , 차라리 악기의 현에 더 가까웠다 .
당신이 바벨의 구멍을 복잡한 심경으로 살피면 ,
바벨은 당신이 바라면 여기에 두고 가도 된다고 , 소리로 빌리지 않는 말로 속삭였다 .
분명 바벨이 맡아두고 있는 당신의 기억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리라 . 당신이 과거를 뒤쫓지 않는다면 모두 바벨의 안에 깊숙히 잠겨 떠오르는 일 없이 조용히 , 영원히 잊혀지겠지 . 그것은 정말로 안락한 망각이었다 .
하지만 ─ 아무리 뻔한 기억이라도 ─ 자신의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하며 , 당신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면 ,
당신이 흔쾌히 수락하자 뛸 듯이 기쁜 표정으로 화답하는 여자 . 그녀는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서야 , 아직까지 당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
< 그리델 안첼리아예요 , 그리고 여기 , 저를 도와주는 녀석은 칼리번이라 하구요 >
그녀가 손으로 가르키자 , 빈 공간으로부터 커다란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 판금갑이라 불리우는 그 갑옷은 , 어찌나 열심히 광을 내놨는지 밤중에도 눈부시게 빛이 났다 . 볼링공처럼 홈이 세 개 파인 투구는 페이스 오프가 불가능한 일체형으로 , 정면에 만들어놓은 세 개의 구멍을 제외하면 물샐틈없이 기사의 머리를 포장하고 있었다 . 바벨과 비교하면 두께부터 , 존재감부터가 다른 존재였다 . 당신에게 적의를 향하지 않아도 , 단순히 거기에 서 있기만 해도 압력이 발생해 주위를 짓누른다 . 뿐만 아니라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주인의 등 뒤를 지키며 서니 , 싫어도 바벨과 비교하게 되리라 . 바벨과는 모든 면에서 반대를 이루니까 .
< 그리 ─ 고 , 사실 직업 화가는 아니에요 . 그림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구요 . 이런 차림새라 오해하셨죠 ? 죄송해요 >
좋은 사람 ─ 나쁜 사람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상황이다 . 상황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 극한의 상황 앞에서 드러나는 본성이야말로 , 그 사람의 모든 것 , 진실된 면일 테니 . 이 악수로부터 , 이 만남으로부터 당신이 어떤 인상을 받더라도 ,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 운명이 곧 서로의 진심을 드러낼 무대를 준비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