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주먹다짐에는 소질 없는고로, 심지어 찜통에서 누굴 후드려 팰 여력 없으니, 한 번만 더 때려 보고 반응이 쭉 없다면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시야에 어른거리는 불빛들은 맹렬하게 밝았으나 어째서인지 형체를 더 키우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쓰러진 학생들에게는 옮겨 붙을까? 명백하게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는 새삼스레 그동안 거쳤던 사감들의 난리를 떠올려 본다. 하 사감과 동 사감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면, 춘 사감은 과연 어떤 괴이한 형상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인간 아닌 것에게는 특유의 열의 불태우지 못하나 그렇다 해서 기본적인 호기심조차 없지는 않다. 어느 쪽이든 인권은 보장 받지 못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라도 해야지.
불길이 번지지 않음은 다행이었지만 방을 가득 채우고 있을 이 연기가 문제인 것이다. 학생들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제가 던지려던 부적은 의미 없이 불타버릴 뿐이었으니. 이 불길을 일으켰을 춘 사감의 폭주를 막는 것 외엔 방법이 없을지. 연은 다시 기우제를 시도 해볼지 말지 고민하다간, 다른 이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다.
하 사감도 그렇고 춘 사감도 그렇고, 이 둘과 비교하자면 동 사감은 정말 상냥하고 온건한 양반이 맞았던 모양이다. 감금해서 굶겨 죽일 뻔은 해도 당장 죽게 생기도록 만들진 않았잖은가? 불길은 다행히 당장 뻗쳐 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열기에 숨이 턱 막혀 오는 것만 같다. 머리가 잘 돌지 않는다. 뜨거운 불길 속으로 차마 뛰어들 자신은 없어 문을 앞에 둔 채 제자리에 선다.
"문을 열어주셨으니 대화할 의향이 있다 기대해도 될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이 열기를 거두어주시죠."
부탁을 하면서도 곧장 통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말 몇 마디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이런 불 따위 진작에 꺼졌을 테니.
"진솔히 말하자면, 이쯤 되니 왜 매번 이 사달 나는지도 궁금하네요. 당신들이 날뛰는 데 그래야 마땅할 이유가 있는가요? 여력이 되신다면 이 질문에도 답변해 주길 바랄게요."
춘 사감의 방으로 향했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불길로 이루어진 문. 이미 열려있던 것이 아니라면 열어볼 염두도 못 냈을 것인데. 이미 열려있음에 안도하나 그 안쪽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불안함을 느낀다. 들어서면 누군가 방 중앙에 앉아 있음을 본다. 춘 사감의 방이니, 당연히 춘 사감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화를 먼저 해보아야 할까. 다른 사감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정상적인 대화는 되지 않을 것이라.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어보는 것을 보며, 혹시 모를 상황에 연은 부적 두 장을 손에 꼭 쥔다.
한참 정신없을 시기, 여러분의 발치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선을 약간 내리면 이마가 축축하게 젖어 앞머리가 착 달라붙고 볼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엎어진 조그만 학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도착했을 때부터 울상이던 늘봄은 곧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제발..."
그마저도 금세 달아오른 학당처럼 활활 타올라 버렸지만.
"제발 좀!! 저희 진짜 쪄죽겠어요!! 쪄죽는다고!! 그마안!!"
훌륭한 청룡의 예시로다. 하지만 성질 내지 않기도 어려웠던 게, 더위에 완전히 당해버려 여기까진 거의 기다시피 해서 왔기 때문에... 으으, 애들 대부분 기절해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은 아니지만 다행이야... 늘봄은 고개만 빼꼼 들고 반쯤 넋 빠진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유현에게 불길이 날아가는 장면을 목격하곤 즉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괜찮아?! 아, 진짜 쫌!! 애한테 뭐 하는 거냐구요!!"
바로 부적을 꺼낸다. 비, 물, 물벼락! 비를 내리겠다! 비를 내려 주세요! 대형 물벼락을 내립시다!!
형제의 것을 취했구나. 사자 머리가 된 춘 사감의 말에 킥- 하고 웃었다. 얼굴 위로 흐르는 땀 슥 밀어내니 눈매도 휘어 웃고 있었다.
"그것 이제 아셨소? 어허. 오해하진 마시게. 내가 달라 한 것도 아니고 그이가 넘겨준 것이니."
억지로 뺏은 것도 아니고 주니까 받은 것 뿐이라고. 이 상황에 여유롭게 설명하다가 불길 날아가자 절로 고개 돌려 그 방향 보았다. 불길이 향한 이 유현인 것 보고 아이고- 하며 미간 찡그린다.
"유우야- 아무리 더워도 그것 잘 보고 피해야지! 네 고운 얼굴에 흉 나면 어쩌려고! 얼굴 밖에 없는 녀석이."
그리고 또 키득키득. 웃으며 춘 사감 돌아보는데 웃음 사이로 살짝 진지함 비추었다.
"무얼 이해하려 했소. 당신들은 신수고 우린 인간이오. 이해하려 한다고 될 것 같소? 돌아온게 배신이라. 좋을대로 생각하고 좋을대로 행동한다라. 되묻겠소. 춘 사감이여. 당신들은 신수인 것 감추고 사감 노릇 하며 우리네 인간을 좋을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소? 지켜줄 마냥 사감의 좌에 앉아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지켜준 적 있소? 당신이 한 말 똑같이 돌려 드리리다. 사감이라 하여 믿었으나 제대로 지킴 받아본 것 없으니 그 배신감 어찌 할 테요. 당신네들 이리 날뛸 적마다 우리더러 죽든 말든 알아서 해보라 집어넣어지니 이것은 당신네들 좋을대로 구는 것 아니오? 어이. 춘 사감이여.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시게. 거!"
말 끝에 분노 표하듯 목소리 높였다. 아직은 역린 뽑아들지 않은 채 춘 사감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말이 통했나? 모든 것 불살라버릴 것만 같던 열기가 일순간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불길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으니.
"혹시 이해하려 노력하기 전에 설명은 충분히 해 주셨나요? 이미 했으나 저희가 못 알아들은 것이라면 죄송하지만, 지금도 저희로서는 이해 못 할 소리 하시니 마음대로 하렵니다."
당신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목적이 무언지, 왜 인간 싫다 하면서도 사감 노릇 충실히 행하고 있었는지, 지금껏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있겠거니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입장에선 쓸데없는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 아니지. 사실 이유를 알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유현은 그리 생겨먹은 인간이었으니.
"……."
그렇기에 불덩이 맞아 살이 익어가도 상대와 같이 진노하지 못한다. 공포에 질리지도, 고통에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릴 수도 없다. 고통은 참으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썩 반길 만한 감각은 아니다.
"그래서, 분풀이라도 하시니 기분이 좀 나으십니까? 제가 구워지니 당신이 가진 문제도 소호는 나아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