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감님들, 그리고 낯선 남자. 히죽 웃으며 하는 그 말에 당신도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안다. 섬뜩한 미소와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은 절 향해 하는 말이라. 뒤로 물러나며 경계하며 남자를 노려보던 연은 폭주라는 말에 두 눈을 떠내며 깜박인다. 처음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사감의 폭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할 테니. 고개를 둘러보며 지금 자리에 없을 사감이 누구인지 살핀다.
한없이 뻗어만 있을 것처럼 있던 그는 문득, 휘청거리면서도 단번에 몸 일으켜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직감했다. 가만히 있어서 버틸 수 있는 지점은 이미 지나 버렸음을. 이대로 있다간 어느 순간 의식마저 잃을 것만 같다. 목숨이 아깝거든 그렇게 되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으로나마 신속히 방을 뜨기로 한다. 문 열고 밖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작열의 수준을 넘어섰다, 탄다, 불타고 말 것이다! 북부가 아닌 학당에서 잿더미가 되게 생겼구나! 구슬땀이 이마를 타고 흐를 적 그는 이 상황이 절대 가만히 있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목화 님을 위해서라도 이 안에서 부채질을 하려고 했건만 더운 바람만 부채를 타는 느낌이다. 불을 좋아하는, 앉는 용? 아회의 눈이 가늘게 뜨이며 삑 소리를 명확하게 듣는다.
"목화님!"
벌러덩 눕는 솜뭉치... 털뭉치... 아니 땅신령을 아회는 조심조심 차가운 천 위에 올리곤, 그대로 부적 하나를 붙였다. 어떻게든 북부의 차갑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얼음 조각 하나 쥐여주려 하며 밖으로 나가길 택했다. 한 손에는 목화, 다른 손에는 지팡이. 차라리 이 바깥으로 나가서, 북부로 가버리면─
"그 용이 북부까지."
불태우지 않을 보장이 어디에 있지? 불현듯 든 생각에 멈칫 서지만 이미 문을 연 지 오래다. 어쩔 수 없다. 북부로 피신하기 전에 원인을 해결하는 수밖에.
"……괘씸한데. 목화님까지 이리 앓아 누우시는데..."
애초에 대체 왜 우리가 해결을 해야 하지. 응당 사감들이 해야 마땅한 것을. 이곳의 존재는 그저 하 사감이 말한 독기인지 무언지 때문인가? 편히 쉬는 꼴이 갑자기 괘씸해지니 오늘도 '적룡' 착실히 일하게 생겼다.
방을 나설 적에는 두루마기 곱게 걸쳤지만 청룡탑 앞에 다다랐을 때는 거의 흘러내려 팔에 걸려있는 수준이었다. 평소라면 희었을 얼굴과 팔다리나 어깨가 열감으로 불그스름하다. 민소매의 한벌옷은 원래 그런 재질인 양 몸에 착 붙어서 안 그래도 짧은 기장이 더 짧아졌다.
차림이 어떻거나 말거나 느릿느릿 걸어온 온화 눈에 사감들 보이자 잠시 멈춰섰다. 안경은 방에서부터 벗었으니 시야에 가릴 것 없는데. 이 그칠 줄 모르는 땀이 눈커풀 기어코 깜빡이게 만들었다. 쯧- 혀를 차며 이마와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 쓸어넘기니 사감 아닌 남자가 저를 보고 뭐라고 말하려는 것 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뒷목 잡아채는 하 사감도.
"...흥."
저는 방에서 더워 죽어가는데 여기에나 와있었다 이거지?
남자는 애초에 관심도 없고 저는 신경도 안 쓰는(것 같은) 하 사감 보고 콧숨만 내쉬었다. 덕분에 정신이 좀 돌아와서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들을 것도 없이 이 청룡탑 춘 사감의 폭주였지만.
"끝나고 비나 내렸으면..."
적룡탑 돌아가는 동안 실컷 맞고 열이나 식히게.
사감들의 당부 뒤로 비틀거리며 청룡탑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잘 해보자- 하는 의미로 품에 안은 역린 토닥였다.
안보다는 낫지만 밖이라 해서 그리 나을 것도 없다. 두 눈이 슬며시 가늘어진다. 불쾌함의 표현이기도 하며, 육체적 한계가 가까워 또렷하게 뜰 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비척비척 다니다 보니 어느 곳에선가 열기가 뚜렷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이 지독한 더위에 원흉이 따로 있었던 건가? 마음 같아선 후끈한 열기에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으나,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가까이 가야만 했다. 가까이 가니 죄 비슷한 생각 한 모양인지 몇 학생들 서성거리고 있다. 가만히 일 돌아가는 꼴 구경하고 있으려 했는데─
"또 뵙게 될 줄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제 목숨 위협한 상대를,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라 생으로 씹어먹으려 했던 자를 잊기엔 그 기억 여간 인상적이었어야지. 말을 건다긴보단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운 소리였다. 저게 왜 여기에 있나? 아니, 어째서 이곳에 있는진 대략 짐작은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왜 아직도 있어? 설마 여기에 쭉 죽치고 있으려고? 이어지는 말에 그는 영 사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간 설핏 찡그리며 짐짓 불만스러운 표정 그려내었다. 역시나 그 나름의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죽기 싫은데 안 가면 안 되나요?"
이유 알게 되었으니 명쾌해지긴 했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것들 때문에 내가 왜 그 고생을 해야 하나. 가라고 등 떠민다면 어쩔 수 없이 가는 수밖에 없겠지만. 사실 죽음의 위협보다도 더워서 움직일 힘 없는 탓이 더 컸다. 인간도 물처럼 녹아버릴 수 있나? 그도 이것만큼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 령도에서 보았던 이들. 또 같이 한자리에 모였음에 연은 온화와 아회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아회에게서 살짝 거리를 둔나. 그리고서 사감님들의 수를 세니, 청룡이라 당연하게도 이번의 폭주는 춘 사감임을 안다. 연은 이 더위에 궁기가 자신에게 물을 챙기라던 것이 이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정말 어떻게 이를 예상하고 있던 것인지. 연은 한숨을 내쉬고선 온화를 따라 안으로 들어선다.
정체도 모를 남자의 대답에 그는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 이상의 표현 없었다. 슬며시 짓던 표정도 다 거짓이었다는 듯 낯짝 무덤덤해진다. 이유는 모르나 사감들은 어느 선에 있어서는 사감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고 있다. 어느 때엔 나서고 어떤 경우엔 나서지 않고, 그 기준이 뭐지? 적어도 자신이 산 채로 잡아먹히려는 상황만은 분명히 막으려는 듯 보였다. 그 부분은 긍정적으로 여길 여지 있다 생각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를 모르니 완전히 신뢰할 수도 없다.
"시체라도 남기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저쪽이라 해서 시체 남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는 심호흡하며 지친 몸 추스리고는, 청룡탑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뜨거운 열기에 더불어 매캐한 연기까지 자욱하다. 걷는 동안에는 아무렇게나 쓰러진 학생들이 발치에 차일 것만 같다. 내부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일 리는 없고, 완전히 정신을 잃었나? 유현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학생 하나를 깨워 보려 했다. 냅다 주먹을 들어 쓰러진 학생의 뺨에다 갈기러 했다는 뜻이다.
안으로 들어갈 적 뒤에서 시선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보면 어쩔 거냐는 거다. 이미 토라졌는 걸.
청룡탑 안은 더위를 견디지 못 해 쓰러진 학생들과 엄청난 열기로 가득했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 두루마기의 소매로 입가와 코를 가렸다. 숨 한 번 잘못 쉬었다가 내장까지 상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쓸어올렸던 앞머리 다시 흘러내길래 재차 올려주고. 안으로 더 들어가본다.
걸음 떼기 전에 고개 슥 돌려 같이 들어온 청룡 아씨- 연을 보았다. 별 의미 없는 시선이었다. 어찌 보면 너 거기 있구나- 하고 의식한 정도일까.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앞 보고 천천히 걸어갔다. 활활 타는 저 폭염의 한 가운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