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잿빛 머리를 가졌다. 사실 잿빛이 아닌 것 정도는 보인다. 그렇지만 이미 머리는 잿빛으로 인식했고, 금색 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여인이 아닌 사내로 판단하고 있으되 이곳이 몽중의 경계라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회라는 존재는 원래 신기루와 같아, 이런 허상의 경계에 존재함이 옳기에. 그렇기에 무 씨 집안의 유령이라 불리지 아니하였나? 당신이 누구인지 이미 완벽히 착각한 순간부터, 유령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더니."
아회는 나지막이 되물을 뿐이다. 답지 않은 날도 있을 법한가? 그런 의도를 가지며 속으로 하나를 센다. 조만간 끊겠다는 말에는 속내로 셈했던 수의 반을 덜었고, 온화하게 인내했다. 여전히 무표정 여상하며 웅크린 몸은 작다. 금세 흩어질 듯 초연한 모습으로 한참을 침묵했다. 담배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폐부 깊숙하게 들어와도, 당신의 질문이 끝났음을 깨달은지 한참이 지나도.
"영아."
마침내 침묵이 깨졌다. 한참이고 입만 다물던 아회는 당신을 향해 온전히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쳐다보지 않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렇게 쳐다보며 표정을 점차 굳혔다. 약간이나마 언짢음을 표하던 얼굴에 처음 보는 획이 그어진다. 차갑게 식어버린 표정은 북부를 빼닮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차가움이 온전히 느껴지고 첨예한 고드름처럼 입매는 다물린다. 고개가 서서히 기우는 꼴이 기이했다. 그대로 눈을 뜨면 상대를 노려보듯 치켜뜰 것만 같았다.
"나는 말이지, 같잖은 도발에 넘어가서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팼단다……. 그 아이는 아마 지금쯤 고역을 치르면서도 예상을 하였을 게야."
사근사근 뱉는 단어와 달리 여전히 표정 서늘하다. "무아회, 그 녀석이 궁기와 관련이 있구나, 하고."
"그 사실이 나를 끝없이 옥죄겠지. 그게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인간이란 모두 그런 존재지 않니. 무언가 좋은 것이 있다면, 쥐어 휘두르기 위해 모르는 척 이야기를 흘리고, 남몰래 스며들어 동조하게 만들고, 그렇게 누군가의 속내를 엿보려 들고, 끝내 잡아채어 목을 꺾어버리지. 너 또한 그쪽 부류였으니 잘 알 터인데……. 특히 제사장이라는 것들은 그 치세를 떨치며 대리인이랍시고 많은 것을 누리며, 그 과정에서 없던 것을 있던 것으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란 것을."
천천히 입 다물고 잠시 생각하던 아회 천천히 손 뻗는다. 이번엔 명확히 당신을 향했다. 여전히 허공 한 번 배회하지만 이번엔 갈피를 제대로 잡았다.
"영아, 우리 영이. 나는 그 순간이 불쾌하고 두렵단다. 궁기가 그 소식을 어디선가 흘려듣고 움직이려 들까, 아니면 건수 하나 물어버린 인간의 표적 되어 쫓길까 노심초사하는 이 순간이 말이다. 그런데, 호위인 네가 지금 이리 모른 체 굴면 나는 어찌해야 하니?"
당신의 얼굴 향함이다. 뺨 더듬으려는 듯 손 느릿하게 뻗었으니, 내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
"날, 날 지켜준다 했잖아. 맹세했잖아. 그 빌어먹을 새끼와 다르게 날 떠나지 않는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퉁명스레 구는 게야……."
"둘째 도련님 눈은 가주님을 쏙 빼닮았으니, 아무리 작은 마님이 미워도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느니 그런 소문은 퍼질 수가 없었지요." "기실 첫째 도련님은 눈을 다소곳이 감고 계시니 그 시선을 잘 알 수는 없었으나, 둘째 도련님은 다소 불편하였습니다. 가주님을 쏙 빼닮았으니, 가끔은 그 안의 감정을 보노라면 가주님의 감정을 엿보는 것만 같았지요." "……지금은 가주님의 감정과는 다른 이유로 눈을 마주치는 것이 불편합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미지의 것을 보면 늘 공포에 떨기 마련이라는데 딱 그 꼴입니다……. 도통 어딜 보는지 모르겠는데, 그 종착점이 내 속내일 것만 같아서……."
자기 감정에 취한 손늘봄은 상대의 축하가 어느 정도의 온도를 띄고 있는지 섬세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지독한 우연의 연속의 오늘따라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건 신의 안배일까, 그 반대일까.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늘봄은 행복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응, 그거면 된 거지.
"'역시'라고 하는 걸 보니 짐작 중이었구나? 하긴... 아, 좀 뻘쭘하다. 내가 초면부터 너무 오르락 내리락 했지? 아무튼 갈수록 청룡 티를 낸다니까, 티를 내. 민망해라~"
그거면 됐다. 행복에 젖어 웃음을 한없이 흘리던 늘봄은 유현의 한마디에 저의 뺨을 한번 긁적이며 민망함을 드러냈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 자신의 성격은 청룡 자체였으므로 이런 평가를 받아도 할 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나 남의 입으로 적나라하게 평가되는 건 또 다른 문제라, 어쩔 수 없이 조금 부끄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 감정은 곧 성큼 다가온 유현의 모습과 기묘한 탐심이 서린 눈빛, 이어지는 질문에 또 다른 색깔의 감정으로 덧칠되고 만다. 늘봄은 눈을 깜빡였다. 상대방의 두 눈이 바짝 다가와 정면에서 맞닿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로 각자 색깔 다른 저 눈동자 안에 도사리고 있는 기이한 탐심을 모르거나 은근슬쩍 아님 체 묻을 수도 없다. 아, 그나저나 눈 예쁘네. 아니 이게 아니지! 손늘봄은 제멋대로 이리저리 튀는 마음을 매우 쳐서 한 갈래로 정돈한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응? 그런 게 궁금하구나? 많이 궁금했나 봐... 흐으음, 어려운 질문인데... 일단 숫자로 표현해서 10점을 만점이라고 치면 지금 딱 10만큼 행복한 것 같고, 문장으로 묘사를 한다면 나비랑 새들이 가슴 안에서 열심히 날갯짓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하, 새삼 말로 표현하려니까 어색하네. 그만큼 기쁘고 두근두근 벅찬다는 소리인데, 어때? 잘 전달됐을까!"
어색한 웃음이 섞인, 그러나 착실한 답변이 한바탕 지나간다. 이윽고 손늘봄은 적절한 문장을 궁리하느라 또다시 이리저리 구르던 눈동자를 유현의 눈에 똑바로 맞춘다. 그 안에는 의외로 약간의 불만이 서려 있다.
"근데 왜 너는 계속 존댓말 써? 나만 반말 하면 좀 그렇잖아. 유현이 너도 나한테 말 얼마든지 편하게 해도 되는데~! 그게 더 좋다고!"
강요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구하는 게 참 당당하기도 하다. 상대가 존댓말이 입에 붙어 반말보다 편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런 건 고려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늘봄은 꿍얼거렸다. 참 귀찮은 인간이다, 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
무엇이 계기가 되었던 아회가 저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 되지 않았다면 저는 영원히 저 사람 또한 웃고 침울해하며 그것 누군가에게 내비치는 사람이란 것 알 일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 보며 깨닫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외면했던 것 중에서도 가장 깊숙히 밀어넣고 감추어 저조차도 알지 못 하고 싶은 마음. 진작에 잘라 내쳤어야 하는 그 우스운 마음의 존재를. 영원히 모르는 채 끝냈어야 했다.
- 돌이켜보면 후회의 시작은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설프게 나서버려 처음으로 내가 왜 그랬지 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부터다. 이전까지만 해도 단단히 봉해두었을 터인데. 제 경솔함이 봉한 것 무르게 풀어내어 그간 쌓아둔 것 무색하게 무너뜨렸다. 이제 다시 봉할 자신 없는데. 다시 쌓아올려 견고히 만들 자신 없는데. 무너진 것 앞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없다 되내일 뿐이 제 최선이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작디 작게 웅크리는 것이.-
아마 본의가 아니겠지만은. 모르는 모습 사이 알고 있는 모습 얼핏 비치는 것에 속 더 비틀린다. 그러나 담배 연기와 함께 씹어삼켰다. 그렇게 내뱉는 쓴 숨과 함께 무엇이 그리 불쾌할 것 같으냐 묻고 한참을 그저 침묵으로 흘려보냈다. 물음에 답 없으니 저 역시 말을 아꼈다. 그 사이 꾹꾹 눌러 담았던 담뱃잎 거의 다 타들어가 슬슬 마지막 한 모금 만을 남겨두어갔다. 빨갛게 타들어간 담뱃잎은 서서히 희색빛으로 식는다. 그 마지막을 빨아들이려는 찰나. 아회가 불렀다. 저 아닌 영이를.
"예."
그리고 태연히 대답하는 제가 비틀린 속 아주 끊어낼 듯 움켜쥔다. 분명 손 따로 두었는데 지금 이 순간도 제 목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으면 피하라고. 버틸 수 없으면 도망치라고. 저도 종종 그리 말 하고 다녔으면서 이 순간 스스로 그 말 지키지 않고 있었다. 직접 빚는 모순이 더할 나위 없이 추하다 여기면서도 뒤늦게 고개 돌려 아회 보았다. 금방이라도 노려 볼 듯 기운 얼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보았다. 그 어떤 붉은 옷 걸쳐도 푸르스름한 백색 잃지 않는 아회 가만히 주시하며 조곤히 이어지는 목소리에 새삼 귀를 기울였다.
역시나. 이런 일 없었다면 영원히 듣지 못 했을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습도.
궁기. 라는 이름 듣자 단박에 검은 호랑이와 일전 보았던 푸른 머리 사내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전해달라 부탁하던 사내. 아. 그래. 그 선물 전해주며 누구냐고 물을까 하다가 관두었지. 그 때 묻지 않았어도 이리 알게 되니 결국 알아야 할 것은 알게 됨일까. 이전 사실 떠올리기 무섭게 다음 말이 비수 되어 제 명치를 헤집는다. 너 또한 그쪽 부류였으니. 제가 아닌 영이에게 하는 말이지만 저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 여기서 아회 착각한 대로 영이 행세 하는 것 그 반증이다. 아니면. 정말로 착각한 것이 아닌 진정 저에게 하는 말일지 모른다 생각하며 당장이라도 명치서부터 뜨끈한 것 올라와 게워버릴 것 같다.
또다시 짧은 침묵 흘렀다. 그 사이 입 안 지그시 깨물어 역력한 구토감 참아내었다. 역히 굴 것이라면 끝까지 뻔뻔해라. 스스로를 다그치며 제게로 뻗어오는 손 바라보았다. 그만큼 벌어진 두루마기 사이에 아회 얼굴도. 그 입이 하는 말 들으며 그 손이 제 얼굴에 닿게 내버려 두었다. 불쾌하고 두렵다. 궁기가 누군가가 무엇 저지를지. 맹세. 지켜준다고. 떠나지 않는다 했으면서. 왜 그리 퉁명스레 굴어. 아회의 손 하고픈 대로 두며 이어지는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었다. 이윽고 제 입 열었을 때. 유순한 행동과 달리 나온 목소리 사뭇 서늘했다.
"제가 어째서 이러는 지는.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과연 그럴까? 아니어도 상관 없어.
"지켜드리겠다. 떠나지 않겠다. 맹세요? 글쎄. 제가 언제 그런 것을 했던지요."
느릿느릿 말 이어지는 사이에도 제 얼굴 더듬고 있었다면 느껴졌을 것이다. 눈매 빙긋 휘고 입매 곱게 호선 긋는 것. 차분히 웃는 얼굴을 하고 그 때까지 미동도 없던 몸 움직였다. 이번엔 제가 팔 뻗어 아회에게 닿으려고- 덮어씌운 두루마기 흘러내릴새라 조심히 등과 허리에 제 팔 휘감으려 하며 그만큼 거리 좁힌다. 피했다면 피한대로 두었겠지만. 아니라면 평소와 같이 허나 기묘한 분위기 두른 채 제 품에 안으려 했겠지. 좁든 멀든 그 귓가에 똑똑히 들리게 말했겠지.
"통 기억이 나질 않으니. 어째. 이 자리서 다시 한 번 맹세해 드리리까."
문득 지금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무슨 대답을 할지 얼른 듣기나 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