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사람이라면 새하얀 피부가 특징이나, 그는 유달리 창백한 편에 속했기 때문인지 상처가 조금만 나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방금 얻어맞은 얼굴은 금세 푸른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고, 주변은 발갛게 물들어 있으니 시체 꼴이 딱 그러할 것이다. 하물며 눈까지 감고 있었으니 더욱. 다만 어딘가 고통스러운 기색 없고 평온하니 기이한 사람이라면 기이하리라. 아회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적룡 기숙사에서 싸움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는가, 죽여 패지 못한 것이 한일뿐이다.
"그래야지."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착각하는 존재는 걱정을 그다지 하지 않는 성격인 듯싶다. 그리고 제법 친밀한, 혹은 그 이상을 넘어선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원내에서, 아니, 재학하며 단 한 번이라도 웃은 적이 있었나? 아니다. 아회라는 인물은 웃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잿더미처럼 초연하게 그럼 그렇지, 그렇군, 그런가? 이 세 반응 중 하나를 적당히 고르는 사람이었다. 지금 하나하나 보이는 행동이나 언사가 당신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아."
펄럭이는 두루마기가 머리를 덮기가 무섭게 외마디 불만이 터져 나온다. 벗어내려 꾸물댔으나 이번엔 당신이 빨랐다. 소매요 자락 다 정갈히 매만져버린 손길에 아회의 입에서 더 불만은 튀어나오지 못했다. 대신 다른 것이 튀어나오니, 당신이 뱉은 얘기 때문이다. "에이잉, 영이 이 녀석." 짤막히 튀어나온 것은 타인의 이름이다. 앙상한 듯 관리되지 못한 손이 두루마기 사이를 빠져나오더니 허공을 잠시 더듬거린다.
"서로 동정하지 않기로 했잖니. 그런 부차적인 것은 짐만 될 뿐이라니까…… 이래서 북부 바깥 녀석들이란."
당신을 잡지 못하는 손길은 계속되다가 이내 힘없이 내려갔다. 담뱃잎 태우는 내음에 "끊겠다면서." 덤덤히 얘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착각의 대상 또한 흡연자인 모양이다. 차분한 목소리에 아회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듯 하며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이내 두루마기 사이로 드러난 표정은 초연했다. 잿더미로 돌아왔다는 듯.
"너도 참, 오늘따라 이상하구나. 어련히 알 것을 모르는 체하니 마치 다른 사람 같아."
농이다. 덧붙이는 목소리는 덤덤하다. 아까 전 웃었던 것을 제외하면 평소의 아회와 같은 어조요, 모습이거늘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서 큰 이질감 부를 뿐이다.
"개운하단다, 당장은 그러하지."
희미하게 눈썹 내려가는 것이, 당신에게 으레 보여주던 표정 중 하나다. 어딘가 언짢을 때마다 드물게 보여주곤 하였던.
친근히 대하는 화법. 들어본 적 없는 웃음소리. 저는 알지 못 하는 이야기. 명백하게 저를 다른 사람으로 보고 대하는 행동.
투명한 물에 검은 먹물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간다. 조용히 물들어가는 그 속에 희미한 앙금마저 가라앉는다.
평소라면 볼멘소리 없이 끌어내리거나 그냥 두었을 두루마기조차 외마디 불만 표하며 손 허우적대는 아회를 붉은 눈동자가 응시했다. 저를 대체 누구에 빗대어 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기 무섭게 이름 하나 들렸다. 영이. 누군데 그거? 지난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은 곰방대 쥔 손에 슬그머니 힘 불러일으켰다. 손등에 핏줄 툭 불거질 만큼. 조금만 더 세게 쥐면 죽대 부러지겠거니 싶을 즈음. 돌연 손에 힘 풀렸다. 뾰족히 돋아 심장 찔러오는 가시 하나 늘어난 탓이다.
제가 감히 그런 생각 할 처지더냐 하는. 일종의 자책. 가책이자 꾸짖음.
담배 내음과 더불어 저를 옥죄는 그것 아니었으면 당장 저 앙상한 손목 잡아채어 누구를 보느냐 다그쳤을 것이다. 그리 할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주절주절 들려오는 목소리 들으며. 비뚝 기운 머리에 머리칼 사이 붉은 수정 반짝인다. 담지 말아라. 흘려 듣자. 스스로 되내이며 필요한 최소한의 말 만을 입에 담았다.
"답지 않은 날도 가끔은 있을 만 하지요."
그 영이란 사람도 사람이라면 말이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말 혀와 같이 씹어 삼켰다. 담배 얘기엔 조만간 끊을 겁니다 하고 뚝 잘라 답했다. 아. 문득 눈치 빠른 제가 원망스럽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알고 싶지 않아도. 아회 말과 행동에 그 영이란 자 누구인가 그려진다. 아회와 가까우면서 걱정 그다지 하지 않으며 흡연을 하고 동정을 부차적인 것이라 표할 만한 사이이며 묻는 말에 얼버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답해주는 상대. 저보다 지낸 시간 오래일 것 분명해 뵈는 분명하게 만드는 상황의 연속에 스스로 휘말려드는 듯 했다.
답지 않아? 다른 사람 같아? 누가 할 소리를.
끊고 싶다. 다시금 저 웅크린 어깨 붙잡아 고성 지르고 싶다. 악 쓰고 싶은 마음 동시에 그러면 안 된다 목 죄는 마음 있다. 아니지. 안 된다고? 솔직해져라. 이 둘도 없을 상황을 직접 끊고 싶지 않을 뿐이지 않나. 지금이 아니면 언제 어떻게 저 본 적 없는 모습 볼 건데. 지금이 아니면 저런 말 언제 들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덤덤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 기울인 채로 눈만 굴려 저 봉긋한 두루마기 덩어리 보았다. 평소와 같이 초연해졌으나 분명 제가 보던 것과는 다른 그 얼굴을. 제가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저는 모른다. 잠시 응시하다 정 반대로 눈 돌리고 담배만 태웠다. 그리고 말했다.
"...무엇이 그리 불쾌할 것 같으십니까."
딱히 그 영이란 사람 의식해서 말 고르진 않았다. 그저 제 오라비 흉내 내었던 것이 점점 비틀려가는 심사에 비추어 그럴 듯 하게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목소리 역시. 낮게 가라앉은 채로.
당신은 잿빛 머리를 가졌다. 사실 잿빛이 아닌 것 정도는 보인다. 그렇지만 이미 머리는 잿빛으로 인식했고, 금색 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여인이 아닌 사내로 판단하고 있으되 이곳이 몽중의 경계라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회라는 존재는 원래 신기루와 같아, 이런 허상의 경계에 존재함이 옳기에. 그렇기에 무 씨 집안의 유령이라 불리지 아니하였나? 당신이 누구인지 이미 완벽히 착각한 순간부터, 유령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더니."
아회는 나지막이 되물을 뿐이다. 답지 않은 날도 있을 법한가? 그런 의도를 가지며 속으로 하나를 센다. 조만간 끊겠다는 말에는 속내로 셈했던 수의 반을 덜었고, 온화하게 인내했다. 여전히 무표정 여상하며 웅크린 몸은 작다. 금세 흩어질 듯 초연한 모습으로 한참을 침묵했다. 담배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폐부 깊숙하게 들어와도, 당신의 질문이 끝났음을 깨달은지 한참이 지나도.
"영아."
마침내 침묵이 깨졌다. 한참이고 입만 다물던 아회는 당신을 향해 온전히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쳐다보지 않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렇게 쳐다보며 표정을 점차 굳혔다. 약간이나마 언짢음을 표하던 얼굴에 처음 보는 획이 그어진다. 차갑게 식어버린 표정은 북부를 빼닮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차가움이 온전히 느껴지고 첨예한 고드름처럼 입매는 다물린다. 고개가 서서히 기우는 꼴이 기이했다. 그대로 눈을 뜨면 상대를 노려보듯 치켜뜰 것만 같았다.
"나는 말이지, 같잖은 도발에 넘어가서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팼단다……. 그 아이는 아마 지금쯤 고역을 치르면서도 예상을 하였을 게야."
사근사근 뱉는 단어와 달리 여전히 표정 서늘하다. "무아회, 그 녀석이 궁기와 관련이 있구나, 하고."
"그 사실이 나를 끝없이 옥죄겠지. 그게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인간이란 모두 그런 존재지 않니. 무언가 좋은 것이 있다면, 쥐어 휘두르기 위해 모르는 척 이야기를 흘리고, 남몰래 스며들어 동조하게 만들고, 그렇게 누군가의 속내를 엿보려 들고, 끝내 잡아채어 목을 꺾어버리지. 너 또한 그쪽 부류였으니 잘 알 터인데……. 특히 제사장이라는 것들은 그 치세를 떨치며 대리인이랍시고 많은 것을 누리며, 그 과정에서 없던 것을 있던 것으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란 것을."
천천히 입 다물고 잠시 생각하던 아회 천천히 손 뻗는다. 이번엔 명확히 당신을 향했다. 여전히 허공 한 번 배회하지만 이번엔 갈피를 제대로 잡았다.
"영아, 우리 영이. 나는 그 순간이 불쾌하고 두렵단다. 궁기가 그 소식을 어디선가 흘려듣고 움직이려 들까, 아니면 건수 하나 물어버린 인간의 표적 되어 쫓길까 노심초사하는 이 순간이 말이다. 그런데, 호위인 네가 지금 이리 모른 체 굴면 나는 어찌해야 하니?"
당신의 얼굴 향함이다. 뺨 더듬으려는 듯 손 느릿하게 뻗었으니, 내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
"날, 날 지켜준다 했잖아. 맹세했잖아. 그 빌어먹을 새끼와 다르게 날 떠나지 않는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퉁명스레 구는 게야……."
"둘째 도련님 눈은 가주님을 쏙 빼닮았으니, 아무리 작은 마님이 미워도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느니 그런 소문은 퍼질 수가 없었지요." "기실 첫째 도련님은 눈을 다소곳이 감고 계시니 그 시선을 잘 알 수는 없었으나, 둘째 도련님은 다소 불편하였습니다. 가주님을 쏙 빼닮았으니, 가끔은 그 안의 감정을 보노라면 가주님의 감정을 엿보는 것만 같았지요." "……지금은 가주님의 감정과는 다른 이유로 눈을 마주치는 것이 불편합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미지의 것을 보면 늘 공포에 떨기 마련이라는데 딱 그 꼴입니다……. 도통 어딜 보는지 모르겠는데, 그 종착점이 내 속내일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