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두덩이 더욱 움푹 들어가고, 어제보다 다크서클이 더 길게 내려앉아 있다고. 연의 룸메이트인 아이가 걱정을 내비치나, 연은 그에 괜찮다며 아이가 안심할 말 하나 하지 못한다. 무기력하고, 어깨는 단단히 뭉쳤고, 머리는 더욱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옷에도 구김이 가득하니 단정함은 온데간데없다. 그러니 변명을 해보아야 걱정만 더 끼칠 뿐이라, 그저 옅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다. 매일 같이 침대에 몸을 눕히나, 매일 같이 연은 단잠의 시간으로 떠나지 못했다. 허우적거리며 무기력한 꿈의 끝에서 연은 희미한 달빛 속 어두운 천장을 뜬 눈으로 올려다보며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 못 이루는 날이 길어지니 룸메이트인 아이 연에게 무언가 작은 쿠폰 같은 걸 쥐여주며 말하기를, 천부에는 악몽을 쫓는 부적 같은 것도 팔지 않겠냐며. 이것은 카페의 케이크 세트 쿠폰이니, 달콤한 것도 먹고, 부적도 지어 오라며. 등 떠밀려 천부에 오게 된 것이라. 연은 인파에 치이며 부적을 지어줄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한 채. 쿠폰만 손에 꼭 쥐고서 카페 앞에 서 들어갈지, 아니면 그냥 돌아갈지 망설이고 있었다.
과연 자신이 케이크가 나오기 전까지 졸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반쯤 감긴 눈,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껌뻑 거리며 고민하다 연은 길게 하품을 내쉰다. 부적을 써줄 가게를 찾아 인파 속을 헤치고 다니느라 더욱 피로한 것이라. 케이크가 나와도 먹다가 깜빡 졸아버리진 않을지, 비몽사몽하니 제대로 입으로 가져가지도 못하고 흘릴 것만 같으니. 그냥 돌아가자고 마음을 먹던 때. 연은 제 눈앞에 나타난 궁기를 보고서 토끼 눈을 떠낸다. 다정하단 듯 말을 걸어오는 재앙을 목도하니 어떤 각성의 상태에 들어선 것만 같은지라. 자꾸만 감기던 눈도 크게 떠지고, 정신이 확 드는 것에 연은 궁기가 해오는 말을 듣고선 연은 화난 듯 잔뜩 표정을 구긴다.
"좋아할 거라고 했었잖아. 왜 거짓말을 했던 거야?"
연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니. 따지듯 묻는 것이 화가 난 듯한 눈치라. 제 물음에 대한 답이나 반응이 만족스럽지 않을 시 연은 선배고, 뭐고 당장이 궁기의 무릎을 발로 까 버릴 생각을 하며 궁기를 올려다본다.
싸움이 났다. 긴 복도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된 요란한 몸싸움 소리 울린다. 오늘도 참 지치지도 않고 치고 받는구나. 제 방에 늘어져 있던 온화 그 소란 들으며 생각했다. 옆에는 집에서 보낸 서신이 아무렇게나 펼쳐지고 늘어져 있었다.
슬슬 나가볼까 했더니 이 무슨 난리인지. 조용해지거든 나가야겠다. 이미 다 읽은 서신 멀찍이 두고 느긋히 곰방대 불 당겼다. 새로 담은 담뱃잎 빨갛게 타올라 이윽고 한 모금 연기 뿜을 쯤. 학생 두엇이 문 앞 지나가며 떠들었다. 누구랑 누가 싸우는 거래? ...랑 무 선배라던데? 지나가는 이름 중 하나는 흐릿했으나 하나는 명확히 제 귀에 들렸다.
학생들 지나가고 잠시. 가만히 있던 온화 자리에서 몸 일으켰다. 후- 다시금 연기 내뱉으며 방에서나 걸치는 한벌옷 위에 적룡 두루마기 대충 걸치기만 하고 방을 나섰다. 다행이랄지. 싸우는 소란 이는 곳 그리 멀지 않았다. 안경도 없이 머리도 묶지 않고 헐렁한 차림새로 그 소란 가까이 가니. 누군가의 팔 붙잡은 수일 보였다. 피가 울긋불긋한 손이 머리통들 사이로 얼핏 비췄다. 그 손 누구 것인지 알자마자 걸음 서둘렀으나 가까이 하기 무섭게 한 줄기 연기가 학생들 사이를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제 걸음 당도하니 이미 끝난 상황에 낮은 한숨 내쉬었다.
아회 가버린 방향 보던 수일이 뒤늦게 온화 발견하고 다가와 제가 그랬던 것처럼 한숨 쉬었다. 벗 말려보겠다고 나섰다가 쓴 맛 본 꼴이 그럼 그렇지 였다. 상황 설명은 물을 것도 없이 모인 이들 떠드는 것 듣기로 되었다. 저기 저 바닥에 피떡 된 놈이 망언을 했다. 뭐 그 정도였다던가. 누군가는 눈쌀 찌푸려지는 바닥을 온화 덤덤한 눈으로 보았다. 그러다 힐끔 눈 돌렸다. 처음에 왜 싸웠나-를 말한 그 여후배에게. 그리고 말했다. 그 때 복도는 조용했기에 제 목소리는 낭창하게도 울렸다.
"그리 떠들 시간에 쫓아야겠단 생각은 안 들더냐? 혓바닥이 걸음보다 가벼우니 조만간 저 꼴 하나 더 치르겠구나."
그 하나가 누구일지 콕 집은 이 없었으나 온화 시선 그 여식에게 꽂혀 있었으니 달리 생각할 것 있을까. 낄낄. 한 손에 든 곰방대 까딱이며 웃으니 어디선가 딱딱딱! 하고 기묘한 소리 같이 울린다. 거기 모인 모두를 비웃듯. 분위기 더 싸하게 만들어 놓고서 그 한복판 천천히 가로질렀다. 가는 길에 널브러진 놈 배 지그시 밟아 숨은 쉬는지 확인하고. 그 여식 옆 지나가며 그저 흘리듯 중얼거렸다.
"그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혓바닥 놀리기 전에 생각이란 걸 하려무나."
그리 지나친 후에 수일 돌아보며 말했다.
"무 선배는 내가 쫓을 터니. 그거나 치우게. 더럽잖나. 바닥이."
어휴. 무슨 악취라도 난단 듯 코 앞서 손 흔들었다. 더러운 것 피하듯 걸음 성큼성큼 떼어 그곳서 멀어졌다. 그 뒤로 수일이 나서 자리 정리하는 것 멀리 들렸다.
적룡 기숙사 밖으로 나온 온화 곧장 호수로 향했다. 다년간 아회 알고 지낸 것 이럴 때 참 쓸모있었다. 조금은 급하게 잰걸음으로 두루마기 휘날리며 호숫가로 가니. 아니나다를까 거기 있었다. 산발이 된 잿빛 머리에 주저앉은 뒷모습이.
발견하자마자 안도의 한숨 내쉬었으면서도 가까이 갈 적에는 태연히 다가갔다. 쫓아나온 것 아닌 마냥.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던 양. 그리 평소처럼 말을 걸려고 했으나 제가 말 거는 것보다 아회 돌아보는 것 먼저였다. 돌아보는 얼굴에 흐른 핏자국부터 눈에 들어와 희미하게 미간 일그러뜨린 것 순간이었다. 돌아본 아회가 저를 향해 하는 말 어째 이상했다.
약조? 무슨 약조를 했었나? 아니. 전혀 기억에 없다. 제가 목이 빠지게 기다릴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저 선후배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이거늘. 딱 그 말 한 번 만으로도 평소같지 않음을 감지하자 아무리 온화여도 순간 고민했다. 이거 정말로 하 사감 불러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동시에 궁금해졌다. 지금의 아회가 무엇을 보여주진 않을지. 온화 안의 저울은 찰나 삐걱이고 슬그머니 후자로 기울었다.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해 목 가다듬곤 차분히 낮춘 목소리로 대답했다.
"찾느라 늦었습니다. 맞은 곳은. 어떠신지요."
말투는 어찌할까 하다가 향이 오라비 것을 흉내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저 답지 않았으니까. 대답하고 반응 슬쩍 살피고. 조심히 그 옆에 가서 앉으려 했다. 저도 모르게 한 쪽 무릎 꿇으며 저를 낮추는 듯한 자세 취하게 되었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경솔히 손 대고 싶은 것 일단은 참으며 말 덧붙였다.
엽 씨 가문 여식은 그 동그란 눈을 정확히 당신 향해 마주했다가, 다른 학생이 눈 가려주며 제지하자 한 번 몸만 움찔했다. 싸움 생기려던 것 간신히 참듯 입술 꾹 다물다 성큼성큼 걸어갈 적에야 아르릉 화 참아내고 자리 휙 떠버리는 것이 조그마한 강아지 같았다. 네게 신의 악의가 느껴지니, 역시 궁기 있는 집안은 무언가 다르긴 한가 보다. 거듭 저주만 받는 집안이니 하루 빨리 제사장들의 손에 궁기는 이리저리 조각 내어 산 제물로 바치고 너 또한 바치면 딱이겠구나!
악의 가득한 조롱을 평소 같으면 넘길 수 있을 터인데도 오늘은 참을 수 없었다. 아마 꾸었던 꿈 때문의 탓도 있으리라. 꿈 내용에 감정이 동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인내심이 뚝 떨어져 주먹을 내지르게 됐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녀석의 얼굴이 피로 물들 적엔 희열마저 느꼈다.
그런데, 이게 현실이긴 한가? 아니, 현실이 아니면 뭐가 어떻지? 어디에서든 내 행동은 옳고 정명하다. 몽중이었어도, 현실이었어도 두들겨 팼을 것이고, 심하면 그 목숨을 뺏기까지 했을 것이다. 도발에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나는 틀리지 않았어……."
씹어뱉기가 무섭게 얼마 없는 세상의 정명함을 판가름하고, 옳고 그른 이치를 구분하던 이성은 점차 흐려지고, 이내 수마에 빠지듯 갈피를 잃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아회란 자는 조용한 곳을 그리도 좋아하는 사람이니, 인적 드문 학교 호수는 그 난리가 났을 때도 도망치기 딱 좋은 곳이라. 평소 같으면 호수에 비치는 물 쳐다보듯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을 터인데, 오늘은 호수를 옆에 두고 앉은 모습이 다르다면 다를 터였다. 자신이 앉은 방향마저 판단하지 못했으니, 당연하게도 당신을 알아볼 리도 없었다.
"죽을 날이 다가왔나 보다, 네 나를 걱정하는 날도 다 있다니."
이렇다 할 꾸짖음의 기색은 없었다. 그냥 하는 말이라는 듯 가볍게 핀잔하고는 터진 입안에서 고인 피를 적당히 먼 곳에 뱉었다. "북부에서 이리 늦었다면 이미 내 죽었을 터지만 학당이라 멀쩡하다. 나보다는 내게 맞은 놈이 고역일 게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입을 훔치는 것이 평소와는 제법 달랐다. 어쩌면 격한 싸움의 여운이 가시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하!"
아회의 웃음은 제법 탁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호탕함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문장이나 단어라기엔 감정이 있었다. 그 감정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유쾌함은 아니다. 아회는 손을 한 번 내젓곤 느릿하게 까딱인다. 제 차림은 됐고, 더 가까이 오기나 하라는 듯. 이제 보니 안경도 싸움 도중에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올 해의 학당은 이상한 일 많아도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작은- 하 사감의 폭주였나. 아니. 과거의 잔영 희미하게 드리울 적 부터였다. 학당에서 세간에서 핏빛 명성 자자한 이들 그 실체 드러내면서부터. 이변과 풍랑은 줄곧 이어져오고 있었다. 단지 그것 인정하고 싶지 않아 줄곧 모른 체 했을 뿐이지.
그래. 제 문제는 여지껏 외면해놓고서 제 것 아닌 문제는 그러질 못 했다. 그저 저잣거리서 스쳤던 학생 하나도 눈에 띄면 그냥 두질 못 하는데. 자그마치 삼 년을 알고 지낸 이는 오죽하랴. 어설프게 남은 본질은 늘 저를 충동질하고 멈춰서게 만든다. 들리면 귀 기울이게 하고. 보이면 눈 쫓게 한다. 아직 제가 그 시절에 머물러있는 듯. 상냥한 착각 불러일으켜 마주한 이를 보게 하였다.
...각설하고.
쫓아온 아회는 호수 앞에 있었다. 그러나 늘 앉은 방향 아니라 호수를 옆에 두었다. 호수 앞에 앉은 아회는 항상 얼굴이 호수물 비친 듯 맑았는데. 지금은 비산하는 조각빛이 옆 얼굴 겨우 비췄다. 하필 멍든 볼에 비추어 낯빛 창백히 보였다. 그 모습 보며 온화 문득 생각했다. 저대로 툭 쓰러져 호수 안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다고. 아회가 죽을 날이 다가왔다는 둥 하여 든 생각일 지도 모른다. 허나 그리 되기 전에 잡아야 하는데. 아. 과연 제가 그럴 분수이던가. 여느 때와 같지 않은 이 상황이 저마저 듬성듬성 조각내는 듯 했다.
"...예. 언사 수월하신 것 보니. 제가 괜한 걱정을 한 듯 싶습니다."
멀리 내뱉어진 핏덩이 힐끔 보며 그리 말하고. 아회가 허한다면 곧장 옷이며 머리며 정도해주려 했으나 짧게 흐른 웃음이 저를 벙-하게 했다. 저리 웃는 것 제 앞에서는 없었, 지 않나. 그보다 웃을 줄 알았냐고. 이 사람. 늘 입 꾹 다물고 꿍얼대거나 기껏해야 눈썹 들썩이는 것 보는게 고작이었던 제 지난 날들 떠오른다. 저 행색에 들었던 안쓰러움 한 켠에 삐죽한 가시 하나 솟는다. 쑥 자라난 가시 곧 제 심장 쿡 찔러서 눈 가늘게 떠 아회 흘겨보게 하였다. 제가 듣기엔 퍽이나 친근하게 건네는 말들- 말벗을 해달라거나 얼굴 좀 보자거나. 그 말들이 가시의 크기 한층 키워 행동 조금 불퉁스럽게 만들었다.
하. 짧게 한숨 내쉬곤 낮추었던 몸 휙 일으켰다. 크게 펄럭일 정도로 호탕하게 제 두루마기 벗어선 아회 머리 위로 펼쳐 덮는다. 덕분에 저는 방에서 뒹굴 적에나 입는 검은 한벌옷 차림에 팔다리며 등판까지 훤히 드러났지만. 제 살 드러나는 것보다 저 안쓰러운 몰골 가리는게 제겐 우선이었다. 행여나 벗어낼라 확실히 덮고 있도록 소매며 자락이며 매만져주곤 그 옆에 다시 슥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신경 쓰지 말래도 눈에 뵈니 안쓰럽습니다. 손 대는 것 원치 않으시면 그거나 덮고 계시지요. 저기. 빌려온 것이니."
짧은 치마 입고도 경망스럽게 양반다리 하고 앉은 온화 그제야 곰방대 물었다. 거의 꺼져갈 듯한 불 겨우 살려 한 모금 피우니 잠시 술렁였던 것 담배연기마냥 흩어져버린다. 희뿌연 연기 아회에게 닿지 않게 바람 태워 멀리 보내버리곤 다시금 차분히 내려앉힌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