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 걸친 몸에 어색한 두드림 느껴졌다. 여전한. 아. 여전했구나. 당신은 인간이 싫지만 학생을 무턱대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싫다면서 사감 노릇은 해주었다. 제 멋대로인 판단일 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리 혼란스럽게 굴어도. 제대로 듣고 판단해주었으니까.
노려보는 눈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시선 꽂히는 찌릿함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봐도 이게 무언가 싶겠다. 갑자기 달려들어 영문 모를 소리 해대니. 그런데. 그런데 이건 꿈이 아니었던가? 조금 전부터 제 머릿속 감돌기 시작한 위화감 급히 잡아채었다. 꿈치고는 당신의 반응 과히 생생했다. 제 무의식이 그러내었다기엔 너무나도.
이게 꿈이 아니라면. 뭐지?
그거 네 몸 아니지- 그 말에 고개 들었다. 꿈이 저런 말까지 할 수 있나? 아니. 적어도 제가 여태껏 꿨던 꿈 중에서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꿈을 빙자한 그것의 농간인가.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 내려 제 손. 아니지. 그 몸의 손 보았다. 제 것 아니지만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손 두어번 쥐고 펴보곤. 피식- 웃었다.
같잖기는.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무슨 색인지 모를 눈 가늘게 좁혀 뜨곤 쯧 하고 혀도 한 번 차주고. 슥 표정 풀었다. 그리고 하 사감 보며 말했다.
"이것 내 몸인가 물었지. 맞소. 이 몸 내 것 아니오. 여느 때처럼 잠들었고 눈 떠보니 이러하여 내가 꿈을 꾼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그냥 꿈은 아닌가 보오. 거 참. 누가 무슨 농간을 친 건지."
하- 별로 난감하지도 않은 한숨 짧게 내쉬었다. 새로이 드러난 화제에 어쩐지 머릿속 차분해졌다.
지금이 꿈이 아니라면 이제 어떡해야 하나. 평소처럼 깨려고 하면 깨질까? 이왕 있는 김에 나중 일 다 불어버려? 아니다. 그건 혹시 모르니 삼가자. 그랬다 돌아갔는데 역린 없으면 저만 손해다. 그러면 할 수 있는 것이- 음-
"나도 학생이긴 학생이라 이런 일은 처음 겪건만. 보소. 사감님요. 어찌해야 내 돌아갈 수 있을지 짐작 가는 거 없소?"
혼자 앓아봤자 답 안 나오고 저는 아는 것도 없으니. 일단은 이 사태 관련하여 도움 될 것 있나 하 사감에게 물었다. 사감이고 신수니까 뭐든 알겠거니 싶었다.
쓸모 없는 것. 이 몸의 주인은 밧줄 하나도 가지지 못한 건가? 당연한 사실을 탓하면서도 그는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이 빌어먹을 꿈에서 깨게 해주었으면. 아니, 이 빌어먹을 몸뚱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선명하게 눈에 박히는 모든 정경이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세상이 네 희망을 깨부수러 올 것이노라고.
당연한 사실에 쓸모를 논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 이후 찾아냈다는 사실이 더 우스운 듯하다. 숨겨진 밧줄을 찾아 손 뻗었을 적, 그는 불가항력에 쓰러지듯 그대로 털썩, 바닥에 몸을 맡기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잃는 것은 쉬운 일이다마는 그 사이 깨어날 수 있다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났을 적 느껴지는 것은 옷깃을 부여잡는 우악 진 손길이었다. 적룡 기숙사의 녀석들도 이리 쥐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떤 경위로 자신의 멱살이 틀어잡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무엇인가 고민하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눈치도 빠르지……."
이것은 몽중인가, 현실인가. 몽중이라면 필히 끔찍한 악몽이요, 현실이라면 당신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을 터인데. 확인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니 두 눈을 온전히 떴다. 눈동자에 담기는 당신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사감들이 달려오는 소리는 점점 귓가에서 아득해지는것만 같았다. 아, 잠이, 오는건가? 아무렴 어때.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은 버리고, 지금 이대로 이 꿈을 끝내는것도 좋을 것이다. 자. 이제 푹 자고 일어나자.
"... 언니. 언니가 바라는대로, 다시 한번 이루었어.."
리본을 머리에 매며 밝게 웃었다. 그래. 이왕이면, 끝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하는게 낫지 않겠니? 어차피 꿈일 뿐이었으며- 결과는 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바꿀수 없으니.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어지는건 아닐 뿐이었으니. 다른 방향도 궁금하기야 했지만 덧 없는 환상을 쫓기에는 자신은 너무 무관심했다.
이 상황 어찌해야 할지 물으니. 꿈이라면 깨면 되지 않느냐는 대답 돌아왔다. 그게 그렇게 간단할까 싶었는데 갑자기 잠기운 미친듯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듯 했다. 정해진 흐름이 있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곧 나오는 하품 작게 하고 저도 하 사감 보았다.
"그 말 듣자마자 잠 오는 것 보니 이대로면 깨어날 듯 한데. 흐암... 그래도 이대로 가기는 조금 아쉬우니 말이네."
나중 생각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역시 그러기엔 기회가 아깝잖아.
"거 팔 좀 빌려주소. 아 빨리."
제 몸 아닌 것 심히 아쉬우나 지금은 이것 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 사감 팔 붙들고 얼른 저 안아올리라며 보챘다. 빨리. 잠들기 전에. 어떻게든 안겨서 어떻게든 그에게 매달려 뺨 맞대려고 했다. 지금이 그저 꿈 아닌 실상의 언젠가라면. 정말로 그렇다면 이것도 혹시 모르니까. 뺨 맞대 문질거리는 것까지 어떻게든 하려고 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 흐흐."
웃을 적 무어라 중얼거린 것 같으나 너무 작아 그저 웃음소리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악몽일 줄 알았던 것 이리 끝나니 그것 만으로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었다.
여전히 시야 선명하니 몽중이다. 시점이 바뀐 것인가, 가까이 얼굴을 보니, 기억하던 이전의 얼굴이다. 기억이 오래 되어 흐렸던 얼굴이 이리도 선명하니 우스움만 치고 올라온다. 내게 무얼 바라는지 모르겠으나 계속 이리 나온다면 재미 보기는 어려울 터입니다. 인간이간 쥐는 대로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거니와 내가 북부 사람이지 않습니까?
"내가 사라졌더라면 궁금한 대로 살았어야지."
속삭이며 입술 비틀어 올린다. 그게 이치이거늘 이리 찾아보려는 것도 가상하고, 팔 하나 날리지 않는 것은 퍽 얌전하구나, 그래, 학당에서는 아직 정원 피로 물들였듯 다 붉게 물들이지 않는다 그 사실이로구나, 이런 면에서는 닮았다. 쓸데없는 곳에서 피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
한데, 내가 뭐냐고?
"무엇일까?"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가늘게 미소 지었다. 눈치도 빠르지, 무 씨 집안 사람인 건 어땋게 알았담? 본가에 갔는데 어르신이나 사용인이 아닌 것 같았다면서. 어찌 자신일 것이라 생각하진 못했을까? 실로 오만하다, 그리도 영민하면서도 오만하고 아둔하다! 통쾌했다. 그래, 모르겠지, 전혀 모르겠지. 내 속내를, 이지러지고 뒤틀려버린 내─
"내가 누구일까, 응? 과연 누구일까. 빌어처먹을 무 씨 집안의 장자야, 내가 누구인가? 나를 광대로 보느냐, 아니면 네 뜻에 휘둘리고 검은 털 짐승에게 쉬이 목 물리게 대줄 요괴로 보느냐?"
모두 틀렸단다, 틀렸어. 나긋나긋 속삭인다. 단전 깊은 곳이 들끓는 기분이다. 배덕한 감각이 온몸을 훑는다. 얼굴에 뱉어줄 침조차 아까울 정도로, 금방이라도 입술이 탈지면처럼 말라버릴까 싶을 정도로 목이 마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두 눈이 첨예한 호선을 긋는다. 누구인지 모를 몸으로도 사근사근하니 간드러진 목소리 내는 것은 제법 쉬운 일이었다.
"나에 대해 계속 고민하려무나, 일평생을! 그래도 하나 단서를 주마, 나는 네가 그 빌어먹을 제사장들이 신에게 외경 품듯이 감정 품을지도 모르는 존재이며, 어쩌면 스쳐 지나갈지도 모르는 존재란다……."
손을 뻗어본다. 얼굴 부여잡으려 하더니, 만일 붙잡힌다면 제법 과장스럽게 귓가에 속삭이려 들었을 터다.
"너희는 결국 무 씨 집안의 피를 받았어. 그래, MA가 내게 쓸모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주었으니, 무 씨 집안이 용서받은 것이 맞단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지?"*
─아. 당신의 이름까지 달싹인 뒤엔 고개를 훅 떼며 찢어질 듯 폭소하였다. 이것이 당신이 훗날 모든 것을 빼앗고 그 북부에 두고 가버린 최후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