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다. 이 공간이 제 것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인식하고자 하지 않으면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기이한 기분. 그동안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미추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그런 그의 기준에서도 희소하니 인상적인 외모였건만 기억에는 없다. 오로지 상상만으로 만들어내기엔 지나치게 상세한 조형에, 더군다나 그는 타인을 그려내어 이입할 만큼의 이해와 공감을 가지지 못하는데……. 그런즉 기이함을 넘어 괴이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제 그토록 '자기' 안에 갇힌 비참한 기분 느끼는 게 다 무엇 때문인데.
……어찌되었건 평범한 꿈은 아닐 테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적어도 제 자아로부터 비롯된 상황은 아니리라 생각하자 불쾌한 기분만은 조금 가시는 듯했다. 의심의 방향은 이제 외부로 향한다. 누군가의 술수든, 요괴의 수작이든, 신의 장난이든 자신이 이 모습이 된 데엔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울려 주어야지. 마음이 한결 편해지니 백룡의 고질적 기질도 드디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는 거울로부터 등 돌리고 문을 열었다.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니 속내가 다시금 뒤집어진다. 이건 통쾌한 건가? 그래, 저런 표정을 한 번은 보고 싶었으니 통쾌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이 정도로도 당신의 가면이 깨지는데, 내가 한때 꿈꾸던 것을 그대로 속삭이면 당신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그 고운 낯짝이 일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을까? 비록 몽중이더라도 그런 표정 정도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미 그는 당신의 표정이 웃을 적 그 눈가의 주름이 어느 방향으로 지는지, 입술의 올라가는 대칭이 어떠한지 모두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는 상상하며 그려볼 수 있었지만 실제와 망상은 다른 법이니 미칠 듯이 궁금해진다.
"……."
문 너머로 당신이 끈덕지게 시선을 따라 보내나 야속하게 갈라지게 된다. 그 시선을 곰곰이 되짚자니 문을 열고 얘기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금 더, 당신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싶다. 내가 고통 받았던 것처럼, 만고의 슬픔을 떠안아 보았으면 한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여 미련도 갖지 않을 수 있으리라. 하물며 그 슬픔이 나로 하여금 비롯된다면……. 하지만 이 충동을 참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이미 추잡한 망상에 당신을 몰아세우며 자신의 잣대로 보았고, 헛된 망상을 믿었으니 더 추해질 수 없었다, 더 추해질 수…….
"……."
문에 쓰러지듯 몸을 맡겼다. 그대로 주저앉아 고개를 기대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두워 환한 미소를 짓게 된다. 아, 역시 이것이 옳다. 나는 결국 당신으로 하여금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었기에, 이리 문 하나만 사이에 두어도 양반 될 수 없는 것이 이치였기에.
누군가 내게 물었다.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도 왜 자꾸 그곳으로 향하냐고. 그땐 가야만 하는 일이 있기에 간다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새하얀 거짓말이다. 그들이 점차 자신의 통제 아래에서 벗어나는 '재앙'을 마주할때마다 부정하고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모습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서있기만 해도 두려움이 차오르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나 재미있는 일이 있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 끼이이익 '
여느때처럼 기름칠이 제대로 되지 않아 경첩의 삐걱이는 소리가 한가득 울리는 이 대문은 예전엔 그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소리였다. 문이 열렸다는 것은 가족들이 돌아온다는 얘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젠 이 소리를 듣고 느끼는 감정은 반대가 되었고 이러한 점도 그에겐 자꾸만 집을 찾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역시나 마당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던 사람들은 문이 열리고 보인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얼굴이 굳었다.
" 제가 왔는데 반갑지 않으신가봅니다. "
그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는 능글맞은 태도로 웃어보였다. 사실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었다. 직계와 방계의 권한이 다른 가문에 비해서도 엄격하게 구분 되어있던 그의 가문이었기에 그의 존재가 필요한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그까짓거 포기하면 편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나름 알려진 가문이었던 그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듯 했지만 말이다.
" 뭐, 좋은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으니까요.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좋은 표정을 지어주신적이 없으니. "
어릴적엔 공포, 경멸, 혐오를 담은 눈빛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이유만큼은 완전 달라졌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라 할만하다. 사실 가문에 들른 목적은 다른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가져갈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살던 방에서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표정이 어떻든 말든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선 물건만 챙겨서 다시 기숙사로 향할 예정이었다. 딱히 위해를 가할 생각도 없었지만,
" 윽?! "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팔의 격통에 팔을 크게 휘둘러 무언가를 쳐냈다. 팔에선 피가 이미 잔뜩 흘러나와 손까지 적시고 있었고 주변엔 팔에 꽂혔던것 같은 칼과 함께 여자 한명이 나동그라져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기에 윤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부여잡은채 외쳤다.
" 하, 이젠 날 죽이시겠다? " " ... 더러운 재앙의 종자, 그때 널 죽였어야했는데. " " 죽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으면 저도 그런 꼴은 겪지 않았어도 됐을테니까요. "
깊게 찔렸는지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팔을 오른팔로 누른채 그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변할리가 없었다. 물론 그들이 변할 것이라 생각한적은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그대로일 것이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생각하기 힘든 와중에도 이 생각만큼은 뇌리에 깊숙하게 박혔다. 다행히 그들도 이 이상으로 무언가 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사실 일격으로 끝내지 못했으니 기회는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분명 후회할거다, 그런 진부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
하지만 여기에 계속 있으면 다른 마음을 먹을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들어왔던 문을 어깨로 밀고 나가며 뒤를 돌아본 그는 말했다.
한때 두려워 하던 것을 현재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되어 정 반대의 입장에서 행동한다는 것에서 윤하가 굳게 마음을 먹은 것이 보이지만, 여전히 시선이 날카롭고 지금처럼 위협을 하니 씁쓸하네요...😥 윤하가 후회조차 하지 못할 거라 말하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윤하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것은 결국 타인이나 다름이 없는, 현재로서는 적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구나... 윤하야 행복하자...😭
그 날 이후로 타인에게 바라지 않게 되었다. 아니. 그리 하려 무딘 애를 썼다. 누구도 눈에 담지 않으려 했다. 누구도 마음에 품지 않으려 했다. 혈연. 지인. 친우. 누구에게도. 정도 무엇도 주지 않고 받고자 하지도 않으려 했다. 보이는 것은 눈 가려 외면하였으니 마음 또한 그리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래버리면.
뒷모습 하나 보고 불러보았다. 뒤 돈 모습 익히 아는 모습이었다. 여기가 어느 기숙사인가 생각해보면 당연히 당신이 나올 것이었다. 제가 바랐는지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미간 찡그리는 것. 금방이라도 으르렁거릴 목소리. 그저 보고만 있으려 했으나. 당신 내뱉은 말에 그만 실소 터뜨려버렸다.
그리고 생각한다. 뭐 이런 꿈이 다 있을까. 정말이지.
낄낄. 키득키득. 제 것 아닌 소리 내며 제 것 아닌 얼굴에 웃음 띄웠다. 이것 정녕 꿈인가. 꿈이란 말인가. 덜컥 겁이 났다. 여태 꿈이라 여겨놓고 이제와 이게 현실일까봐 지레 겁먹었다. 제 것 아닌 옷에 빈 허리춤이 현실일까 봐. 웃는 얼굴 서서히 일그러졌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걸음 황망히 내달렸다. 감히 검은 옷 두른 몸으로 당신에게 안기려들었다. 그것 안 된다면 하다못해 옷소매라도 붙잡아 쥐려 했다.
"내가. 뭐 하는 놈이냐니. 잊으셨나 봐요. 내가 감히 당신 역린 쥐고 있지 않던가요. 매일 같이 피와 살 먹여달라 시끄러이 구는 역린의 주인이 나란 말이오. 아무리 내 이 꼴 하고 있어도. 그건 알아봐야지. 그것 뿐인데."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뚝 끊었다. 뭐 하러 이래야 하나 싶어졌다. 절로 힘 풀린 손 툭 하니 늘어뜨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고개 역시 아래를 향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문 너머를 타고 귓전을 때린다. 자세히 설명할 것이 어디 있을까, 당신 동생은 기실로 죽을 팔자인데. 북부에서 태어나 그런 수모를 당하며 몇 번이고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지금은 당신과 당신의 수족들의 손에 죽어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살고 있는데 그것이 어디 죽을 팔자가 아니겠는가, 당신 탓이라 지금이라도 문 열고 속삭여버릴까? 그렇게 되어버리면 당신은.
"흐."
가볍게 어깨가 들썩인다. 한 번의 숨을 뒤로 입을 급히 틀어막아도 들썩이던 몸짓은 점점 커져간다. 사위가 조용해졌음을 깨닫고 나서야 손 너머로 소리가 흐른다. 흐흐, 으흐흐, 으흐흐흐─ 결국 목청 높여 폭소하더니 눈에 고인 눈물을 닦는다. 만족스러운 듯 길게 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넘기기가 무섭게 표정 굳히었다.
"촌극도 이딴 촌극이 없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어떤가, 몽중이지 않은가. 그는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섰다. 기실 알고 있다. 몽중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느낀다. 당신의 태도가 절대 정상이 아니란 것도, 자신이 이런 꿈을 꿀 사람도 아니라는 걸. 그렇지만 뭐 어떠한가, 평생 의문하고 살아라, 그리고 내 안전한 것을 확인하며 안도하고 살아라. 그 안전함이 깨질지 모르는 불안함에 살아라.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며 체념해라, 형제라는 것에 매달려라. 아니면 버려라, 아예 내쳐버리고 희망을 짓밟아도 좋다.
"밧줄이 어디 있지."
당신이 내게 손을 댄 뒤 떠나버리고, 내가 그렇게 살아오던 것처럼. 슬슬 잠에서 깰 시간인 것 같다. 아니면 이 몸뚱이를 버릴 시간이거나. 놀랍지 않은가, 잿더미인 자가 이리도 날뛰는 꼴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장 누군가가 다가와 의미 모를 이야기를 한다. 정확한 맥락이 모두 잘려 나간 말은 당연하게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말하는 투를 봐선 상대는 이 얼굴과 이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면 어쩔까. 적당히 저 역시 아는 체하며 적당히 얼버무려야 하나? 짧게 고민이 스치고, 해답은 어렵잖게 떠올랐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무슨 노래?"
모르는 것 괜히 아는 척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상대를 가만히 응시한 채로 말이 없었다.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인지 모를 자의 눈이 아닌, 화유현 본연의 기질이 진득히 담겨 있다. 눈앞의 것을 당장이라도 파헤칠 것만 같은 집요한 시선. 꿈속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고질적인 탐구욕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이 꿈은 이미 실존하거나 언젠가 벌어질 사건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가? 저 자는 이야기를 선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완전한 허구와 가상의 인물인가? ……거기에까지 생각이 닿자 확인해 보고 싶은 점이 생겼다. 하지만 그건 대답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아도 늦지 않을 테다. 그는 대답을 요구하듯 다시금 상대방을 가만 바라보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