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이후로 타인에게 바라지 않게 되었다. 아니. 그리 하려 무딘 애를 썼다. 누구도 눈에 담지 않으려 했다. 누구도 마음에 품지 않으려 했다. 혈연. 지인. 친우. 누구에게도. 정도 무엇도 주지 않고 받고자 하지도 않으려 했다. 보이는 것은 눈 가려 외면하였으니 마음 또한 그리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래버리면.
뒷모습 하나 보고 불러보았다. 뒤 돈 모습 익히 아는 모습이었다. 여기가 어느 기숙사인가 생각해보면 당연히 당신이 나올 것이었다. 제가 바랐는지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미간 찡그리는 것. 금방이라도 으르렁거릴 목소리. 그저 보고만 있으려 했으나. 당신 내뱉은 말에 그만 실소 터뜨려버렸다.
그리고 생각한다. 뭐 이런 꿈이 다 있을까. 정말이지.
낄낄. 키득키득. 제 것 아닌 소리 내며 제 것 아닌 얼굴에 웃음 띄웠다. 이것 정녕 꿈인가. 꿈이란 말인가. 덜컥 겁이 났다. 여태 꿈이라 여겨놓고 이제와 이게 현실일까봐 지레 겁먹었다. 제 것 아닌 옷에 빈 허리춤이 현실일까 봐. 웃는 얼굴 서서히 일그러졌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걸음 황망히 내달렸다. 감히 검은 옷 두른 몸으로 당신에게 안기려들었다. 그것 안 된다면 하다못해 옷소매라도 붙잡아 쥐려 했다.
"내가. 뭐 하는 놈이냐니. 잊으셨나 봐요. 내가 감히 당신 역린 쥐고 있지 않던가요. 매일 같이 피와 살 먹여달라 시끄러이 구는 역린의 주인이 나란 말이오. 아무리 내 이 꼴 하고 있어도. 그건 알아봐야지. 그것 뿐인데."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뚝 끊었다. 뭐 하러 이래야 하나 싶어졌다. 절로 힘 풀린 손 툭 하니 늘어뜨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고개 역시 아래를 향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문 너머를 타고 귓전을 때린다. 자세히 설명할 것이 어디 있을까, 당신 동생은 기실로 죽을 팔자인데. 북부에서 태어나 그런 수모를 당하며 몇 번이고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지금은 당신과 당신의 수족들의 손에 죽어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살고 있는데 그것이 어디 죽을 팔자가 아니겠는가, 당신 탓이라 지금이라도 문 열고 속삭여버릴까? 그렇게 되어버리면 당신은.
"흐."
가볍게 어깨가 들썩인다. 한 번의 숨을 뒤로 입을 급히 틀어막아도 들썩이던 몸짓은 점점 커져간다. 사위가 조용해졌음을 깨닫고 나서야 손 너머로 소리가 흐른다. 흐흐, 으흐흐, 으흐흐흐─ 결국 목청 높여 폭소하더니 눈에 고인 눈물을 닦는다. 만족스러운 듯 길게 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넘기기가 무섭게 표정 굳히었다.
"촌극도 이딴 촌극이 없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어떤가, 몽중이지 않은가. 그는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섰다. 기실 알고 있다. 몽중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느낀다. 당신의 태도가 절대 정상이 아니란 것도, 자신이 이런 꿈을 꿀 사람도 아니라는 걸. 그렇지만 뭐 어떠한가, 평생 의문하고 살아라, 그리고 내 안전한 것을 확인하며 안도하고 살아라. 그 안전함이 깨질지 모르는 불안함에 살아라.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며 체념해라, 형제라는 것에 매달려라. 아니면 버려라, 아예 내쳐버리고 희망을 짓밟아도 좋다.
"밧줄이 어디 있지."
당신이 내게 손을 댄 뒤 떠나버리고, 내가 그렇게 살아오던 것처럼. 슬슬 잠에서 깰 시간인 것 같다. 아니면 이 몸뚱이를 버릴 시간이거나. 놀랍지 않은가, 잿더미인 자가 이리도 날뛰는 꼴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장 누군가가 다가와 의미 모를 이야기를 한다. 정확한 맥락이 모두 잘려 나간 말은 당연하게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말하는 투를 봐선 상대는 이 얼굴과 이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면 어쩔까. 적당히 저 역시 아는 체하며 적당히 얼버무려야 하나? 짧게 고민이 스치고, 해답은 어렵잖게 떠올랐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무슨 노래?"
모르는 것 괜히 아는 척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상대를 가만히 응시한 채로 말이 없었다.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인지 모를 자의 눈이 아닌, 화유현 본연의 기질이 진득히 담겨 있다. 눈앞의 것을 당장이라도 파헤칠 것만 같은 집요한 시선. 꿈속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고질적인 탐구욕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이 꿈은 이미 실존하거나 언젠가 벌어질 사건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가? 저 자는 이야기를 선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완전한 허구와 가상의 인물인가? ……거기에까지 생각이 닿자 확인해 보고 싶은 점이 생겼다. 하지만 그건 대답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아도 늦지 않을 테다. 그는 대답을 요구하듯 다시금 상대방을 가만 바라보고만 있다.
검은 옷 걸친 몸에 어색한 두드림 느껴졌다. 여전한. 아. 여전했구나. 당신은 인간이 싫지만 학생을 무턱대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싫다면서 사감 노릇은 해주었다. 제 멋대로인 판단일 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리 혼란스럽게 굴어도. 제대로 듣고 판단해주었으니까.
노려보는 눈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시선 꽂히는 찌릿함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봐도 이게 무언가 싶겠다. 갑자기 달려들어 영문 모를 소리 해대니. 그런데. 그런데 이건 꿈이 아니었던가? 조금 전부터 제 머릿속 감돌기 시작한 위화감 급히 잡아채었다. 꿈치고는 당신의 반응 과히 생생했다. 제 무의식이 그러내었다기엔 너무나도.
이게 꿈이 아니라면. 뭐지?
그거 네 몸 아니지- 그 말에 고개 들었다. 꿈이 저런 말까지 할 수 있나? 아니. 적어도 제가 여태껏 꿨던 꿈 중에서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꿈을 빙자한 그것의 농간인가.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 내려 제 손. 아니지. 그 몸의 손 보았다. 제 것 아니지만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손 두어번 쥐고 펴보곤. 피식- 웃었다.
같잖기는.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무슨 색인지 모를 눈 가늘게 좁혀 뜨곤 쯧 하고 혀도 한 번 차주고. 슥 표정 풀었다. 그리고 하 사감 보며 말했다.
"이것 내 몸인가 물었지. 맞소. 이 몸 내 것 아니오. 여느 때처럼 잠들었고 눈 떠보니 이러하여 내가 꿈을 꾼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그냥 꿈은 아닌가 보오. 거 참. 누가 무슨 농간을 친 건지."
하- 별로 난감하지도 않은 한숨 짧게 내쉬었다. 새로이 드러난 화제에 어쩐지 머릿속 차분해졌다.
지금이 꿈이 아니라면 이제 어떡해야 하나. 평소처럼 깨려고 하면 깨질까? 이왕 있는 김에 나중 일 다 불어버려? 아니다. 그건 혹시 모르니 삼가자. 그랬다 돌아갔는데 역린 없으면 저만 손해다. 그러면 할 수 있는 것이- 음-
"나도 학생이긴 학생이라 이런 일은 처음 겪건만. 보소. 사감님요. 어찌해야 내 돌아갈 수 있을지 짐작 가는 거 없소?"
혼자 앓아봤자 답 안 나오고 저는 아는 것도 없으니. 일단은 이 사태 관련하여 도움 될 것 있나 하 사감에게 물었다. 사감이고 신수니까 뭐든 알겠거니 싶었다.
쓸모 없는 것. 이 몸의 주인은 밧줄 하나도 가지지 못한 건가? 당연한 사실을 탓하면서도 그는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이 빌어먹을 꿈에서 깨게 해주었으면. 아니, 이 빌어먹을 몸뚱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선명하게 눈에 박히는 모든 정경이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세상이 네 희망을 깨부수러 올 것이노라고.
당연한 사실에 쓸모를 논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 이후 찾아냈다는 사실이 더 우스운 듯하다. 숨겨진 밧줄을 찾아 손 뻗었을 적, 그는 불가항력에 쓰러지듯 그대로 털썩, 바닥에 몸을 맡기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잃는 것은 쉬운 일이다마는 그 사이 깨어날 수 있다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났을 적 느껴지는 것은 옷깃을 부여잡는 우악 진 손길이었다. 적룡 기숙사의 녀석들도 이리 쥐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떤 경위로 자신의 멱살이 틀어잡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무엇인가 고민하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눈치도 빠르지……."
이것은 몽중인가, 현실인가. 몽중이라면 필히 끔찍한 악몽이요, 현실이라면 당신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을 터인데. 확인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니 두 눈을 온전히 떴다. 눈동자에 담기는 당신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사감들이 달려오는 소리는 점점 귓가에서 아득해지는것만 같았다. 아, 잠이, 오는건가? 아무렴 어때.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은 버리고, 지금 이대로 이 꿈을 끝내는것도 좋을 것이다. 자. 이제 푹 자고 일어나자.
"... 언니. 언니가 바라는대로, 다시 한번 이루었어.."
리본을 머리에 매며 밝게 웃었다. 그래. 이왕이면, 끝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하는게 낫지 않겠니? 어차피 꿈일 뿐이었으며- 결과는 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바꿀수 없으니.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어지는건 아닐 뿐이었으니. 다른 방향도 궁금하기야 했지만 덧 없는 환상을 쫓기에는 자신은 너무 무관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