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알고 있겠다, 무얼 더 망설일까? 그렇기는 했지만 앞의 사람들을 향하던 시선은 근처에 놓여져있던 양손도끼로 슬쩍 옮겨진다. 제아무리 꿈이라지만 너무 무방비하다. 그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으며,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저 무심한 사람들의 입에서 즐거운 노랫소리를 흘러나오게 해 볼까? 괴롭힐래 괴롭히고 싶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예쁘게 표정이 구겨지면서- 순식간에 생명의 빛이 꺼져버리는 그 모습마저 한껏 담아주고 싶어. 이런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짓고 있던 표정 그대로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내 눈으로 끝까지 바라봐준다면 분명 다들 기뻐해주지 않을까?
생각을 바꾼 듯 부적을 집어넣고 양손도끼를 들었다. 지금이라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질것만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방해받지 않고, 쫓겨나지 않고, 이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어줄수 있을거야.
속으로 실소하고 말았다. 자신이 아는 그 '궁기'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직 집안을 뒤엎지 않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정원을 피로 물들이지 않았고, 어머니를 미치게 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아직 때가 아니던, 한없이 가깝던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실로 고문이리라. 다만 이때의 당신이 자신을 훑는 것이 그 싹이 보이는 것만 같아, 다른 감정도 같이 들기 시작하였다.
"……아, 응. 그런 편이지, 그러니까, 음. 돌아갈 때 조심히 가고."
지금의 당신을 말리면 그 참사도 일어나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그 참사를 계획하고 다짐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애초에 당신이 그 궁기가 아니라면? 당신의 기숙사가 다른 점에서 혼란이 온다. 하물며 이 몸의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 도통 알 수가 없어 그는 말의 끄트머리를 애매하게 흘렸다. 반말도, 그렇다고 높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어조로 얘기하고는 자신의 손을 흘긋 바라보다 멋쩍은 듯 웃어 넘기려 들었다.
"하하, 악몽이긴 했나…… 기억은 안 나는데 아직도 이러는 걸 보면 좋은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라."
걱정은 말고, 라는 말을 차마 뱉기 어렵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지금 여기에서 목을 비틀고 싶다, 지금 여기에서 붙잡고 앞으로 있을 일을 막아내고 싶다…… 그런데, 그 둘 중 하나를 행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삶에 의미가 있어지나? 몽중이라 할지언정 이 안에서도 의미가 생길까? 어차피 갈라섰는데, 멀어졌는데. 알 도리가 없다. 그는 그저 누구의 인두겁일지도 모르는 모습으로 웃을 뿐이지.
유현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상대의 모습을 넌지시 엿보았다. 자신과는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푸르른 눈에 맺힌 감정들은, 아마 기쁨이나 그 엇비슷한 이름이 붙은 것들이었으리라. 쉬이 체감하기 힘들, 이다지는 경험하지 못할, 이해할 수 없기에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는 모호한 일련의 기의. 찾던 물건을 발견했으니 이해는 되는 반응이지만 그게 그렇게나 좋아할 일인가? 눈앞의 상대 파악하기 용이하다 말했으나 사실은 그럼에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더욱 많다. 날 적부터 늘 이래 왔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지만.
"성공이네요. 축하해요."
점점 격해지는 상대의 반응과는 달리 그는 영 심심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역시나 물건엔 관심 없고 자기는 꼿꼿하게, 조금은 성심 없으나 건성은 아니도록 선 채로 사람만 멀뚱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눈앞에 구슬이 가까워지자 그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뺏긴다. 무어라 감탄을 하거나 반응이라도 해 준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유현은 별다른 감상을 느낄 수 없었다. 정말 작기야 하나 그뿐이다. 물건 찾았으면 되었지 왜 제게 보여주기까지 하는가 싶지만 구태여 말로 꺼내거나 눈빛으로 내보이지는 않기로 했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했다는 의사만 표현했다.
"역시 청룡이셨네요."
4학년이라. 그만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면 기숙사의 영향으로 성격과 감정의 폭이 상당히 널뛰게 될 시기다. 저 역시도 동갑이니 성격이 상당히 변했느냐 하면, 우습게도 정작 자신은 제대로 돌아보지 않아 그것은 잘 모르겠다. 천성이 그런 것인지 기숙사 탓인지 늘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슬 나오라며 역정을 내던 게 언제였냐는 듯 이번에는 기쁨에 방방 뛰고 있다. 가뜩이나 행동 굼뜬 유현이 피할 새도 얼결에 휘말리기엔 충분한 분위기였다. 한 바퀴 휙, 다 돌고 나서야 그는 조금 얼떨떨한 듯한 기색으로 엉거주춤하게 설 수 있었다. 그래도 조금 갑작스럽긴 해도 싫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집적거리기에 도가 튼 어떤 친구의 손길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서. 그는 애매하던 자세 이내 고쳐 다시 반듯하게 섰다. 내린 손 한 번 가볍게 움켜쥐다 펴는 동작이 짧게 스쳐간 방금의 순간을 잡아 보는 것만 같다.
"네, 얼마든지 편하게 부르세요."
저 반응은 아마 같은 나이에서 비롯된 친밀감 같은 것일 텐데 역시나 잘 와닿지는 않는다. 감정적으로도 그렇지만 그는 원체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다. 당장 둘 있는 친구들이 모두 저보다 연상인데도 옛날부터 반말 찍찍 하고 다녔으니. 자기도 편하게 부르겠다거나, 혹은 저 역시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느냐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말도 상대방에 비하면 길지가 않다. 은근하게 거리 느껴지는 태도였다. 유현이 사람 탐구하길 좋아한다 해도 살갑게 사귀길 잘하는 편은 아니라……. 어찌됐든 호감은 샀으니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테다. 사실 이렇게까지 큰 호감을 사게 될 줄은 그도 몰랐지만. 외모 때문인가? 아니면 청룡인 탓에? 행복이며 기쁨이라 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흡족한 감각을 말한다. 고작해야 구슬 찾기에 그만한 마음을 느끼다니, 구슬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였나? 그만큼이나 염원이 강했던 걸까? 그는 또 다시 성큼 늘봄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어느 정도로 행복하신가요? 묘사를 한다면 어떤 식이죠?"
그렇지, 무척이나 기뻐하는 듯한 모습에 또 몹쓸 관심사가 도진 것이다. 게다가 백룡은 대체로 청룡을 좋아하곤 했다. 화유현이 워낙에 이런저런 감각 무딘 자라 외력으로 인한 친근감을 제대로 느끼고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여하간 툭하면 이런 태도 나오기엔 충분한 조건이었다. 마주본 시선에는 기이한 탐심이 서려 있다. 마치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어떤 것에 지대한 욕망을 느끼기라도 하듯. 다른 이들처럼 현저한 마음 가지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충동만은 저주스러울 만치나 쉬이, 항시 선명히도 그의 생을 따라다니리라.
막내? 형님? 꿈이라서 그런가, 나는 내가 아닌가. 이제서야 조금 상황이 파악되는 것 같다. 하지만 머리가 안다고 언제나 마음이 따라가는 건 아니다. 저 친근한 목소리는 늘봄에게 너무 낯설게만 느껴지는데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늘봄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머리를 헝클이고 손을 거둬갔다. 제 것과 정반대 색깔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지만 이걸 정리해야 할 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둬야 할 지, 정확히는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러울지 몰라 늘봄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아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의 연속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움직이는 신체 부위는 혓바닥이었는데 그 아래서부터 막혀있으니 행동이 원천봉쇄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늘봄은 남자의 질문에 눈을 한 번 데굴 굴렸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다정하네. 형님이라더니, 동생을 아끼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