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튀었을 적, 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자신이 공격해서 타인이 다쳤다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는 조금 거리가 먼 움직임이었다. 손가락 끝이 바르르 떨리더니 낮은 목소리가 목울대를 타고 흘러 나왔다. "얘, 내가 왜 잊었을까……."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희열 가득한 중얼거림이 허공을 타고 흐르더니, 사근사근 속삭였다.
"안 돼, 입술에 상처가 남잖느냐. 얌전히 있어야지… 앞으로 터질 일 많을 터인데……."
그리고 손에 이대로 힘 주어 목 뜯어버릴까 생각할 적, 그느 순식간에 손을 떼며 물러났다. 발목을 휘감으려던 금줄 탓이다. 걷어차듯 움직이며 뒤로 빠지는 모습이 평상시와 달리 날랬다. 다만 머리카락이 잠시 줄에 채였던 탓인지 머리 대충 쪽지던 것이 툭 떨어진다. 점차 판단력이 흐려진다. 흐려지다 못해 세상이 빙 돈다. 앞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분별을 할 수가 없다. 봉두난발 사이로 시선이 정확히 온화 있을 곳을 향했다.
"우리 아까 하던 거 마저 할까? 너도 나도 만족하지 못했잖니."
나긋나긋 묻던 도중 새로운 인물 나타나 고개를 돌려 본다. 인간 하나가 더 늘었구나, 흐려지는 이성 사이로 무언가 외치는 것 같지만 심상 속 외침은 들리지 않는다. 개여시를 지키듯 몸을 막아선다.
"아, 흑룡이네."
아, 그 빌어먹을 사랑을 설파하는 어리석은 것이구나. 저것도 잡아야지, 그러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올 것만 같지 않던가? 그래, 그랬다! 감히 자신에게 명령 내리는 것은 달갑지 않으나 이번엔 뜻이 통하였으니 따를 뿐이다. 아니,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온전히 나의 뜻이다!
"그 빌어먹을 흑룡 때문에… 아암, 안 되지, 안 돼. 살려두면 안 돼…."
형님과 멀어지게 된 계기도 그 흑룡 때문이 아닌가… 형님, 내 형님. 안 그래도 곁에 붙어있는 것들이 달갑지가 않은데……. 통제를 벗어나듯 중얼대며 한 걸음, 두 걸음 앞장 선다. 점차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일순 검붉은 부적이 불탔다. 죽이라고 했던 외침과 동시에 마치 혼불 보듯 기이한 불길 치솟더니 그 사이로 집채만한 흰 호랑이가 튀어 나온다. 줄무늬는 청회색이요, 풍성한 꼬리 끝은 마치 일렁이는 안개와도 같다. 신수와도 같은 모양새로 달려든 것은 당연히 흑룡인 학우를 향함이요, 만일 피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입으로 잡아채어 뒹굴려 들었다. 어깨부터 시작해 뼈 하나라도 부러뜨리고 말겠다는 듯.
금줄 솟구치나 아회에게 미치지 못 하는 것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휴 한숨 내쉬었다. 명색이 도술 배우는 입장인데 어째 하나도 쓰질 못 해. 망가져도 제대로 망가졌구나. 엉망인 손바닥 보다가 또 누가 왔다는 짐승의 말 듣고 고개 돌렸다. 칙칙하던 눈에 저어기 흑룡 아씨 알아본 기색 감돌았다. 그리고 곧장 그리로 움직였다.
"그래서?"
짐승 지나칠 적 그렇게 말 흘렸다. 네가 누굴 홀렸건 저만 아니면 되었던 것을. 어쩌라는 걸까. 다시금 비웃음 가늘게 흘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대로 훌쩍 날듯이 뛰어 아회보다 먼저 흑룡 아씨- 가현의 앞 막아서고자 한다. 제 몸으로. 문득 아회 홀린 얼굴 어떨까 싶어 마주 보는 방향으로 섰다. 좀 그럴싸 하게 두 팔 벌려 보기도 하고.
요괴의 반응을 본 가현의 눈이 희번득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드디어 찾았어. 찾았으니까 이제 편안하게 만들어줄게. 인간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것들은 이미 이전에도 힘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보내버린 적 있었는데, 너라고 다를 것 있겠니.
"아하하~ 어찌 네가 인간의 속내를 헤아릴 수 있을까. 어중간하게 알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걸."
자신이 마을에서 시간을 오래 허비한 것은 다 그만큼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얼 하더라도 확실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떠보기에 그 어떤 동요도 없이 흘려 넘기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여실없이 드러내주었으니 이제는 집행의 시간이다. 허나 말을 잇기 전, 요괴의 외침을 들은 가현은 남학생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맞다. 변수가 하나 있었, 지.
"아아.... 이런 거. 조금, 버거운... 데..?"
지난번 범을 사냥할때와는 정반대의 모양새가 되었다. 새하얀 호랑이의 모습을 보며 가현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어내고는, 이윽고 씨익 읏었다. 애정이다. 애정이야. 네 애정. 확실히 받았어. 그렇지? 피를 울컥 토해내면서도 그 미소 변하지 않고, 그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집채만한 흰 호랑이를 올려다보며 한껏 황홀경에 젖어든 미소를 유지했다. 그보다. 이런 상태라면 자신이 할수 있는게 없지 않은가.
"그때, 나 데리고 맛있는거 많이 사줬던 사람. 맞지....? 달이. 저 아이의 이름이야. 세번, 끊지 말고 연속으로 불러줘. 저 빌어먹을 요괴. 없애버릴수 있으니까..."
제 앞을 막아주려고 했던 것 같은 적룡의 여학생을 바라보며 그리 이야기했다. 이윽고 가현은 부적을 두장 꺼냈다.
"너. 너는 나랑 놀자. 내게 애정을 주었으니... 나도 너한테. 내 무한한 애정을 담아 행해줄게. 좀 더. 좀 더 가까이... 우후훗...!"
밧줄로 이 호랑이를 묶어 움직임을 봉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내며, 가현은 부적을 두 장 날린다.
제 반항은 헛된 몸부림으로 끝나고.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말아달라며 호소하는 눈으로 연은 당신을 바라보나,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통증과 함께 들려오는 당신의 말에 연은 눈을 꾹 감는다. 바다에 오는 게 아니었어. 숨 쉬는 것도 고통으로 몰아넣는 통증이 온몸을 타고 흐르고, 고동치는 심장의 맥박 소리만을 들으며 다가올 결과에 떨고 있을 때, 상황이 변하면 연은 눈을 천천히 떠낸다. 가현에게 달려드는 모습에 비척거리며 일어난 연은 가쁜 숨을 몰아쉰다.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피를 토해내는 가현을 보자, 연은 악을 쓰고서 이를 꽉 깨문다. 차라리 내가 다치면 더 다쳤지,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피에 젖은 부적을 두 장 꺼내어 아회에게 내던진다. 강한 바람으로 하여금 멀리 날려버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