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를 받아 이곳에 왔지만 실패한다 해도 큰 불이익은 없을 테다. 죽을 걱정을 하면서도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언지. 의문하면서도 그는 순순히 보리를 달고 앞으로 나아간다. 보리를 위해 속도를 늦춰주지는 않았으나 서두르지도 않고 꾸준하고 착실하게 걸음을 옮겨갈 뿐이다.
아, 그래도 이렇게 달라붙으면 불편한데.
가뜩이나 저를 홀린 괴이한 것이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와중에 이렇게 나오면 동작에 문제가 생긴다. 그는 보리에게서 슬쩍 몸을 뺀 다음 소리가 난 곳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도 잠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자 정면을 응시한 채로 넌지시 물었다.
"한 번 살펴보기나 하죠. 제가 먼저 갈까요?"
갈까요, 하고 물었지만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었나 보다. 그는 침착하게 수풀 방향으로 걸어가 그 너머를 살피려 했다.
거센 바람과 함께 제 몸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아쉬워라- 조금 더. 재미를 볼 수 있었는데. 그래도 저를 향한 도움 또한 자신을 향한 애정일 터. 가현은 구면인 청룡 여학생을 향해 방긋 웃었다. 그보다, 이렇게 더 질질 끌수는 없었다. 저를 공격한 저 학생 역시 결국에는 같은 학당 사람일 터. 사람을 어중간하게 닮은 저것의 뜻대로 서로 물고뜯는 구경거리를 제공해줄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적룡 여학생에게도 부탁하긴 했으나 저 역시 위험을 피했기 때문에 멀뚱히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달아, 달아, 달아. 네 발로 도망치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 줄게. 이제 그만, 그 덧없는 목숨- 내게 내어놓지 않으련."
이제는 집행의 시간이다. 감히 여럿 가지고 논 것에 대한 처벌은, 마땅히 받아야 할 터였으니. 가현은 이름을 세번 연달아 부르며 입꼬리를 다시금 끌어올렸다. 내 승리야. 덧 없는 것아. 네가 아무리 발악하더라도- 절대 넘어설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그 기억 마지막 한 켠에 똑똑히 박아두도록 하렴.
막아보려 했으나- 한발 늦은 것 보고 온화 할 수 있는 건 그저 한숨 쉬는 것 뿐이었다. 늘 그렇지. 저는 항상 제때 무언가 해본 적이 없었다. 겨우 숨 쉬는 몸뚱이는 그저 살아만 있을 뿐이다.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다. 아. 지금은 제대로 듣지도 못 하니 더한가. 흑룡 아씨가 무어라 말 하는데도 못 알아들으니.
어느새 사방이 먹먹했다. 분명 아직 난장판 수습된 것 없으면서도.
슥 돌아섰다. 아무 것도 못 한다면 방해나 말자. 그래. 사람이 저만치 모였는데 무언들 못 할까. 저는 늘상 그랬듯이 보고만 있자. 어찌 되건. 무엇이 되건. 하여 물러섰다. 뒤로 두어걸음 떨어져 이제 어찌 되어갈까 그 광경 눈에 담기로 했다.
아. 그거라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목숨의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궁금증이 앞서는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죽을 만큼 두려운 상황도, 그리 두려우면서도 궁금증을 느낄 대상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만약에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면 거기에 송보리를 밀어넣어 볼까? 어느 쪽이 더 앞설지, 얼마나 두려워할지 확인해 보고 싶다.
다가가는 와중에도 이런저런, 어떤 면에서는 다소 부도덕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밀려든다. 그러다 보리의 말에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되묻기엔 그의 직감은 지난번에도 맞게 돌아갔었지. 유현은 알겠다며 보리가 가리키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애정이니 뭐니 그 같잖은 것 죄다 집어치우라지! 그 미친 감정, 모든 것을 잃을 원흉, 그딴 것을 무한히 준다고 한다면 나는 세상을 저주할 것이다. 이젠 존재 빼고는 믿지도 않고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존재를 다시 믿고야 말 테다. 그렇게 사랑 없는 세상을 달라고 영혼이라도 바치리라! 집어 치우라지! 억센 주둥이로 어깨라도 으스러뜨릴까 싶었건만 이젠 또 후배까지 나타난다. 죄다 방해, 방해다. 모든 것이 방해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전부 다 뒈져 버리라지, 오냐, 너도 같이 죽자꾸나. 그리 생각하며 앞발 휘두르려 했을 적, 거센 바람에 몸 붕 뜨며 밀려난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뒹굴다가도 금세 벌떡 몸 일으켜 안의 본체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짐승인 것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
왜 그 누구도 모르는 게냐, 죽여야 한다. 차라리 다 죽여버리는 것이 옳다! 너희는 모르겠으나 나는 안다, 이 모든 일이 거사를 위한 발돋움이 될 것이다, 나는 옳다, 옳아야만 한다……. 송곳니 언뜻언뜻 보이듯 입가 움찔대더니 목에서 예사롭지 않은 그르릉 소리 나였다. 이내 살벌하게 송곳니 드러내며 땅이 울려라 포효했다. 절대 자신에게 명령 내리는 존재 죽이게 두지 않겠다는 듯, 그리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두툼한 발 박차며 뛰었다. 몸으로 들이 받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 몸짓에서 조종도 조종이지만 적룡 고학년이라는 듯 짙은 증오가 느껴지는 것은 절대 기분탓이 아닐 터이지.
이제 저 여자만 죽이면, 그 요괴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개여시는 가현을 죽이고 박가도 죽일 생각에 웃었슴니다.
백호로 변한 아회의 공격이 빗나갔를 때, 가현이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르자, 그것은 연신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부터 온 몸의 털이 빠져, 무네 개의 발이 달린 짐승 모습이었고 머리가 갈라져, 두개골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달이는 빠른 속도로 노화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네 발 달린 짐승의 뼈였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확실한 건, 그에게 돌려주건 그냥 돌아가건 당신들은 쉬게 됩니다.
[>박가에게로 수습해서 가져간다] [>그냥 두고 간다] [>학당으로 돌아간다]
>>880 유현
' ... 오늘은.. 귀띰은.. 아니고.... ' ' 나, 난 무서워서 못 보지만... 볼래..? '
보리가 고개를 가로젓다가 어느 수풀을 가리켰습니다.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 폐, 폐하를.. .몸에.. 모, 모시면... 산제물을.. 먹으니까... 피, 피.. 피냄새나.. 죽음, 의 냄새가.. 나는 거야 '
보리가 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수풀 사이로 창백한 뼈가 드러난 인간의 팔이 보입니다.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그 눈은 한없이 무감했다. 백호 된 아회 보면서도. 바삐 움직이는 두 아씨 보면서도. 홀로 먹먹한 세상에서 모든게 멀게만 보였다.
한 차례 소동 지나고- 짐승이 비명 지르니 그것 귀를 찔러와 미간 찡그렸다. 이윽고 짐승의 털 빠지고 늙어가는 것 보며 참 여럿 생각했다. 박 가의 집에서만 해도 이렇게 차분히 있을 수는 없었는데. 아. 술기운 떨어졌나. 그래서인가. 돌아가거든 독한 것으로 한 잔 해야겠다. 잠깐 사이 뼈만 남은 짐승, 박 가가 찾던 개였던 것일 그것 보다가 고개 돌렸다. 따라서 몸도 돌렸다.
얼룩덜룩한 두루마기 소매에 손 넣어 가벼이 걸치고서 먼저 훌쩍 자리 떠난다. 학당 있을 도화 아닌 천부 향해.
제 곁을 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살기는 절대 예삿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잡아낸 가현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지었다. 애석하게도 신은 네 편이 아니라 내 편인가보네. 내 목숨을 가져가는 것은 네가 아니라 존엄한 존재여야만 하니- 아쉽더라도 지금은 그 살기 고이 접어 모셔두렴. 그런 뜻이 담긴 눈빞으로 새하얀 호랑이로 변한 학당 학우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곱게 휘어 접는다.
이윽고 꽤 험한 꼴으로 결말을 맞이하는 요괴를 그저 무덤덤한 눈길으로 지켜보았다. 이젠 모든게 끝이다. 실종된 아이들의 위치는 끝내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이 이상 실종되게끔 내버려두는 것은 막을수 있을테니.
"그럼..."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가현은 끝끝내 제 정신 놓아버리지 않은 채 묵묵히 뼈를 수습한다.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이 개가 어쩌다 사람의 피를 마시게 되었든 이젠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은 사람의 죄를 저울질하는 판관이 아니었기에. 그저 이것이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온전하지 못한 형태나마 되돌려줄 뿐.
그런 효과도 있군. 아니, 작용이라고 해야 옳은가? 과연 도착한 장소의 수풀 너머로는 싸늘하게 식은 시체의 팔이 삐져나와 있다. 그는 그것을 응시하다 수풀을 넘어 그 건너편을 보려 했다. 시체가 얼마나 있는지, 남은 부위가 얼마나 되는지 정도는 확인을 해야 했으니. 참, 아까 생각했던 궁금증도 해결해야 했다.
"용기가 안 나서 그런데, 같이 봐 주실래요? 당신도 아까 저를 잡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전혀 무섭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다. 보리 무서워하는 꼴 보겠답시고 치는 뻔뻔한 거짓말이다.
그러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오자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사라졌다는 아이들은 어쩐지 보이는 저들끼리 신나게 노느라 시간 가는지도 모르는 듯한 태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단서가 부족한 그로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해 주는 사람 하나라도 있을는지. 인사성은 밝으면서 빠르게 사라져가는 뒤통수들을 그는 다소 황당한 눈으로 보다, 다시 시체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이것들 들고 돌아가야 하나? 남은 부위가 적다면 고려해 볼 만하다.
확인을 마친 후에는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의 끝마무리는 보고로 끝나야 하니, 이유는 그뿐이었다.
빌어먹을 세상은 또 내 편이 되어줄 수 없다. 아마도 일평생 그럴 것이다. 인생의 수지타산을 셈하자면 오늘까지 합산해 삼 대가 파산하고도 남을 손해를 봤을 것이다. 뿌리깊은 증오가 눈꼬리를 휘어 접는 모습에 다시금 샘솟는다. 그리고 다시금 몸을 낮췄을 적, 고막을 찢어낼 듯 쟁쟁한 비명이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노화가 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털이, 가죽이, 살이, 근막이, 그렇게 끝내 남은 것은 짐승의 뼈. 동시에 머리가 맑아졌다.
"……."
뼈와 함께 남은 것은 인간으로 돌아와 봉두난발에 얼굴 반쯤 가려진 청년으로, 상황을 파악하듯 그대로 꼼짝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조종 받지 않고 있음에도 감정의 여파가 식지를 않는다. 울부짖으며 남은 뼈에다 한을 쏟고 싶었다…….
그대로 한참, 한참이고 뼈를 향해 시선을 두다 제가 죽이려 들었던 흑룡의 학생이 수습하기 시작하자 몸을 홱 돌려버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남은 뼈는 개에게 던져주지, 또 그놈의 애정이니 뭐니를 들먹이며 자애 베풀려 드는 모습이라 단정짓고 자리를 떠났을 적 끝내 사과하지 않았으리라. 상황이 급박스러워 어쩔 수 없었다기엔, 그는 자신이 정당하다 믿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파도 철썩이는 소리가 듣기 싫어 느긋하던 발걸음은 점차 박차를 가하더니, 더 빠른 수단을 갈구하듯 부적을 태워 연기가 되듯 사라지며 학당으로의 움직임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