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온화 생활 흐름은 그러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진 슬렁슬렁 학당 안 돌아다니며 수업을 듣던가 동생들 안고 놀아주던가 하다가 저녁이 되면 밖에 나가서 통금 아슬아슬할 때까지 마시다가 들어온다. 얼뜻 보면 전과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확실히 다른 점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 다름은 평소 온화 행실 생각하면 그리 별날 것도 아니어서. 누구도 쉬이 알지 못한 채 변화는 서서히 흘러간다. 마치 언제 학당 소란스러웠냐는 듯 평화로운 지금처럼. 그런 나날이었다.
하여 오늘도 저는 천부에 나와 있었다. 오후 깊이 기울었지만 아직은 해가 하늘에 쨍한 시간. 적당히 걸으며 사람 구경 좀 하고 단골집 찾아 들어가면 시간 딱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집에 얼굴 비출까. 향이 오라비 한가해뵈면 꾀여다가 같이 잔 기울여도 좋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미리 배나 좀 채워둘까. 요즘 너무 마시기만 해서 위가 영 그러니. 갖가지 생각을 하며 북적이는 천부의 거리를 걸었다.
인파 속 한 가운데에 붉은 두루마기 자락 너울거리며 느긋한 걸음으로 나아가니 머릿속 흩뜨리던 생각들 슬그머니 사라진다. 이렇게 계속 걷다보면 언젠가 새하얗게 흩어져버릴 수 있을까. 저도 모르는 새 사라진다면 참 좋을 것이다. 지나-가세- 지나가세-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 어느새 빼든 곰방대 물고 가볍게 피우며 슬슬 걷다보니 마침 저 앞에 빵집 보였다. 빵. 좋지. 슬금 걸음 틀어서 빵집으로 향했다. 새콤한 설탕옷 입힌 마들렌 있으면 좋겠구만.
제 느긋한 걸음으로 빵집 향하고 있었으나 정신 살짝 흐린 것은 그대로였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술기운이 슬 떨어져 가서 그런지. 뭐 이유야 아무래도 좋다. 제 몸 고장난 것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돌아가서 약이나 제때 먹으면 사람 꼴은 유지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저 빵집에서 맛난 것 고르기부터 하자. 그러려고 슬슬 걸어가고 있는데.
"어야."
시야에 불쑥 흰 머리 들어오더니 그대로 부딪힐- 뻔 했다. 저도 상대도 가까스로 직전에 멈춰서 꼴사납게 바닥을 뒹군다던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부딪히지는 않았어도 시야에 확 들어왔으니 자연히 눈 굴러 상대 살폈다. 하얀 머리에 겁 먹은 얼굴. 어디서 봤던가? 곰방대 한입 물으며 머릿속 휘리릭 넘겨보니. 아. 그 때 그 잘 먹던 그 도령이구먼. 후우. 담배 연기 내뱉는 입술이 가늘게 호선 그렸다.
"아이고. 미안하기는. 내도 앞 제대로 못 봐서 그런 것을. 괜찮네."
싱긋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말한 온화 눈이 슬쩍 도령의 차림 훑었다. 품에 안은 것 보니- 빵집 다녀오나. 아니면 다른 카페인가. 궁금하긴 하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 아니지. 자. 어찌할까. 순간의 생각 끝에 그냥 평소 하듯 굴어보기로 했다. 아는게 없으니 말이다. 늘 그렇듯 제 손 올려 요 겁 먹은 도령 턱 쥐고 저 보게끔 하려 한다. 마침 키도 비슷하니 시선 맞추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시선 맞으면 씨익 웃으며 그리 말한다.
"접때 유유 사냥할 적 보고 처음이구려. 도령? 내 그 날 친히 업고 내려와줬는데. 여태 한 번 찾아와주질 않고 말이네."
대뜸 꺼낸 말이니 상대가 알아들어도 그만 못 알아들어도 그만이었다. 시작은 반응을 살피기 위한 건 뿐이니. 턱 쥔 손으로 목덜미까지 스윽 간지럽히려 하며 킬킬 웃음소리 흘렸다.
" 에? 어.. 응. 아마..도! 나중에 좋은 기회가 있다면..! 응. 언젠가 좋은 기회 있겠지~ "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는데- 하고 니오는 생각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공기가 차게 식었고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 뭔가 차가운 것이 잔뜩 실린 느낌. 그럼에도 니오는 금세 다시 꾸고 있던 꿈에 빠져들었다. 지금의 이 꿈같은 시간은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목줄에 채여 이리저리 휘둘릴 걱정,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몸의 어딘가가 찔릴 걱정, 목에 날카로운 것이 다가와 대답을 강요받을 걱정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간이었으니까. 그런, 꿈 같은 시간이었으니까. 그런 꿈 같은 시간에서도 둘째 언니와 가현의 만남을 잠깐 생각해보았을 때는 분명 좋은 꼴은 나지 않겠다 싶어 이리저리 대답을 회피하곤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 응- 괴물이라고 했어. 그래서 있지, 니오가 보여주고 증명하려고. 그 사람들이 옳았다는거. "
학당으로 올때 일기장에 처음으로 쓴 말은 그것이었다. 「 기억안나? 걔들이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 모두가 널 괴물이라고 생각해. 그들이 옳았다는 걸 보여주자. 」모두가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괴물이라고 말하겠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괴물이 되어주겠다고 그 어린 나이에 생각하고 맹세했다. 원래부터 원체 지*맞은 성격이었다. 그것이 뭔가를 만나서 더욱 더 날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에헤~ 그렇지? 둘째 언니.. 응. 치요언니는, 항상 니오를 첫 번째로 생각.. 에..? "
멍하니 구름속에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필터링 없이 모든 것을 말하던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이름이었다. 둘 째의 이름은 쿠즈노하 치요미. 애칭은, 치요. 니오는 저도 모르게 둘째 언니의 이름을 말하고는 순간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가렸다. 딱히 누군가에게 알릴 이유도 없거니와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은 모를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신상을 흘려서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에, 언니야. 니..니오 조금 무서운데.. 에헤.. 니,니오가 뭔가 잘못했어..? "
마시고 있던 커피를 조금 손을 떨면서 내려놓았다. 분명 꿈같은 시간이었는데. 여기서도 만화적인 표현이 허락된다면 아마도 꿈을 꾸던 장면에 쩌적쩌적 금이 가고 깨지기 시작하는 그림이 그려졌을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척 에헤헤~ 하고 웃으면서 마카롱 하나를 집어들고 입으로 가져가다가 눈이 마주쳤고 감당하지 못할 차가운 느낌에 '아' 하는 단말마와 함께 툭 하고 마카롱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떨어진 마카롱을 잠시간 바라보던 니오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가현의 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