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갈무리한다.인간이 본디 그런 법이지, 인간이란 원래 이리 쉽게 감정 갈무리 할 수 있는 법이지. 평상시엔 그리 생각하며 금세 가라앉혔겠으나, 오늘은 시점을 달리하기로 했다. 본디 이런 법이지, 인간이란 감정에 쉬이 휘둘리는 법이지. 그렇지만 그 감정에 먹히진 않을 터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나아간다. 주저앉는 사감을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음에도. 아마 문 때려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가려 했다는 듯 발을 멈추지 않는다. 돌아보지도 않고 들어가지 않는 사감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원래 그런 법이다. 저 존재들은 도울 생각이라곤 일절 없을 터다. 그리고 지금 내게 시련을 주었고, 그로 인해 명분이 주어졌다.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이 아닌, 울부짖고 물어뜯으며 한을 풀어낼 명분이.
걸어 들어가며 마지막으로 들은 하 사감님의 목소리에 가현은 씩 웃었다. 역시 그랬구나. 우리 집 막내라고 한다면- 분명 영 사감님을 제외한 다른 사감님들도 당신과 같겠구나. 사감님의 목소리가 저 안에서 계속 들려오고, 가현의 발걸음도 멈추지를 않았다. 앞이 안 보이는 주제에 어떻게든 방향감각을 잡고 나아가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그게 사감님의 애정이겠죠? 하지만 괘씸해서 말이예요~ 감히. 제사장 가문인 제게. 그 분을 느낄 수단을 잠가버렸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괘씸해서 견뎌낼수 없단 말이죠. 가현은 해사하게 웃었다. 자. 이제 슬슬 받아주실래요. 제 애정. 제 사랑. 당신이 제게 주었던 만큼- 저도 당신에게 돌려드릴테니까.
"영원히 어우러져봐요. 끝내, 어느 한쪽이 바스라져 사라질 그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당신을 위해 원하는 만큼 보살핌을 받아줄테니. 대신 당신도 나의 사랑 고스란히 받아주어야 할 거예요. 부적을 꺼내 정팔각형으로 접고. 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8개의 삼각형을 그려 그 곳에 동 사감님의 이름-진명을 모르기에 동 사감이라고밖에 적지 못했지만- 을 가득 채워둔 다음 제 손 위에서 그것을 불태운다. 당신에게도, 똑같은 작열통이 주어지기를 바라며.
여기저기 다 까지고 눈도 안보였고. 게다가 이젠 사감이라는 사람들도 마구 변하고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 상황에 무력하게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하나하나 다 *같아서, 견딜수가 없다. 니오는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보면 오늘 하나하나 뜻대로 된 일도 없었고 마치 운명이란 녀석이, 자기보다 훨씬 강한 녀석이 어쩌지도 못하게 붙잡고 흔든 느낌. 속이 울렁거리고 호승심이라는 것이 불타오르는 감각.
아, 그러니까
" 전부 뒈져버려. "
그리고 '섹튬셈프라' 하고 나지막히 읊조리는 것으로 니오는 가능한 모든 것을 모아서 날렸다.
.dice 1 2. = 1 HP 1000
509The Key Man? The Key Man?◆ws8gZSkBlA
(w5dtdSJkmg)
진짜 말 한마디 못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답답한지. 심지어 가현이는 아까처럼 눈 앞이 안보이는듯 했다. 하 사감님도 그렇고 사감님들이 돌아가면서 미친짓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지. 아무리 넓은 이해심과 포용력을 가진 흑룡이라지만 이것까지 이해해주긴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를 한번 쓸어넘긴 그는 부적을 손에 쥐었다.
' 그냥 여기서 죽어도 원망하진 마십시오. '
처음으로 자신의 가문 사람이 아닌 타인에게 분노를 전가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사람은 최근엔 없었는데 ... 그는 오히려 옅은 미소와 함께 부적을 던졌다. 아까 문에 던진 것처럼 거대한 고드름이 날아간다.
드디어 소리가 들려온다. 눈이 보이지 않았는지 이제 보인다는 목소리도, 때에 맞지 않는 산뜻한 소리도, 거기다 뒤에서 들리는 사감의 목소리는…… 듣지 않은 걸로 하기로 했다. 비틀거리며 걷는 소리도 들린다. 어두운 복도 속에서, 그는 상당히 많은 것에 대한 불쾌함을 느꼈다. 아마 대다수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을 터다. 잃었노라고, 잃었다고. 그걸 느끼는 건 잠시일 뿐이면서도 그리 많은 불평을 뱉겠지. 인간이란 그런 법이다, 언제라도 조금만 잃는다 하면 그리도 불쾌를 표했다. 지금 상황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며 회피하려 든다. 적어도 그가 살아오며 봐온 편협한 시선에서 인간은 그런 존재였다. 자신도 다를 바는 없으나, 그래도 하나 다른 점은 있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선 원래 이런 삶이 정상이노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 허락하지 않은 것이 들어오노라, 사라지노라. 그렇기에 지키려고 영원히 가두려 든다. 영원히, 그래, 영원히. 명분은 주어졌고 이성은 과거를 헤집는다. 영원히, 영원히, 그 빌어먹을 영원은 대체 언제까지 나를 따라다니려고. 깨진 단안경을 벗어 바닥에 떨군다. 그리고 부적 불태웠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타오르듯 떠오르더니, 영거리에서 사감을 쏘아 맞추려 든다. 빗나가도 괜찮다. 맞을 때까지, 그리고 정신을 차린다 해도 멈추지 않으면 될 일이다. 부적이 다 타오를 때까지.
알아서 오히려 좋지 않을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걸 한 번도 묻지 않고 넘어가면 화유현이 아니다. 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나아가자, 또다시 어두운 복도가 그를 맞이했다. 여전하게도 침잠한 공간이다. 문득 밤벌레처럼 뒤틀린 사감의 형상과 이곳이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영원히 보살핌 받다가는 굶어 죽게 생겼답니다."
아, 한데 굶주림은 으레 사람의 인간성을 마모시키고 지옥과도 같은 참상을 불러온다 하더라. 아직 목도한 적 없는 경험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니 다같이 굶어 죽는 것도 정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 정신 차려야지. 찾는 답은 아마 거기에 있지 않을 테니까.
부적이 소모되고, 동 사감의 머리 위에 암석이 생겨난다. 그것들은 이내 무너져 낙석으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