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걸음이 멈추었다. 아, 잃었던 감각이 돌아온다. 차단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일제히 몰아닥친다. 잃은 것을 되찾은 감각이란, 혼란하면서도 충족감이 느껴지는 기이한 체감이다. 그 감각에 적응하느라 잠시 말문을 잃고 있었는데.
떡하니 제 앞에 나타난 문에 유현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경계는 하면서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의심해야 했다면 송보리와 마주쳤을 때부터 했어야 했다. 홀로 떨어져 누구도 보이지 않던 상황에 하필이면 그의 방과 마주칠 이유는 뭔가? 이 상황이 처음부터 누군가의 의도로 꾸며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계획인지는 몰라도, 따라주어야지. 유현은 사감의 방문을 두드렸다.
동 사감이 자신의 말에 반응했다. 고개를 든 사감은- 평소대로의 모습이 아니었으니. 가현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다가도 이내 씨익 웃는다. 당신이 아무리 기이하다 한들. 제아무리 망가진 형상이라 한들. 그때 내가 보았던 그 공허하고 거대한 그 분의 눈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을까!
"네에, 당신들이 그렇게 부르는 존재이자- 제가 이 덧 없는 목숨의 끝까지 몸바쳐 모셔야 할 존재."
"그 분을 이야기했답니다. 안될 것이라도 있는지요?"
여전히 히죽 웃은 채 태연함을 담았다. 당신이 제게 적대심을 품게 되더라도- 이 세상을 몇 번 씩이고 초기화시켰던 그 분의 존엄성과 위압감에 닿을 수 있을까. 촉각은 돌아왔지만 고조된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감히. 끝까지. 그렇게 나오시겠다는 말씀이시죠."
시야가 재차 가려지고 가현은 미친 듯 웃어재낀다. 촉각만큼은 잠기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양. 그보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오직 당신만 바라보지 못하게 되어버리잖아.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강한 바람이 불고, 가현은 사감이 있을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나 그 무엇도 닿지 않았다.
"..... 어라. 언제 오셨어요~?"
오신 줄도 몰랐네. 가현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아서며 어깨를 으쓱인다. 목소리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하사감님 같은데.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사달이 벌어진 듯싶다. 아니면 사감이 자신을 인솔할 리가 없지. 옷깃을 잡아도 짜증 내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사안인 건가, 어느 쪽이든 됐다. 누구 손에 놀아나는 건진 몰라도 학생 전체에게 피해가 갔더라면 그만한 각오는 됐겠지. 등에 느껴지는 촉감에 아회 굳이 고개 돌리지 않고 천천히 고개 끄덕이고는 걸음 재촉했다.
"……."
진동이 느껴진다. 옷깃을 타고 느껴지는 떨림이 사람에게서 느껴지니 이는 소리다. 격양된 것인가? 잘 모르겠다. 일단 주체가 하사감인 것을 보니 격양된 감정이겠지, 들리지 않으니 그리 만든 사람이, 혹은 존재가 거슬릴 뿐이다. 한도, 끝도 없이 거슬린다. 인내심은 깊다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영 달갑지 못하다. 안경이 깨져버려 가뜩이나 시야가 거슬리니. 인간이란 본디 이런 존재다.
"네에. 안 그래도 아까전에 똑같은 증상을 겪었어서 익숙해요~ 이 정도는 괜찮기도 하고요."
가현은 별것 아니라는 양 방긋 웃었다. 이게 언제 사라질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어떤 느낌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에. 하 사감님의 말에 가현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였다.
"어라~ 사감님들도 방에 갇혀 계셨던 거예요? 동 사감님이 다른 사감님들까지 전부 가뒀어요? 대단하시네."
바람 새어나가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점점 주위에 소리가 가득차는것을 보아서는, 아무래도 흩어진 사람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한 듯 싶었다. 가현은 천천히 소리를 따라 걷는다. 최대한 집중하며 애매한 곳에서는 한 손으로 벽을 훑어가며 나아간다. 지금 여기에는 하 사감님과 추 사감님이 계시고, 춘 사감님과 영 사감님은... 같이 가지 못하는 상황이지 싶다.
"아하하~ 역시 하 사감님이시네요. 전에 분명 엄청 싫어한다고 하셨었죠~?"
어차피 영 사감은 듣지 못하는듯 싶으니. 그리 이야기하고서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망설임 없이 걸어들어간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은 확실했다. 애정 주려 했는데 도망쳐버린 나쁜 사감님에게는- 애정을 두 배로 쏟아줘야지?
암막 커튼이 걷어지는 것 처럼 천천히 시야가 돌아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눈 앞에 있는 것은 세 명의 사감. 분명히 정상으로 보이는 세 명의 사감이 보였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두 다리와 두 팔이 보였다. 여기저기 찰과상이 생겨 생채기가 생긴 무릎과 손바닥이 보였다.
" 아. 보여요. "
그 말을 끝으로 니오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혹시 다시 안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긴장감에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안 보인다고 눈을 마구 문질러댄 탓에 살짝 빨개져서 아파오기 시작해 실눈을 뜬 니오는 욱..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학당의 잠긴 문과 잠긴 공간, 그리고 감겨 버렸던 감각. 사감들의 대화를 듣고 상황을 끼워맞춰 본다. 그때의 감각은 어쩐지 '상실'과는 다르다는 직감이 들었었다. 아마도 그것은 '잠금'이었던 걸까. 이 상황에 휘말린 것은 당연히 자신만은 아니었던지, 곳곳에서 종종 마주쳤던 학생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상황과 함께 그들의 면면을 가만히 살피던 유현이 불현듯 흠칫 몸을 떨었다.
이리저리 살펴 보던 시야에 온화의 모습이 잡혔던 것이다. 아, 아까는 촉감을 잠그더니 이번에는 눈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아니다, 멀미 때문인가? 헛 게 조금…… 그는 단 한 치의 의심 없이 제 눈을 의심했다. 그러다가 제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눈 꾹 감은 채 슬며시 미간을 짚었다. 인간은 역시 흥미롭다……. 마구 치솟아 오르는 탐구심은 일단 접어두어야 했다. 그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두 사감들을 일별하고는 열린 문의 저편을 응시하였다.
감정을 갈무리한다.인간이 본디 그런 법이지, 인간이란 원래 이리 쉽게 감정 갈무리 할 수 있는 법이지. 평상시엔 그리 생각하며 금세 가라앉혔겠으나, 오늘은 시점을 달리하기로 했다. 본디 이런 법이지, 인간이란 감정에 쉬이 휘둘리는 법이지. 그렇지만 그 감정에 먹히진 않을 터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나아간다. 주저앉는 사감을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음에도. 아마 문 때려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가려 했다는 듯 발을 멈추지 않는다. 돌아보지도 않고 들어가지 않는 사감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원래 그런 법이다. 저 존재들은 도울 생각이라곤 일절 없을 터다. 그리고 지금 내게 시련을 주었고, 그로 인해 명분이 주어졌다.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이 아닌, 울부짖고 물어뜯으며 한을 풀어낼 명분이.
걸어 들어가며 마지막으로 들은 하 사감님의 목소리에 가현은 씩 웃었다. 역시 그랬구나. 우리 집 막내라고 한다면- 분명 영 사감님을 제외한 다른 사감님들도 당신과 같겠구나. 사감님의 목소리가 저 안에서 계속 들려오고, 가현의 발걸음도 멈추지를 않았다. 앞이 안 보이는 주제에 어떻게든 방향감각을 잡고 나아가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그게 사감님의 애정이겠죠? 하지만 괘씸해서 말이예요~ 감히. 제사장 가문인 제게. 그 분을 느낄 수단을 잠가버렸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괘씸해서 견뎌낼수 없단 말이죠. 가현은 해사하게 웃었다. 자. 이제 슬슬 받아주실래요. 제 애정. 제 사랑. 당신이 제게 주었던 만큼- 저도 당신에게 돌려드릴테니까.
"영원히 어우러져봐요. 끝내, 어느 한쪽이 바스라져 사라질 그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당신을 위해 원하는 만큼 보살핌을 받아줄테니. 대신 당신도 나의 사랑 고스란히 받아주어야 할 거예요. 부적을 꺼내 정팔각형으로 접고. 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8개의 삼각형을 그려 그 곳에 동 사감님의 이름-진명을 모르기에 동 사감이라고밖에 적지 못했지만- 을 가득 채워둔 다음 제 손 위에서 그것을 불태운다. 당신에게도, 똑같은 작열통이 주어지기를 바라며.
여기저기 다 까지고 눈도 안보였고. 게다가 이젠 사감이라는 사람들도 마구 변하고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 상황에 무력하게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하나하나 다 *같아서, 견딜수가 없다. 니오는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보면 오늘 하나하나 뜻대로 된 일도 없었고 마치 운명이란 녀석이, 자기보다 훨씬 강한 녀석이 어쩌지도 못하게 붙잡고 흔든 느낌. 속이 울렁거리고 호승심이라는 것이 불타오르는 감각.
아, 그러니까
" 전부 뒈져버려. "
그리고 '섹튬셈프라' 하고 나지막히 읊조리는 것으로 니오는 가능한 모든 것을 모아서 날렸다.
.dice 1 2. = 1 HP 1000
509The Key Man? The Key Man?◆ws8gZSkBlA
(w5dtdSJkmg)
진짜 말 한마디 못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답답한지. 심지어 가현이는 아까처럼 눈 앞이 안보이는듯 했다. 하 사감님도 그렇고 사감님들이 돌아가면서 미친짓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지. 아무리 넓은 이해심과 포용력을 가진 흑룡이라지만 이것까지 이해해주긴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를 한번 쓸어넘긴 그는 부적을 손에 쥐었다.
' 그냥 여기서 죽어도 원망하진 마십시오. '
처음으로 자신의 가문 사람이 아닌 타인에게 분노를 전가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사람은 최근엔 없었는데 ... 그는 오히려 옅은 미소와 함께 부적을 던졌다. 아까 문에 던진 것처럼 거대한 고드름이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