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손바닥에 간질간질하게 무언가 느껴져 가현은 몸을 살짝 옴츠리며 미소지었다. 대충 말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말을 못 하는 것일까? 용캐도 이런 방법을 떠올려냈구나 싶었다. 현명한걸. 난 앞이 보이지 않고, 너는 말할수 없으니. 이런 소통방법이 제일 최고라는 걸 알아냈구나.
".... 여기야?"
주위의 공기와 전혀 다른 부류의 것. 그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에 걸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사감실 문을 바라보는 앞이 보이지 않는 가현은 이윽고 제 옆의 남학생이 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너. 말 못한다고 했지? 사감님이랑 대화는 우선 내가 시도해볼게. 그러니, 문좀 대신 두드려줘. 같이 합을 맞춰서, 사감님 좀 끌어내보자. 이런 어여쁜 일을 꾸미셨으니 우리가 한껏 사랑해드려야지. 그렇지~?"
입꼬리를 올려 쎄한 미소를 지어보인 가현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음음. 사감님~ 그렇게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나오지 않으신다고 해서 사감님께 이득이 갈 건 없답니다~ 잠깐 나와주실래요~?"
갈림길. 주변에서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무언가 떨어졌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라 할지언정, 돕고싶다 할지언정 지금은 뭉치는 것보다 홀로 흩어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의지한답시고 붙어있다 불시의 습격으로 두명 다 죽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딴 개죽음, 더는 바라지 않는다. 하물며 의사소통도 안 되는데 무엇이 가능할까, 그는 현재, 그다지 희망스러운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성정을 품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기묘한 상황이다. 저것이 진정 내가 아는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다. 삿된 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환술일 수도 있고, 함정일 수도 있다. 의심이 싹튼다, 불신이 피어난다.
"……."
아회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불경한 것이라면 맞서면 되겠고, 약하다면 찢어 죽여버리면 된다. 그 정도면 애먼 분풀이로 제법 괜찮겠지. 부적 하나가 불탄다. 검붉은 색 흉흉한 부적이. 성공한다면 훌쩍 뛰어 착지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그저 걸어 내려갔을 터다. 음, 영 어두워서 이쪽도 신나게 굴렀겠지만.
밖으로 나오자 약간은 스산한 분위기였다. 여기 올 때 까지 아무도 못 만나는 지경에 이르자 살짝 무서워진 느낌이 들 뻔 했지만 니오는 이런건 전부 정신력으로 버텨낼 수 있다며 어깨를 털었다. 싸워서 져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이기는 지는 잘 알고 있다. 그게 누구이던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 가만히 그자리에 서서 고민하기 시작한 니오는 '과연 어디로 가면 좋을지'에 대한 최적의 답을 도출하려 했다.
" 청룡탑..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백룡탑..도 마찬가지로. 적룡탑... 그래! 적룡탑!...으로 가자니, 거기 새끼들은 나 싫어하지.. 그럼 흑룡탑!...에는.. 언니야가 있고.. "
어디로 가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니오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으음~ 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청룡이나 백룡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가보나 마나 일 것이 뻔하다. 더구나 익숙치 않은 곳에서는 길을 찾기가 더욱 어렵다. 이 상황에 적룡으로 간다? 어둠을 틈타서 뒤를 맞을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흑룡탑뿐이다. 잠깐 들어가보고, 영 아니면 다시 나오면 될 일이다.
흐려진 시야가 밝아진다. 앞이 보이기 시작하며- 열린 문이 보이자 가현은 입꼬리를 한껏 올린다. 아아, 이게. 이 당연한 시야가 이렇게너 반가울 줄이야.
"아핫, 아하하핫.... 사감님, 들어갈게요~?"
이렇게 몸소 내 눈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해 주셨으니까... 친애하는 사감님에게 내 애정 한껏 담아 건네줄게요. 미묘한 호승심인지. 투쟁심인지. 그저 증오와 애정인지. 모든 것이 모호한 상태로- 가현은 문을 활짝 열어재낀다. 자. 걸어잠그는것도 이제 끝이야. 모든 것을 잠가버린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리 없다는걸 잘 아시지 않은가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이 학생도 별 이유 없이 휘말린 걸지도 모르고. 거짓말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없지는 않으나, 혹여라도 그렇더라면 추궁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되리라. 그건 그렇고 이 사람, 무서워하는 반응이 너무 극적이라 본능적으로 관찰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유현은 절레절레 고개 저어 정신을 차렸다.
"가시죠. 한 번 방을 나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고는 앞으로 먼저 나아갔다. 보리가 따라오는지 아닌지 확인조차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동행을 바라는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같이 안 가겠다고 하면 내버려 두고, 아니면 말고다.
가현은 발걸음을 멈춘다.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것이 잠겨버렸으니까.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늘함도. 중압감도. 이렇게 되어버리면 자신은-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잖아. 신을 느낄수 없잖아. 신 님의 존엄함을. 공포를. 경외감을. 중압감을. 그 분을 오직나만이온전히즐길수없잖아
"... 건방지게 굴지 말아요. 동 사감님."
당신 따위가. 신을 마주해야 할 내 감각을 잠가버렸어. 그 분의 고귀함과 존엄함 앞에서 결국 빛을 잃게 될 존재일 뿐인 당신이, 내게 그 어떤 동의와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잠갔어. 왜? 어째서? 나는 신 님을 마주하고, 그 앞에 무릎 꿇어야 할 사람인데. 그 존엄성을 몸소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도대체 뭐야? 당신이 그걸 멋대로 잠가도 되는거야? 마음대로 굴어도 되는거야?
용서
못
해
"저는 오직 그 분의 명을 받아 따를 뿐이랍니다. 그 분께서 명하시는것만 골라 행할 뿐이랍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잠그셨잖아요. 그 분을 느끼지 못하게, 당신이 방해한거잖아. 당신 마음대로 해 놓고서 나는 당신의 허락을 구해야 해?"
그러니까- 나도 내 사랑 일방적으로 사감님에게 드릴게. 싫어하지 말아줘. 광소가 더더욱 짙어진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에 느긋함이란 없었으며,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