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움직인다. 지팡이를 느릿하게 짚으며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아회 어느 순간 몸을 멈춘다. 불쾌한 소리가 귀를 메운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적만이 가득한 곳이 아니다, 듣지 못했던 것이다. 지팡이 위를 두들기려는 손가락을 멈추고, 그대로 가만히 멈춰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청각이라. 하필이면 청각이라. 감히 어떤 새끼가 내 감각을 뺏어.
"……."
살릴 생각은 말아야지. 아니면 죽기 전까지 패야하나. 그게 낫겠지. 어차피 인간은 다 그런 법이지, 나는 북부 사람이고, 달라질 일은 없으리라. 속으로 생각하며 멀리, 더 멀리 걸어간다.
처음으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자박자박 걷던 걸음이 멈추어졌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를 간신히 식별하니 송보리라는 이름이 읽혔다. 같은 기숙사의 선배이자,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다시 나타난 사람. 다른 공간에 떼어진 듯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이 상황과, 언젠가 사라진 전적이 있는 자의 방이 나타난 것에 무언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불안요소를 앎에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혹시나의 상황에 대비해 안경을 챙겨 쓰고,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라도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문 앞에서 비켜섰다. 문으로부터 거리를 둔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방이 고요하니 소리 높여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리라 생각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가현은 잔뜩 의심을 품는다. 어째서.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믿을 이유가 없어. 가현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한다. 이전에 범을 사냥할때와 같은 생각이었다. 인간 비스무리한 탈을 쓴 것에게 개죽음을 당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며 물러서자니 이젠 제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어째서, 왜? 잠깐만. 안돼. 이것 만큼은 안돼. 그만, 잠가버리지, 마....!
"... 이럴 줄 알았다면, 오빠라도 데려오는 거였는데..."
이젠 눈 앞이 보이지도 않는다. 가뜩이나 저항할 힘도 없다. 그저 자신은 이렇게 이 곳에서 덧 없는 개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분한듯 이를 질끈 물었으나 달라지는것은 없었다. 동 사감님. 지금 이 모든 해프닝은 당신이 꾸민 일이었구나. 무엇이 다가오는지. 무엇이 일어나는지 느끼지도 못하는 채로, 홀로 이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진 느낌을 받으며-
"...!"
그러던 찰나 제 팔이 잡히자 가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난다. 떨쳐내려 해도 힘이 들어가지를 않으니 소용 없는 일이다. 싫어. 이런거. 원하지 않아. 곧 죽겠구나 싶은 생각으로 가만히 서 있자니 생각외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가현은 고개를 갸웃인다. 이거. 환상이 아니라, 진짜야?
"너. 진짜 맞아....?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지금 앞이 안 보이게 되어버려서. 진짜 너지?"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가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일단 조금이나마 믿어볼까. 적어도, 온기 만큼은 느껴지니까.
문도, 창문도, 아무튼 '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은 전부 잠겼다. 아무리 열려고 해도 철컥거리며 열리지 않을 뿐이었고 심지어는 모든 불이 꺼져서 움직이기도 영 힘든 상황이었다. 니오는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거리며 가터링에 묶인 지팡이를 꺼냈다.
" 배워놓은게 또 있단 말이지. 루모스. "
지팡이 끝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면 이제서야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역시 앞이 보여야 뭐든 할 의욕이 생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몇 배나 크게 다가오는 법이니. 니오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 누군가 와주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문 밖의 어떤 소리는 더욱 더 크게 들려왔다. 누군가 있나? 니오는 앞으로 나서서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마법을 쓸 때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알 수 있다. 하나는 직관적인 방법으로 시도한 마법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눈으로 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조금 다른 것인데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러니까, '실패'였다. 그럼에도 문이 열리자 기이한 기시감같은 것이 느껴져 머리를 긁적였다.
눈 앞이 안보인다니 이러면 지금 하는 손짓 몸짓도 다 의미가 없는 짓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일단 의미라도 전달하려고 그는 잡았던 팔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가 가현의 손을 살짝 잡고서 손바닥에 손 끝으로 천천히 글씨를 썼다. 제발 잘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그는 앞이 보이고 있으니 가현의 팔을 잡은채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지나치게 고요한 계단을 내려가자 여전히 어둠으로 뒤덮인 복도가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사감님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있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동 사감님인것 같아 그는 아래로 더 내려가려 했다. 여기 있어봤자 딱히 소득은 없을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약간의 대화- 라고 쓰고 일방적인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하며 한걸음 한걸음 조심히 발을 디딘다. 슬슬 이 상황이 무엇인지도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사감님이 꾸며낸 일이라면- 적어도 자기 기숙사의 학생을 해하지는 않... 나? 이전 하 사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인다. 일단 확실한 건 지금 이 남학생은 진짜가 맞다는 것 하나였으니 제 촉각만큼은 온전히 남아있는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팔을 잡히고 난 이후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게 된 가현은 앞이 보이지는 않으나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린다.
"내 감이 맞다면 여기서 더 내려가면 사감실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피하지 않는다. 원인을 찾아내 잠잠하게 만든다. 이게 정말 동 사감님이 벌인 짓이 맞다면, 이전 하 사감님 때처럼 억제시키면 그만일 것이다. 지금 사감실에 계시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 사감실까지 안내해줘. 우리 사감님이니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애정을 보여줘야겠어."
그럴수 있는 몸 상태인지는 끝끝내 말하지 않은 채 가현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재차 서두르기 시작한다.
메아리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하고 아무도 없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여기서 조용함을 유지하겠지만 니오는 조금 달랐다. 아무도 없다는 것과 어둡다는 것은 분명 무서웠지만, 그 마저도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호승심이 타올라서 지지 않으려고 했다. 기저의 깊은 곳에는 '나는 짱' 이라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으니 원할대로 행동하면 될 터였다.
" 야아 - ! ! 여기는 쿠즈노하 니오 - ! ! 아무도 없냐 - ! ! "
그리곤 지팡이 불빛에 의지해 걸어갔다. 그러고보니 같은 층에 사감실이 있을 터였다. 그 곳으로 가볼까- 했으나 생각해보니 이렇게나 소리를 질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것은 아무도 없다는 뜻일 것만 같았다. 게다가 얼마전에 불려가서 혼났던 것을 생각하자니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문에 움직여 닿는 손이 보이는데도 막상 손에서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그 부위가 사라진 것처럼. 손만 그런 게 아니다. 의식하고 나자 그 위화감이 온 몸을 덮쳐온다. 스치는 머리카락의 감촉도, 움직임을 따라 부는 바람도, 닫히는 눈꺼풀의 마주침도, 탄식을 내뱉은 목의 울림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감각이 이상하다. 아니,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에 와 형언하라면 영영 잊은 것만 같아 떠오르지 않는다. 짧게 숨이 멈추었다. 이런 상황은 확실히 그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홀로 있었더라면 동요가 꽤 길었을 테다. 난데없이 휙 엎어진 누군가의 등장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랬으리라.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진다. 아마도 아까 전의 자신과 같은 방법을 쓰려고 했던 모양이지. 말소리는 잘 들리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귀에는 문제가 없다 보다. 그는 주춤거리는 보리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혀가 움직이는데도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다. 곤란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