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이 안보인다니 이러면 지금 하는 손짓 몸짓도 다 의미가 없는 짓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일단 의미라도 전달하려고 그는 잡았던 팔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가 가현의 손을 살짝 잡고서 손바닥에 손 끝으로 천천히 글씨를 썼다. 제발 잘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그는 앞이 보이고 있으니 가현의 팔을 잡은채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지나치게 고요한 계단을 내려가자 여전히 어둠으로 뒤덮인 복도가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사감님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있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동 사감님인것 같아 그는 아래로 더 내려가려 했다. 여기 있어봤자 딱히 소득은 없을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약간의 대화- 라고 쓰고 일방적인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하며 한걸음 한걸음 조심히 발을 디딘다. 슬슬 이 상황이 무엇인지도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사감님이 꾸며낸 일이라면- 적어도 자기 기숙사의 학생을 해하지는 않... 나? 이전 하 사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인다. 일단 확실한 건 지금 이 남학생은 진짜가 맞다는 것 하나였으니 제 촉각만큼은 온전히 남아있는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팔을 잡히고 난 이후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게 된 가현은 앞이 보이지는 않으나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린다.
"내 감이 맞다면 여기서 더 내려가면 사감실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피하지 않는다. 원인을 찾아내 잠잠하게 만든다. 이게 정말 동 사감님이 벌인 짓이 맞다면, 이전 하 사감님 때처럼 억제시키면 그만일 것이다. 지금 사감실에 계시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 사감실까지 안내해줘. 우리 사감님이니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애정을 보여줘야겠어."
그럴수 있는 몸 상태인지는 끝끝내 말하지 않은 채 가현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재차 서두르기 시작한다.
메아리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하고 아무도 없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여기서 조용함을 유지하겠지만 니오는 조금 달랐다. 아무도 없다는 것과 어둡다는 것은 분명 무서웠지만, 그 마저도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호승심이 타올라서 지지 않으려고 했다. 기저의 깊은 곳에는 '나는 짱' 이라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으니 원할대로 행동하면 될 터였다.
" 야아 - ! ! 여기는 쿠즈노하 니오 - ! ! 아무도 없냐 - ! ! "
그리곤 지팡이 불빛에 의지해 걸어갔다. 그러고보니 같은 층에 사감실이 있을 터였다. 그 곳으로 가볼까- 했으나 생각해보니 이렇게나 소리를 질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것은 아무도 없다는 뜻일 것만 같았다. 게다가 얼마전에 불려가서 혼났던 것을 생각하자니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문에 움직여 닿는 손이 보이는데도 막상 손에서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그 부위가 사라진 것처럼. 손만 그런 게 아니다. 의식하고 나자 그 위화감이 온 몸을 덮쳐온다. 스치는 머리카락의 감촉도, 움직임을 따라 부는 바람도, 닫히는 눈꺼풀의 마주침도, 탄식을 내뱉은 목의 울림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감각이 이상하다. 아니,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에 와 형언하라면 영영 잊은 것만 같아 떠오르지 않는다. 짧게 숨이 멈추었다. 이런 상황은 확실히 그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홀로 있었더라면 동요가 꽤 길었을 테다. 난데없이 휙 엎어진 누군가의 등장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랬으리라.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진다. 아마도 아까 전의 자신과 같은 방법을 쓰려고 했던 모양이지. 말소리는 잘 들리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귀에는 문제가 없다 보다. 그는 주춤거리는 보리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혀가 움직이는데도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다. 곤란한데.
제 손바닥에 간질간질하게 무언가 느껴져 가현은 몸을 살짝 옴츠리며 미소지었다. 대충 말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말을 못 하는 것일까? 용캐도 이런 방법을 떠올려냈구나 싶었다. 현명한걸. 난 앞이 보이지 않고, 너는 말할수 없으니. 이런 소통방법이 제일 최고라는 걸 알아냈구나.
".... 여기야?"
주위의 공기와 전혀 다른 부류의 것. 그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에 걸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사감실 문을 바라보는 앞이 보이지 않는 가현은 이윽고 제 옆의 남학생이 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너. 말 못한다고 했지? 사감님이랑 대화는 우선 내가 시도해볼게. 그러니, 문좀 대신 두드려줘. 같이 합을 맞춰서, 사감님 좀 끌어내보자. 이런 어여쁜 일을 꾸미셨으니 우리가 한껏 사랑해드려야지. 그렇지~?"
입꼬리를 올려 쎄한 미소를 지어보인 가현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음음. 사감님~ 그렇게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나오지 않으신다고 해서 사감님께 이득이 갈 건 없답니다~ 잠깐 나와주실래요~?"
갈림길. 주변에서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무언가 떨어졌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라 할지언정, 돕고싶다 할지언정 지금은 뭉치는 것보다 홀로 흩어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의지한답시고 붙어있다 불시의 습격으로 두명 다 죽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딴 개죽음, 더는 바라지 않는다. 하물며 의사소통도 안 되는데 무엇이 가능할까, 그는 현재, 그다지 희망스러운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성정을 품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기묘한 상황이다. 저것이 진정 내가 아는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다. 삿된 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환술일 수도 있고, 함정일 수도 있다. 의심이 싹튼다, 불신이 피어난다.
"……."
아회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불경한 것이라면 맞서면 되겠고, 약하다면 찢어 죽여버리면 된다. 그 정도면 애먼 분풀이로 제법 괜찮겠지. 부적 하나가 불탄다. 검붉은 색 흉흉한 부적이. 성공한다면 훌쩍 뛰어 착지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그저 걸어 내려갔을 터다. 음, 영 어두워서 이쪽도 신나게 굴렀겠지만.
밖으로 나오자 약간은 스산한 분위기였다. 여기 올 때 까지 아무도 못 만나는 지경에 이르자 살짝 무서워진 느낌이 들 뻔 했지만 니오는 이런건 전부 정신력으로 버텨낼 수 있다며 어깨를 털었다. 싸워서 져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이기는 지는 잘 알고 있다. 그게 누구이던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 가만히 그자리에 서서 고민하기 시작한 니오는 '과연 어디로 가면 좋을지'에 대한 최적의 답을 도출하려 했다.
" 청룡탑..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백룡탑..도 마찬가지로. 적룡탑... 그래! 적룡탑!...으로 가자니, 거기 새끼들은 나 싫어하지.. 그럼 흑룡탑!...에는.. 언니야가 있고.. "
어디로 가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니오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으음~ 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청룡이나 백룡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가보나 마나 일 것이 뻔하다. 더구나 익숙치 않은 곳에서는 길을 찾기가 더욱 어렵다. 이 상황에 적룡으로 간다? 어둠을 틈타서 뒤를 맞을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흑룡탑뿐이다. 잠깐 들어가보고, 영 아니면 다시 나오면 될 일이다.
흐려진 시야가 밝아진다. 앞이 보이기 시작하며- 열린 문이 보이자 가현은 입꼬리를 한껏 올린다. 아아, 이게. 이 당연한 시야가 이렇게너 반가울 줄이야.
"아핫, 아하하핫.... 사감님, 들어갈게요~?"
이렇게 몸소 내 눈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해 주셨으니까... 친애하는 사감님에게 내 애정 한껏 담아 건네줄게요. 미묘한 호승심인지. 투쟁심인지. 그저 증오와 애정인지. 모든 것이 모호한 상태로- 가현은 문을 활짝 열어재낀다. 자. 걸어잠그는것도 이제 끝이야. 모든 것을 잠가버린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리 없다는걸 잘 아시지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