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투 찌르는건 싫어하면서 쓰다듬어주는 건 좋은가보다. 취향 참 확실하네. 가현은 남자가 다시 눈을 뜨기 전까지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얌전히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하면 얼마나 좋아. 외부인이라는 것이 참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하~ 무서운 궁기씨랑 우리 농질 언니가 이야기했던 거였군요. 저런. 아쉬웠나요?"
끝내 물에 데려가지 못한 것이 불만이었던 듯 표정을 찌푸리는 남자를 보며 방싯 미소짓는다. 그래도 우리 언니의 부탁을 잘 들어줬구나. 친절한 사람이야. 사실 친절과는 거리가 멀기는 하나 가현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것과 함께 궁기라는 자 역시 어떤 느낌인지 어느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무서운 사람. 분명 이 사람의 목줄을 쥐고 있거나 벗어나지 못할 속박을 걸어둔 사람이겠지. 설마, 농질 언니도?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가현의 표정이 잠깐 어두웠으나 금새 풀어졌다.
"..... 오빠, 꽤 재밌는 사람이네. 오빠가 이 학당에 아직 볼 일이 남아있듯이, 나도 내 인생에서 이뤄야 할 일이 남아있어서 아직 안돼요. 음. 이건 어때요?"
"훗날. 내가 이루고자 하는걸 전부 이루고 내 삶에 미련조차 남지 않게 된다면, 그때 물 속으로 찾아갈게. 그러면 내게 많은 걸 속삭여줘요."
당신이 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 속으로 데려간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지. 전부 하나하나 내게 알려주지 않을래요. 가현의 눈꼬리가 샐쭉 휘어졌다. 이윽고 다시 물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방금 그거, 말 안하겠다고 나름대로 시위한거야? 귀여워라.
"으응, 재미있겠다. 분명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올거예요. 농질 언니. 그리고 오빠가 원하는 그런 그림이.."
가현 역시 남자를 따라 웃었으나 남자의 것과는 다른 잔잔한 미소였다. 지금의 표정에서 다시금 이 남자의 위험성이 상기되는 것 같았다. 제아무리 나른하고 무해해 보이지만 결국 농질과 어울려 다니는걸 보면 같은 느낌이겠으며 그동안 사람을 홀려 물 속으로 데려갔다는 것도 들었으니 경각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 사람을 제대로 다루려면, 그 전에 그 사람의 본질이 어떤 것이며 성향이 어떤지 절대 잊지 말고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에ㅡ 허나 그럼에도 머리 위로 올라간 손은 한참을 더 쓰다듬다가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짜릿함, 오히려 환영이야.
"... 으이그. 내 그럴 줄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요~ 옷 말리는동안 맨몸으로 그냥 돌아다닐 건 아니잖아요? 학당 사람들이 보면 분명 오해할거라고요~"
아이고. 이럴거면 옷을 왜 입고 들어간거야. 가현은 혀를 찼다. 자신은 이 사람이 어떻게 하고 돌아다니든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다른 학생들조차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에, 가현은 욕실에서 나가 제 옷장을 뒤적거린다. 옷 마를동안 입을 바지를 빌려줄수 있다면 참 좋겠으나 안타깝게도 사복 뿐이었기에 불가능할것 같았다. 윗옷은 교복인데 바지가 사복이라면 눈에 확 띌것 아닌가. 그렇다고 윗옷만 입혀주고 돌아다니게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미친놈 취급 당할것같고. 결국 가현은 제 손에 잡히는 긴 교복 치마와 윗옷, 그리고 여분의 두루마기 한 벌을 가지고 돌아왔다.
"짜잔~ 내 옷 빌려줄테니까, 일단 젖은 옷은 벗고 마르는 동안은 이거 입어요. 바지가 없어서 치마로 가져오기는 했지만 크게 상관 없죠?"
가현은 방싯 웃으면서 남자를 슥 훑어본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남자 치고는 곱상하게 생겼으니 치마저고리 두른다고 한들 분명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제 흑룡 두루마기까지 걸쳐준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 이전에 보리가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때 그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은 것을 떠올려본다면 분명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긴다.
다리에 힘이 없어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니 겉으로 보기엔 건장한 느낌인데 어떤 사유라도 있는 것일까. 사실 자신도 그렇고 누구나 자신만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 궁금은 하더라도 그것이 과한 호기심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알게될 것이라면 언젠간 자연스럽게 알게 될테니 말이다. 고학년일수록 자신의 제안에 못볼 것이라도 본듯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적룡의 남학생은 그러지 아니하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 거의 매일 같이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친목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라. "
어릴때, 그러니까 학당에 들어오고 한동안은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때가 있었다. 저택에 거의 갇혀살다시피하며 커뮤니케이션이라곤 가문의 사람들과 짤막한 대화만 나누었으니. 그나마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는건 그 사람의 도움이 컸다. 아무튼 그 시절에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만들었던 쿠키가 크게 호평을 얻어서 그때부턴 항상 쿠키를 만들어서 품에 넣고 다니고 있다.
" 다행히도 맛이 없다는 소리를 한 사람은 없었으나 혹여 입맛에 맞지 않으실 수 있으니 그땐 억지로 드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
그는 뜨겁게 우려내고 한동안 식혀서 미지근하게 되어버린 보리차도 같이 내려놓았다. 부적과 같이 들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더 차갑게 할 예정인듯 했고 역시나 부적이 손에서 사라지며 보리차가 들어있는 병의 주변에 물방울이 작게 맺혔다. 둘이 앉아서 좁은 벤치일터인데 능숙하게 주전부리를 차려놓은 그는 작은 병에 든 보리차를 건네어주며 말했다.
" 제건 따로 있으니 입을 대고 드셔도 괜찮습니다. "
컵까지 두기엔 자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나름 시원한 공간에서 이렇게 차려두고 있으니 그럴싸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쿠키를 먼저 입에 가져가 한입 깨물었다. 달달함이 퍼지는게 기분이 좋아 슬쩍 웃은 그는 아회를 바라보고 말했다.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지방에서 오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
무 아회, 무 씨 가문 ... 꽤나 명문이라 자부하는 집안의 아이들은 성씨만 들어도 그것이 어디 있는 가문인지 대충은 알고 있던데 안타깝게도 그의 가문은 이젠 명문도 아닌데다 자신도 그런 지식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렇게 직접 묻는 것 말고는 알 방도가 없었다.
어쩌면 데리러 오기도 전에 내가 먼저 찾아갈지 모르겠어.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두지 않은채 두어 번 퐁퐁 토닥였다. 이 세상에 더이상의 미련이 남지 않게 된 시점-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기 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 미련 없이 떠나간다면 분명 짜릿한 경험이 될 것이다. 과연 그게 언제일지는 가현 자신조차 가늠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내 모든 걸 조종하지는 말아줘요~ 적어도 내 스스로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오롯이 느껴보고 싶으니까. 오빠의 사랑. 과연 어느 정도로 차갑고 어두울지... 벌써 기대되네요?"
히죽 웃으며 그렇게 말을 마무리한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남자를 보며 가현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옷 크기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테니까. 벗든 말든 자신에게는 별 감흥이 없기에, 윗옷을 벗으려는 모습에도 아무런 상관없이 그냥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예정이었는데 이 남자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가현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린다.
"아니~ 뭐 어때요~? 농질 언니랑도 같이 살고, 다른 사람들이랑도 같이 산다면서요? 오빠. 생각보다 부끄럼이 많은 편?"
얼굴을 살짝 붉힌채 서있는 남자에게 느릿하게 다가가 타투를 쿡 찌르려는 듯 손을 올리다가, 손을 올려 찌르는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위험하면서도 순진한건지 바보같은건지 모를 만큼 순하다. 과연 이 사람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가지고 찾아와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원래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이 순한 사람들은, 그 속내가 더더욱 검은 법이라던데 이 남자도 그렇겠지만 적어도 지금 같이 지내면서 보이는 모습들만 보면 결국 죄가 중한 사람이든 아니든 결국 그 근본은 사람이라는 것을 여실 없이 드러내는듯 싶었다. 일단 남자가 원하는대로 가현은 뒤로 돌았다.
"그래도 부담스럽다고 하신다면 이러고 있을게요~ 다 입으셨으면 이야기해줘요. 사이즈가 맞을지 안 맞을지 한번 보기도 해야해서요~"
일단 제일 중요한것은 그것이었다. 일단 이 학당에 있는 동안은 최대한 의심을 안 살 모습으로 보여야 농질의 부탁을 온전하게 들어줄수 있을테니까. 농질이 기뻐해준다면 자신도 기쁠 것이니, 그것을 완수하게 해 줄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최대한 성심성의껏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몇이나 그 모습에 속아 자연스럽게 넘어갈지는 모르겠으나 이 남자라면... 음. 아직 물가에 애 내놓은 심정인것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을 만났을 때처럼 당당하게 선언하는 일은 가급적이면 없었으면 하는데.
"아. 천은 가능하면 안 쓰고 다니시는게 좋을거예요? 오빠가 저거 쓰고 얼굴 가리고 다니는거 본 학생들이 있으면 곤란하잖아요~ 여기 있는 모든 학생들이, 저처럼 오빠한테 친근하지는 않을 거라서."
당장 포목점만 해도 자신 외에 두명 더 있었으며,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천을 쓰고 돌아다니는걸 본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모두가 이 남자에게 친근했다면 괜찮겠으나 그러기에는 위험부담이 조금 컸다. 부탁이 무엇인지 현 시점에는 전혀 추측할 길이 없었기에 찝찝하긴 했으나 농질의 부탁이라면 자신이 막을 필요도 없었고, 그걸 알자고 지금 당장 물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아직 이루어야 할 일이 산더미였으니.
"그리고, 그거 입고 있는 동안에는 여기 학생인 척 행동해요. 괜히 전처럼 당당하게 굴다가 방해받으면 분명 귀찮아질거예요? 자칫 사감님들한테 잘못 걸려서 완벽하게 끝내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무서운 궁기씨가 오빠를 혼낼지도 몰라요~"
뒤돌아있는 사이에도 입은 쉬지 않는다. 걱정들을 한가득 풀어놓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사람을 죽이는 일. 그것도 어린아이를 죽이는 일은 심적인 충격을 준다. 유현의 말에 별다른 반박 하지 않았다. 조용히 생각만 했다. 그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아. 맑은 머릿속은 정말 쓸데없을 정도로 이성적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뚫고 넘칠 것만 같아. 괜히 앞머리 쓸어넘기며 눈 한 번 꾹 감았다 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제 아닌 척 하는 재주가 남다르다는 점이었다. 유현에게 들어오라 하고 침상까지 걸어가는 동안 어떤 흐트러짐도 없었다. 옆자리와 무릎을 두드릴 적에도 태연했다. 동감이라며 곧장 따라들어온 유현 보고 피식 웃는 것도. 옆자리 앉는 것 보고 에잉, 하고 아쉬운 소리 내는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지독하게 철저히- 아. 끔찍해라. 유현 앉고나자 온화 손짓으로 열린 문 닫았다. 이제보니 문 뒤에 부적 붙어 있다. 학당에서 쓰는 것 과는 색이나 문자가 다른 것이 집안에서 쓰는 것일까. 부적 붙은 문은 저절로 닫히고 잠기기까지 했다. 철컥. 잠금쇠 소리 뒤로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그 침묵 깬 것 유현이었다.
"더 안 묻겠다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아니면 친구의 정 봐서 넘어간다- 그런 거냐?"
분명 생각 가다듬어 다시 물어볼 것이라 예상했건만. 정말 별 일이다. 화유현이 궁금한 걸 묻지 않고 넘기려고 한다니. 말하기 싫다면 그냥 놀러온 거라고 하자며 가끔은 이런 경우도 있지 않겠냐는 제 친우 보며 픽 실소했다. 이럴 때는 유달리 눈치가 좋지. 혹은 후일을 기약하겠다는 생각일까? 제가 더 몰려서 유우에게 털어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올 때까지? 아무래도 좋다. 아무러면 어떠냐는 생각이 제 행동 부추겼다.
"싫다. 보다는 얘기하기엔 별 것 아닌 것이라. 묻지 않는다고 네 탐구심 식지 않을 것 내가 모를까. 그러니 내기 하나 하자."
침대에 편히 앉은 유현과 달리 온화 몸 앞으로 기울여 바닥에 놓은 탁자로 손 뻗었다. 여러 잡동사니 놓인 그 위에서 둥글넙적한 양철캔 집었다. 도르륵도르륵 소리 나는 것 보니 사탕 들었나보다. 그것 열어 사탕 하나 집고 입에 툭 던져넣었다. 입 안에서 사탕 굴려 맛을 본 후 다시 말했다.
"내가 지금 먹은 사탕이 무슨 맛인지 맞추면 '그 때 왜 그랬는지'는 얘기 해주지. 기회는 딱 한 번. 질문 안 받을 거고 틀리면 적어도 오늘은 그 관련해서 아무 말도 안 해줄 거다. 할 테냐? 안 하고 다음을 기다릴 수도 있긴 해?"
그리 말하고 사탕캔 닫아 저와 유현 사이에 놓았다. 캔 뚜껑에 무슨 맛 들었는지 그림 있으니 그것 보고 고르라면서. 그림은 순서대로 딸기, 포도, 사과, 레몬, 오렌지였다. 이미 녹기 시작한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며 가만히 유현의 선택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