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으로 우울한 저기압이 몰아쳐왔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안도하지도 못했으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도 없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바라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더라면. 부정해도, 부정하지 않더라도. 되돌릴 수 없다. 두려우며, 부끄럽고, 고통스러우니 연은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으나, 학생으로서의 의무가 자신을 강제로 끌어다 내놓은 것이었으니. 비척비척 연은 수업 장소로 향했다.
아. 문. 어제 그거. 여기 문이라면 학당 문 말고 다른게 없을텐데 왜 다른걸로 알아들었지? 가현은 조금 머쓱해져서는 입맛을 다신다. 얘가 제 4의 벽을 넘을수만 있다면 데헷 하는 포즈로 제 머리를 쥐어박는 가현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너의 역량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진짜로....(쥐구멍)
"어제 저희 동 사감님께서 잠그신 문이었군요. 무언가를 닮았다고요..?"
여튼 사서의 이야기에 점차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도술로도 안 열리고 영 사감님께서 열어도 금방 닫혀버리는 문.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동 사감이 귀를 틀어막고 닫아버리는 모습이었는데. 가현은 눈동자를 도륵 굴린다. 폭주. 익숙하다. 이전에 하 사감이 한번 그랬던 적이 있지 않은가.
"괜찮아요~ 어차피 1년 뒤면 저도 어른인걸요. 그러니까... 더 말씀해주시지 않으실래요? 영 사감님 말고, 다른 사감님들께서 열어보려고 시도하신 적은 있나요?"
말도 안 된다는 듯 사서가 말했습니다. 그녀는 잠깐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 신수 중에 닫는 걸 좋아하는 존재가 있어.. 근데, 자취를 감춘 지 제법 오래 되었단다. ' ' 다른 사감들이 열려고 시도했다가 문이 어찌나 굳게 닫혔는지 포기하더라고. 하 사감님이 문을 걷어차고 주먹질하고 불까지 냈는데, 멀쩡하잖니. 동 사감님은 아프다고 안 나오는 중이란다. '
사서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녀는 아는 정보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 사감님들 말로는 해신장과 자신장을 설득해야 할 거 같다는데... 말이 통해야지, 원.. '
어느 평소 때와 다름없을 춘 사감을 보고서 연은 옅게 웃는다. 그러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니, 안에 있을 비단 주머니를 꼭 잡아 쥔다. 어떻게 오늘 이걸 건넬까 말까, 고민하던 연은 비단 주머니를 손에서 놓는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선택하자. 그러며 자리에 앉는다. 오늘의 수업이 무엇이었더라 생각해보고, 춘 사감을 본다.
가현은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조금 더 판단하고 정보를 흘릴 필요가 있겠다. 자신이 그 날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은 뒤로 숨겨둔 채 사서의 말을 듣기 시작한다.
"그래요? 자취를 감춘지 오래 되었다는 것 외에, 달리 알고계시는 내용은 없나요. 제가 하사감님께 들은 게 있기도 하고, 따로 본 것도 있기 때문에 조금 혹하는데요~"
바로 이럴 때 알고 있는것을 끄집어낼 찬스지. 가현의 눈이 반짝 빛난다. 적당히 간을 재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자연스러우면서도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낼수 있을지 재어보기 시작한다. 물론 그때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갈수는 없을 것 같았으나 조금이나마 듣는 건 아예 안 듣는것과 큰 차이가 있기에.
"아프시단 말이죠... 조금 유감스럽네요. 그보다 다른 사감님들께서 시도해도 안 열릴 정도라면 큰일이예요~"
다른 사감은 몰라도 하 사감만큼은 신수가 확실하다. 그런 존재조차 용을 써 보아도 열리지 않을 정도라니. 동 사감 역시 뭔가 있다. 이전, 자신이 겹쳐보았던 것도 그렇고 석연치가 않다. 그 날 자신은 그 장소에 있었으며 직접 걸어잠그는 것을 보았는데.
"설득하는 방법 같은건 이야기해주시지 않으시던가요?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것 같기도 한데 말이예요.."
드물게 남은, 인간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종족. 목화 제법 귀한 존재이나 입안이 쓰다. 어찌하여 자신을 따라온 건지, 자신이 지선이 될 수는 없을 터인데.
"……참 너무도 하십니다. 써야만 하는 부적인데."
부적 떼어놓으라 할 적 아회 수업 때 쓰던 부적을 내려둔다. 떼잉, 다시금 불만 뱉더니 품 속에서 다른 부적 꺼낸다. 검은 종이에 피와 경면주사 섞어서 쓴 듯 흉흉한 붉은빛 발하는 부적. 부적뭉치 한꺼번에 불타고 날서게 돋아난 손톱이요 흉악한 핏줄이요 목대이 핏대 선다. 그마저도 점차 줄어들고 정신 좀 차려보겠답시고 고개 설렁설렁 흔든다. 으르릉, 목 긁는 소리 들리다가 사그라든다.
사서님의 표정을 보며 가현은 알게 모르게 웃었다. 아, 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 의외의 것을 들었을 때 사람들 대부분이 보여주는 특유의 표정.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정이 가서... 더욱 괴롭히고 예뻐하고 싶어져.
"형제분이 있다고 들었어요. 이것 외에는 다음 기회에. 조금 더 대화를 나눌수 있으면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하 사감의 정체를 사서가 알고 있을지 모르고 있을지는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가현은 조금 모호하게 이야기하고는 입을 꾹 닫았다. 닫고 잠그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동 사감님과도 얼추 어울리지만- 그렇다기에는 몇백년 전 자취를 감춘 존재라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하 사감이 반씩 합쳐진것과 같은 느낌이 되어버린 걸까. 아직 알수 있는건 없었기 때문에, 추측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사감님들조차 말이 통해야 대화를 나눈다고 하실 정도면... 확실히, 그냥 인간 따위인 저희가 도전해봐야 변하는건 없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책은 꼭 2주 안에 반납하러 올게요?"
이전, 봄 지선과 같은 신선들. 기숙사의 용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격 취급받는 사감님들. 이 정도만 해도 자신은 많은 추측을 할 수 있을만큼 방대한 정보를 들었다. 자,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 책을 읽어볼까.
수업을 뒤로하고 왔으나 결국 아예 쉬지는 못할 모양이다. 그냥 못 들은 척 다시 나가버릴까. 힐끔 입구를 보았다가 곧바로 포기한다. 얼굴 보인 이상 어차피 완전히 재끼기는 글렀다.
"적임자를 딱 알아보셨네요. 맡겨주세요. 깔끔하게 정리해놓을 테니."
제 집 못 찾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들 훑어본다. 용, 역사, 추방, 신선. 흥미가 동하는 주제부터 무덤 들어가기 전까지 결코 읽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골라야지. 손을 뻗어 표지에 '추방된 것들'이라 적힌 책 골라 집는다. 책의 앞면, 뒷면 한번 둘러본 후에 첫 장을 펼친다.
그게 관건이 아닌데……. 뭐,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들 유현은 별 유감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한순간이나마 측은한 듯한 사감에 태도에 더 정신이 팔렸다. 완벽을 요구했던 사감도 목표치를 낮추었다. 민감한 10대의 자존심이 상할 법한데도 그는 순순히 고개만 끄덕이고 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