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워. 아파.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기뻐서. 당신의 손길이 다시 한번 저에게 닿아준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을것만 같아서. 귓가를 가득 채워오는 웃음소리가 황홀경에 잠겨들게 만드는 것만 같아서. 가현은 고통을 꾹 참을 수 있었으나 표정이 찌푸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 님의. 비밀이라면... 기꺼이...."
한낯 인간 따위가 더는 파헤쳐서는 안될 비밀일테니까. 그 제사장은 누구였을까. 가려진 시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뒤늦게 궁금증이 몰려왔지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으로썬 전무했다. 눈에 전해지는 고통이 가라앉고 가현은 잠시 눈을 깜빡거린다. 시야 끝에 비쳤던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정말로 그저 기분 탓이었을까? 이것 역시 알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석연치 않은 마무리로 그칠수밖에 없었다. 음. 불타버린 책은 역시 날씀드리는게 낫겠다.
이런, 이 방법은 영 아닌가. 실패했단 생각이 들어 아예 손을 빼 버린다. 그 뒤로는 추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허공에서 자세 잡고 평온한 사유를 계속해간다. 지면을 등지고 유유자적하게 떨어지던 그는 몸 돌려서 사감이 있을 위치를 빤히 응시하고자 했다. 나름의 확신이 있으니 나오는 여유였다. 뭐, 만약에 정말로 운 없어서 죽는대도 미련은 없으니 상관 없고. 이왕 죽을 거라면 머리부터 떨어지도록 자세를 바꿔야 하나?
……푹. 결론을 다 내기도 전에 무사귀환한 것이 더 빨랐다.
"제 몸도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말이에요."
핑계 대는 주제에 빙긋이 미소짓는 꼴 뻔뻔스럽다. 유현은 누운 김에 몇 초간 그 안락함에 파묻혀 있다, 느릿느릿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대강 넘겨서 치웠다. 옷이며 손을 정돈하기엔 이미 엉망인 꼴이라 열심히 털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인형, 인형이라…….
"대강 모양만 잡히면 되나요?"
완성품에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우선은 사지 달리고 사람 형체를 갖춘 정도의 간략한 모양새를 떠올리며 진흙을 움직여 본다.
뭐든지 알려 줄 것 같이 말해놓고서 그러다니. 하늘같이 높은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는 후배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부탁하니 거절하는 것에 슬퍼하는 눈으로 선배를 바라보다, 시선 돌림에 눈을 가늘게 접고선 이쪽을 보라는 듯 연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다. 이어하는 말에는 연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당신을 보다 고개를 젓는다.
"도술 때문에 그래서가 아냐. 그냥 사감님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말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연은 하는 당신 말에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비단 주머니를 잡는다. 가까운 수업에 보여준다면, 그 반응이 어떨지 알 수 있겠지. 생각하던 때, 케이크가 나오면 연은 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간다. 포장을 해달라는 말이 오가다, 다시 돌아온 연은 당신을 본다.
"미안해라. 내 케이크가 먼저 나왔네."
당신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던 것도 잠깐이고, 들을 수 있는 건 다 들은 것 같으니까. 연은 빙긋 웃으며 말한다.
사서의 반응에 가현은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 분께서 행하시는 것인데, 어찌 인간 따위가 딴죽을 걸 수 있겠냐만은. 소소한 유감의 뜻을 표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대여하려던 책 하나를 회수해가신 건 조금 아쉽지만.. 아직 읽고싶은 책이 하나 더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아까 책을 정리해뒀던 곳으로 가 살피기 시작한다. 분명 여기 어디다가 두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눈으로 슥 훑던 가현은 자신이 점찍어두었던 책 한권을 뺐다. 잊혀진 역사. 이 책 내용이라면 분병 무언가가 더 있겠지. 갈증을 해소시켜줄 실마리는 아니더라도, 실오라기 하나 정도는 걸쳐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조용히 들어가려 했으나 현진 도사가 인사를 하는 바람에 절로 한숨 새었다. 그래도 일단은 배우는 입장이니 고개 까딱 하고 멀찍이 있었다. 허나 멀리 있으면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오던가. 저 한 켠에서 아회 보이고 무언가 내려놓는 것 보았다. 무언지는 보지 않았다. 아회의 긴 머리만 눈길 좀 주다가 고개 돌렸다.
부적 없이 싸우는 법 배우는데 굳이 없앨 것까지 있나. 의문은 드나 잠자코 현진 도사의 말대로 가진 부적 모두 꺼내어 불살랐다. 손아귀에서부터 불꽃 피어올라 한웅큼의 부적 모두 재로 만든다. 파스스 부서진 잿더미 바닥으로 털어버리고. 무엇 시키나 지켜보니 저 토벽 부숴보란다.
나무 허수아비보단 낫군.
제법 단단해 보이는 토벽 앞에 서서 검에 손 올렸다가 내린다. 손만 대었을 뿐인데 거부감이 느껴진 듯 했다. 수업 중에 괜한 피를 보는 것은 싫다. 그러니 역린 쓰는 것은 무르고. 토벽 앞에서 정권 자세 취했다. 발 적당히 벌리고 허리 비스듬히 틀어 오른손 뒤로 빼었다가- 강하게 쥔 주먹으로 토벽의 한 가운데 향해 내질렀다.
"실제로 위험한 상황은 아닐 거라 믿어서 위기감은 들지 않았어요. 음, 그래도 낙하에 따른 본능적인 흥분은 조금 느껴졌었던 것 같네요. 짜릿하다는 말을 이런 때 쓰던가요?"
알고자 하는 마음 저 역시 모르지 않기에 순순히 대답한다. 설명이 보다 상세했다면 좋았겠으나, 그 이상의 감상을 말하기엔 그 감각이 어떤 것인지 유현으로서는 정확히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곱씹는다면 나중엔 알 수 있을까?
흙더미는 머릿속에 그린 생각을 도통 따라주지 않는다. 다시.라는 말에 무념하게 시키는대로 하려다 '완벽하게'라는 말이 들려오자, 그는 재차 시도하던 것 멈추고 흙을 다시 무너뜨렸다. 반항은 아니다. 단지 조금 더 생각을 하고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머릿속의 상과 진흙의 움직임을 보다 뚜렷이 그려가며 다시 시도해 본다.
주먹이 토벽을 때리는 감각이 생생하다. 타격의 충격. 그로 인한 근육의 떨림. 토벽이 무너질 때의 흙 섞인 공기와 그 내음.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되려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그 감각 참으며 자세를 바로잡으니 토벽은 금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제야 완벽히 부숴야 한다는 현진 도사의 말에 고개 비뚜름히 기울이고 짧은 한숨 내뱉었다.
그런 건 처음부터 말 하라고.
토벽의 반격을 흘려내고 재차 어깨를 당긴다. 손을 두어번 펴고 쥐기를 반복한 후 다시 꾹 쥔다. 지익. 뒷발 살짝 밀어 간격 벌리고 허리 또한 비튼다. 그리고 다시 정권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