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이 볼만할 것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였던가. 선배의 이름이 거짓이었던 것에 당혹스러우며, 조금씩 진짜 모습을 들어내며 당신의 얼굴이 변할수록 공포에 사로잡혔으나, 그런 공포의 와중에서도 비밀스러운 것을 파헤치고 있다는 것에 뚫어질 듯 응시하던 연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린다. 다른 사람들이 이를 보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으나, 구름으로 가려져 그러진 않는다. 하 사감님의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예상했던 것이라고. 어마어마한 비밀을 혼자 목도한 것에 기분 좋게 심장이 뛰면서, 불안해지는 기분 속에 연은 웃는다. 그 불안 속으로 조금 더 파고들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비단 주머니를 당신에게 내보인 순간부터 돌이 킬 수 있을 방법은 없으니. 알게 되면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연은 말대로 비를 내리게 하는 대신, 비단 주머니를 더 들어 당신에게 내밀어 보이며 당신을 붙잡는다.
"이름은 거짓일지 몰라도, 분명히 사감님들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특별한 수업을 진행할 수도 있다고도 했어."
또 하나, 한바탕 일이 있었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니까 오늘 일기에 써도 되겠지. 잠이 도통 오질 않아 휴게실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사감님들의 호출이 있어 학당의 입구에 다녀왔다. 입구엔 뜬금없이 한 가족이 멍하니 서있었는데 도통 말을 듣질 않고 건드리면 공격적으로 변해서 이쪽을 상처 입히려 했다.
나는 그 와중에 어떤 노랫소리에 홀려 그들을 마치 나의 가족인것처럼 여겨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역으로 공격했다. 맞다, 내가 공격한 대상은 바로 학우들... 그 노랫소리는 마치 인어의 노래처럼 듣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는듯 하다. 농질이 학당에 왔을때도 학우들이 우리를 공격했으니 마찬가지의 노래가 있었겠지.
그리고 결론적으론 가족들은 죽었다. 우리의 손에.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히 찢겨나갔지만 그것에 대해선 죄책감은 딱히 없다. 감히 날 아들이라고 부르다니. 그 더러운 핏줄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여야지.
허나 난 분명 홀려있을때 어머니, 라고 부르려고 했다. 그들이 날 아들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서. 하지만 태어나 한번도 어머니란 말을 해보지 않은 나는 지금도 그 말을 꺼내려하면 말이 멈춰버린다. 어머니, 아버지. 남들에겐 정말 흔하게 존재하는 것조차 내겐 없다.
지금에 와서 부모님의 존재가 부럽거나 하진 않다. 부모님이 살아있었어도 내 취급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니까. 하지만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해선 자연스럽게 환상이 생기기 마련. 나는 아주 잠깐이라도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내가 태어났을때는 나를 사랑으로 안아주셨을까.
학당에 입학할땐 의외로 부모님들이 많이 오지 않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부모님이 안계시는 것을 들키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부모님이 오신 몇몇 학우들을 볼때면 늘 부러움이 앞섰다. 나도, 저렇게, 두 손을 잡고 기뻐할 수 있는데. (종이가 살짝 울어있다.)
당신들이 살아있었다면 ... 나는 비록 백침일지언정 조금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한 취급을 받으며 갇혀 살았을까. 이성은 후자였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언제나 전자의 상황을 꿈꿔왔다. 어째서 난 평범하지 못하게 태어나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나의 것이 하나도 없는 저 저택에서 항상 나는 외로움에 시달렸다. 학당에 와서도 많은 친구들이 생기고 나의 것들도 조금씩 생기고 있음에도 나는 외롭다. 이 외로움은 해소되지 못하고 그저 날 그 갈증에 시달리게 만들뿐. 이 갈증은 어쩌면 내가 죽어서야 해소될지도 모른다. 죽는다면 나는 ... 당신들을 볼 수 있을까. 만약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물어보고 싶다.
더 이상 없다는 것은, 이전에는 있었다는 것. 춘 사감이 가까이 다가오면 연은 그 뾰족한 송곳니로 당장 자신을 물어뜯을 것만 같아 겁을 먹으나, 뒤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똑바로 바라본다. 잊으라는 말에는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반항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서 어떻게 잊으라는 말인가? 춘 사감이 급히 수업을 끝내려 하면 연은 놓칠까 비단 주머니를 쥔 채 주먹을 쥐고서 그 뒤를 따르며 다그치듯 묻는다.
"사감님은 다른 존재지? 그렇지? 그리고 이 주머니 안에는 뭐가 든 거야? 내가 만난 선배라는 사람은 누구고?"
육편이 된 누군가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일제히 몰아친 도술에 휘말려 찢어지고 불타오른 어느 사람들. 그는 사건이 유야무야 마무리되고 현장이 수습되는 동안에도 그들의 조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언뜻 제 한 손 보태어 엉망으로 발겨 버린 시신들을 마지막까지 확인하고자 하는 집념이라도 있는 듯했다. 시신의 앞에 다가가 몸 낮추고, 흐릿한 시야를 분명히 해가면서까지 그것들을 눈에 담고자 했다. 발걸음을 돌려 순순히 돌아간 그나마의 결정도 통제할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돌아가란 지시가 없었더라면 유현은 끝끝내 그 자리에 붙박여 날이 새도록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리라. 그것이 제 어떠한 욕망을 충동질했기에. 몸. 한때는 숨쉬던 사람들의 마지막 흔적. 인간으로 난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가진 유기有機의 증명. 그것들을 보고 있자면 살 안의 것들을 바라는 충동이 치솟는다. 진주를 캐내려 조개의 살을 헤집듯, 볼품없이 뒤엉킨 조직들의 틈으로부터 찬연히 빛나는 가치를 찾아내고 싶어지는 것이다! 숨이 멎은 순간부터 이것들은 더는 아무런 의미 없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다. 육肉은 사유하는 인간을 정의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욕망이란 으레 이성을 제치고 뇌리에 들어차고 말지 않는가. 그날의 광경은 이미 화상과도 같이 선명하게 남아 기어이 오늘에까지 따라붙었다. 그에 화유현은 흔연히 사유한다. 골몰하는 뇌중에 떠올리는 것은, 때아닌 유년의 기억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어렸을 적엔 그 이유를 몰랐다. 아니, 사실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다. 단지 유충했던 이지로는 이리저리 얽힌 감정의 골로부터 어떤 갈래를 구별지어야 할지, 그 하나하나의 결에 어떤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하는지를 깨우치지 못했을 뿐이었다. 뭉텅이져 쏘아지는 감정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뚜렷하던 정서가 무엇인지는 직감으로나마 깨닫고 있었다. 적개심. 그것으로 인해 나는 내가 늘 그들에 속하지 않음을 여실히 되새겨야만 했다. 원인은 어디에서부터라 지목하기도 무엇한 난제였다. 그 단초가 내 집안의 관습적인 습속 탓인지, 나라는 인간 자체의 이상성 때문인지, 내가 그간 일으켜 온 문제 때문인지, 그 모든 것을 포괄하고도 남은 여러 문제점 탓인지. 사실 이는 어려울지언정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존재라 해도 거창할 것 없었다. 배척은 내게 상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뭉클한 체온과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멀다 하여 외로움을 느끼기에는, 나는 이미 그따위 따돌림 따위와는 비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를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 사람은 회계 보조 역으로 고용되었던 여자였는데, 사정이 있어 학당에 다니지 않고 일찍부터 타향살이하며 지내는 중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아직은 소녀라는 말이 어울릴 나이였지만 어렸던 내 눈에는 충분히 어른으로 보인다 생각했다. 그는 늘 무심한 채로 홀로 겉돌던 나를 퍽 가엾게 여겼던 모양이다. 어쩌면 살던 곳과는 딴판으로 다른 싸늘한 객지에서의 외로움을 내게서 겹쳐 보았던 건지도 몰랐다. 어느 날부턴가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먼저 다가와 친밀하게 말을 붙이고, 짧은 휴식시간을 쪼개어가며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내게 부족한 것들을 챙겨 주고 내가 괜찮다 여기는 상황을 그렇지 않다 말해 주었다. 어른들은 물론 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자신들의 처사가 부당함을 알았던 것인지, 종종 그에게 핀잔을 두곤 했지만 적극적으로 금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차라리 그때 막았더라면 그 애에게는 나았을 텐데.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들을 얻었다. 상식을 더분 온갖 사소하고 많은 이야기와,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들에게서는 엿보지 못했던 다채로운 표현들, 그리고 내게는 끝내 와닿지 않았던 애정을.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옳게 말하려면 편안한 존재로서 기호하기 시작했다는 편이 더 적확하겠다. 당시에 어렵다 느꼈던 다른 사람들에게였다면 감히 품지도 않았을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그 때문이다. 나는 자연하게도 그 사람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 사람이라면 아마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용납해 주리라 함부로 짐작했다. 단 한 번도 드러내지 못했던, 해소되지 못할 오래된 궁금증에 그만 불이 켜지고 말았다.
아아아악!
비명이 들렸다. 귀청을 찢을 듯한 고성에 놀란 나머지 칼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찔린 상처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피는 까진 무릎이나 긁힌 상처 따위에서 보던 것보다 진하고 거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이 되지 못할 신음과 울음을 뱉어내었다.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무어라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을 발견한 기쁨에 그저 들떠 누가 건네는 말이든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건 뭐야?"
왜 늘 보던 때보다 얼굴이 질렸을까? 왜 화를 내? 왜 숨을 똑바로 쉬지 못하지? 눈물은 울지 않을 때도 흐르는 것이었나? 표정이 왜 그럴까? 지금 그 반응은 무엇을 뜻해? 당초에 원하는 것을 취하지 못했어도 나는 그 반응만으로 무척 즐거워졌다. 아직은 가장 원초적인 표출조차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던 때라, 태어나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간은 어느 누구도 쉽게 보여주지 않던 모습을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대답을 종용하려 했으나 그는 피 흐르는 허리를 부여잡고, 발걸음 위태로이 넘어져 가면서도 꾸역꾸역 기듯이 자리를 뛰쳐나갔다. 왜 도망을 가나. 몰래 하려던 짓 들킨 이상 더 할 생각 없는데. 아픈 게 싫었나? 그렇다면 내 손에서 칼을 빼앗으면 그만 아닌가. 무어라고 외치고 웅성대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나는 한창 달갑다가도 김이 새어 가만히 앉은 채 도망치는 뒷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또 하나의 의문을 갖는다. 얼룩진 칼의 날 위로 언제나의 무념이 어슷이 비쳤다.
나는 나를 파헤치기로 했다. 방금과 같이 나를 가르고 속을 살피면 무엇이라도 의미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드러난 근육에도, 막을 새도 없이 솟아 웃옷을 흠뻑 적신 핏물 속에도, 내가 찾던 무언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사실이 못내 싫었다.
"왜 그 아이를 찔렀니?" "궁금했어요." "무엇이?" "살 안쪽에 뭐가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열어 보면 보일까 해서." "네 팔은 왜 그었고?" "누나가 왜 소리를 지르는지 알고 싶었어요. 나도 아프면 알 줄 알았어요."
거짓말이다. 나조차 나를 설명치 못하기에 말 돌렸다. 가장 순수하고 무지했던 그때에도 그 사실 하나만은 똑똑히 직감했기 때문이다. 곧은 말을 꺼내는 순간, 지극히 당연하여 진절머리가 나는 그 사실을 직시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어째서 그런 것들이 궁금한 거야?"
나를 취조하던 어느 친척은 어쩐지 할말을 찾지 못한 듯 어물거리다 물었다. 이 물음에만은 입 열지 못하고 대답을 삼켰다. 나는 알고 싶었다. 깨달아 더는 의문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따라 다니는 이 지독한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당신들이 나와는 무엇이 다른지 알고 싶었다.
서로 생각부터 통하지 않았으니 어디에서부터 훈육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을 테다. 나는 혼이 나긴 했으나 호되게 꾸지람 듣지는 않았다. 어른들은 내가 저지른 행동이 무척이나 잔악한 짓이니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돌아가며 단단히 일렀으나, 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좋은 행동이나 나쁜 짓이라는 둥의 모호한 말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상해를 금하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말해 주었다면 차라리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영 알아듣지 못했으나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세상은 어느 하나도 내게 친절히 일러 준 적이 없었다. 이해 없는 수용일지라도 나는 따르기로 했다.
그때부터, 아니, 태어나 사유란 행위를 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무엇 하나 나는 알 수 없었으며 무엇 하나 내게는 답이 되지 못했다. 내가 온전히 이해한 것이란 결론 없을 탐구에 매달려 천착하기뿐이다. 나는 그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가도 어느 때엔 하릴없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생의 모순이 통렬했다. 나는 그 모순만은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