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아주 한심하니 갱생될 여지가 없는 범죄자.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라 연은 그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털어내며, 지우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젓는다. 그리고 친절하게 대답하는 당신의 말에 연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외부 자일 당신이 저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지. 연은 고갤 기울이며 묻는다.
"어떻게 도와주게?"
선배로써 조언이라도 해주려는 것일까. 10년도 더 되었다는 말에는 연은 당신의 나이가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본다. 제 학년을 묻는 말에는 연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만 접은 채 나머지 손가락을 다 펴며 말한다.
천재 선배의 조언이나, 아이디어라면 당연히 어리고 바보 같은 제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보다 훌륭할 것은 맞지만. 지금 당장에서는 물어볼 것도 없는데. 이후에는 또 어떻게 당신에게서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지금을 즐기라는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연은 물음표를 띄우며 고개만 갸웃거린다. 이어지는 말에는 으- 하며 질린다는 얼굴이 된다. 용서받지 못하게 된 이들이 끝까지 일상을 놓지 못하는 꼴이란. 안쓰럽고, 꼴사나운 것이다.
"응.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든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단련 시키라는 당신의 조언엔 연은 제 손을 모아 손장난을 치며 말한다. 그런 태도로 보아하니 말만 그럴 뿐,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듯 하다.
이도 저도 아니 되면서도 분명히 쥔 것은 있는 지금. 그 지금이 낫지 않느냐. 제겐 그렇게 들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주 나쁠 것도 없었다. 눈 앞만 보며 살아온 것과 지금이 무슨 차이 있는가. 오히려 지금이 낫다. 그리 생각하니 저도 피식 웃음이 새었다.
"듣고보니 그런 것도 같네. 내 여기 들어와 이리 굴 수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거늘. 지금만 보면 나쁘진 않으이."
말하고보니 제 말에 제가 우스워 킬킬 웃었다. 웃다가도 금방 투덜대고 침울해졌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다. 언뜻 변덕스러워 보이나 붉은 눈 항시 담담하여 보이는 것 그럴 뿐 임이 오롯하다. 제 붙잡는 팔에 가만히 몸 내맡기던 온화 문득 눈 깜빡였다.
"아. 그것 들었소. 여기 아닌 곳에 보내어진 신수 중에 인간을 감싸다 추방된 신수가 있었다지. 기린이었나."
하 사감의 말에 수업 중 들었던 것 주절대며 제 마시던 와인병 집었다. 남은 것 모조리 마시고 빈 병은 적당히 바닥에 굴려버린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병 보고 어린 애 마냥 키득키득 웃는다. 웃던 눈이 힐끔 하 사감 보았다. 귀한 것 잘 알아봤다길래 그 정도는 기본이 아니냐는 듯 어깨 으쓱였다.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물건 많이 보고 만지기도 하며 자랐으니. 그리고 솔직히 이건 못 알아보는게 바보 아닌가. 생각하며 검에 붙은 늑대 조각 슬쩍 어루만졌다.
"흠- 정 안 되면 이것 놓고 하 사감이나 해볼까 했는데. 것도 영 아니네. 지금도 답답한 것을 버틸 자신은 없으니. 음. 앞으로도 열심히 하 사감 소리 들으시구려!"
하 사감 할려다 안 하겠다고, 농지거리 하듯 가볍게 말한다. 무슨 놀이를 할까 말까 정하듯이. 냐하하! 웃은 온화 맥주캔 보고 저도 달라는 듯 손 뻗었다. 그가 따서 입 대기 전에 제가 먼저 가려가려고 한 손 쭉 뻗고서 입은 계속 떠들었다.
"기껏해야 백년 살까 말까 한 인생인데. 그것 반의 반도 아니된다면 그야 뭐가 일어나든 기구하다 여기지 않을 수 있겠나. 허나 각각 놓고 보면 상대적인 거요. 내 삶의 1년이나 당신의 100년이나. 애초에 사는 궤가 다른 것들끼리 서로 대어봐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 해서도 아니 되지. 그래도 나는 당신의 지금이 부럽소. 뒤섞여 스스로를 잊고 잃었을지언정 제대로 눈 뜨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 순간이면 전부 끝나버리는 것을."
간신히 쥐고 있는 것 하나 놓치면 그것으로 제 삶은 끝이다. 어쩌면 모든 인간 그럴 지도 모르나. 에잇. 되었다. 입 꾹 닫고 눈도 꼭 감았다 떴다. 여태 쥐고 있던 역린 잘 세워서 소파에 기대놓고 빈 손 마저 하 사감에게 두른다. 잘 붙들린 몸 괜히 부비적대며 능실능실 웃어보였다.
"뒤섞였어도 기억이나 경험은 이 한 몸에 고스란히 있을 것 아니오. 거 얘기 좀 해주소. 형제라 부르는 것 보니 서로 오간 것 있지 않겠소. 말이든 뭐든. 아니면 다른 형제 얘기나 뭐 그런 것도 좋네만?"
감히 그들의 얘기를 술안주거리로 해달라, 발칙한 요구를 한 온화였으나 한 술 더 뜨듯 검지로 하 사감의 얼굴 콕콕 누르려고도 한다.
꽤 깊이 잠들었었는지 깨는 데 시간이 걸린다. 저런 자세로 푹 잘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복 아닐까. 실없는 생각 속에서 당신의 잠이 깨기를 기다리며 소녀는 딱 눈높이에 맞는 그 위치를 고수했다. 그러다 누구냐 묻는 말에 "누구냐고 물으면 섭섭한데-" 하며 부러 말끝을 늘인다.
"안녕하세요. 깨자마자 보이는 게 내 얼굴이라 더 반갑지 않나요?"
자못 뻔뻔해 보이는 기세로 인사를 받아치며, 제자리라는 듯 연의 옆자리에 풀썩 앉는다. 바로 앞에 벽난로가 있어서인지 꽤 따뜻하다. 절로 몸이 노곤해지는 게 이곳에서 자고 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공용 휴게실만 아니었다만 그냥 이대로 누워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리라.
"꽤 본격적으로 졸고 있던데요. 피곤했나요?"
소녀는 제 무릎을 받침대 삼아 팔을 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팔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만 돌려 연을 바라본다.
아, 어느 쪽으로든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이 즐겁다. 내가 당신을 대신해 손을 더럽힐 수도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당신이 내가 있기 때문에 참아주는 것일까. 정황상 후자겠지만 무 씨 집안의 내로라하는 천재요 형님이라면 전자도 충분히 생각했을 것만 같아 벌써부터 등골이 오싹하다.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닮았다고 생각할까, 얼마나 다르리라 믿고 있을까, 그렇다면 도박수를 던질 때, 당신은 과연 어디까지 용인해 줄까…….
"아무렴요, 어찌 형님을 기다리게 하겠습니까?" 애닳는 목소리가 귀에 내리 꽂힌다. 어째서 그런 목소리로 묻는 걸까 의문이 든다. 당신이 아무리 애처로이 부르짖어도 닿지 않을 터인데. 아무런 말 없이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짓는다. 내가 자비를 베푸는 연고라 함을 알고 싶습니까, 어째서 당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지 아니한다 생각하십니까. 늘 그렇듯 이 미련한 아우는 함구하겠습니다. 당신이 궁금해 미칠 때까지. 제법 잘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제가 입 딱 다무는 일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이라면……. 저에 대한 재미보다 더 깊은 건 싫은데."
소곤소곤 얘기하는 목소리에 채 감정이 식어가는 것은 당신의 눈웃음 뒤로 이어진 언사 때문이다. 벌써부터, 라. 너무나도 일찍 잃었습니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 쳐도 당신이 무얼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돌아갔을 때 다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 지고하신 도련님이? 속에서 다른 감정이 감질나게 뇌리를 스친다. 뺨을 스친 방향으로 고개가 서서히 모로 기운다. 날선 송곳니 살짝 보이며 요요히 웃음 지었다. 아. 역시 저 머리를 갈라내서 생각을 좀 읽어보고 싶다.
"세상엔 후회할 일이 많다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후회를 연상케 하는 발언은 무 씨 집안 답지 아니합니다, 형님……."
감정이 희미하게끔 속삭인다. 당신이 떠나고 나서, 첫째 도련님 없이 사생아만 남아버린 가문에서 어떤 삶을 살고 무엇을 잃었는지 그 편린 잠깐 보여주듯, 어린 날의 순진무구하던 아우는 불타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잿더미 됐다는 듯이. 그렇지만 당신에게 여전히 감정은 남아있단 여지를 보인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까지는 당신이 생각해야겠지만, 적어도 당신이 바라는 나의 감정이 부정적이길 바랄 뿐이다. 후회를 의논하기엔 너무 늦었잖아.
"시생의 벗이라면 형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형님의 사람이니까. 말을 삼키며 천천히 자리에 되돌아가듯 앉는다. 점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조심조심 걸어오더니 차 한 잔과 다과를 내려놓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떠날 적, 아회는 미적지근한 커피가 든 잔을 들었다. "드시지요. 혹 기미가 필요하신지요?" 쓸데없는 농담 한마디와 함께. 망가지지 않는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 무슨 사달을 벌이겠다 그 소리로고.
경고하듯 말하는 당신의 말에 연은 손장난을 그만두고 시선을 들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불길한 소리 하고는. 연이 눈썹을 모으자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사감님의 폭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처럼 말하는 것에, 연은 뭐라고 했냐며 되묻는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미소 짓는 당신과 다르게,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려 연은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니 또 다시 당신을 꺼림직해 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