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앞에 앉은 당신을 바라본다. 동화책에서 얼굴을 가리고 나오던 인물들은 전부 다 악역이었다. 그러니 특별한 이유 없이 그 가면 뒤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이상, 어느 정도는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은 당신의 추론을 듣고서 옷소매 안에서 제 부채를 테이블 위로 꺼내든다. 끈으로 팔에 묶여있을 부채에는 사파이어색 선추가 반짝이니 이로써 당신의 추론에 답이 될 것이었다. 연은 당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묻는다.
"말을 하려다 마는게 제일 치사한 짓인 건 아오? 다른 건 뭐 이제라도 알았으니 그러려니 하겠소만."
지금의 하 사감은 대놓고 화를 안 낸다 뿐이지 마냥 협조적인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버럭버럭 하면 어거지로 끌어내기라도 하겠건만. 역시 보통 존재는 아니라 이건가. 까딱하면 휘말릴 것 같아 제 이성의 끈을 팽팽히 당기면서도. 한편으론 휘말려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리길 바라는 자신이 있다. 프흐! 제 어리석음에 자조하여 웃었다.
"꼬드긴다니. 내깟 것이 꼬드기면 넘어올 거요? 넘어와준다면 내야 좋지. 주색잡기는 내 낙이니."
무슨 의도인지 혹은 저를 놀리려는 건지 순순히 소파에 앉은 하 사감 보았다. 그의 가운 차림 만큼이나 헐거운 차림새로 그의 무릎 타고 앉아 똑바로 응시했다. 하 사감이 비틀린 웃음 지으며 종당엔 제 목 제가 겨눌 거라 해도 눈썹 한 가닥 꿈틀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손 내려 그가 새로이 불러낸 와인병 가져오려 하고 제 손에 병 쥐어지면 그 자리에서 열어 벌컥 들이키려 했을 것이다. 제 입가로 한 방울 고인 와인 또르륵 굴러 턱에서 목으로 길 흔적 남겨도 그대로 두고 혀로 젖은 입술 훑고서 말할 것이다.
"내 명줄 기구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데. 스스로 목에 칼 겨누는 것 무엇이 두려울까. 때가 되면 기꺼이 목 쯤은 내어주겠으나 그렇다고 곱게 내어줄 생각은 없는지라."
온화 슬그머니 기울인다 싶더니 하 사감의 위로 제 몸 겹치려 한다. 팔 만으로 그의 어깨 위 둘러 사이의 틈조차 없게 만들려 하며 나즈막히 중얼거린다.
"제 것 간수도 못 해 내 손에 떨구어놓고 말이 많소. 허니 얌전히 대답이나 해주시오. 내 쉬이 죽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영구히 당신의 심장 쥐고 있을 방법. 인간인 채 모든 걸 취하겠단 어리석은 조건은 붙이지 않을 테니. 알고 있는 걸 답해주시어요."
보잘 것 없는 제가 이리 간청하오니.
중얼거림 길어질수록 말투 사근사근해지고 눈 웃음 곱게 휜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하 사감을 똑바로 마주하고 밀어붙이는 몸에 쉽게 물러나 줄 기미는 없었다. 원하는 걸 얻어낼 때까지 들러붙을 듯이.
당신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반응에 연은 그저 난감할 뿐이다. 선추를 알아보면 연은 다시 부채를 소매 속으로 감추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당신의 말에 연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 된다. 아무리 일찍 졸업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이 어떤 기숙사였는지조차 기억을 하지 못한다니. 최소한 다니며 걸쳤던 두루마기의 색이 어떤 색인지, 부채의 선추는 어떤 색이었는지 기억할 것인데. 자기를 놀리기라도 하는 건지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던 연은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당신에게 말한다.
사람은 쉽게 믿을 수 없다고. 연은 그 미소가 어딘지 꺼림직하다 느낀다. 최소 1년은 일찍 졸업했다는 당신의 말에 연은 당신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어디 기숙사였을지 생각해 본다. 청룡은 아니라고 하였고, 불타는 적룡 같지도 않은 것이라. 왜인지 흑룡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던 연은 당신의 물음에 고민에 잠긴다. 내 이야기라. 최근 들어서 있었던 소란들에 관해서는 이제는 외부자인 당신에게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선배가 다니던 때랑 크게.... 바뀌진 않았을 거야. 뭐 최근 들어서 작은 소란들이 있긴 하지만... "
아직까진 큰 일은 없으니까. 덧붙이며 말하고서 연은 가면 뒤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지 뚫어져라 쳐다본다.
와인병 뺏긴 하 사감 혀를 차던 말던 물처럼 들이켰다. 메마른 목에 술 들어가니 그제야 좀 살 것 같기도 하다. 이 갈증만 아니라면 매 밤 깨는 일도 없을 것인데. 그리 한탄한들 일생 사라지지 않을 테지.
"희망고문은 그다지 즐기지 않는데 말이오. 절반이 내게 복종한들 절반이 반항하면 안 될 것 아닌가. 에잉. 못 됐긴."
저를 놀리는 것이 분명한 말에 숨김 없이 불만을 드러내며 입술에 와인병 댄다. 마셔도 갈증이 풀리는 건 잠깐이라. 병 내리자마자 마른 숨 짧게 내쉬었다. 급히 들어간 알콜에 정신이 잠깐 멍해지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이성 또렷한 눈으로 하 사감 보고 있으니 그가 말한다. 아니. 그가 하는 말은 그러했다. 결국 이도 저도 될 수 없음을.
"뭐요 그게.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돼. 이 무슨 X 같은 삶인지! 겨우 길 하나 찾았나 싶었거늘."
살며시 미간 찡그리며 내뱉는 말은 하 사감에게 한다기보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줄곧 응시하던 눈 역시 밑을 향해 잠시나마 검게 물들었다. 하! 막혔던 숨 토하듯 내쉰 온화 비실비실 일어나려나 싶더니 에잇 하며 거진 걸치듯 제 몸 하 사감에게 기대버린다. 다소 느슨하게 기대서 제 손에 쥔 역린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것 아니면 내 살 길 보이지 않아서 그러오. 내 남은 시간 동안, 이런 물건 만들 수도, 다시 가질 일도 없을 테니."
결국 남은 시간이나마 유희 즐길 수 있음에 만족해야 하는가... 술에 잠긴 듯 음울히 중얼거리다가도 몇 모금 더 마시니 금방 평소마냥 돌아온다. 거의 빈 병 잠시 내려놓고 하 사감의 머리카락 장난 삼아 건들려 하며 떠든다.
"그나저나- 내가 다음 하 사감이 되면 당신은 어찌 되는가? 그저 하 사감을 내려놓고 떠날 뿐이오? 애초에 어째서 하 사감 따위를 하고 있는 거요? 적룡에게 심장 준 것도 아닌 듯 한데."
조잘조잘. 질문세례 퍼부은 다음엔 볼 맞대고 부비려 들었을 것이다. 늘상 누군가에게 하듯이 말이다.
전우애라. 과연 그런 것이 생길까? 속으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학당 내부에서 그는 적룡 기숙사에 속해있고, 냉랭함을 넘어 초연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누군가 선 안에 들이는 걸 밀어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들어왔다고 내쫓지도 않는 사람. 그 어떤 사람이라도 선에 들어왔다고 기뻐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 안의 주인을 보고 애써 얻은 기회가 사실 수포였음을 깨닫는다. 때문에 타인도 선 안에서 잠깐 쉬어가기만 하지 오래 머무르지 않는 사람. 그는 그 정도로 타인에게 무신경한 존재였다. 인간은 다 그렇지 뭐, 로 넘겨버리는, 자신에게 전우애라. 당신은 효율적인 문제라고 했다.
"지당하신 말씀이기도 하지."
형님이니까. 때문에 고분고분 고개만 끄덕이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조금 더 생각하니,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를 알 것만 같다. 서로 닮았지만 받아들이는 시선이 다르다. 그리고 당신은 그 시선이 정설이라 믿고 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거니, 그리 믿는단 뜻이겠지.
"형님도 참, 그 정도로 연약하지는 아니합니다. 고작 손가락 움직이는 것일 뿐인걸요."
나긋하게 얘기하지만, 어조는 여전히 잿더미 같다. 과거의 한순간마다 죄다 끔찍하게 불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못한 잿더미, 외로이 남겨진 불씨, 잠깐의 정적. 굳어버렸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당신은 어째서 내 말에 굳고 사과하는가. 어째서 매달리듯이 그리 성심성의껏 치워주겠다 단언하는가. 미안해요, 라. 단어를 곱씹는다. 그 말을 그때 들었으면 지금 이 운명이 좀 달라졌을까. 달라지지 않았겠지. 사과가 너무 늦지 않았나 생각하며, 천천히 미소를 그려냈다.
"아무렴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굳이 형님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아우는 걱정이 됩니다. 지금도 굳이 형님 더럽힐 필요는 없으니까요……."
가면을 벗자 뺨을 더듬던 손이 느릿하게 얼굴을 훑어본다. 당신은 그 오랜 세월 동안 흠 없이 여전하구나. 어디 흉이 진 곳도 없고, 그 흠결 없는 공포로 이름을 떨쳤겠구나. 날 두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고이 뜨인 두 눈동자에 새파란 시선이 담긴다. 여전히 당신의 눈은 광채로 가득하다. 얼굴을 느릿하게 더듬던 손길이 감질나게 떨어진다. 붙잡을 것이면 붙잡아 보시던가, 그런 느낌으로.
"예, 새겨듣겠습니다. 사냥도, 찾는 것도 모두 좋아하는 것이니 기대가 됩니다…."
무엇일까, 공들여 찾은 것이 내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무엇을 잡아낼까. 느릿하게 미소 짓던 얼굴은 소중한 듯 제 눈가를 손으로 쓸 적, 애달프게 변모한다. 마치 그때의 과거를 떠올리듯. 아직 당신에게 있어 내가 동생이구나 증명받아 기쁘다는 듯. 아, 형님.
"저 또한 자주 나올 터이니, 형님을 마주할 날만을 고대하여도 되는 것이겠지요……?"
그쪽. 내게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구나. 애정 따위는 그때 집어치웠을 거라 생각했는데 당신은 아직 미련이 있어. 어리석은 건지, 머리가 좋은 건지. 내게 써먹을 수 있는 패를 보여주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당신도 나와 같은 피 물려받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는 이 패를 어떻게 써먹고 무엇을 내어줘야 할까. 당신은 나와 달리 산전수전 모두 겪고도 살아남은 4명의 도사 중 하나다. 그런 당신을 상대하려면 어떤 말을 버리고 전진하여야 체크메이트로 승리를 따낼 수 있을까……. 느릿하게 눈가 쓸어주는 손길에 느른한 미소와 함께 볼을 비비며 생각했다. 아, 이래서 체스가 싫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니까.
"부끄럽지만 새로 사귄 벗이 있어, 서신을 쓰고 있었지요. 형님께서는 어찌 이곳에 오시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