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의 분위기가 변하는걸 보고도 윤하는 느긋한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어보였다. 처음 겪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격적으로 느낄만한 분위기였음에도 평온하게 입에 들어가있는 우동면만 씹어넘긴 그는 가현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처음 만나고서 얼마간은 이렇게 투닥거리는 날이 더 많았었다. 그야 서로 다른 사람이고 매일 같이 보는 사람이랑 싸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직도 예전과 똑같기에 너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 라고 생각하며 그는 가현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런건 재미 없잖아. 네가 원하는대로만 움직이는 인형은 쉽사리 질리기 마련이거든. 내가 네 것이고 네 맘대로 해도 되는 사람은 맞지만 종종 이런 엇나감이 있어야 더욱 재밌는 법이란다. "
컵에 반쯤 차올라 찰랑이는 물을 마시며 한번 말을 고른 윤하는 이어서 답했다.
" 내가 욕망에 희박하긴해도 네가 주는 애정만큼은 얼마를 주던 부족하거든. 그러니 작은 일탈이라 생각해줘. "
눈 하나 깜짝하지않고 말을 마친 그는 남은 우동을 마저 먹어치웠다. 그도 만만치않게 뒤틀려있는지라 가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니었다. 허나 이렇게 상황이 전개될땐 그도 태연하게 받아치곤했고 오늘도 다르지 않았을뿐이다. 어차피 가현이 이렇게 말해도 다음번에 또 같은 상황이 온다면 똑같이 행동할테니 말이다.
윤하가 농질의 말을 전해주자 가현은 보기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보기 힘든 표정이네, 하고 흥미로움을 느끼며 그는 가현의 반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 농질이 생각하던 것이 조금 다른 모양인듯 했다. 그와 그녀가 다르듯이 그녀와 농질도 다른 사람이라 완벽하게 같은 해석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일텐데 어째서 저런 반응인 것일까.
" 그럼 마실건 내가 살께. "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가게 문을 나섰다. 계산은 가현이 하는듯 했으니 마실건 자신이 사면 되니까 말이다. 그가 생각하는 가현은 아닌듯하면서도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느낀 다름에 혼란스러워하는듯 했다. 여기서 자신이 말을 얹어봤자 도움 되는 것은 없으니 그저 가현이 하고싶은대로 할 뿐이다.
"우리 윤하~ 왜 오늘따라 그렇게 엇나가려고 하는 걸까, 응? 내가 질려버리는 기준을 몰라서 그러는것도 아닌데. 다시 저학년때처럼 서로 이해 못하는걸 그대로 드러나고 티내기를 바라는거야?"
가현은 히죽 웃으며 눈 앞의 남학생을 바라본다. 포용 이상의 것은 본성일수밖에 없는가. 제아무리 포용의 절정을 찍는 6학년이 되었다고 한들, 남의 모든 걸 이해하기란 그렇게나 힘든 것인가. 결국 자신도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는 충분히 이해할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내로남불은 아니니까. 그저- 자신의 사람이 바라는대로, 한껏 어울려줄 뿐이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그냥 평범하게 갈구할 수도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나를 자극해야 하냐구. 바보야."
늘 제 감정을 꾹꾹 숨기다가도 기회가 오면 그 거짓된 모습을 갈아치우고 제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게 자신이었으나, 그게 결코 이 남학생이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자신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낌없이 사랑을 퍼다줄수 있는 사람인데 그걸 몰라준다는 것이 약간의 불만 사항이었다. 툴툴대면서도 서로 척을 지지는 않겠다는 의미를 담아 말하며 손가락으로 남학생의 볼을 쿡 찌른다. 앞으로는 조금 더 나를 이해해주길 바래. 그리고, 절대 허락 없이 다치지 마. 컵에 따라진 물을 단숨에 마시고는 계산을 위해 일어선다.
이윽고 계산을 마친 가현은 가게 문을 열고서 나왔다.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것이 농질과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것 같은게 조금 놀라웠다. 자신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에 관련된 것은 훗날 밝혀지게 되겠으나, 적어도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전히 서술하기에는 애로사항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
"좋아~ 아까 날 그렇게 괴롭혔으니까, 제일 비싼거 위주로 많이 시켜버릴거야."
그새 생각 정리가 완료된건지, 다시 늘 비쳐보이던 잔잔한 미소를 걸친 채 가현은 몸을 착 붙였다. 결국에는 이 남학생도 자신을 엿먹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니. 정말 엿먹일 의도였다면- 애시당초 MA님을 거론하는 부분부터 비틀린 방향으로 나아갔겠지. 항상 그랬듯이 그 어떤 감정의 변화가 찾아오더라도 그 끝은 늘 포용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지금 역시 예외란 없었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카페로 걸어 나서며, 사람 구경도 하듯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이 시선으로 좀 더 겹쳐보이는 것이 없는지 찾아보는 것에 가까웠으나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역시 사감님들에게는 뭔가 있다니까.
"카페도 가고. 충분히 배부르다 싶으면 다른곳도 가자. 아까 그 가게, 맛은 있지만 양이 좀 적었거든~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리고 가는 동안 당연하게도 가현의 입은 쉴 새가 없었다. 생각보다 식사가 일찍 끝난것에 대해서는 아마 자신과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릴때는 이렇게 대화가 이어지면 가현이 벽을 쾅치곤 했다. 그러면 이젠 그 화제의 대화는 끝. 처음엔 싸우자는줄 알고 거기서 더욱 투닥이곤 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그걸 암묵적인 신호로 받아들였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아예 벽을 칠것 같으면 알아서 자제하곤 했다. 그렇게 몇년의 세월을 지내왔지만 그럼에도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에 가끔씩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가현의 뜻을 알고 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조금이라도 더 나눠갖겠다는 욕심이라고 생각해줘. "
자신의 볼을 쿡하고 찌른 가현의 손가락을 보며 윤하는 웃어버렸다. 그 손가락이 뜻하는 바를 잘 알기에 그도 손가락으로 가현의 볼을 살짝 찌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것이 뒷말까지 동의를 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현이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녀를 데리고 자주 가는 카페로 향한다. 열심히 두리번거리는 가현을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답한다.
" 양보단 질에 집중하는 가게인가봐. 배부르게 먹을 양은 아니었지? "
그래도 맛있는걸 먹었으니 조금은 만족할 수 있다. 카페로 가는 동안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소리가 둘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진다. 거의 매일을 얘기하는데도 화제가 끊어지지 않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말이다. 카페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고 휴게실에 위치한 자신들의 테이블처럼 창가에 위치한 곳에 자리를 잡은 그는 가현에게 마실 것과 따로 먹고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선 주문을 하러 향했다.
" 가현아. 내가 우리 집안에 대해서 제대로 얘기해준적 없지? "
자신이 마실 것과 가현이 말한 것까지 주문을 하고서 돌아온 그는 가벼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평소엔 별로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