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감정 컨트롤이 잘 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어린애다운 면모가 남아있을 그 때의 자신은 좀 수틀린다 하면 말을 더 꺼내는 대신 행동이 앞섰다. 장소가 어디든, 보는 눈이 몇이나 되든 아랑곳 않고 벽을 쳐대며 이야기의 끝을 알렸다. 허나 지금, 어느정도의 사리분별이 가능해지고 임씨 가문답게 주위에 조금이나마 신경을 기울일수 있게 된 시점에서는 괜한 주목을 피해가려 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남학생과의 대화도 어지간하면 끊을 일 없이 완만하게 잘 풀어나갈수 있게 되었기에 그 빈도가 줄었지만. 가현은 제가 한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걸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양 주먹을 꾹 쥐어 보였다.
볼이 찔려 옴폭 들어갔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가현은 눈빛에 불만을 한껏 담았다. 진작 말해줬다면 제 애정을 한껏 보여줬을텐데. 그래도 지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그만이랄까.
"맞아~ 그래도 이런 감성.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포만감과는 또 다른 만족을 채워갈수 있는 음식점이 그렇게 많지는 않잖아?"
가성비를 따진다면 나쁘다고 할 수도 있는 가격이었으나 가현은 물건의 값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싸든 싸든, 어느 방향이건 당장 자신이 어떻게든 만족할수만 있게 된다면 그것 하나만으로 통과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가현의 만족을 충족시키지 못한 가게는 지금까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맛도 없고 비싸며 서비스조차 엉망인 가게라고 해도 그것이 인간미라며 웃어 넘기는 것이 가현이었다. 좋게 말하면 포용심이 넓은 사람인데, 나쁘게 말하면 상대가 성장할 여지를 쥐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적당한 비판은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으음. 듣고 보니까 그러네? 아직 너희 가문에 대해서는 파악한게 많이 없는데..."
말차 몽블랑, 우유맛 아이스크림, 그리고 카페 마끼아또까지 선전포고 한 그대로 널널하게 시킨 가현은 남학생의 말에 흥미를 표한다. 희게 새어버린 머리와 하얀 기운이 침범한 붉은 눈이 모씨 가문에서 재앙으로 통하게 된다는 것 정도는 들었으나 그 이상은 들은 적 없었다. 뭔가 들을 욕심이 생길만 하면 남학생은 쓴 웃음으로 그 상황을 넘겼으며,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도 주변에 항상 누군가가 끼어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이렇게 단 둘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눠본것도 조금 지난 일이지 싶었다. 휴게실에서 대화할 때는 항상 신입생 한두명을 제물마냥 끼워놓고 있었으니까.
"이야기해주지 않을래? 너희 가문에 관한 이야기."
상대가 먼저 이야기해줄 것처럼 운을 띄웠으니, 굴러들어온 기회를 차버리는 건 임씨가문 실격인 일이지. 가현은 이때다 싶었는지 호기심을 품고 남학생을 바라본다.
천부는 늘 북새통을 이룬다. 여러 사람 마주하고 지나치는 곳이니 시끌벅적함은 당연하다지만, 사람 사는 소리가 이렇게 요란법석할 줄은! 북부에서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회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익숙해지려 부단히 노력했지마는, 6년 내내 사람들과 대화하기는커녕 나가는 날이 줄어들고 말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아회는 영 나가지 않으려 들었고, 그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바깥으로 나서는 날이 잦아졌다. 해가 서쪽에서 뜰 것 같은 발언이지만 조용한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천부 구석진 곳에는 찻집이 하나 있으니 정처 없이 떠돌다 찾게 된 장소요 이곳은 아회에게 있어 바깥에서 몸을 숨기는 작은 안식처다.
주인장은 조용하고, 학생도 없다시피 하여 소란이 일어날 일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차와 가배, 한과는 고사하고 서양식 다과마저 맛있는 곳이니 어찌 이곳을 한 번만 발걸음 할 수 있으랴. 주에 한 번은 들러 가배와 다과를 들며 책을 읽곤 하였으니 오늘도 아회 이곳 구석진 자리에서 여가시간 보내던 찰나였다.
"……."
정확히는 가배 적당히 식을 때까지 기다리며 무언가 쓰고 있었으니. 흘리는 글씨 자 대지 아니하여도 한치의 오차 없으며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모든 인간성을 소실하고 난 후. 제가 가문원들의 마음에 쏙 들어 제사장 후보니 차기 당주니 하는 자리에 앉게 된 시절, 백씨 가문과의 교류가 있었다.
제아무리 보잘것 없는 가문이고, 맥이 끊길락 말락 하는 굉장히 적은 규모라고는 하지만 임씨 가문이 눈독들이기에는 그 무엇보다 좋은 가문이었다. 그야 당연히- 자신들의 바램에 큰 보탬이 될 것 같았으니까. 최초 선조까지 넘어가는 먼 과거. 그 어떤 인간보다도 MA가 좋아하는 호박밭을 잘 가꾸어 어여삐 여겨지던 자들. 현 시점인 지금조차도 몇 안되는 인원들을 이끌며 신당 주위의 자연을 독점하며 가꾸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임씨 가문에게 있어 눈엣가시임과 동시에, 배워갈 것 많은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으니. '정원사'로써의 지식과 요령을 배워가며 인용하고, 백씨 가문의 맥이 끊길 적 그것들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백씨 가문의 뒤를 이을 또 다른 정원사가 되기 위해. 커다란 야망을 친절 뒤에 덮어 가리며 그들과 교류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보고 배우라고 이 자리에 데려온 가현의 관심은 교류와는 다른 곳에 꽂히기 시작했다. 백씨 가문 내에서 유독 소심했으며, 시선에 잘 띄지 않았던 사람. 제 가문 어른들이 백씨 가문원들과 소통할 적,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얼추 전해듣고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 가현 역시도 그 이야기를 귀띔들었다. 소심한 성격은 둘째치고, 정원사로써 너무나도 불완전한 재능을 가졌으니. 우리 가문의 교류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할 사람이다. 우리는 효율 있는 교류를 해야만 하니- 가급적이면 다가서는것을 삼가고 어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라.
거절하지 못할 아버지의 당부를 들었음에도, 어린 가현의 시선에는 그녀가 계속 밟혔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십 년이 넘게 흐른 지금조차도 확실히 단정짓지 못할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가현에게는 교류 다음으로 신경쓰이는 존재가 그녀였다.
"언니. 언니는 왜 항상 혼자서 있어?"
순수함이라곤 이미 MA를 알현할 적 말아먹었으나, 그 나잇대 어린애들이 늘 그렇듯 악의적이지 않은 의도를 담아 그 사람에게 자그마한 고사리손 내밀며 활짝 웃었다.
"으음. 나랑 같이 놀자! 혼자 있는건 외롭잖아. MA님도 같은 인간끼리 소외시키는 거랑.. 누군가 외로워하는 건 원하시지 않을거야!"
지금 와서 다시 되짚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개꿈같은 말이었으나- 그때의 자신은 아직 모르는게 많은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순수한 이야기에 어떻게 답했을까. 소심함을 감추지 못하고 망설였을까? 오히려 반기며 작은 손 마주잡고 웃어줬을까? 저와 같은 혈육들의 피를 흠뻑 머금고서 더럽힐대로 더럽혀진 손이었지만, 그럼에도 좋아해줬을까. 그저 불분명한 기억의 조각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것에 후회란 없었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MA의 존엄성과 압도적인 분위기 뿐이었던 자신에게, 그녀는 너무나도 색다른 의미를 심어주었다.
같이 대화를 나누며 세상 물정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던 어린 가현에게 다양한 것을 알려주었고,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가현은 항상 먼저 다가가 동틀 무렵의 참새 새끼마냥 쉴새 없이 재잘거렸다. 소심하고, 소극적인 당신이 제게 마음의 문을 열어줄 때까지. 먼저 다가오지 않더라도, 적어도 자신을 보고 웃어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어울려 놀아줄 때까지. 임씨 가문의 어른들이 따로 가현을 부르는 일이 있지 않았다면 가현은 항상 그녀의 곁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자신의 가문에서는, 이렇게 자신과 잘 놀아주고 많은 대화를 나누어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인정받고 나서도 제 존재를 어여삐 여겨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메말라버린 눈물샘이 다시 채워지는 일 없었으나 뚫려있는 마음 속 빈 공간을 채워주는 그 느낌. 소실된 인간성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꾸어주는 느낌만큼은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허나 그런 행복은 항상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가문간의 교류가 끝나면 자신은 계속 이 곳에 있을 수 없었으니. 짧지 않은 기간동안 서로 교류했기에 점차 정이 들어버린 것일까. 헤어지고 나면 또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점이 가현에게 있어서는 끝내 이겨내지 못할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일찍 철이 들어버린 어린 아이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 언니. 나중에, 나랑 또 만나면... 그때도 나하고 많이 놀아주는거야. 알겠지? 자, 약속.."
담담하지만 서운함이 씻겨 나가지 않아, 떨리는 목소리로 기약 없는 약속을 전하며, 새끼손가락 내밀어 걸었다. 훗날 반드시 다시 만나자고. 그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절대 잊지 말자고.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 자신이 학당에 입학하게 될 무렵. 곱게 차려입고 단장한 채 흑룡 기숙사로 첫 걸음을 내딛으며, 앞으로 자신이 오랫동안 사용할 방으로 들어갈 적, 가현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설마. 설마..
".... 언니? 진짜 언니야?!"
자신을 알아보았을지, 못 알아보았을지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가현은 제 몸 날려 그녀를 힘껏 껴안았을테니까. 너무나도 반가워서. 뭔가를 배워가는 학당이라곤 여기 한 곳 뿐이었으니 당연한 만남이었겠으나, 그런 당연함따위 상관 없게 만들어질 만큼 좋아서. 그리고 그만큼 보고 싶었으니까. 벅차오르는 제 기분을 그저 힘껏 안아주는 것으로 표현해내며, 가현은 그 어느때보다도 맑고 순수하게 웃었다.
"나. 언니랑 다시 만났어. 못볼 줄 알았는데, 또 만났어... 절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야. 내 룸메이트, 이대로 그냥 고정시켜달라고 사감님께 건의할거야."
".... 서화 언니랑 나랑. 언제까지고 함께 있고 싶으니까..!"
졸업이니 뭐니 하는 진부하면서도 뻔한 결말따윈 바라보지 않는다.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 나아가는 것을 꺼려한다고 해 봐야, 이 세상은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을테니. 기약 없는 불투명함 따위를 겁낼 자신이 아니다. 그런 것에 겁을 집어먹었다면 이미 제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테지.
이후의 학당 생활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임씨 가문은 제사장 가문에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금술을 제외한다면 특별한 가계도술이 없었고, 특화된 도술조차 없었기 때문에, 가현은 항상 도술 면에서 조금 뒤쳐지기 일쑤였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배웠던 것 또한 도술이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교류였다. 수업이 끝나고 도술같은 건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이라 판단하고 해이해질 적이면, 서화가 보여주는 도술을 보며 신기해하고.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조금이나마 향상심에 불탈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건 아니더라도 자신과 놀아줄 적 보여주었던 도술들만큼은, 끝까지 파고들어 완벽하게 익히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기도 했다.
"이걸 이렇게, 그리고 이것도 이렇게 하면... 얍. 어때? 예전보다 많이 늘었지!"
그리고 가현은 그렇게 익힌 도술을 항상 서화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면서 이 정도면 많이 늘지 않았냐며 마냥 웃었다. 학년의 차이. 그리고 재능의 차이는 늘 존재했기 때문에 서화가 보여준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하찮아보이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저 방긋 웃으면서 다음에 더 노력해야겠다며. 그렇게 즐거운 나날들을 하루하루 보낸다.
어렸을 적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도 다시 물어보며,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은. 유독 정확한 답을 들려주지 않았던 질문이 몇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미소짓는 서화를 마주 바라보며, 아무렴 어떠냐고 가볍게 넘기게 되었다. 그래.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이란 있는 법이겠지. 그렇다면 이 역시 자연스러운 것. 나는 포용해야만 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야.
허나. 그런 이유 모를 포용심마저 반쯤 꺾여 애매모호하게 되는 순간도 없지 않았다. 유독 서화와 친해 보였던 여학생. 목과 머리에 어여쁜 파란 리본을 매단 여학생이 기숙사에 찾아올 적이면, 가현은 일단은 함께 반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밍숭맹숭했다. 이 학당에 먼저 왔다는 이유 하나로 서화와 친해졌다는 사실이 황당하면서도, 조금 불편했다. 독기의 영향을 적게 받던 그 시절은- 그저 서화와 그 사람이 함께 놀며 자신까지도 신경써주고 있다는 장점 하나만을 바라보며 애써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학년. 그리고 또 한 학년이 올라가며, 그 여학생을 보는 일이 늘어나고 교류가 잦아지며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흑룡의 독기에 아주 조금씩 영향을 받아가며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버리게 되어, 이젠 그 여학생도 자신의 사람 중 하나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었다. 친구의 친구는 자신의 친구라고 하지 않던가. 비록 질투심은 들 지언정- 과거처럼 불편히 여기지는 않게 되었다.
항상 그렇게 좋은 일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을. 신도 무심하시지. 항상 인생은 극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었으며, 이제 막 4학년이 되던 시점의 가현에게도 그 변화는 평등히 적용되었다.
"......"
참혹하다 못해 차마 맨 눈으로 지켜보기 힘든 광경. 학당 전체에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으며, 피가 흘러 웅덩이를 이루고. 신체 일부가 잘려나간 수많은 시체 한가운데 서서 끝내 미소짓던 그녀의 모습. 학당은 발칵 뒤집어졌고, 절대 떨어지지 않겠노라고 외쳤던 자신의 약속마저 물거품이 되어 흩어져버리게 되었다. 항상 찾아와주던 파란 리본을 맨 여학생의 시신 앞에 서서. 그 광경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현은- 남들이 느끼는 분노 대신 허탈함을 느꼈다.
어째서. 왜 당신이 내쫓겼어야 했는가. 왜 자신의 사람들은 이리도 허탈하게 제 곁을 떠나가고야 마는가.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양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제 방까지 향하고. 문을 닫기가 무섭게 가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알다.
신 님. 어째서 인생이라는 것은 이리도 덧없는 것인가요.
왜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항상 모든 것을 잃게 될 뿐인가요.
당신이 쥐어준 카드만으로.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의문이 많아서. 그저. 저는.
실소를 흘리며, 탁한 시선 속 이젠 비어버린 기숙사 방 안을 한 없이 바라본다. 기어코 이렇게 또 자신의 곁을 떠나는구나.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어. 학업이 끝나도. 주말이 찾아와도. 한결같이 반겨주고 예뻐해주던 그 사람은- 이젠 여기에 없어. 그런 당연한 아픔에 앞서 자신을 더더욱 괴롭게 하였던 것은- 끝내 자신에게는 상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점이었으니. 차라리 그렇게 나갈 것이라면. 그렇게 쉽게 제 곁을 떠날 것이었다면- 자신도 그들과 똑같이. 당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주지 그랬냐면서. 한탄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 한 가지가 불현듯 떠오른다. 그래. 처음에도 그러지 않았는가. 아쉬움을 담은 채 헤어졌으나, 결국 다시 만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번 역시 그것과 동일할 것이다. 앞으로도 만날 기회란 남아있을 것이다. 가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그래. 애시당초 애정 따위는-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누기에는 더없이 모자라며, 방해되는 요소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니. 어째서 그 동안 당연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을까?
".... 언니. 언니의 사랑. 내가 그것을 못 받은게 그저 한이지만.... 그래도. 분명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그렇지..?"
그렇다면 자신은 그 날을 다시 기약하며 기다릴 뿐이다. 오늘 자신이 받지 못한 애정을, 다시 그 날 한껏 받겠노라고 다짐한다.
오직 죽음으로써 완성될 수 있는 영원한 애정을. 덧 없는 몸뚱아리를 버리고, 신에게 나아가며 만들어나갈수 있는 그 영원함을 바라며,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다진다. 결국 자신에게 있어 사랑과 애정은 제 손에 쥐어진 칼날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며. 당신 또한 그렇게 느끼기를 바라고 믿으며.
훗날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어떤 모습으로든 영원토록 제 곁에 두어가며 평생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놓겠노라는. 비틀린 다짐을 이어가며 가현은 끝내 웃음지었다.
>>119-120 아아, 세상에나. 세상에나... 농질에게 단순히 룸메였단 이유로 집착하던 것이 아니었군요. 인간성의 공백을 채워주던, 메마른 땅의 단비같은 존재였군요. 농질이 독기로 인하여 미쳐버렸을 때 자신을 죽이지 않았단 점에서 복잡한 심정도, 그 이후 뒤틀려가는 모습도 모두 선명하게 와닿는 독백이었어요...🥹 끝내 가현이도 독기에 물들고, MA를 만난 뒤 광신하는 모습과 맞물려 비틀린 애정을 만드니... 어찌 애절하고 매콤한 진미가 아닐 수 있을까요... 가현주는 천재만재셔요...!!!!
>>123 맞아! 개연성 생각해보면 이걸 좀 더 일찍 공개했어야 하는데 과거의 나 MA랑 가문에만 꽂혀 있다보니 좀 늦게 풀게 되었다며.. ^-^ 하나만 집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게 아니라 이것저것 다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지금의 임가현이 되었다~ 그런 느낌이지! 아냐 어장 사람들이 천재만재인 것이다.. 설정 통과시켜준 캡틴도 천재만재인 것이다 ^-^~~
궁기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멀리서 제 동생이 하는 행동을 봤습니다. 뭐, 눈동자 부분이 뻥 뚫린 검은색 호랑이 반가면 너머를 불가살이 본다면 '말 걸면 죽일 표정이다' 라고 대답하겠지만요. 그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뚝을 몇 차례 두드리다,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사람이 없는 장소? 아주 좋죠. 지금의 궁기 입장에서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휘익, 가벼운 발걸음으로 찻집에 들어섰습니다.
' .... '
시험해볼까. 궁기가 말 없이, 조용히 아회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안 보이는 걸 매우 잘 알고 있던 이였으니, 그는 주먹을 쥐어서 아회가 있는 탁자에 가볍게 똑똑 두드렸습니다.
주의를 딱 환기시킬 수 있을 정도로만. 작으면서도 또렷하게. 그리고 여즉 입을 꾹 다문 채로 아회가 어떤 반응을 할 지 궁금해하며, 그는 다시 한 번, 탁자에 작게 노크했습니다.
식어가는 가배 향 느끼며 밑단에 굵은 설탕 알갱이가 박힌 카스텔라는 아직 입도 대지 않았지만 평온한 한때였다. 무언가를 써내리며 고심하다가도, 다시금 만년필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걸어왔을 때도 그랬다. 사람이 온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누군가 탁자를 두드렸을 때, 아회는 평온히 미소를 지었다. 소리가 난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내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생각했건만."
아회 자그맣게 한숨 쉰다.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장난이오? 오라비- 하고 말 건네지 아니하고."
안다. 온화에게선 늘 특유의 향이 난다. 매캐한 남령초의 냄새, 혹은 술 내음은 이 정도 거리면 순식간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을 아는 흑룡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을 붙였을 터이다. 흑룡의 사람이라면 벌써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터이며, 세작이라면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인가. 아회는 모르겠다는 양, 조심스럽게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나긋나긋 입을 벌렸다.
"평소 같으면 벌써 그대가 내 품에 안아서 숨이 막혔을 터인데,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료……."
손등을 겹치듯 테이블 위로 올렸음에도 가늘게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핏줄이 돋아난 손. 그래, 그는 제법 맹랑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으니 누구인지 대충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그 사람 역으로 떠보기 위해 이러는 것일 터다.
"그래, 앉지 않겠소? 마침 자리가 비는 것 같으니."
눈웃음. 아회의 이 사근사근한 태도는 같은 적룡 기숙사들도 모를 터인데! 아니, 어서 앉으라는 듯 종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제지하지 않는다면 손의 떨림을 감추려는 듯 조심스럽게 테이블 아래 무릎으로 내려두려 들었을 것이다.